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4. 성리학의 연구와 보급
  • 3) 이기심성설 논쟁

3) 이기심성설 논쟁

16세기 초반 사림의 사상적 경향은 성리학 이념의 사회적 실천, 도덕성과 수신의 강조였다. 그런데 도덕성과 수신의 강조가 그 사회적 실천을 수반하는 경우 필연적으로 인간의 심성에 대한 관심이 증대될 수밖에 없었다. 鄭汝昌과 柳崇祖는 바로 이러한 관심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려고 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김종직의 문인이었던 정여창은, 성리학의 이념을 실천하는 학문적 자세로서 立志를 강조하고 그 이론적 근거로 理氣論과 善惡天理論을 주장하였다.<이기설>에서 그는, 氣없는 理가 없고 이없는 기가 없으며 이가 있는 곳에 기가 모이고 기가 움직이는 곳에 理 또한 드러나니 ‘一而二 二而一’이라고 하였다. 또한 기가 움직일 때 이가 主가 되므로 천하에 理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 그 사이에 蘊畜되어 있다고 보았다.653) 成校珍,<一蠹鄭汝昌의 哲學思想-理氣說과 善惡天理論을 中心으로->(≪如山柳炳德博士華甲紀念 韓國哲學宗敎思想史≫, 1990).

<선악천리론>에서는, 선악이 모두 天理이며 악도 性이라는 鄭顥의 주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주자의 견해에 입각하여, 천리를 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人欲으로 인해 선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며 성을 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기의 淸濁에 따라 선하지 않게 될 수 있기 때문이라며 본래 성은 선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654) 鄭汝昌,≪一蠹集≫續集 권 1, 善惡天理論.

20여 년 동안 관직의 대부분을 성균관에 있으면서 성리학풍의 진작에 힘썼던 유숭조는 중종 초년 大司成으로 있으면서 최초의 經書諺解書인≪經書諺釋≫을 저술하여 학생들에게 가르쳤으며, 또한 중종에게 본격적인≪대학≫ 이론서인≪大學三綱八目箴≫과 송·명대 성리학자들의 주요 견해들을 모은≪性理淵源撮要≫를 지어 바쳤다.

특히≪대학≫의 明明德條를 해석하면서, 理가 움직이면서 氣를 낀 것이(理動氣挾) 四端의 情이며 기가 움직이면서 이가 따르는 것이(氣動理隨) 七情의 萌芽라고 하는 등 심과 성·정, 4단·7정과 이기의 발현 문제를 연관지어 설명하였다.655) 柳崇祖,≪大學三綱八目箴≫ 明明德箴. 이 내용은 뒤에 이기심성논쟁의 중심 주제가 되었던 것으로 사단칠정론은 이미 유숭조로부터 싹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 성리학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치는, 우리 동방에 性理에 관한 글이 권근 이후에 전혀 없다가 겨우 있게 되었다든지 4단7정과 이기에 관해 논한 것이 이황에게 영향을 미쳤다든지 하는 후대 학자들의 평가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656) 柳崇祖,≪眞一齋集≫ 大學綱目箴跋, 眞一齋先生遺集序.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리학 이론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는 조금 시일이 걸려야만 했다. 중종대 등장하는 기묘사림이 성리학에 대한 이론적 탐구보다는 앞 시기의 영남사림과 마찬가지로 성리학 이념의 사회적 실천에 더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성균관에서 유숭조로부터 배우기도 했던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사류들은 오히려 스승의 학문을 ‘章句之學’일 뿐 ‘治身之學’이 아니라고 비난하기까지 하였다.657)≪中宗實錄≫권 27, 중종 12년 2월 경신.

