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3. 서원건립활동
  • 4) 초창기 서원의 성격

4) 초창기 서원의 성격

중종대 주세붕에 의해 창건된 서원은 초기에는 사묘에 부수된 유생들의 독서처로 건립되었다. 따라서 사림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다만 관학의 보조적 기능을 수행하는 정도의 기구로 인식되었다. 이후 퇴계에 의하여 서원은 사림의 講學·藏修處로서 그 성격이 분명하게 되면서 사림세력의 향촌활동에서의 중요한 기반으로 자리잡게 되고 이후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사림의 학적 기반으로서의 서원제도의 보급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선초부터 계속되어 온 사림세력의 유교적 향촌지배체제 확립을 위한 노력의 결과였다. 그러나 서원은 훈척계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명종 때까지는 사림의 정치·사회적 활동의 주요한 기반이 될 수 없었으며, 다만 이 시기 피폐된 관학인 향교에 대신하는 사림들의 새로운 교육기관으로서 주목되고 있었다. 실제로 이 시기에는 봉사대상 인물이 없는 경우에도 퇴계에 의하여 서재·정사라 하지 않고 서원으로 명명되고 있었다. 이후 사림파가 정치의 전면에 나서게 되는 선조대부터 그들에 의해 전개되는 붕당정치와 관련되면서 서원은 점차 그 역할을 증대시켜 나갔다.

그러나 선조·광해군·인조대까지만 하여도 사림에 의해 수행되는 붕당정치가 명분과 시비분별 위주로 전개되지 못하고, 향촌에서도 사족의 활동기반으로서 유향소 그리고 향안·향약 등이 제 기능을 발휘하고 있어 서원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그리 클 수는 없었다. 광해군대나 인조 때 서원이 정치적으로 이용되었던 경우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나 대체적으로 이 기간 동안 서원은 집권세력의 도학적 정통성 부여를 위한 자파계 인물의 제향처나 사림의 확보를 위한 인재양성소로서의 정치적 역할을, 그리고 향안 등과 마찬가지로 사림간의 상호결속을 위한 취회소로서의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였다.612) 鄭萬祚,<朝鮮期 書院의 政治·社會的 役割>(≪韓國史學≫10,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9). 이하 서술은 이 글을 주로 참고함. 이 시기는 東西간, 南北간 정쟁은 치열하였지만 아직 서원을 중심으로 한 향촌사림이 본격적으로 중앙정치에 참여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서원이 정치·사회적으로 주목되며 그 역할이 커지는 것은 이른바 산림세력이 본격적으로 진출하는 17세기 중반 이후부터이다. 이 시기는 붕당정치가 성리학적 이념과 밀접하게 연관되는 명분과 의리 중심으로 전환되어 향촌사림의 여론이 정치의 향방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당시 향촌사림은 이러한 붕당정치의 전개과정 속에서 중앙정치세력과 연계하여 향촌에서의 자신들의 지위를 공고히 하려고 하였으며, 중앙관료들은 지방의 서원조직을 통해 자파의 정치적 입장을 강화하려 하였다. 따라서 당시 향촌사림의 여론을 수렴하는 일차적 거점이었던 서원의 역할은 더욱 증대될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17세기 중반 이후 붕당정치 전개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유림의 집단상소인 유소는 대체로 향교·서원조직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시기의 붕당정치는 서원 등을 통해 수렴된 사림의 공론이 자파계 관료나 유소奉獻을 통하여 정치에 반영되는 양상을 나타내고 있었으니, 요컨대 서원은 사림공론에 의한 붕당정치 실현의 기반이었던 셈이다. 현종·숙종대의 명분론 중심의 붕당정치의 전개는 바로 이 서원에 토대하였던 것이며 따라서 서원의 건립도 이 시기에 가장 활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 이후 서원은 표면적으로는 사림공론의 수렴처를 표방하였으나 실제로는 당론의 연수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한편 동성촌의 발달과 함께 동성집단 내부의 상호결속과 사회적 지위 유지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서원은 족적 기반의 중심기구로 그 사회적 역할을 증대시켜 나갔다. 이는 향촌사회에서 기존의 사족지배가 점차 위기에 봉착하고 있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특히 이 시기 향안·향약 등 사족간의 결속을 보장하던 자치조직이 쇠퇴하던 현상은 사족들로 하여금 문중적 보장의 필요성을 절감케 하였다. 이러한 가문의식의 현저한 발휘 속에 서원의 역할도 문중내 名祖·顯祖의 제향을 통한 향중의 벌족으로서의 사회적 지위 유지, 문중자제의 교육과 교화를 통한 문중내 윤리질서의 유지 등을 도모할 수 있었던 것이다.613) 鄭萬祚, 앞의 글(1989). 따라서 이 시기에 오면 서원의 각 가문별 분립현상이 뚜렷해졌다. 17세기 전반까지만 하더라도 이러한 원·사의 건립은 향중 공동의 관심사에서 출발하였으나, 17세기 중반 이후부터는 자기중심적 이해관계에서 지역·씨족별로 개별화 추세를 보이면서 문중의 파별로 더욱 세분화되어 가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원장·유사 등 당시 서원운영을 실질적으로 책임지고 있었던 원임의 구성에서도 나타나 시기가 내려오면서 점차 피봉사자의 후손의 비중이 커지고 있었다. 이렇게 볼 때 이 시기 서원은 이전까지의 향촌공동체적 성격에서 벗어나 점차 가문중심적으로 전환되고 있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의 양상이나 그 시점은 각 서원의 형편이나 성격에 따라 다소 달랐다.

