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3. 서원건립활동
  • 3) 사액서원의 추세

3) 사액서원의 추세

백운동서원이 설립된 지 6년 후 퇴계의 請額에 의해 紹修書院이란 扁額을 하사받은 것이 賜額書院의 시초이다. 퇴계는 명종 4년(1549) 12월 당시 경상도관찰사 沈通源에게 啓聞하여 백운동서원을 사액서원으로 발전시켜줄 것을 청원하였다. 여기에서 퇴계는 중국의 예를 들어 사액과 동시에 국가적 차원의 경제적인 후원 및 감사·수령 등 지방관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지방관의 지원은 경제적인 것에만 한정시키고, 이 외의 서원 운영은 사림이 자치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할 것을 강조하였다.593) 이에 대한 상세한 연구는 尹熙勉, 앞의 글 및 鄭萬祚, 앞의 글(1980) 참조.

이에 대해 중앙에서는 서원이 당시의 관학의 부진을 대신할 수 있는 교육기관이라는 점을 일단 인정하고, 유생을 고무·진작시키기 위해 서적 등과 함께 소수서원이라는 편액을 내리도록 하였는데 이후 이것이 서원사액의 하나의 기준이 되었다. 백운동서원에 뒤이어 설립되는 灆溪·臨皐書院 등에 대한 사액은 소수서원의 예에 따라 시행되었다. 초기 서원의 청액과정은 서원유생이나 서원 소재지 지방관의 요청에 의해 감사가 청액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그 사액기준도 비교적 엄격하게 적용되었다고 보여진다. 이후 서원이 유향소·향교를 대신해 향촌사회에서 점차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각 지역마다 급격히 설립되자 사액의 기준도 일단 완화된 것으로 보여진다.

서원 사액은 교육기관으로서 국가로부터 공인받는 것일 뿐 아니라, 법전에 규정된 바 없었던 초기에도 서원에 소속된 토지와 院屬은 해당 지방관의 令으로 면세·면역되는 것이 관례화되어 있었고, 또한 祭需가 관급되는 등 경제적으로 이점이 있었다. 따라서 서원은 창건되자마자 곧바로 청액운동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16세기말 선조연간까지만 하더라도 사액문제가 각 정파간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좌우되지는 않았다. 선조연간까지 사액된 서원을 제시하면 다음<표 2>와 같다.

여기에서 보면 사림계열이 아직도 失勢期였던 명종대(명종 20년;문정왕후 훙거)에는 소수서원, 해주의 문헌서원, 영천의 임고서원 등이 사액을 받았다. 척신세력인 小尹이 주도권을 가진 명종대에 사림계의 교육기관인 서원에 대한 이러한 공인조치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세력이 이제는 척신계열로서도 전혀 무시만 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확대되었기 때문이지만, 또한 사액을 받은 세 서원의 피봉사자가 안향·최충·최유길·정몽주 등 모두 고려조의 인물이었던 것도 한 까닭이 될 듯하다.594) 李泰鎭, 앞의 글(1977), 182쪽.

도 별 지 명 서 원 명 건 립 연 도 사 액 연 도 봉사인물
경 상
황 해
경 상
경 상
경 상
함 경
전 라
경 상
전 라
경 상
경 기
경 기
경 상
전 라
경 상
豊 基
海 州
咸 陽
永 川
義 城
咸 興
順 天
善 山
綾 州
慶 州
開 城
楊 州
禮 安
南 原
玄 風
紹 修
文 憲
蘫 溪
臨 皐
泳 溪
文 會
玉 川
金 烏
竹 樹
玉 山
崧 陽
道 峰
陶 山
滄 州
道 東
중종 38년
명종 4년
7년
10년
11년
18년
19년
선조 3년
3년
6년
6년
6년
7년
12년
38년
명종 5년
명종 5년
21년
10년
선조 9년
9년
선조 원년
선조 8년
3년
7년
8년
6년
8년
33년
40년
安珦
崔沖·崔惟吉
鄭汝昌
鄭夢周
金安國
孔子
金宏弼
吉再
趙光祖
李彦迪
鄭夢周
趙光祖
李滉
盧禛
金宏弼

<표 2>명종∼선조대의 사액서원

이후 사림계열이 주도권을 잡게 되는 선조대에 들어오면서 사액서원의 피봉사자는 고려시대 인물에 한정되었던 제약에서 벗어나, 士禍期의 인물을 포함하여 사림계열이 성리학의 정통으로 내세웠던 김굉필·조광조·이언적·이황 등으로 확대되어 갔다. 그러나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피봉사자의 범위는 약간 확대되었으나 사액에 있어서만은 성리학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한정되어 있었다.