기묘사림의 사상적 특징은 조광조가 경연에서 주장하였던, 도학을 높이고(崇道學) 인심을 바르게 하며(正人心) 성현을 본받고(法聖賢), 지치를 일으킬 것(興至治)에 잘 나타나 있다.658) 趙光祖,≪靜菴集≫附錄 권 1, 事實. 이들에게 도학은 堯舜으로부터 공자·맹자를 거쳐 주자에게 계승된 道統을 기반으로 하며, 格物致知하여 善을 밝히고 誠意正心하여 몸을 닦고 그것이 몸에 쌓일 때는 天德이 되고 정사에 베풀면 王道가 되는 학문이었다. 또한 지치는 三代의 정치를 의미하였다.659) 鄭炳連,<靜庵의 道學倡明과 至治의 理念>(≪儒學思想硏究≫2, 儒敎學會, 1987), 24∼45쪽. 그러므로 지치를 실현하고 그 이론적 기반인 도학을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서는 왕이건 신하이건 먼저 자기 자신의 마음을 다스려 바르게 하고 성현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중앙에서 세력이 점점 확대되어 가자 기묘사림은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지치를 현실사회에 실현하기 위해 여러 가지 개혁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그리하여 仁과 德에 의한 왕도정치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군주가 현인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賢哲君主論」을 주장하고 그를 위해 경연활동을 강화하였으며, 군주를 올바르게 보필할 수 있는 신하를 등용하는 방법으로 과거시험을 보지 않고 학덕을 지닌 인물들을 薦擧에 의하여 뽑는 賢良科를 시행하였다.660) 曺昇鎬,<靜菴 趙光祖의 改革政治 硏究>(≪江原史學≫6, 1990), 51∼69쪽.

또한 성리학적 명분과 도통을 강조하며 昭陵과 愼妃를 復位시키고 정몽주와 김굉필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주장하였다. 소릉은 단종의 어머니인 顯德王后의 능으로 단종이 폐위되면서 같이 廢陵되었었고, 신비는 중종의 왕비로 中宗反正 때 아버지인 愼守勤이 반정에 참여하지 않고 살해되자 반정세력에 의해 강제로 廢黜당하였었다.661) 李範稷,<訥齋 朴祥의 愼妃復位疏에 나타난 義理思想>(≪訥齋 朴祥의 文學과 義理精神≫, 광주직할시·향토문화개발협의회, 1993). 따라서 이 두 왕비가 정당한 이유도 없이 쫓겨난 것은 성리학적 명분에 어긋나므로 다시 본래의 상태로 복위를 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도교의식을 거행하던 昭格署의 혁파와 魯山君과 燕山君의 立後 주장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662) 李秉烋,≪朝鮮前期 畿湖士林派硏究≫(一潮閣, 1984), 117∼124쪽. 정몽주와 김굉필의 문묘종사 요구는 조선 성리학의 도통을 확립하는 동시에 자신들의 학문의 우월성을 공인받는 수단으로 추진되었다.

한편≪소학≫은 앞 시기의 영남사림들과 마찬가지로 학문의 시작으로 매우 중시되었다. 그러나 영남사림들이 이 책을 개인적인 실천 차원에서 중시하였다면 기묘사림들은 사회적인 차원까지 확대해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보급하려고 노력하였다. 동시에≪소학≫에 실려 있는 呂氏鄕約을 보급하는 운동도 적극적으로 벌였으니 그 대표적인 인물이 金安國이었다. 이≪소학≫실천운동과 향약보급운동은 결국 성리학적 사회질서를 수립하려는 기묘사림의 노력의 소산이었으며 이는≪二倫行實圖≫·≪警民篇≫ 등 禮俗書籍의 간행과 언해,≪주자가례≫의 시행 등으로 한층 더 뒷받침되었다.663) 李泰鎭, 앞의 글, 20∼23쪽.
金勳埴,<16세기 『二倫行實圖』 보급의 社會史的 考察>(≪歷史學報≫107, 1985).

