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4. 성리학의 연구와 보급
  • 1) 성리서의 간행과 보급

1) 성리서의 간행과 보급

16세기 이래 사림이 역사적 의미를 갖는 것은 性理學, 특히 朱子性理學을 습득하고 실천하는 주체로서 조선사회에 성리학적 질서를 보편화시킴으로써 사상 및 사회체계에 기본적인 바탕을 제공하였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사림의 성장과정은 성리학에 대한 이해의 심화과정이었으며 이는 성리학 경전에 대한 註釋書와 理論書, 즉 性理書의 수입과 간행·보급 등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이미 고려말부터≪四書集註≫와≪大學衍義≫·≪近思錄≫등 성리서가 성리학자들에 의해 도입되어 보급되었으나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널리 퍼지지는 못하였다.615) 都賢喆,<高麗後期 朱子學 收容과 朱子書 普及>(≪東方學志≫77·78·79, 延世大, 1993), 198∼213쪽. 조선의 건국세력들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고 제도정비와 부국강병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성리학의 이론적·철학적 측면에 관심을 덜 쏟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성리서가 널리 보급되지 못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616) 韓永愚,≪鄭道傳思想의 硏究≫(改正版) (서울大 出版部, 1983), 9∼13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초부터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의 행차, 즉 赴京使行의 책교역(貿書) 활동을 통해≪眞西山讀書記≫·≪朱子成書≫·≪四書衍義≫등의 성리서가 새로이 도입되었으며, 經筵의 강의과목으로 채택된≪대학연의≫는 여러 차례에 걸쳐 수입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사신들이 책들을 들여왔던 것은 개인의 해외여행이나 상인들에 의한 사무역이 거의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신들에 의한 초기의 책교역은 말 그대로 책을 사고 파는 무역활동까지는 나아가지 못하고 주로 明에서 오는 明使·勅使에 의한 下賜와 중국에 가는 조선사신들이 받아가지고 오는 回賜로 진행되었으며 그 범위도 제한적이었다.617) 李存熙,<朝鮮前期의 對明 書冊貿易>(≪震檀學報≫44, 1980), 62∼63쪽.
李元淳,<赴京使行의 文化史的 意義>(≪史學硏究≫36, 1983), 136∼139쪽.

이러한 소극적인 방법에서 벗어나 적극적이고 실질적인 책교역을 벌이는 시기는 세종대였는데, 유교국가의 기반이 마련되면서 儀禮詳定所와 集賢殿 등을 통한 古制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진 것이 그 주된 요인이었다. 그리하여≪四書大全≫·≪五經大全≫·≪性理大全≫ 등이 세종 원년(1419)·8년·15년 세 차례에 걸쳐 사신을 통해 들어왔다.618)≪世宗實錄≫권 6, 세종 원년 12월 정축·권 34, 세종 8년 11월 계축 및 권 62, 세종 15년 12월 임술.

≪사서대전≫은 朱子를 비롯한 宋·元代 학자들의 4서에 대한 주석을,≪오경대전≫은 5경에 대한 주석을 모은 것이며,≪성리대전≫은 성리학에 대한 학설들을 모은 것이다. 永樂 13년(1415) 명의 한림학사 胡廣 등이 황제의 칙명을 받아 동시에 편찬한 이 책들은 송에서 원에 이르는 시기의 성리학을 집대성한 것으로 내용에서 상호보완적인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책들의 도입은 조선사회에 성리학이 본격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하였음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사서대전≫·≪오경대전≫·≪성리대전≫은 도입에 그치지 않고 여러 차례에 걸쳐 간행되었다. 국왕인 세종이 그 필요성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偰循 등 당시 학자들도 간행하여 널리 배포할 것을 청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세종 7년(1425)부터 간행사업에 착수한 이래 세종 9년≪성리대전≫이 제일 먼저 간행되었으며 이듬해에는 경상도감사가 진상한 이 책 50부를 2품 이상의 문신과 承政院의 承旨, 집현전 博士 이상의 관료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이어≪사서대전≫과≪오경대전≫도 세종 11년 경상·전라·강원도 감영에서 간행이 완료되어 중앙관료나 향교에 나누어주었다. 태종대에 癸未字, 세종대에 甲寅字 등 정교한 銅활자가 주조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서적의 간행과 밀접한 연관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619) 鄭亨愚,<『五經·四書大全』의 輸入 및 그 刊板 廣布>(≪東方學志≫63, 1989), 18∼26쪽.

