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4. 성리학의 연구와 보급
  • 4) 학파의 분화

4) 학파의 분화

기묘·을사사화를 통한 훈척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성리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수는 비약적으로 증가하고 지역적으로도 크게 확산되었다. 아울러 성리학에 대한 연구 수준이 높아지면서 성리학에 대한 이해의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하고 각각 주장하고 강조하는 바도 다르게 나타났다. 이러한 학설의 차이, 지역적 차이 등을 바탕으로 16세기 중반부터 서원을 중심으로 하여 학파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먼저 서경덕학파와 이황학파·조식학파가 형성되고 그 뒤에 이이학파와 성혼학파가 형성되었다.

서경덕학파는 개성을 중심으로 한 경기지방과 호남지방 일부에 형성된 학파였다. 서경덕은 송도 출신으로 여러 번 효행으로 관직에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일생을 처사로 보내면서 제자 양성에 힘썼다. 그의 제자로는 張可順·李球·李仲虎·朴枝華·李之菡·許曄·閔純·朴淳·徐起·南彦經·洪仁祐·鄭介淸·洪聖民·朴民獻·金謹恭 등이 있다.

이들 가운데 박순과 이구는 스승의 氣一元論과 先天後天說을 충실히 계승하여<태극도설>을 비롯한 우주론을 둘러싸고 이이·이황과 논쟁을 벌였으며, 민순과 남언경은 스승의 主靜說을 계승하여 주정에서 얻어지는 마음의 평정을 無意無欲의 경지로 파악하여 靜寂主義에 빠지기도 하였다.687) 丁垣在, 앞의 글, 43∼62쪽·73∼78쪽.

또한 남언경은 최초로 양명학을 수용한 인물이었으며 그의 처남인 홍인우와 이중호·김근공 등도 학문에 양명학적 경향을 보이는 등 서경덕 문인 가운데 여러 인물들이 양명학을 수용하였다.688) 尹南漢,≪朝鮮時代의 陽明學 硏究≫(集文堂, 1982), 115∼171쪽. 이는 주자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스러웠던 서경덕사상의 특징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였다.

주자성리학에만 머무르지 않는 이러한 학문적 특징은 유교를 중심으로 불교와 도교를 절충하려는 三敎會通的인 경향을 보이는 박지화와 이지함의 사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지함은 魚鹽의 생산과 銀·玉의 채굴 등 상공업의 활성화를 통해 국가재정과 민의 생활을 향상시킬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689) 韓永愚,<17세기후반∼18세기초 洪萬宗의 會通思想과 歷史意識>(≪韓國文化≫12, 1991), 383∼391쪽.
韓明基,<柳夢寅의 經世論 硏究>(≪韓國學報≫67, 1992), 150∼151쪽.

서경덕학파의 또 다른 학문적 특징으로 博學·雜學的인 경향을 들 수 있는데 백과사전적인 저술인≪人事尋緖目≫을 쓴 장가순과 예학뿐만 아니라 역학·천문·지리·의약·복서 등에 조예가 깊었던 정개청 등에게서 이러한 모습이 보인다. 이기합일론과 3교회통사상, 박학·잡학적인 성격과 상공업 중시 경향 등은 이후 서경덕학파를 다른 학파와 구별짓는 사상적 특징이 되었다.690) 고영진,≪조선중기 예학사상사≫(한길사, 1995), 90∼104쪽·120∼129쪽.

서경덕의 문인들은 일부 예외가 있지만 대체로 현실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자신들의 경륜을 펼쳤다. 박순은 정승으로서 같은 호남사림인 柳希春·기대승 등과 함께 신진사류들이 舊臣들을 물리치고 주도권을 잡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며,691) 高英津,<16세기 湖南士林의 활동과 학문>(≪南冥學硏究≫3, 慶尙大, 1993), 28∼31쪽. 허엽은 선조대 초반 동서분당이 되면서 조식의 문인인 김효원과 함께 동인의 영수로 활약하였다. 이들과 더불어 박민헌·홍성민·이지함·남언경 등도 중앙의 주요 관직과 지방관을 역임하며 활동하였다. 특히 민순은 선조 8년(1575) 仁順王后 喪 때≪國朝五禮儀≫에 의해 행하는 것을 반대하고 古禮에 따라 집무시에 白衣冠帶를 착용할 것을 주장하여 왕실전례에서 처음으로 고례를 행하도록 하는 데 기여하기도 하였다.692)≪宣祖實錄≫권 9, 선조 8년 5월.