≪소학≫과 함께 이들의 학문적 기반으로 중시된 것이≪근사록≫이었다. 주자와 呂祖謙이 초학자를 위해 만든 이 책은 주돈이·정호·정이·장재의 학문 가운데 핵심적인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성리학의 이념과 체계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어 일찍부터 성리학을 배우는 사람의 필독서였다. 이미 고려말에 들어왔지만 널리 읽히게 된 것은 중종대 기묘사림에 의해서였다. 특히 조광조는≪소학≫보다 더 중시하였으며 개혁정책의 이론적 기반으로 삼았다. 이 책이 성현의 도통을 계승하고 태평시대를 구현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이유에서였다.664) 金鎔坤, 앞의 책, 162∼182쪽.

≪근사록≫의 첫번째 장인<태극도설>은 性理의 본원으로 천지만물의 이치가 모두 구비되어 있는 것으로 인식되어 당시 학자들 사이에 많이 논의되었다.665)≪中宗實錄≫권 26, 중종 11년 10월 신유. 아울러≪성리대전≫에 대한 연구도 아직 완벽하게 이해하는 학자가 거의 없는 상황이었지만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렇듯 성리학 이념의 구현과 개혁을 통해 지치를 실현하려고 했던 이들의 노력은 靖國功臣의 僞勳削除를 계기로 훈척의 본격적인 반격을 받아 결국은 己卯士禍로 인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기묘사림의 성리학 이론 수준은 깊이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의 등장은 주자 중심의 성리학적 세계관이 조선사회에 확립되고 명분과 실천을 중시하는 경향이 이후 조선 성리학의 중요한 특성으로 자리잡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실천적 행동은 훈척까지도 성리학의 실체를 새롭게 인식하게 하고 성리학을 자기 시대의 이념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이제 주자성리학은 조선사회의 지배사상으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666) 고영진,<조선사회의 정치·사상적 변화와 시기구분>(≪역사와 현실≫18, 한국역사연구회, 1995), 90∼93쪽.

중종대 후반 정치세력 또는 사회세력으로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던 사림은 다시 중앙정계에 진출하지만 乙巳士禍로 인해 선배 세대들과 마찬가지로 향촌사회로 돌아가야만 했다. 따라서 이들의 학문 연구는 기본적으로 기묘사림의 사상을 계승하였으나 동시에 그 한계성을 극복하려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거기에 훈척의 지배라는 현실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이들 사림은 기묘사화가 실패한 원인으로 먼저 지치를 포기한 국왕의 학문적인 문제점을 들었다. 사림의 기반이 아직 취약한 상황에서 어떠한 좋은 개혁도 왕의 의지가 없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국왕의 학문인 聖學이 제대로 갖추어지는 것이 선결과제라고 보고 성학, 즉 帝王學에 대한 연구를 활발히 전개하였으며 그 이론적 기반이 되었던≪대학≫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667) 李泰鎭,<李晦齋의 聖學과 仕宦>(≪韓國思想史學≫1, 1987).

다음 원인으로 든 것은 기묘사림이 지치를 추진하는데 학문적 기반, 특히 이론적 기반이 부족했다는 점이었다. 성리학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성리학적 이념과 방법을 융통성 없이 과격하게 현실에 적용하여 개혁을 하려다 실패했다는 것이다.668)≪退溪先生言行錄≫권 5, 類編 論人物. 이에 대한 반성은 후대의 사림이 출사보다는 학문연구에, 성리학의 실천적 측면보다는 이론적 측면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훈척의 계속되는 탄압으로 인해 중앙정계에 나아가 자신들의 이상을 펼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이들은 재지적 기반을 강화하면서 성리학 연구에 더욱 힘을 쏟고 제자들을 키워 훗날에 대비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자신들의 근거지를 중심으로 書院건립 등을 추진해 나갔다.