나아가 세종 17년에는 각 지방의 향교나 궁벽한 향촌에까지 이 책들을 배포하기 위한 조치가 취해졌다. 즉 지방의 향교에 비치하기를 원하는 자나 개인적으로 소장하기를 원하는 자가 있는 경우 지방 관아에서 종이를 모아 올려 보내면 중앙의 鑄字所에서 인쇄하여 내려 보내겠다는 것이었다.620)≪世宗實錄≫권 70, 세종 17년 10월 계해. 이후 지방으로의 보급상황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이를 계기로 중앙은 물론 지방의 학자들도 이 책들을 접하기 시작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성리대전≫은 周敦頤의<太極圖說>과 邵雍의<皇極經世書>를 비롯하여 성리학의 핵심적인 내용들이 풍부하게 들어 있었기 때문에 理學의 淵源으로서 공부하는 학자들이 먼저 마땅히 보아야 할 책으로 인식되었으며≪근사록≫과 함께 경연에서 강의되기도 하였다.

그러나≪성리대전≫에 대한 이해수준은 그리 높지 않았다. 당시 최고의 학술기관이던 집현전의 학자들도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경연에서 가르칠 사람도 제대로 구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621)≪世宗實錄≫권 39, 세종 10년 3월 갑신 및 권 55, 세종 14년 2월 을미. 이러한 상황은 그 뒤에도 계속되어 성종대에도 반드시 여러 관련서적을 참고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책으로 여겨져 弘文館員 가운데 똑똑한 자를 뽑아 미리 공부하여 경연에 대비하게 할 정도였으며 강의를 훌륭하게 한 관원에게는 왕이 선물을 내리기도 하였다.622)≪成宗實錄≫권 122, 성종 11년 10월 병인 및 권 231, 성종 20년 8월 기유.

이러한 가운데≪性理群書≫·≪朱文公集≫·≪朱子語類≫ 등이 도입되어 학자들의 성리학 이해에 도움을 주었으나623)≪世宗實錄≫권 64, 세종 16년 6월 을축.
≪文宗實錄≫권 8, 문종 원년 7월 경신.
≪成宗實錄≫권 139, 성종 13년 3월 병자.
성리서의 도입과 간행은 연산군대에 가서 일시 중단되었다. 연산군은 독서금지령을 내리고 홍문관을 혁파하고 왕실에 소장한 책들까지 불태워버려 많은 책들이 소실되었다. 더욱이 중종 9년(1512) 왕실에 남아 있던 책들을 보관해왔던 尊經閣에 화재가 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624)≪燕山君日記≫권 56, 연산군 10년 12월 임오.
≪中宗實錄≫권 21, 중종 9년 12월 경인·신묘.

그러자 이듬해인 중종 10년 이에 대한 본격적인 대책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홍문관은 세종대에 서적의 간행과 보관, 활자의 주조 등이 文治를 빛나게 하였는데 세월이 지나 全帙이 남아 있는 것이 없고 연산군대를 거치면서 거의 없어졌음을 지적하며, 求書敎旨를 내려 개인집에 있는 책들을 수소문하여 모으고 명에 주청하여 없어진 책들을 구해오며 별도로 都監을 만들어 간행에 힘쓸 것을 청하였다. 아울러≪주문공집≫·≪주자어류≫·≪진서산독서기≫·≪伊洛淵源錄≫처럼 홍문관에 1질밖에 남아 있지 않거나≪二程全書≫처럼 개인에게만 있는 책들은 간행하여 널리 배포하고, 희귀서적은 각 도로 하여금 木刻本을 만들어 원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인쇄하여 갖도록 청하였다.625)≪中宗實錄≫권 23, 중종 10년 11월 갑신.

여기에 대해 중종은 중국에 갔다 오는 자는 서적을 널리 구해 오도록 하고 개인의 경우 없어진 책들을 기증하면 상을 후하게 내릴 것을 명령하였다. 또한 홍문관에서 언급한 희귀서적에 대해서는 큰 道가 卷帙이 많은 서적을, 작은 도가 권질이 적은 서적을 분담하여 간행하도록 하였다.626)≪中宗實錄≫권 23, 중종 10년 11월 병술.

이에 따라 부경사행에 의한 책교역도 다시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그 중심인물은 金安國이었다. ‘己卯士林’의 한 사람이었던 그는 중종 13년(1518)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오면서≪語孟或問≫·≪傳道粹言≫·≪經學理窟≫·≪延平問答≫등 다량의 성리서를 구입해와 중종에게 진상하면서 간행하여 널리 배포할 것을 청하였으며 중종은 이 책들을 간행하도록 하였다.627)≪中宗實錄≫권 34, 중종 13년 11월 무오·신유. 趙光祖를 위시한 기묘사림들이 등장하여 道學政治를 펼치면서 성리학적인 분위기를 조성해 간 것도 이 시기 성리서의 활발한 수입과 간행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己卯士禍가 일어나면서 이러한 움직임은 위축되고 사신들을 통해 서적들이 간간이 들어올 뿐이었다. 또한 중종 17년에는 禁書인≪大明一統志≫를 중국에 간 사신이 구입하려다가 중국당국에 의해 적발된 사건을 계기로 서적의 수입이 금지되기도 하였다.628) 吳性鐘,<朝鮮中期 陽明學의 辨斥과 受容>(≪歷史敎育≫46, 1989), 65∼70쪽.

