•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3. 서원건립활동
  • 2) 서원의 건립과 사회

2) 서원의 건립과 사회

위와 같은 시대적·사회적 배경 위에서 건립된 최초의 서원은 중종 38년(1543) 周世鵬에 의해 건립된 白雲洞書院이다. 주세붕은 豊基군수로 부임하면서 곧바로 서원건립에 착수하였다. 그는 서원건립의 동기로 교화를 내세웠으며 교화는 반드시 尊賢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하고, 이에 풍기의 교화를 위해서 이 지역 출신인 安珦을 존봉하는 祠廟와 儒生藏修를 위한 서원을 세우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요컨대 그는 이 시기 가장 시급한 과제는 교화라고 인식하여 이것이 사묘·서원을 세우게 된 기본적인 동기라고 한 것이다. 당시 공신계열에 가까웠던 주세붕이 후일 사림의 향촌기구로 정착되는 서원의 건립에 착수한 것은 기본적으로는 이 시기 사림세력의 성장과 무관하지 않겠지만, 조광조계열의 신진사류들이 자파의 정치적 입장 강화를 위해 제기한 정몽주·김굉필의 문묘종사운동에 대해 공신계 南袞이 이에 대한 대안으로 그들의 講道地에 사우를 세울 것을 건의했던 사실과도 관계가 있다. 주세붕은 남곤에 의해 발신한 만큼 양자는 일정한 관계에 있었음이 분명하다.570) 鄭萬祚, 앞의 글, 39쪽.

이와 관련하여 주세붕의 서원 건립과정에서 주목되는 것은 사묘와 서원이 별개로 간주되었고 서원은 사묘에 부수적인 존재에 그쳤다는 점이다. 사묘는 교화를 위한 존현처요, 서원은 단순한 유생의 독서처였던 것이다. 이후 서원이 명실상부한 유생의 장수 및 강학소로 발전한 것은 退溪 李滉에 의해서였다.571) 鄭萬祚, 위의 글, 42∼43쪽.

한편 이 서원건립에는 당시 영남감사 林百齡과 후임감사 李彦迪의 魚鹽·鹽藿의 施措572)≪雲院雜錄≫紹修院史.와 서원을 건립함으로써 향촌민을 교화하여 교육진흥을 꾀한다는 입장에서 이루어진 독지가의 희사가 상당한 재정적 뒷받침이 되었다. 그 예로 풍기사람 진사 黃彬은 서원운영에 필요한 租米 75석을 희사하였다. 그는 서원뿐 아니라 향교를 이건할 때도 많은 협조를 한 사림이었다.573)≪竹溪志≫권 2, 順興白雲洞紹修院學田記. 이렇게 볼 때 백운동서원은 지방관과 향촌사림의 공동협력하에 건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서원건립에 당시 풍기사림 모두가 적극적으로 협력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많은 풍기사림들은 기존의 유향소·사마소를 통하여 지위와 세력을 굳건히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원이라는 새로운 기구의 설립이 자기들의 세력기반에 영향력을 미칠 것이라고 보고 당시 전국적인 기근현상을 들어 이를 반대하였다.574) 尹熙勉,<白雲洞書院의 設立과 豊基士林>(≪震檀學報≫49, 1980), 66∼73쪽. 백운동서원에 뒤이어 설립된 咸陽의 灆溪書院에서도 보면 설립초에는 “誹謗朋興”, “遠近聞者 莫不駭笑”(≪灆溪書院誌≫)라 하여, 서원의 건립·운영·유지를 위해서 서원 소용 현물을 기부하는 등의 적극적으로 협력한 사림 못지않게 서원건립 자체에 반대하는 사림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초기 서원에 한정되었으며 사림세력이 중앙정계를 완전히 장악하는 선조연간 이후의 상황은 달랐다. 한편 당시 정권담당자인 훈구파의 입장도 국가재정 부담을 가중시키면서까지 사림들의 향촌자치적인 성격을 띤 서원의 설립을 적극적으로 찬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鄕村民 또한 서원설립이 노동력 동원 등 그들의 부담을 가중시킬 것이라는 생각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백운동서원은 이러한 불신을 해소하기 위해 국가 공공기관의 신설은 될 수 있으면 閑遊한 寺院시설을 이용함으로써 경제적인 이점 또는 崇儒抑佛의 이중효과를 노리겠다는 국가의 정책적인 의도에 부합하여 당시 廢寺化되어 있었던 宿水寺廢址에 설립되었던 것이다.575)≪竹溪志≫권 2, 順興白雲洞紹修院學田記.