그 결과 성리학적 세계관과 理氣心性論을 본격적으로 다룬 연구가 나오기 시작하였으니 그 대표적인 인물이 徐敬德과 李彦迪이었다. 두 사람은 각각 조선 성리학에서 氣一元論과 理氣二元論의 선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서경덕의 학문은 北宋 성리학을 독창적으로 집대성한 성격이 크다. 그의 학설에 주로 영향을 미친 것은 북송 성리학자인 장재와 소옹·주돈이의 학설이었다. 따라서 그가 주로 관심을 갖고 연구하였던 성리서는≪주자대전≫과 같은 주자 중심의 성리서가 아니라≪성리대전≫과 같은 송·원대 성리학자 전반을 포괄한 성리서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당시 사상계가≪주자대전≫을 중시하는 경향과≪성리대전≫을 중시하는 경향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전자는 이기이원론, 후자는 기일원론의 입장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서경덕은 우주가 끊임없이 생성·변화·소멸하는 현상세계인 後天과 그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궁극적 본체인 先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양자 모두 氣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고, 기의 운동을 氣自爾(스스로 능히 하는 동시에 스스로 그러하지 않을 수 없는 것)라는 독창적인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또한 理를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지만 이가 기 밖에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시에 이가 기보다 앞선 것이 아니라는 理氣合一論을 주장하였다.669) 徐敬德,≪花潭集≫권 2, 原理氣·太虛說·理氣說. 이는 우주의 근원을 理로 파악하고 이가 기보다 앞선 존재라고 보아 이기이원론과 理先氣後論을 주장하는 주자의 견해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서경덕에게서 기는 본체로서 도덕성을 담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가 아닌 기를 도덕규범의 근거로 하는 한 현상적인 기가 비현상적 존재임을 증명해야만 했기 때문에 본체는 절대화되고 결국 현실세계의 거부와 초월적 세계로의 도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공부방법으로 敬보다 主靜을 강조하였던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도덕적 실천을 중시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의 학문이 경을 중시하는 사상보다 사회성 획득에 불리했다는 지적은670) 丁垣在,<徐敬德과 그 학파의 先天학설>(서울大 碩士學位論文, 1990), 63∼78쪽. 이후의 역사 전개를 볼 때 문제가 없지 않다. 실제로 서경덕의 문인들은 현실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다른 학파보다 오히려 더 개혁적이었기 때문이다. 서경덕의 사상은 이후 기를 중시하는 학자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며 주자절대주의를 부정하는 北人과 近畿南人學派의 사상적 뿌리가 되기도 하였다.671) 신병주,<17세기 전반 북인관료의 사상-김신국·남이공·김세렴을 중심으로->(≪역사와 현실≫8, 1992).
고영진,<17세기 후반 근기남인학자의 사상-윤휴·허목·허적을 중심으로->(≪역사와 현실≫13, 1994).

서경덕이 주자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스러웠던 반면 이언적은 독창적인 면이 없지는 않았지만 주자의 이론에 충실하려고 하였다. 김종직의 문인이었던 외숙 孫仲敦에게서 수학했던 그는 중종 12·13년(1517∼1518) 曹漢輔와 조선 철학사상 최초의 학문적 대논쟁이었던 無極太極論爭을 벌였다. 경연에서의 논의와 朴祥의<論無極說> 등 중종대 전반에 활발히 일어났던 성리학의 우주론과 본체론에 대한 논의를 일단 결산하는 의미도 지니고 있는 이 논쟁은 이언적이 孫叔暾과 조한보 사이에 이루어졌던 무극·태극에 대한 論辯을 보고<書忘齋忘機堂無極太極說後>라는 글을 발표한 데서 비롯되었다.672) 許南進, 앞의 글, 203∼204쪽.

여기서 그는 양명학의 영향을 받은 손숙돈이 무극의 불필요성을 주장하고 불교·도교의 영향을 받은 조한보가 태극의 體가 본래 寂滅하고 渾然하기 때문에 大本과 達道를 구별할 필요가 없으며 따라서 頓悟的인 수양을 강조한 데 대하여, 태극이 곧 무극이라는 말은 맞지만 태극이 적멸하다는 것은 잘못이며 그 體에는 體用·動靜·先後·本末이 있으므로 돈오적인 방법은 하늘을 오르는데 계단이 없으며 바다를 건너는데 다리가 없는 것과 같은 주장이라며 비판하였다.