이후 광해군의 등극으로 인한 북인정권의 등장은 서원의 설립과 사액이 정치적 목적에 의해 좌우되는 한 계기가 되었다. 북인정권은 당시 퇴계·율곡학파에 비해 상대적 열세인 학문적 기반과 자파세력 확보 및 재강화를 위해 서원·향교·향소 등 향촌자치기구에 관심을 두면서,595) 鄭仁弘과 그 문인집단은 당시 경상우도 지역의 서원·향교·향소 등 3곳을 중심으로 향권을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이에 기초하여 자파세력 상호간의 통문을 통하여 반대세력에 대한 毁家黜鄕, 損徒, 儒生停擧 등의 鄕罰을 가하기도 하였다(≪光海君日記≫권 26, 광해군 2년 3월 정유 및 鄭慶雲,≪孤臺日錄≫). 이 시기 서원의 설립 및 사액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대북의 영수인 鄭仁弘은 자기 스승인 曹植의 추존사업에 적극 나서면서 광해군 원년(1609)에 경상우도의 조식 배향처인 晉州의 德川, 三嘉의 龍巖, 金海의 新山書院을 사액받고,596) 趙任道,≪澗松集≫권 2, 書 附桐溪答書에 “三書院賜額 皆出於爾瞻借重之計”라 하여 이들 서원사액에 중앙권력이 개입하였음을 지적하였다. 동왕 7년에는 경성에서 불과 30리 밖에 있는 楊州 西面(三角山 白雲峰下)에 조식을 배향하는 서원을 건립하여 그 이듬해에 白雲書院이란 사액을 받았다. 특히 이 서원 건립은 통문이 중앙관료들 사이에 널리 발해지는 등 거당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597)≪光海君日記≫권 87, 광해군 7년 2월 임인 및 권 109, 광해군 8년 11월 정축. 이 서원은 인조반정 이후 서인정권에 의해 곧바로 훼철되었는데598) 裵大維,≪慕亭集≫권 2, 白雲書院賜祭文, “癸亥後毁撤”. 이는 이 서원의 건립과 사액이 북인정권의 정치적 목적과 결부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광해군 9년에는 전라도 康津에 조식을 배향하는 서원을 건립하여599)≪光海君日記≫권 117, 광해군 9년 7월 갑술. 호남유생을 자기세력으로 흡수하는 동시에 자신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유소 상정의 후방적 기지를 구축하였다. 이러한 노력들은 나중에 모두 廢母論의 여론을 조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보여진다.

한편 북인정권은 서원을 이용하여 당시 남인 집거지인 예안에까지 자파세력을 부식시키고 있었다. 북인정권은 金誠一·柳成龍 사후 한때 남인세력의 공백기를 틈타서 유성룡과 동문이면서도 불편한 관계에 있었고 북인계 李山海와 친근한 사이였던 趙穆을 매개로 하여 세력을 확보하였던 것이다. 조목은 사후 북인세력에 의해 도산서원에 從享되었고, 예안유림은 북인정권에 의해 발탁되어 이 지역에서는 한때 남·북인 세력이 공존하게 되어 갈등이 심각하였다.600) 李樹健,<17∼18세기 安東地方 儒林의 政治·社會的 機能>(≪大丘史學≫30, 1989), 40쪽.