조선에 있어서 서원제도는 이와 같이 주세붕에 의한 백운동서원의 설립으로 출현되었지만 이후 서원을 조선사회에 보급·정착시키고 그 성격을 규정하여 발전의 토대를 마련한 것은 퇴계 이황이었다. 당시 퇴계는 조광조의 도학정치론에 공감하고 있었으며 또 이를 위해서는 교화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주장에도 동조하고 그 자신이 이를 열렬히 강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퇴계의 경우는 조광조 등의 선배사류들과는 다르게 군주보다는 재지사림에 보다 치중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는 향촌의 士子에게 주자학적 정치이념과 학문체제를 훈도하고 수련시킴으로써 장차의 향촌사회를 주도하게끔 할 보다 적극적인 교학체제의 확립에 노력을 경주하였다. 따라서 그는 송대 주자에 의해서 창안된 지방사학으로서의 서원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선초 이래 있어온 중앙통제방식의 관학적 교화체제를 부정하는 것이며 동시에 향촌사림 위주의 새로운 교화체제의 전개를 의미하는 것이다.576) 鄭萬祚,<退溪 李滉의 書院論-그의 敎化論과 관련하여->(≪韓㳓劤博士停年紀念史學論叢≫, 1981).

그는 풍기군수 시절 백운동서원의 사액을 청하여 사림의 향촌에서의 기반확보에 대한 국가의 공식적 승인을 받았고 이후 그의 문인들과 함께 서원보급운동을 전개하였다. 퇴계의<書院十詠詩>에 의하면 9개 서원이 나타나는데 이 중 海州·江陵 두 곳을 제외하면 모두 영남지방의 서원들이었다. 명종 말년까지 건립된 서원이 20개 미만이었음을 감안하면, 이 가운데 반수 이상에 퇴계가 관여하고 있었다. 퇴계는 이러한 서원이라는 새로운 학제를 통하여 종래의 과거와 관련한 출세주의·공리주의가 아닌 참다운 성리학의 토착화를 기대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이 시기 가장 시급한 과제인 사림의 사습과 사풍을 바로잡고자 하였다. 결국 퇴계의 서원창설운동은 당시 사림들의 참다운 공부를 위한 환경조성운동이었다.577) 李佑成,<李退溪와 書院創設運動>(≪退溪學報≫19, 1978). 이렇게 본다면 조선의 서원은 퇴계에 의해서 사림의 學的 기반으로 정착되고 이후 보급·확산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중종 이후 명종대까지 세워진 퇴계 주도하의 초창기 서원은 집권 훈구파의 견제 속에서도 어디까지나 교육기관임을 강조하면서 계속적인 발전을 해 나갔다. 훈구파의 입장에서도 이 시기 피폐된 향교에 대신하는 새로운 교육기관의 설치를 외면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 서원의 被奉祀者는 사림세력의 기준으로 볼 때 성리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을 대상으로 삼았으나, 대상인물이 없을 경우는 伊山·硏經서원 등과 같이 사묘없이 출발한 경우도 있었다. 이는 이 시기 서원의 설립이 존현보다는 강학에 일차적 목적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후 사림이 완전히 정권을 장악하게 되는 선조대에 오면 서원은 명종대에서의 일정한 제약에서 벗어나 사림의 활동기반으로서 본격적인 발전을 보게 된다. 명종연간 이후의 서원·사우578) 書院·祠宇의 개념은 鄭萬祚,<17∼18세기의 書院·祠宇에 대한 試論>(≪韓國史論≫2, 서울大, 1975)에서 구체적으로 검토되었다. 여기에 의하면 양자는 여러 가지 면에서 원래는 엄격히 구분되었지만, 17, 8세기 서원남설로 양자 모두 祀賢 위주로 전환되면서 서로 혼칭되고 구분이 모호해졌다고 한다.의 건립상황을 지역별로 통계를 내보면 위의<표 1>과 같다.579) 薛錫圭,<肅宗朝 院宇動向과 朋黨의 社會的 基盤>(≪國史館論叢≫34, 1992), 175쪽.
이 통계는≪文獻備考≫·≪俎豆錄≫의 기록을 토대로 한 것으로 당시 국가에 의해 파악된 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邑誌 등에 이보다 훨씬 많은 원·사가 기재되어 있다. 연대별 원·사의 건립, 사액 수에 관한 통계는 이 밖에 鄭萬祚,<17∼18세기 書院·祠宇에 대한 試論>(≪韓國史論≫2, 서울大, 1975, 265쪽) 및 全用宇,<朝鮮朝 書院·祠宇에 대한 一考察>(≪湖西史學≫13, 1985, 5∼6쪽) 등이 있는데 대체로 비슷한 수치이다.