이후 조한보와 네 차례의 서신을 통해 계속된 논쟁에서 이언적은, 至無한 가운데 至有가 있으므로 ‘無極而太極’이라 하며 理가 있은 뒤에 氣가 있으므로 ‘太極生兩儀’라고 하니 이가 비록 기와 떨어져 있지 않으나 또한 기와 섞이지 아니한다고 하여, 태극이 理이며 이와 기가 ‘理氣不相雜’과 ‘理氣不相離’의 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논리적으로는 이가 기에 앞선다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수양의 방법으로 ‘下學人事’와 ‘上達天理’가 병행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673) 李彦迪,≪晦齋集≫권 5, 答忘機堂第一書.
李完栽,<「無極·太極論辯」에 관하여>(≪李晦齋의 思想과 그 世界≫, 成均館大 大東文化硏究院, 1992), 92∼107쪽.

이는 이언적이 주자 이론의 핵심인 이기이원론과 理先氣後說 등을 거의 완벽하게 이해하고 그에 기반하여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였음을 의미한다. 나아가 그의 학설은 이황을 비롯한 후대의 여러 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쳐 주자 중심의 성리학적 세계관이 조선사회에 이론적으로 정립되는 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 또한 그는 당시의 시대적 요청이었던 제왕학에도 관심을 기울여≪대학≫에 바탕을 둔 개혁론인<一綱十目疏>를 중종에게 올리고 그 이론적 작업으로≪大學章句補遺≫·≪中庸九經衍義≫ 등을 저술하였다.674) 李泰鎭, 앞의 글(1987), 162∼168쪽.

이러한 서경덕과 이언적의 학문적 성과를 바탕으로 하여 바로 다음 시기에 오면 이기심성론에 대한 연구와 논쟁이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李滉과 李珥를 비롯하여 曹植·鄭之雲·李恒·金麟厚·盧守愼·奇大升·成渾 등이 그 이론적 심화에 기여하였다.

특히 이황과 기대승 사이에 벌어진 四端七情論爭은 조선 학자들의 주자성리학에 대한 이해 수준을 한 단계 높이고 나아가 그들이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명종 14년(1559)부터 21년까지 8년 동안 지속된 이 논쟁의 발단은, 정지운이 권근의≪입학도설≫과 權採의≪作聖圖≫ 등의 영향을 받아 작성한<天命圖>를 이황이 수정하면서였다. 즉 4단은 理에서 발한 것이고 7정은 기에서 발한 것이다(四端發於理 七情發於氣)라고 정지운이 써놓은 것을 이황은 4단은 이가 발한 것이고 7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라고 수정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이에 정지운도 이황의 견해를 받아들여 새로<天命新圖>를 작성하였다. 여기에 기대승이 자신의 견해를 담은 서신을 이황에게 보냄으로써 논쟁이 시작되었던 것이다.675) 李相殷,<退溪의 哲學-四七論辯과 對說·因說이 意義->(≪韓國哲學硏究≫中, 韓國哲學會, 1978).

이 논쟁에서 이황은, 4단은 이가 발하여 기가 그것에 따르는 것이고, 7정은 기가 발하여 이가 그것에 타는 것이다(四端理發而氣隨之 七情氣發而理乘之)라고 하여「理氣互發說」을 주장하였다. 이는 4단과 7정을 각각 이와 기에 分屬시키고 4단은 純善無惡한 것으로, 7정은 有善有惡한 것으로 본 것이다. 나아가 그는 理가 발한다고 하여 이의 능동성·자발성을 강조하였다.