한편 이중호는 학문연구와 제자양성에 힘써 朴應南·尹毅中·羅士忱·尹斗壽 등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으며, 그의 아들인 李潑·李洁 형제는 선조대 중반 東人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693) 尹南漢, 앞의 책, 152∼153쪽. 정개청 역시 나주지역을 중심으로 학문연구와 제자양성에 힘써 호남지역에서의 서경덕학파는 나주·화순 지방 등을 중심으로 강한 재지적 기반을 가지면서 활동하였다.694) 金東洙,<16∼17세기 湖南士林의 存在形態에 대한 一考察-특히 鄭介淸의 門人集團과 紫山書院 置廢事件을 중심으로->(≪歷史學硏究≫7, 全南大, 1977).

이처럼 서경덕학파는 선조대 초반 적지 않은 세력을 이루고 정국에 영향을 미쳤는데 이는 선조 9년 서경덕이 우의정으로 추증되는 데서도 짐작할 수 있다. 주로 동인으로 활약하던 이들은 己丑獄事와 建儲議事件을 계기로 동인이 南人과 北人으로 갈라지자 북인에 참여하였다. 이지함의 조카였던 李山海와 아들인 李慶全이 북인의 핵심 인물이 되고 민순의 제자였던 韓百謙·洪可臣·洪履祥 등이 사상계의 일단을 형성하였으며 서경덕의 문묘종사를 요구하는 등 서경덕학파는 광해군대까지도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695)≪光海君日記≫권 34, 광해군 2년 10월 을해.
고영진, 앞의 책, 255∼256쪽.

이황학파는 영남지역, 그 가운데서도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상좌도지역에서 형성된 학파였다. 이 지역은 일찍부터 중소지주들의 재지적 기반이 강하였으며 이를 기반으로 성리학을 일찍 수용하여 길재와 김숙자를 비롯하여 김종직·이언적 등 많은 성리학자들을 배출한 곳이었다. 이들 성리학자들도 각자의 문인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학문적 授受관계는 약하였으며 학문적인 師承의 성격을 띠며 본격적으로 학파를 형성한 것은 이황에 와서였다.696) 李樹健,≪嶺南士林派의 形成≫(嶺南大 出版部, 1979), 231∼276쪽.

이황은 50세 이후에는 잠시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 근처 溪上書堂·陶山書堂 등에 은거하면서 저술 활동과 제자 교육에 힘썼다. 368명이나 되는 문인 수에서도 알 수 있듯이 특히 서당을 통한 후진 양성에 주력하여 趙穆·金誠一·柳成龍·李德弘·鄭逑·禹性傳·柳雲龍·權好文·具鳳齡·黃俊良·鄭惟一 등 정계와 학계에서 크게 활약한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선조대 초년 당시 사상계에서 이황의 학문은 상당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이황이 노년과 병중에도 불구하고 왕과 조정의 요청에 의하여 올라와 기대승과 함께 경연을 주도하였던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따라서 그의 문인들은 대체로 스승의 학설을 충실히 계승하고 옹호하였으며 학문적 권위와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황이 죽은 뒤 얼마 되지 않아 바로 문인들이 그의 저술을≪國朝儒先錄≫에 편입시키려 하고 당시 활발히 추진되고 있었던 文廟從祀運動의 대상에 스승을 추가하려 한 것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697)≪宣祖實錄≫권 6, 선조 5년 9월 갑진 및 권 7, 선조 6년 8월 을해.

≪국조유선록≫은 선조가 부제학 유희춘에게 명령하여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 등 조선에서의 성리학 발전에 기여한 네 사람의 저술을 모아 중국의≪이락연원록≫의 체제를 모방하여 편찬케 한 책으로, 여기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 사람의 학문이 국가적으로 공인받는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때문에 이황 문인뿐만 아니라 서경덕 문인들도 자기 스승의 저술을≪국조유선록≫에 편입시키려고 하였다.698)≪宣祖實錄≫권 6, 선조 5년 9월 정해.

문묘종사 역시 성리학의 道統意識이 확립되면서 학문적 정통성을 확립하려는 시도였다. 처음에는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 등 四賢에 대해서 요구했었는데 이제 이황까지 포함하여 5현에 대한 종사를 요구한 것이다. 이는 이전의 학문 계통 가운데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지는 계열을 조선 성리학의 정통으로 보고 이황을 조광조의 학문을 이은 계승자로 위치지음으로써 그의 학문적 우월성과 정통성을 국가적으로 인정받으려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699) 金鎔坤,<16世紀 士林의 文廟從祀運動-學問動向과 士林의 至治運動과 관련하여->(≪金哲埈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知識産業社, 1983), 405∼411쪽. 이들의 노력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결국 광해군 2년(1610) 5현에 대한 문묘종사가 이루어졌다.