시기 경 상 충 청 전 라 경 기 황 해 함 경 강 원 평 안 합 계
명종 원
9
 
3
 
1
 

 
1
 

 
1
 

 
1
 
1
 
2
 

 
1
 

 
1
 

 
17
 
4
 
선조 원
27
2
7
 
6
2

1
14
6
5
2
6
 
2
 
6
1

 
1
2
1
 

 

 
3
3

 
63
16
15
3
광해군 원
14
3
5
 
7
1
3
1
6
2
1
2
1
 
2
 
1
 
1
 
1
1
1
 
2
 

 

 
1
 
32
7
14
3
인조 원
12
7
2
 
6
 
1
 
7
6

 
2
 
1
 

1

 
1
1

 
2
2
1
 
1
2

 
31
19
5
 
효종 원
11
2
1
 
1
1

 
5
3
2
1
5
 
3
1
3
 

 

1

 
2
3

1
1
 

 
28
10
6
3
현종 원
19
3
8
5
8
3
7
 
9
3
7
1
5
2
4
1
2
 
1
 
5
3

 

3
2
2
4
1
4
1
52
18
33
10
숙종 원
72
46
25
3
33
16
15
2
26
33
14
6
18
5
22
3
10
4
12
3
3
6
5
1
5
5
1
1
9
10
10
5
176
125
104
24
합계 원
164
63
51
8
62
23
26
4
68
53
29
12
38
7
34
5
23
6
15
3
13
14
7
1
12
13
4
4
19
16
15
6
399
195
181
43

<표 1>명종∼숙종연간의 연대별·지역별 院·祠의 건립 및 사액동향

선조대에 오면 서원은 이미 숫적으로 60여 개를 넘으면서 피봉사자도 金宏弼·鄭汝昌·李彦迪 등 사화기에 被禍된 인물이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또한 그 범위가 이황·李珥·曹植 등 이 시기 사림 사이에 형성된 학파의 영수 및 성리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까지 확대되었다. 이와 같이 사림은 서원의 제향인물을 통해서 그들의 도학적 정통을 천명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일정하게 강화하였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서원의 발전은 이 시기 사림의 집권과 함께 시작된 붕당정치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붕당은 대체로 학연으로 맺어지는 것이 특징이며 각지의 서원을 중심으로 여론이 결집되고 이것이 중앙에 진출한 자파의 관료를 통해서 반영되고 있었다.580) 李泰鎭, 앞의 글(1977), 185쪽.