이러한 서원설립 및 사액문제에 있어서 정치적 이해관계의 개입은 인조반정 이후에도 서·남인간에 어느 정도 정치적 조정이 이루어져 심각한 양상을 띠지는 않았으나, 서인 우세하에서 서인쪽에 편향성을 띠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시기 金集·宋時烈·宋浚吉로 대표되는 산림세력이 등장하면서 이들은 집권의 명분과 도학적 정통성의 확립이라는 측면에서 그들의 학적 연원인 조광조·이이·成渾·金長生 등의 서원을 계속적으로 설립하고 사액을 받았다.601)≪書院謄錄≫1책, 효종 원년 5월 30일. 이들 서인계 서원은 대부분 지역적으로 근기 또는 충청도에 집중되었으며, 또한 서원의 설립에 자파 중앙관료들이 적극적으로 개입함으로써 남인계열보다 정치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었다. 그 결과 효종 10년(1659) 윤3월에는 무려 8개소의 서원이 한꺼번에 사액을 받기도 하였으며602)≪孝宗實錄≫권 21, 효종 10년 윤3월 무자. 그 영향으로 현종대에 들어와서는 향촌사림의 청액운동을 촉발시켜 請額疏가 폭주하였다. 현종연간에는 사액의 남발을 우려하여 사액에 관한 한 일률적으로 시행하지 말라는 통제책이 취해졌으나 앞의<표 1>에서 보듯이 사액은 전대에 비해 엄청난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또한 사액을 받은 서원을 당색별로 구분하면 서인계 서원이 남인계에 비해 압도적 다수로 나타난다. 이는 사액과정에서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른 중앙권력의 적극적인 개입이 현저하였음을 의미한다. 당시 서인계 서원은 첩설처라 하여 일단 사액이 거부된 서원도 서인관료의 特請에 의하여 대부분 특례로 사액되는 경우가 많았다. 사액과정에서의 이러한 당파적 편향성은 이후 서원문제가 집권세력의 이해관계에 따라 크게 좌우되고, 또한 이것이 정치적인 차원의 문제로 확대되는 결과를 낳았다.603) 鄭萬祚, 앞의 글(1985), 252∼255쪽. 이후 숙종대의 서원사액에 대한 극단적인 당파적 편향성은 이에 연유하였다.

숙종연간의 정치변동과 각파 원·사에 대한 사액추세를 제시하면 다음<표 3>과 같다.

시 기 1∼6년(남인집권) 7∼15년(서인집권) 16∼20년(남인집권) 20년 이후(서인집권)
당 색
경 상 7 1     3         1 6       2 1⑵   2   2⑴
전 라           1 3⑴     1⑶           2 1 2 2 2⑵
충 청 2           2   1   1       1   1 5   2⑵
경 기         2   1   1   2     3   3 6 3⑴ 1⑴
강 원                     1                
평 안 1         1     1⑴         2   2   3⑵
함 경             2                   1 1   1⑴
황 해 1       1   1     2             3⑴   3 1⑵
합 계 11 1     6⑴ 1 10⑴   2 5⑷ 10     8 3⑵ 9⑵ 18⑴ 8⑴ 12⑾

<표 3>숙종연간의 정권변동과 사액 추세

薛錫圭,<肅宗朝 院宇動向과 朋黨의 社會的 基盤>(≪國史館論叢≫34, 國史編纂委員會, 1992), 175∼178쪽의<표 2>肅宗朝 院宇의 建立 및 賜額動向을 재편집. ( )안은 사우의 수임.

이 표에서 보면 특별히 예외적인 경우가 있긴 하지만 대체로 남인 집권시기에는 남인계 인물을, 서인 집권기에는 서인계 인물을 배향하는 원·사에 사액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604) 鄭萬祚, 앞의 글(1975). 이하 서술은 이 논문을 주로 참고함. 숙종대 정국변동과 관련하여 원우건립 및 사액동향을 구체적으로 검토한 논고로는 薛錫圭, 앞의 글이 있다.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참고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무엇보다도 이 시기 庚申·己巳換局 다시 甲戌換局으로 이어지는 잦은 정변 속에 각 정파마다 자파서원을 통해 집권의 명분이 되는 도학적 정통과 명분론을 확보하고, 동시에 자파세력을 확대·부식하고자 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따라서 당시 집권세력은 자파서원 건립에 물질적·행정적 지원을 하였는데 사액은 그 중 가장 대표적인 형태였다. 사액은 지방에서 자파의 사회적 기반을 합법적으로 확립할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에 이 시기 여러 정치세력간에 중요한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605) 사액이 당파적 이해관계와 결부되었던 한 예로 안동의 屛山書院을 들 수 있다. 이 서원의 제향인인 西厓 柳成龍은 퇴계의 高弟로 선조대 중앙정계의 퇴계학파의 영수로 존재하였고, 동서·남북 分黨時에는 서인·북인으로부터 붕당 발생의 장본인 또는 남인의 영수로 인식되고 있었다. 당시 집권세력인 북인 내지 서인의 그에 대한 이러한 인식태도는 그를 주향으로 하는 병산서원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이 서원은 광해군대에 설립되어 안동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인식되었으나 여타 서원과는 다르게 사액되지 못하다가 250년 후인 철종연간에 그 후손들이 집권세력과 연결되면서 사액되었고, 뒤이어 대원군 서원훼철시에는 남인의 대표적인 서원으로 남게 되었다.