이황이 죽고 난 뒤에도 그 문인들은 유성룡·김성일·구봉령·우성전 등을 중심으로 중앙 정계에서 광범위한 세력을 형성하고 서경덕·조식학파와 함께 동인으로서 활약하였으며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화되면서는 남인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특히 유성룡은 선조대 중반부터 동인의 중심 인물로 활동하며 경연을 주도하였고 임진왜란 때는 영의정으로 전쟁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이후 이황학파는 김성일·유성룡·정구·張顯光을 중심으로 네 분파를 이루며 전개되었으며 이이학파와 함께 조선 사상계의 주류로 자리잡으면서 중·후기 역사의 전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700) 고영진,<17세기 전반 남인학자의 사상-정경세·김응조를 중심으로->(≪역사와 현실≫8, 1992), 88∼96쪽.

조식학파는 영남지역, 특히 진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우도지역에서 형성된 학파였다. 이 지역 역시 경상좌도지역과 마찬가지로 고려말부터 강한 재지적 기반을 바탕으로 성리학을 수용하여 김굉필·정여창·김일손 등 많은 성리학자들을 배출하였는데, 좌도의 이황처럼 16세기 중반 조식에 와서 본격적인 학파를 이루었다.

조식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성리학에 기초하였으나 그는 노장사상이나 불교 등 비성리학적 사상도 포용하였으며 시문·병법·의학·지리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었다. 우주론과 심성론에서는 理를 중시하는 이황의 견해와 비슷한 면을 보이고 있지만 이기심성론에 대한 이론적 탐구에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며 敬과 義를 학문의 중심으로 삼고 ‘下學而上達’을 주장하는 등 학문의 실천성을 강조하였다.701) 金允濟,<南冥 曺植의 學問과 出士觀-退溪 李滉과의 비교를 중심으로->(≪韓國史論≫24, 서울大, 1991).

따라서 그는 민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 위에서 당시 사회모순과 훈척의 비리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자세를 보였다. 명종대 훈척의 전횡을 지적하면서 文定王后까지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貢物의 代納과 防納, 그리고 그와 연관된 서리의 폐해를 지적하는 胥吏亡國論을 주장하였다. 또한 文武兼備를 통한 국방력의 강화와 일본에 대한 강경론을 주장하였다.702) 申炳周,<南冥 曹植의 學問傾向과 現實認識>(≪韓國學報≫58, 1990), 91∼114쪽.

그는 당시 학자들이 관직에 나아가 제대로 개혁에 힘쓰지 않고 이기심성논쟁 등 성리학의 이론적 측면에만 관심을 쏟는 데 대해, 손으로 마당 쓸고 청소하는 방법도(灑掃之節) 모르면서 입으로만 天理를 떠들어 명망을 도둑질해서 세상을 속인다고(盜名欺世) 비판하였다.703) 曹植,≪南冥集≫권 2, 與退溪書. 그러면서 자신은, 포부를 펼칠 수 없는 상황이면 관직에 나아가지 말아야 한다는 엄격한 出仕觀을 견지하며 일생 동안 출사하지 않았으며 문인들에게도 출사에 신중하고 만약 관직에 나가면 소임을 다할 것을 당부하였다.704) 권인호,≪조선중기 사림파의 사회정치사상≫(한길사, 1995), 73∼119쪽.

문인 가운데 吳健·鄭逑·金宇顒·金宇宏·鄭仁弘·崔永慶·金孝元·李瑤·河沆·趙宗道·姜濂·金沔·郭再祐·柳宗智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며 대체로 스승과는 달리 현실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특히 김효원·오건·김우옹·정인홍 등이 동인의 핵심인물로 활약하였으며 김우옹은 유성룡과 함께 선조대 중반 경연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기축옥사 때 최영경이 죽는 등 피해를 많이 입은 조식학파는 이황학파가 같은 정파인 자신들을 구제하는 데 소극적이고 또한 건저의사건에서 정철의 처벌에 미온적인 입장을 보이는 것을 계기로 결국 결별하고 서경덕학파와 함께 북인을 형성하였다.705) 李樹健,<南冥 曹植과 南冥學派>(≪民族文化論叢≫23, 嶺南大, 1982), 215∼226쪽.