이 시기 서원건립 및 그 운영은 대체로 초기 서원보급운동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던 퇴계의 서원론에 기초하고 있었다. 퇴계 서원론의 핵심은 향촌자치제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서원의 건립이 붕당간·학파간 계열의식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것이 정치적 목적에 의해 크게 좌우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 시기 서원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一鄕 또는 一道 사림의 공론에 의해 피봉사자의 문인·鄕人·후손 등의 합력에 의해 건립되는 것이 일반적이다.581) 鄭萬祚, 앞의 글(1975), 232∼255쪽. 그 과정에서는 지역적 범위나 정도의 차이는 있었으나 퇴계에 의해 제시된 바 있듯이, 본현 내지 인근 지방관의 적극적인 협조가 있었다. 실제로 이러한 서원의 건립에는 막대한 물력이 소모된다는 점에서 지방관의 직·간접적인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향촌사림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서원건립 자체를 지방관이 직접 주관하는 예도 많았다. 당시 서원설립에 있어서 이러한 지방관의 적극적인 협조는 ‘右文興學 養育人才’라는 국가의 적극적인 보호책에 힘입은 바 컸지만, 당시 향촌사회를 장악하고 있었던 재지사족을 수령은 무시할 수 없었고 또 그들의 협조에 의해 수령의 지위가 유지될 수 있다는 상호이해 관계가 크게 작용하였다. 이는 또한 ‘興學校’라는 수령의 책무와도 관련되는 문제였다.

그러면 먼저 서원설립 초기인 16세기 중반에 건립된 禮安의 易東書院의 예를 들어 구체적인 건립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 서원은 이황의 주관하에 일향 사림들이 공동참여하여 건립된 전형적인 예이다. 이황은 일찍이 예안에 우거한 바 있는 禹卓의 학문과 절의가 후학의 사표가 될 만하다 하여 명종 13년(1558) 4월에 趙穆·琴蘭秀와 함께 예안현 동북쪽에 있는 우탁 舊居 부근의 鼇潭 위에 터를 잡고 서원건립에 착수하였다.582) 琴 輔,≪梅軒集≫권 2, 雜著, 易東書院記事.
趙 穆,≪月川集≫권 5, 易東書院事實.
鄭震英,<禮安 易東書院의 硏究>(≪安東文化硏究≫3, 安東大, 1989), 26∼29쪽.

그러나 이러한 서원건립 논의는 ‘事力이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곧바로 실행되지 못하였다. 당시 서원건립에는 막대한 경비가 소요되고, 그 役事에는 民力이 동원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농민들의 생활이 극도로 불안정한 시점에서 이들의 노동력을 동원한 서원건립은 어려울 수밖에 없으며 실제로 역사를 시작하였다 하더라도 농번기나 겨울철에는 역사를 멈추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역동서원의 건립이 늦추어진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로부터 5년 후인 명종 18년 봄에 郭趪이 현감으로 부임하자 고을사람 金富弼·趙穆·琴蘭秀·琴應夾 등이 그에게 서원건립 문제를 건의하여 적극적인 협조를 받게 되었다. 그후 곽현감이 관사를 짓고 남은 기와 9천 장을 보조하자, 이에 재차 서원건립이 논의되어 앞에 든 사람들이 스승인 이황에게 품의하여 一邑 長老회의를 거침으로써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 이에 일향 사림들로부터 각기 형편대로 재력을 보조받았는데 그 수가 무려 160여 가에 170여 석이나 되었다.

선조 즉위년(1567) 2월에 김부필·琴輔·琴應商·禹克昌·금응협·금난수·조목 등의 監役으로 기와와 재목을 마련하자, 예안현감은 향리와 인부를 동원하고 경내 여러 사찰의 승려에게 순번을 정하여 공사를 돕게 하였으며, 또한 匠店 중에서 有實者를 택해서 수호케 함으로써 건립의 근본이 잡히게 되었다. 예안현감은 이 뿐만 아니라 곡식 40석과 포 15필을, 안동부사 尹復는 곡식 10석과 大木 10여 株를 부조하였다. 그리하여 그해 봄부터 공사가 더욱 급속히 추진되었고 그 과정에서 예안의 재지사족들이 적극 참여하였다.