한편 현종연간에 이어 숙종연간은 서원이 너무 과다하게 설립되어 그 폐단이 심각하게 노출되면서, 서원 신설과 일체의 사액은 불허한다는 국가적 차원의 통제책이 강화되고 있었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러한 통제책은 집권 당파에 의해서 제대로 지켜지지 못하고 다만 반대당파를 억압하는 데만 유효하였다. 예컨대 기사환국 후 피화된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서원은 갑술환국 후 숙종말년까지 26년간에 걸쳐 무려 20개소가 건립되고 또한 14개소에 追配되었는데 이들 원사는 다수가 첩설에 관계없이 특별히 사액되고 있었다.

또한 이 시기에 오면 ‘첩설처 사액불허’라는 금령에 저촉되지 않으면서 자파의 집권 명분 및 사회적 기반을 확대시키기 위해, 거듭되는 환국의 피화인 등으로 사액서원의 제향자의 범위를 확대시켜 결과적으로 도학자여야 한다는 제향기준을 무너뜨렸다. 이것은 후일 서원의 질적 저하를 유발하고 사우와의 구별을 모호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 시기 서원정책은 한마디로 말한다면 정권 내지 당파적 차원을 넘지 못하였고 따라서 그 건립과 사액을 격증시켜 폐단만 격화시켰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러한 서원정책을 통해서 노론정권은 다른 당파에 비해 자파의 사회적 기반을 확대하는 데 성공하였다. 숙종연간에 사액된 서원은 남인계의 21%에 비해 서인계는 41%였다. 이러한 서원의 건립과 사액의 폭증현상에는 각 당파의 정치적 욕구 못지않게 이 시기 향촌사림의 현실적 이해관계가 크게 작용하였다.

한편 이 시기 서원의 남설·첩설과 맞물려 청액상소가 폭주하면서 이에 따른 사액도 당파적 차원에서 격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표면적이나마 서원에 대한 통제책이 강화되고 있었음을 감안하면 자파세력 집권기라 하더라도 특별히 정치적 비중이 있는 서원을 제외하고는 사액이 쉽지 않았다. 예컨대 기사환국 후 남인집권 때 남인의 정신적 지주인 이언적·이황을 배향하는 두 서원, 즉 慈仁의 觀瀾書院(이언적 배향)606)≪書院謄錄≫3책, 숙종 17년 7월 26일.과 풍기의 郁陽書院(이황·黃俊良 배향)607)≪書院謄錄≫3책, 숙종 19년 12월 26일.에 대한 청액이 첩설을 이유로 허락되지 않은 것은 그 한 예이다.