이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식학파는 정인홍·곽재우·김면·조종도·郭逡·全致遠·李大期 등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켜 경상우도지역을 지켜냄으로써 일본군의 호남 진출을 막아 이순신의 해전에서의 활약과 함께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를 계기로 북인은 전쟁 이후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였으며 이는 광해군대에 가면 더욱 강화되었다. 특히 경상우도 의병대장이었던 정인홍은 강한 재지적 기반을 확립하여 山林으로서 정국을 주도하였다.706) 李樹健,<南冥學派 義兵活動의 歷史的 意義>(≪南冥學硏究≫2, 1992).
高錫珪,<鄭仁弘의 義兵活動과 山林基盤>(≪韓國學報≫51, 1988).

광해군대 정권을 잡은 조식학파는 학통의 강화를 통해 정치적 기반을 확대해 나가려고 하였다. 광해군초 5현이 문묘에 종사되자 정인홍이 이언적과 이황의 학문을 비판하고 조식의 학문을 추켜세우는 ‘晦退辨斥’을 일으킴으로써 서·남인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켜 靑衿錄에서 삭제되기까지 하지만, 조식학파는 계속 조식의 영의정 追贈과 配享書院의 건립, 문묘종사의 시도 등을 통하여 스승의 학문적 권위와 정당성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으려고 하였다.707) 韓明基,<光海君代의 大北勢力과 政局의 動向>(≪韓國史論≫20, 서울大, 1988), 298∼313쪽.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인조반정으로 북인이 중앙 정계에서 축출당함으로써 이루어지지 못하고 이후 이황과 이이의 사상이 학계의 주류로 자리잡게 되면서 학파로서 거의 기능하지 못하였다.

坡州를 위시한 경기지방을 중심으로 형성된 이이학파는 이이 자신이 연배가 낮았기 때문에 위의 세 학파보다 늦게 형성되었으며 문인들의 활동 시기도 다른 학파보다 늦었다. 이이학파는 이이가 처음에는 동서분당 속에서 어느 당파에도 들어가지 않고 중립적인 위치에서 양자의 조정을 위해 노력하다가 서인으로 自定함으로써 이후 성혼학파와 함께 서인의 중심세력으로 활동하였다.

따라서 초기의 서인의 경우 학문적 유대성이 희박하였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으나708) 李泰鎭, 앞의 책, 51∼62쪽.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이이가 서인에 참여하기 이전에, 나아가 동서분당 이전부터 이미 정계에서 활동하는 인물 가운데 서경덕·이황·조식학파의 사상과는 다르고 이이와 비슷한 경향을 보이는 인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명종말부터 등장하여 선조초에 큰 활약을 보이는 호남지역의 宋純계열의 학자들은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 있는 호남지역의 서경덕계열과 대비되는 이들 송순계열의 인물로는 송순·吳謙·李恒·奇大升·柳希春·李後白·鄭澈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대체로 ‘理氣不相離’의 측면을 강조하고 氣發理乘說을 주장하여 이이 사상의 선구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709) 高英津,<16세기 湖南士林의 활동과 학문>(≪南冥學硏究≫3, 1993), 30∼37쪽.

즉 기대승은 이황과의 이기심성논쟁에서 이기의 분리와 理의 자발성을 부정하고 4단이 7정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항 역시 이기가 범주적으로는 구분되지만 실제로는 분리될 수 없다고 하고 4단과 7정을 이기에 분속시키는 데에 반대하였다.710) 吳恒寧,<一齋 李恒의 生涯와 學問-朝鮮性理學 成立期의 한 지식인의 삶과 생각->(위의 책), 90∼94쪽. 나아가 송순은 이황의 이기호발설에 반대하면서 4단7정 모두 ‘기발이승’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도심과 인심을 4단과 7정으로 각각 분속시킨 것에 대해서도 잘못이라고 지적하였다.711) 宋純,≪俛仰集≫續集 권 2, 與李景浩書. 이는 이이의 견해와 거의 다름이 없는 것이다. 또한 호남사림은 아니지만 宋翼弼과 金繼輝 등 이이와 정치적 입장을 같이했던 인물들 가운데 적지 않은 경우가 이이와 비슷한 학문적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712) 裵相賢,<龜峰 宋翼弼과 그 思想에 대한 硏究>(≪東國大學校 慶州大學 論文集≫1, 1982).