서원이 완성된 뒤에도 현감 곽황은 경내의 寺社전답 200여 負를 서원에 귀속시켰으며, 書員 1인과 閑良 6인으로써 서원의 각종 잡무와 사환의 일을 담당케 하였다. 곽황은 이 외에도 포 25필, 곡식 70석을, 현감 鄭惟一과 감사 朴啓賢, 그리고 鄕士 김부필·李完·금응협·金富倫·金富儀·금보·朴士熹·金生溟 등도 전답이나 노비 혹은 곡물을 기부하였다.

이와 같이 역동서원은 16세기 후반 예안의 향촌사회를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던 眞城李氏·奉化琴氏·永川李氏 및 조목·박사희·김생명 등 퇴계문도인 재지사림파에 의해 창건되고 유지되었다.583) 17세기초에 설립된 安東의 屛山書院도 立廟(1610) 당시 有司로 石物유사 12인, 燔瓦유사 2인, 各里유사(縣內(2), 北面(4), 西面(7), 南面(3)) 16인, 各面유사(府東(2), 府南(1), 府西(2), 府北(2), 臨河(4), 乃城(2), 甘泉(1), 一直(2)) 16인이 分定되고 있었다. 이는 이 시기 서원건립이 일향의 공동 관심사였음을 알 수 있는 단적인 예이다. 따라서 서원건립 役事 또한 일향 동민들의 적극적인 동원으로 이루어졌다(≪屛山書院奉安錄≫참조). 또한 이 서원의 건립에는 예안현 및 인근 수령의 협조가 많았다. 역동서원은 퇴계 당시 예안사림의 집합소로서 그들은 이를 바탕으로 하여 각기 사회적 지위를 굳혀갔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 시기 서원은 일향내 사림세력을 하나로 결집시킬 수 있는 하나의 매개체였다고 하겠다.

경상우도의 南冥門徒들에 의해 설립된 德川書院 등 이 시기에 건립된 서원 대부분의 창건과정도 위의 역동서원과 비슷한 과정을 밟았다. 선조 38년(1605)에 설립된 尙州 道南書院의 경우≪創設時稧案≫에 의하면 건립 당시에 일향의 재지사족 235명이 등재되었고, 이후 효종연간까지 10차에 걸쳐 186명이 加錄되고 있다. 이 숫자는 이 시기 상주의 향안에 등재된 재지사족을 총망라한 것이다. 대체로 서원의 濫設·疊設이 문제가 되기 이전인 17세기 초·중반까지 설립된 서원은 대부분 역동서원에서와 같이 일향사림과 지방관의 적극적인 상호협조관계에서 설립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 시기 서원의 건립과 확대는 지역적으로 보면 그 지역 재지세력들의 형성시기와 그 존재형태에 비례하였으며 따라서 당시 폭넓은 재지세력이 존재한 경상도를 위시한 하삼도에 집중되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이후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이는 이 지역이 이른바 사림의 淵藪라 하여 양반세력이 강력하였고 또 그들이 일찍이 붕당정치의 주역으로서 정치활동을 활발히 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일찍부터 향촌에 강력한 재지적 기반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584) 鄭萬祚, 앞의 글(1975).