성리서의 도입과 간행이 다시 활발해지는 것은 중국의 서적 반출 금지가 풀리고 사림이 다시 정계에 진출하는 중종대말경이었다. 이 때에는 서적 구입을 위한 장기적이고 구체적인 계획이 이루어지는데 중종 자신이 직접 목록을 작성하여 김안국에게 넘기는 열성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에 김안국은 藏書閣과 文武樓에 보관되어 있는 서적들을 조사하여 중국으로부터 구입할 책들의 목록을 작성하였는데≪皇極經世書說≫·≪象山集≫등 經學理書를 중심으로 하여 家訓書·政事書·文學書·筮占書·地志 등 매우 광범위한 것이었다. 아울러 서적의 수입을 보충하기 위해 개인들이 소장하고 있는 희귀하고 긴요한 책들을 모으는 계획도 세세히 세워져 시행되었다.629)≪中宗實錄≫권 98, 중종 37년 5월 정해 및 권 99, 중종 37년 10월 무인.

한편 서적의 보급과 유통을 위해 지금의 서점이라고 할 수 있는 書肆를 설치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서적을 상품으로 사고 파는 관행이 없었던 상황에서 관의 주도 아래 중국으로부터 책을 수입하고 그 책을 간행하여 보급하는 것은 아무래도 한계가 없지 않았다. 그러므로 일반 사람들이 원하는 책을 자기 손에 구입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서사의 설치는 중종 14년 잠깐 제기되었으나 기묘사화로 논의가 무산되었다가 중종 24년 大司諫 魚得江에 의해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즉 그는 世家大族은 소장하고 있는 책들이 무용지물인 경우가 많은 반면 지방의 儒者는 공부에 뜻이 있어도 책이 없어 독서하지 못하고 책값이 비싸 구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서점을 설치하여 책을 싸게 매매토록 하고 가난한 사람은 서점에서 책을 볼 수 있도록 청하였다.630)≪中宗實錄≫권 36, 중종 14년 7월 갑오 및 권 65, 중종 24년 5월 기미.

그의 건의는 당장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그 뒤에도 계속 논의되었으며 중종 33년에는 서사를 설치하여 시행하자는 대신들의 요구로 담당 관서로 하여금 구체적인 절목을 마련하라는 왕의 지시가 내려지기도 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명종 6년(1551)에 서사를 설치하는 법이 시행되어 비로소 일반인들이 서적을 매매할 수 있게 되었다.631)≪中宗實錄≫권 87, 중종 33년 3월 을유·갑신.
≪明宗實錄≫권 11, 명종 6년 5월 갑인.
당시 매매되었던 책 종류와 책값에 대해서는 魚叔權의≪攷事撮要≫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유교경전과≪성리대전≫과 같은 성리서들이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다.632) 魚叔權,≪攷事撮要≫권 하, 書冊市准.
李存熙, 앞의 글, 74∼75쪽.
따라서 서사는 이러한 책들의 보급을 통해 당시 학자들이 성리학을 이해하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서사의 설치는 서적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이미 상당히 증가해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종 38년(1543)≪朱子大全≫이 중국으로부터 처음 들어와 간행되었다. 이 책은 주자의 저술을 모두 모은 문집으로≪주자어류≫와 함께 주자의 학문을 연구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었다. 이전의 성리학 연구는 주로≪성리대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는데, 이 책은 주자의 설과 다른 학설들도 포함되어 있어 주자성리학의 정수를 이해하는 데 미흡한 점이 없지 않았다. 따라서 주자의 전사상체계를 본격적으로 접할 수 있는≪주자대전≫의 간행은 조선학계에서 성리학 연구가 본궤도에 오르게 되는 중요한 전기를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李滉·金麟厚·奇大升 등 당시 대학자들이 이 때 비로소 이 책을 접하고 주자성리학에 대한 연구를 심화시켜 나갔으며≪朱子書節要≫·≪朱子文錄≫ 등 관련 연구서를 저술하였다.

한편 명종대에도 성리서의 간행이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주로 개인에 의해 지방의 서원이나 관청 등에서 간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李楨으로 그는 주로 이황과 의논하여≪程氏遺書≫·≪전도수언≫·≪연평문답≫·≪이락연원록≫·≪學庸章句指南≫ 등 기존에 들어와 있던 성리서는 물론 중국에서 새로 구입해온 책들을 간행하였다.633) 金恒洙,<16세기 士林의 性理學 理解-書籍의 刊行·編纂을 중심으로->(≪韓國史論≫7, 서울大, 1981), 159∼163쪽.

이처럼 성리서의 수입과 간행·보급을 통해 사림들은 보다 성리학을 가까이 접할 수 있게 되었으며 동시에 성리학에 대한 이해도 심화시켜 나갔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스스로가 성리학에 대한 다양한 주석서와 이론서를 저술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명종말 선조초에 성리학은 조선사회에서 거의 완전히 이해되는 단계에 이르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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