결국 동서분당이 되기 이전부터 서경덕·이황·조식학파와는 다른 사상을 가진, 이이와 비슷한 사상을 가진 일군의 집단이 존재하였으며 이들이 뒤에 서인이 되고 거기에 이이와 그 문인들이 참여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을 광의의 이이학파에 넣어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이학파는 선조대 초반에는 이이와 그 交友들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후반에 가면 그의 문인들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문인으로는 金長生·趙憲·鄭曄·李貴·黃愼·李廷立·邊以中·尹昉·韓嶠·朴汝龍·金振綱 등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조헌·이귀·황신·한교 등은 성혼의 문인이기도 하였다.

이이학파는 선조 초년 다른 학파와 마찬가지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며 세력을 확대해 나갔으나 이이가 죽고 기축옥사와 건저의사건 등을 계기로 북인의 집중적인 비판을 받으면서 광해군대까지 중앙 정계에서 큰 활약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황학파와 함께 북인이 시도하였던 ‘회퇴변척’과 조식의 문묘종사를 무산시키고 스승의 宣廟配享을 요구할 정도로 상당한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713)≪光海君日記≫권 34, 광해군 2년 10월 갑신·갑술.

나아가 김장생의 문인들과 이귀 등이 중심이 되어 인조반정을 일으킴으로써 이후 중앙정계를 주도해 나갔으며 숙종대에 가서는 이이·성혼의 문묘종사를 성사시켰다.714) 薛錫圭,<朝鮮時代 儒生의 文廟從祀 運動과 그 性格>(≪朝鮮史硏究≫3, 伏賢朝鮮史硏究會, 1994), 157∼175쪽. 이는 이이의 학문이 국가적으로 공인받았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이황의 학문과 대등한 위치에 올라서서 조선 사상계의 주류로 자리잡게 되었음을 의미하였다.

이이학파와 마찬가지로 성혼학파도 파주를 중심으로 한 경기지역에서 형성되었다. 성혼은 조광조의 문인이며 遺逸로서 당시 신망이 높았던 成守琛의 아들로 정치적으로는 이이와 같은 입장이었으나 학문적으로 이황의 견해에 동조하여 이이와 이기심성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상이 이황과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이가 氣發만 인정한 것에 반대하고 이황이 理發을 주장한 것에 대해 동조는 하였지만, 이기가 본래부터 분리되어 있어 각각 발하는 것으로 본 이황과는 달리 이기는 본래 混淪되어 있으며 발할 때도 같이 발하는 理氣一發說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氣隨之’와 ‘理乘之’는 인정할 수 없지만 ‘纔發之際’에 그 중시하는 바에 따라 主理와 主氣로 나누어볼 수 있기 때문에 ‘이기호발’이라고 말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혼의 사상은 기대승과 이이·이황의 사상을 절충하였다고 할 수 있다.715) 成校珍,≪成牛溪의 性理思想≫(以文出版社, 1993), 109∼124쪽.

성혼의 문인으로는 吳允謙·姜沆·崔起南·安邦俊 등과 이이의 문인이기도 한 조헌·한교·이귀·황신 등이 있었다. 성혼학파는 스승이 이이와 절친한 관계로 이이학파와 함께 정치적 입장을 같이 하여 서인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문인의 상당수가 이이의 문인과 겹치고 그 세력이 크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학파보다는 학파로서의 독자성이 약하였다. 더욱이 성혼이 기축옥사와 임진왜란 때의 일로 북인의 비판을 받으면서 정계를 은퇴하고 향촌으로 물러나 중앙 정계에서는 거의 독자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고 이이학파에 참여하여 활동하는 정도였다.716) 具德會,<宣祖代 후반(1594∼1608) 政治體制의 재편과 政局의 動向>(≪韓國史論≫20, 서울大, 1988), 256∼260쪽.

그러나 이이학파에 완전히 흡수된 것은 아니었으며 나름대로의 학문적 특성을 유지하다가 17세기 후반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질 때 소론의 학문적 기반이 되었다. 즉 尹拯과 崔錫鼎을 비롯하여 당시 소론으로 활약했던 여러 인물들이 성혼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고 비슷한 학문적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717) 劉明鍾,<折衷派의 鼻祖 牛溪의 理氣哲學과 그 展開>(≪成牛溪思想硏究論叢≫, 牛溪文化財團, 1988), 349∼366쪽.
신병주,<17세기 후반 소론학자의 사상-윤증·최석정을 중심으로->(≪역사와 현실≫13, 1994).

성리학이 조선사회에 뿌리내리게 되고 저변이 확대되면서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다양한 학파들이 형성되었으며, 사림이 중앙정계의 주도세력으로 등장함에 따라 각 정파는 이러한 학파들을 기반으로 하여 성립되는 측면이 강하였다. 따라서 학파와 정파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전개되었으며 이것이 조선 중기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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