효종대 이후 현종대를 거치면서 서원의 사회적 폐단이 노출되자 사액문제에 대해서 첩설처는 防啓해야 한다는 통제책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었다. 그러나 영향력 있는 대부분의 서원 사액은 ‘特爲賜額’되는 등 朝臣들의 영향력에 크게 좌우되었다. 청액이 방계되었다 하더라도 조신의 건의에 의해 다시 사액심의의 기회를 가지게 되는 경우가 있었으며, 이런 경우 첩설처라 하더라도 특별히 사액되는 경우가 많았다. 남인계로 상주의 대표적인 서원인 道南書院의 경우 현종 11년(1670) 1차 청액에서 실패하였고 남인 집권기인 숙종 2년(1676) 11월 5일의 2차 청액에서도 또다시 실패하였으나 그해 12월 19일에 영의정의 주선으로 특별히 사액되었다.608)≪書院謄錄≫1책, 현종 11년 12월 27일 및 숙종 2년 11월 5일·12월 19일. 이렇게 볼 때 당시 서원이 사액을 받기 위해서는 중앙관료들에 대한 사전 준비작업과 이들을 통한 중앙정부의 분위기 파악이 중요한 관건이 되었다고 보여진다. 실제로 당시 대부분의 서원사액은 중앙관료의 협력 없이는 불가능하였다. 특히 권력에서 밀려나 있었던 계열의 서원은 더욱 그러하였다. 경주의 龍山書院도 사액할 때 京師가 贊議하여 성사되었다고 하였다.609)≪龍山院志≫賜額 “傍孫崔立基陪疏請額時 府使南九命 正郞任華世 遊宦京師 贊議成事”. 남구명과 임화세는 本府출신이다. 여기에서 서원사액 과정에서 동향 내지 본도출신 유력인사가 큰 도움이 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남인계열이 중앙정계에서 완전히 실각하는 갑술환국 이후부터 영남 남인계 서원의 사액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사액서원 수의 지역적 차이도 이에 연유한 것이다. 지역별로 보면 경기도가 삼남지방에 비하여 원사의 수는 얼마되지 않지만 원·사에 대한 사액의 비율은 여타 도에 비해 배 이상 높게 나타난다. 이와 같이 경기도 지역의 사액비율이 높은 것은 인조반정·갑술환국 이후의 서인 내지 노론집권으로 이어지는 당시의 정치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이 지역 원·사에 제향되는 인물은 대부분 고관의 경력을 가졌거나 중앙의 정쟁에서 被禍한 인사로, 이들은 당시 정권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으며 그의 문인과 자손들이 정계에서 활약하고 있었기 때문에 원·사의 건립도 용이하게 이루어지고 국가로부터 사액도 쉽게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610) 鄭萬祚, 앞의 글(1975).

한편 당시 정치적으로 민감한 서원이 아닌 대부분의 서원에 있어서 사액과정의 어려움은 울산의 鷗江書院(정몽주·이언적 배향, 남인계)의 예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구강서원은 숙종 5년에 봉안된 이후 곧바로 청액을 위한 준비작업에 착수해 숙종 8년∼20년까지 4차에 걸친 청액과정을 거쳐 남인이 완전히 실각하는 갑술환국 직전에 어렵게 사액되었다.611) 이하의 서술은 李樹煥,<蔚山 鷗江書院의 設立과 賜額過程>(≪大丘史學≫49, 1995) 참조. 1·2차 청액은 서인집권기였으며, 3·4차 청액은 기사환국 후 남인집권기였다. 이 시기가 서원사액에 있어서 당파적 편향성이 극심하였음을 감안하면 1·2차 청액의 실패는 당연한 결과였다. 서원의 사액 여부는 중앙관료들의 찬반논의에 의해 결정될 문제이지만, 그 업무가 예조 소관이므로 정치적으로 중요한 서원이 아닌 경우 예조판서의 역할이 가장 컸다고 보여진다. 1차 청액은 예조판서의 반대로 무산되었으며, 2차 청액도 예조판서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다. 3차 청액은 남인 집권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첩설이란 이유로 불허되었다. 이러한 청액과정에서 서원유림은 서울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서 중앙관료들에 대해 일정한 청탁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3·4차의 청액에서는 각각 약 27,000兩, 25,000냥 이상의 막대한 경비가 소요되었는데 이 중 상당수는 중앙관료들에 대한 청탁자금으로 사용되었다고 보여진다.

대체로 사액과정에서는 동향·본도출신 인사 및 자파 중앙관료들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는데 재경세력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대부분 지역의 서원은 중앙관료들의 적극적인 비호를 받을 수 없었고, 따라서 이들에 대한 사전 교섭을 위해서는 엄청난 물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와 같이 당시 서원들이 막대한 자금을 소비하면서까지 청액운동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사액이 곧바로 재지사족들의 향촌내 생존권 확보와 직결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17세기 중반 이후 서원이 급격히 남설되면서 폐단이 노출되자 설립과 사액에 대한 국가적 통제책이 수립되고 이에 대한 권한은 지방관에 귀속되었다. 서원유림들이 지방관으로 대표되는 관권에 대해 일정하게나마 그들의 자유로운 향촌내 활동을 담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국가의 공적 승인이라 할 수 있는 사액을 받는 것뿐이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