이에 반해 기대승은, 4단은 7정에 포함되는 것이므로 양자를 구분해서 보는 것은 잘못이며 마찬가지로 이와 기도 서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4단과 7정을 이와 기에 분속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天理의 발현이 제대로 되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기의 작용에 달려 있다고 하여 이의 자발성을 부정하였다.676) 李 滉,≪退溪集≫권 16, 答奇明彦 論四端七情第一書·答奇明彦 論四端七情第二書.
奇大升,≪高峯全集≫兩先生四七理氣往復書, 高峯上退溪四端七情說·高峯答退溪四端七情書.

이 논쟁은 뚜렷한 결말을 보지 못하고 끝났다. 이는 양자가 서로 강조하는 바가 달랐으며 동시에 주자의 심성론 자체가 완전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기대승이 주자의 이론 자체에 충실하려고 했다면, 이황은 주자의 이론에 조선의 현실을 반영시켜 나름대로의 체계를 세우려고 하였다.

그러면 그 현실이란 어떠한 것이었을까. 그것은 훈척의 전횡과 탄압, 그리고 북송 邵雍·張載와 명 羅欽順 등의 학문과 양명학·불교 등 주자성리학과 성격을 달리하는 사상의 광범위한 유행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황은 출사보다는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을 택하였으며 제도의 개혁보다는 도덕적 수신과 실천을 중시하고 주자성리학 이외의 사상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

따라서 그의 학문은 주자성리학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데 주력하면서도 인간의 도덕적 행위의 근거를 객관적으로 증명해내는 심성론과 수양론에 더 중점이 두어졌다.≪心經≫을 중시하여≪心經後論≫을 저술하고 敬을 강조하여 이를 바탕으로 제왕학의 모델을 제시한≪聖學十圖≫를 선조에게 올리고,≪傳習錄論辯≫을 저술하여 양명학을 강하게 비판하였으며 나흠순의 영향을 받은 노수신과 人心道心論爭을 벌였던 것도 이러한 사상적 특성에서 기인하였던 것이다.677) 安炳周,<退溪의 學問觀-心經後論을 中心으로->(≪退溪學硏究≫1, 檀國大, 1987).
吳性鐘, 앞의 글.

이황의 사상은 주자성리학에 대한 이해의 심화와 더불어 훈척과의 투쟁과정에서 구체제에 대한 재야사림의 비판의식을 바탕으로 형성되었다.678) 李泰鎭,≪朝鮮後期의 政治와 軍營制 變遷≫(韓國硏究院, 1985), 54∼56쪽. 그러므로 그의 사상의 기본적인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理貴氣賤’, 理의 자발성, 이원적 사고에 의한 도덕성과 수신의 강조는 훈척을 공격하는 데 중요한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심성을 강조하고 근본적·이상주의적 성격을 지니는 그의 사상이 구체제를 일소하고 사림이 정권을 잡고 국가를 운영해나가는 데 적절한 것이었느냐에 대해서는 문제가 없지 않다. 이미 사림이 정치의 전면에 나설 당시에는 지주의 토지 침탈, 防納·代立制의 폐단 등 15세기말부터 노정되어온 많은 사회경제적 문제가 대두했는데, 이황의 사상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던 것이다.679) 고영진,<이황>(≪역사비평≫22, 역사비평사, 1993), 222쪽.

이러한 과제를 대신 수행한 것이 李珥의 사상이었다. 이황이 기대승과의 이기심성논쟁을 통해서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시켜 갔듯이 이이도 成渾과의 이기심성논쟁을 통해서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시켜 갔다.

선조 5년(1572)부터 6년간 계속된 이 논쟁에서 성혼이 이황의 이기호발설에 동조하여 理發을 인정하고 道心과 人心을 구분하여 각각 4단과 7정에 분속시키려고 한 데 반하여, 이이는 4단과 7정이 구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7정 가운데 선한 부분이 4단이며 이 4단·7정 모두 기가 발하고 이가 그것을 타는 것이라는 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하였다.680) 成渾,≪牛溪集≫권 4, 與栗谷論理氣第一書 壬申.
李珥,≪栗谷全書≫권 10, 答成浩原 壬申·答成浩原.
그리고 도심과 인심을 구별하는 것은 이황과 같았으나 4단은 도심과 인심 가운데 선한 부분으로, 7정은 도심·인심의 선악을 합한 부분으로 보았다.681) 李珥,≪栗谷全書≫권 9, 答成浩原 壬申.