이와 같이 초기의 서원은 대체로 일향 사림들에 의해 발의·창건·운영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따라서 국가에서는 그 창건과 사액과정에서 기준에 따라 비교적 공정하게 대처하였다. 이러한 분위기는 광해군대에 와서도 계속되었으나 몇몇 서원의 건립이 당시 다른 학파에 비해 학문적 기반이 약했던 집권 북인세력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선례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당시 집권 북인세력은 자파의 학적 연원인 曹植의 문묘종사운동을 추진하고, 한편으로는 조식을 제향하는 서원을 건립하고 이를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하는 전초기지로 삼았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인조반정 이후 서인이 집권하면서 더욱 확대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집권 서인의 서원정책은 인조 22년(1644) 경상감사 林壛의 상소를 계기로 서원에 대한 폐단이 거론되면서 적어도 그 건립만은 국가가 파악해야 한다는 국가적 차원의 제재조치의 필요성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붕당정치에 입각한 그 이전의 국가적인 장려책을 따르고 있었다.585) 鄭萬祚,<朝鮮後期의 對書院施策>(≪제3회 국제학술회의논문집≫,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5). 그러나 이후 서·남인간의 정치적 대립이 점차 가열되자 서원의 설립과 사액에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른 중앙권력의 적극적인 개입이 현저해지면서 서인 편향적인 경향이 뚜렷하였다. 당시 서인정권의 자파서원 건립은 붕당정치하에서 퇴계로 대표되는 남인에 대한 도학적 정통성의 확립과 자파세력 확대 및 집권의 명분 확립과도 관련되는 중요한 문제였다. 따라서 서인정권은 이러한 문제를 빠른 시일 안에 해결하기 위해 그들 서원의 설립에 자파 중앙관료들을 적극적으로 개입시키는 예가 많았다.

이 시기에 설립된 대표적인 서인계 서원인 魯岡書院의 설립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586) 이하 魯岡書院에 관한 서술은≪魯岡書院誌≫에 의거하였다. 이 서원은 尹煌·尹拯 등을 비롯한 파평 윤씨 一門을 배향한 서원으로 서인이 老·少論으로 분립된 후에는 소론의 대표적인 서원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 서원은 현종 13년(1672) 7월 湖中사림들에 의해 祠宇營建이 발의되었다. 이에 당시 서인계 현직관료이던 金壽恒·閔維重·金萬基·朴世堅·呂聖濟·李選·金萬重·申翼相·趙師錫·鄭維岳·趙根 등이 적극 협력하여 창건통문을 발하였다. 통문 발간처로는 경기(지역:4)·경상(17)·충청(22)·황해(8)·전라(27)·평안(10)·原襄道(10) 등 7도 98개 지역의 각 감사·병사·수사 등 지방관과 향교·서원·재지사족이 포함되었다. 이어서 각 도 열읍에서 서원건립에 소용되는 米·木·紙·魚鹽 등 현물의 적극적인 부조가 있었는데, 물품수합은 현직관료가 담당하였다. 이후 사액이나 追配 때에도 창건 때와 마찬가지로 전국적인 부조가 있었다.

이와 같이 노강서원의 설립과정은 역동서원 등과는 본질적인 차이점이 있었다. 서원설립에 있어서 자파의 중앙관료, 인근 지방관 및 향촌사림들의 물질적 협조라는 측면에 있어서는 동일한 양상이었으나, 그 규모나 범위면에 있어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이 시기 대부분의 서원이 그 범위가 동일 권역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일향이 중심이었는데 비해, 노강서원은 통문 발간처나 부조한 지역이 충청·전라도지역이 중심이 되긴 하나 거의 전국적인 범위이며, 서원창건에 주동적인 인물 또한 지방관을 포함한 중앙정계의 현직관료였다는 데서 본질적인 차이점이 있었다.587) 그러나 이 시기 모든 서원의 설립과정에서 당색간의 뚜렷한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인조반정 이후 대표적인 서인계 서원은 그들의 학문적 정통성의 확보 및 집권의 명분과 연결되면서 여타의 서원에 비해 중앙권력이 크게 작용하였던 것이다.