따라서 원·사는 종래의 교육기관으로서의 의미가 크게 축소되었고, 祀賢의 기능만이 강조되면서 오히려 향촌에서의 문중의 우위권 경쟁을 위한 도구로 이용되고 한편으로는 그들 문중의 사회·경제적 이해를 대변하는 도구로 전락되어 갔다. 즉 17세기 중반 이후 서원의 급격한 남설 및 각 가문 선조간의 우열을 둘러싼 각종 시비, 서원의 추배문제 등 서원을 중심으로 한 鄕戰 등은 이러한 서원의 성격변화에 기인한 바가 크다. 특히 교육적 기능의 상실은 이 시기 서원의 남설 및 이에 따른 국가적 통제책으로 야기된 경제적 기반 약화가 크게 작용하였다. 그러나 소수이긴 하지만 몇몇 서원은 이 때까지 부정기적으로 設講을 하여 교육적 기능을 명맥상 유지하기도 하였으나 피봉사자의 후손이 그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끝으로 한가지 언급할 것은 서원이 가지는 의미가 당파별로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는 점이다. 초창기 서원이 집중되어 있었던 영남의 남인은 퇴계의 영향을 받아 처음부터 서원을 사림의 자치조직체로 인식하였고, 인조반정·갑술환국을 거치면서 중앙정계에서 완전히 배제된 이후에는 자기존립을 위해 서원을 통한 향촌에서의 재지적 기반 확보와 유지에 주력하였다. 따라서 서원의 문제는 생존의 차원에서 중요시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비해 서인 내지 노론은 집권세력이었으며 또한 성균관이 자기세력하에 있었다는 데서 서원에 대한 관심은 남인에 비하여 부차적인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집권명분의 강화와 자파세력 확대라는 측면에서 서원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지 생존 차원의 문제는 아니었던 것이다. 入院生의 문제에 있어서 영남남인계 서원이 “中人·庶孼은 비록 大·小科에 합격하더라도 濫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614)≪紹修書院院錄謄本≫(丙戌 5월 13일, 도산서원 소장) 院錄古規 및 紹修·屛山書院 尋院錄 참조.라고 하여 배타적 보수적 입장을 뚜렷이 한데 반해 서인계 서원이 비교적 유연한 입장을 견지한 것도 이에 연유한 것이었다.

<李樹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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