주자의 학설에 입각해 있으면서도 현실적 필요성에 의해 이기의 분리나 理의 운동성을 강조했던 이황과는 달리 이이는 주자성리학 자체에 충실하려고 함으로써 당시의 문제를 풀어나가려고 하였다. 그는 모든 사물 현상을 기로, 그리고 그 기에 내재한 기본 원리와 원인을 이로 보고 이 理와 기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임을(一而二 二而一) 강조하고 기의 운동성만을 인정하였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理氣之妙’와 ‘理通氣局論’으로 이론화되었다. 또한 敬은 用功의 요령이며 誠은 收功의 경지이니 경으로 말미암아 성에 이른다고 하며 성을 상대적으로 중시하여 경을 제일 중시했던 이황과 차이를 보였다.682) 黃義東,≪栗谷哲學硏究≫(經文社, 1987), 82∼113쪽.
金吉煥,≪朝鮮朝儒學思想硏究≫(一志社, 1980), 116쪽.

理는 두루 통하지만 氣는 국한된다는 ‘이통기국론’과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이와 능동적 자율적인 기의 조화를 강조하는 ‘이기지묘’는 만물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모두 강조함으로써 그의 개혁정책의 논리적 바탕이 되기도 하였다. 理에 해당되는 영원한 가치는 변할 수 없지만 그것을 구현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시대적인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으며 따라서 舊習과 時弊를 更張하는 데 있어 이상성과 현실성을 잘 조화시켜 합리적으로 추진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683) 金敎斌,<栗谷哲學에서의 必然性과 可變性에 대한 硏究>(≪儒敎思想硏究≫2, 1987).

이러한 인식 위에서 그는 16세기 조선사회를 中衰期로 파악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다양한 개혁 방안을 제시하였다. 즉 통치기구의 재편과 위정자의 자질 향상을 목표로 宮府一體論·冗官革罷論 등 통치체제 정비론을 주장하였으며 경제적 능력에 맞는 부세와 중간수탈의 배제를 목표로 收布收米法의 시행과 放軍收布의 폐지 등 부세제도 개혁론을 주장하였다.684) 李先敏,<李珥의 更張論>(≪韓國史論≫18, 서울大, 1988).≪聖學輯要≫는 바로 이이의 경세론이 집약된 것인 동시에 16세기 초반부터 전개되어온 제왕학의 완결이라고 할 수 있다.685) 文喆永,<朝鮮前期 儒學思想의 歷史的 特性>(≪韓國思想史大系≫4,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1), 121∼125쪽.

이이의 사상은 정권을 담당하고 현실을 주도하면서 개혁해나가는 사림의 입장에서 형성되었다. 따라서 그의 사상은 이황보다 기의 역할을 상대적으로 중시하였으며 구체적으로 여러 개혁책들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같은 제왕학이면서도≪성학십도≫에서는 군주 스스로가 성학을 따를 것을 제시한 반면≪성학집요≫에서는 현명한 신하가 성학을 군주에게 가르쳐 그 기질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하여 신하의 역할을 상대적으로 강조한 것도 바로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었다.686) 金駿錫,≪朝鮮後期 國家再造論의 擡頭와 그 展開≫(延世大 博士學位論文, 1991), 244∼246쪽.

이처럼 여러 차례에 걸친 이기심성논쟁을 통하여 조선학자들의 주자성리학에 대한 이해는 거의 완벽한 수준에 도달하게 되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주자성리학에서 완전하게 해결하지 못하였던 이기론과 심성론의 결합에 대한 연구가 다양하게 진행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었다. 이제 주자 중심의 성리학적 세계관은 조선사회에 완전히 뿌리내리고 성리학은 지배사상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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