서·남인계 서원간에는 창건과정뿐만 아니라 서원운영을 위한 院任의 구성에 있어서도 그 차이점이 확연하게 나타난다. 이는 영남남인계 서원의 ‘院長·有司’체제와 서인계 서원의 ‘원장·掌議·유사’체제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양자간에는 원임의 자격·임기·직임 등에 있어서도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영남남인계 서원의 경우 원장은 실질적인 서원운영의 책임자로, 대부분 향내의 사림으로 임명되며 현직관료는 제외되고 있었다. 이에 반해 서인계 서원의 원장은 중앙정계의 고위관료로 추대되었는데 이는 서원측의 이해관계와 중앙관료의 자파세력 확대라는 상호관계가 결부되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따라서 원장은 일종의 명예직의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실질적인 서원운영은 장의가 담당하였다고 보여진다. 장의는 대체로 서원 소재지 내지 인근의 지방관으로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므로 서인계 서원은 지방관으로 대표되는 관권과의 관계를 효과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고 보여진다. 이러한 당시 서인계 서원의 권력지향적인 성격은 자파 현직관료로 임명되는 京掌議·京有司제도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이 제도는 중앙과의 긴밀한 유대관계를 모색하기 위한 한 수단으로 제시된 것이었다.588) 李樹煥,<朝鮮時代 書院의 內部組織>(≪嶠南史學≫2, 嶺南大, 1986).

이와 같은 양자간의 서원조직 및 운영상의 차이점은 당시의 정치상황과 무관하지 않겠지만, 전자는 서원의 성격을 향촌자치제로 규정하였던 퇴계의 서원론에 기초하고 있었고, 후자는 17세기초까지 서원을 통한 향촌사회 운영원리나 도학적 정통성, 사림 수에 있어서의 영남남인계에 대한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서원설립과 운영에 중앙관료가 적극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정치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었기 때문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성향이 서원의 인적 구성에 일정하게 반영되었다고 보여진다.

이와 같이 서원건립이 본격적으로 당파간의 정치적인 이해관계와 결부되기 시작한 것은 효종대 이후 山林세력이 중앙정계에 진출하면서부터이다. 이 시기는 성리학적 명분과 의리가 붕당정치 전개의 쟁점으로 부각되었던 시기이다. 붕당정치의 전개과정에서 자파의 정치적 입장 강화 및 이를 위한 자파 정론에 대한 향촌사림의 광범한 지지는 필수적이었다. 서원은 이 시기 유생들의 여론을 결집시키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중요한 매개체였으며589) 鄭萬祚, 앞의 글 (1975). 이하 서술은 주로 이 글을 참고함. 따라서 각 정파의 입장에서는 서원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院·祠의 남설은 이에 연유한 바 크다.

실제로 원·사의 남설은 남·서인간에 政爭이 격화되는 현종대에 오면 뚜렷해지며 그 증가율은 전대에 비해 배에 가깝게 나타나고 이러한 경향은 숙종대에 심화되었다. 또한 피봉사자의 추배에 있어서도 그 수가 훨씬 많아졌을 뿐 아니라 그 자격에 의심이 가는 인물이 적지 않았다. 이는 서원의 질적 저하를 수반할 수밖에 없었다. 현종말부터 시작하여 숙종연간에 나타나는 서원의 폭발적 남설현상은 이 시기 庚申·己巳·甲戌換局으로 이어지는 서·남인간의 정쟁의 격화가 크게 작용하였으며 여기에 서원을 통한 자기존립을 모색하였던 지방사림들의 이해관계가 결부되면서 더욱 확대되었다.

당시 양반층은 상급신분층으로서의 우세한 지위를 유지하고 붕당정치하의 고립을 면하기 위하여, 명분과 이해관계에 따라 혈연적으로 또는 학파 및 지방별로 연결되어 상호간의 결속과 유대관계의 강화를 도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당시 원·사를 갖지 못한 고을의 경우 사림의 활동이 부진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 때문에 사림들은 그들의 장수처로서 또는 향촌에서의 儒化를 위해서는 원·사의 설립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앞다투어 원·사를 건립하였다.

이와 같이 원·사가 이 시기 사림의 정치·사회적 활동의 중요한 구심점이 됨에 따라 그 설립 특히 사액과정에서 정파간 이해관계의 대립이 현저해졌다. 서원문제를 둘러싼 정치적 대립은 서·남인간에 야기된 務安의 紫山書院 치폐과정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 서원은 鄭汝立사건에 연루되어 사망한 鄭介淸을 봉향하는 남인계 서원인데 이후 정권변동에 따라 건립·훼철이 반복되었다.590) 金東洙,<16∼17세기 湖南士林의 存在形態에 대한 一考察-특히 鄭介淸의 門人集團과 紫山書院 置廢事件을 중심으로->(≪歷史學硏究≫7, 全南大, 1977).

한편 서원은 소속 사림들의 개별적·집단적 행동에 구체적인 물질적 지원을 하는 등 이 시기 사림들 공동의 경제적 이해가 결부되어 있어서, 중앙관인들은 자파세력 확대라는 측면에서 자파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공고히 해준다든지, 반대파 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축소시킴으로써 사림들을 위축시키는 현상이 나타났다. 전라도의 남인계 서원인 자산서원을 훼철하고 그 경제적 기반을 노론계 서원인 忠簡公書院·義烈祠·松林書院으로 分屬시키는 조치라든가, 송시열 등이 자파와 이해관계가 다른 三溪書院을 훼철하고 그 경제적 기반을 탈취한 사건 등은 그 한 예이다.591)≪書院謄錄≫2책, 숙종 6년 12월 26일.
≪肅宗實錄≫권 4, 숙종 원년 10월 갑자.

한편 갑술환국 이후 노론정권은 자파세력의 근거지 확보라는 측면에서 이 시기 남인의 본거지인 영남지역 곳곳에 그들의 거점확보를 위한 자파서원을 설립해 나갔으며 그 과정에서 무리한 관권의 개입으로 정치적 분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는 정치적 반대세력인 남인의 본거지인 영남지방에 대한 향촌분열과 이간책의 일환이기도 하였다.592) 이 시기 영남지역에서 설립된 대표적인 서인계 서원은 尙州 興巖書院(1702년 건립, 1716년 사액, 宋浚吉 배향), 靑松 屛巖書院(1702년 건립 사액, 이이·金長生 배향), 安東 西澗祠(1785년 건립, 1786년 사액, 金尙憲 배향), 慶州 仁山影堂(1719년 건립, 宋時烈 배향) 등이다. 노론계 서원의 건립을 둘러싼 당파간의 대표적인 분쟁은 鄭萬祚,<英祖 14년의 安東 金尙憲書院 建立是非-蕩平下 老少紛爭의 一端->(≪韓國學硏究≫1, 同德女大, 1982) 참조. 이렇게 볼 때 17세기 중반 이후의 서원정책은 붕당정치의 파탄으로 나타난 당파적 차원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시기에 오면 同姓村의 발달과 함께 사림 사이에 가문의식이 현저해지면서 서원은 숫적인 면의 남설과 관련되어 봉사 대상인물의 선정이 원칙에 크게 어긋나는 경우가 많았다. 원래 서원의 제향인은 학문이 깊고 斯文에 공이 있는 자만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이 시기에 오면 학문이 깊다고 보기 어려운 인물, 儒化를 남긴 수령, 行誼가 있는 士子까지로 그 범위가 확대되었는데, 이것이 서원남설의 또 하나의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가묘적 성격이 강한 사우의 건립이 이 시기에 더 많아진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는 사림의 동족·가문의식의 단적인 표출이었으며 이 시기 원·사가 서로 혼칭되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들 원·사는 17세기 중반까지의 원·사가 일향사림의 공론에 의해 건립되었던 것과는 다르게 대체로 제향인의 후손이 주동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당파간의 극한적인 대립으로 나타난 원·사의 폭발적 남설은 필연적으로 정치·사회적 폐단을 심화시켰으며 따라서 영조대 이후 서원은 왕권강화책의 일환으로 국가적 차원의 강력한 제재를 받게 되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