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5. 경제개혁의 추진
  • 3) 한전론과 균전론

3) 한전론과 균전론

조선 초기의 기본 토지제도가 된 科田法체제는 고려말 무한정 팽창을 보이고 있던 私田을 개혁한 결과로 제정된 것인 만큼 거기에는 일정하게 土地國有의 정신이 관철되고 있었다. 가령 세종대에 가서도 “無故하게 2년 동안 全陳한 田地는 許給他人한다”고 하여, 일정한 균전론적 정책이 한동안 추진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말한다.755)≪世宗實錄≫권 78, 세종 19년 7월 정유. 이 규정의 ‘許給他人’이란 문자는 그 소유권을 남에게 移給한다는 뜻이다. 그 해석에 관해서는 金泰永,<朝鮮前期의 均田·限田論>(≪國史館論叢≫5, 1989) 참조. 이하 均田·限田論 관련 서술은 주로 이 글을 참조하였다.

그런데 그같은 정책은 이윽고 세종 26년(1444) 貢法田稅制가 확정되면서 폐기되기에 이르렀다. 이 전세제도는, 正田에 대해서는 진황을 일체 인정하지 않고 모두 收稅하며, 續田은 진황하는 경우에만 조사하여 계문한 후 면세한다고 규정함으로써, 당해 전지의 소유권은 계속 원소유자에게 보유되도록 고쳐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관계 규정은≪經國大典≫에 “3년 이상 된 陳田은 許人告耕한다. 海澤인 즉 10년을 한도로 한다”756)≪經國大典≫권 2, 戶典 田宅.고 명문화하였다. 명종 11년(1556)에는 이 규정을 다시 명백히 하여, “3년 이상 된 陳田을 許人告耕한다는 것은 영구히 移給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 本主가 還推할 때까지 우선 耕食함을 허락한다는 뜻이다”757)≪受敎輯錄≫戶典 諸田.고 해석하기에 이르렀다.

조선왕조의 토지정책은 그 개창 반세기 만에 크게 변하여 이제 전지를 경작하지 않고 버려 두더라도 그 소유권은 本主가 항구적으로 보유할 수 있도록 규정해 두기에 이르렀다. 連作農業의 보편화라고 하는 토지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토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한층 더 객관화하고 그 소유관계의 측면 또한 확고히 강화되어 갔다. 그것은 동시에 당시의 지배층인 관인 지주층의 요구를 객관적으로 보장하는 정책의 구현이기도 하였다.

토지 소유권을 항구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음에 따라 이제 지주지의 집적은 한층 박차를 더하게 되었다. 게다가 세조대에는 현직 관료에게만 收租地를 절급하는 職田制가 실시되자, 그 이면으로 관인층의 토지 소유욕은 더욱 확대되기 마련이었다. 더구나 세조의 집권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책봉된 많은 功臣들은 戚臣으로도 얽히면서 이후 ‘勳戚’이라고 불리우는 집권세력을 형성하여 거의 100년 동안 국정을 천단하였는데, 이들은 대개 다수의 노비와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가령 “세조대 이후로 士風이 탕연히 기강이 없어져 大臣으로서도 탐학무절한 자가 많아졌다”758)≪成宗實錄≫권 40, 성종 5년 3월 정미.고 한 기록은 그같은 사실의 일단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제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에 걸친 토지 소유관계의 추이를 간단히 짚어보기로 한다.

豪强者가 묵은 私債를 濫徵하매 小民은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所耕田을 巨室에 다 바치고 立錐의 땅도 없게 된다. 거실이 쌓아 둔 곡식은 官府의 갑절이나 되는데, 義倉穀은 태반을 還收치 못하니 조금만 흉년을 만나도 나누어 줄 수 없는 형세가 된다. 무지한 소민은 다시 사채를 쓰니, 해마다 利息을 빼앗기고 마침내 失所하여 강자는 도적이 되고 약자는 離散한다(≪成宗實錄≫권 22, 성종 3년 9월 임인).

백성은 전지를 가진 자가 없고 그것을 가진 자는 오직 富商大賈·士族家뿐이다. 백성의 곤궁이 어찌 이같은 때가 있었을 터인가.…외방 양민은 女息은 남의 奴妻로 들여보내고 子息은 남의 婢夫로 의탁케 하니, 이 때문에 人丁이 날로 없어진다(≪中宗實錄≫권 75, 중종 28년 7월 을묘).

실로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로 내려오면서 한편으로는 지주지의 집적이 대대적으로 일어나고 다른 한편에서는 토지를 잃게 된 소농민층의 파산과 유리도산이 대대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소농민층의 몰락은 곧 지배체제의 지반이 붕괴되어 감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 붕괴를 막기 위해서는 우선 호세가의 대토지소유를 제한하자는 均田·限田論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759) 均田論과 限田論은, 가령 그 개념이 구체적으로 논의된 조선 후기 實學의 경우와 대조해 보면, 엄밀한 의미에서는 전혀 相異한 개념이다. 그러나 16세기의 경우 양자는 豪勢家의 대토지소유의 집적 및 그 이면에서의 소농민의 流移도산을 막아보겠다는 동일한 발상에서 논의된 것이므로, 여기서는 일괄 다루기로 한다.

균전·한전론의 기원은 실로 유구한 것이며, 조선왕조에서도 이미 15세기부터 부분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체계화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중종대 사림계의 등장에 따라 이른바 ‘至治’을 실현하기 위한「王政」을 논의하면서부터였다. 중종 10년(1515) 2월의 경연석상에서 井田法에 관한 논의가 일어나더니, 그 12년에는 “至治를 이룩하고자 한다면 限田은 시행하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760)≪中宗實錄≫권 21, 중종 10년 2월 경자 및 권 28, 중종 12년 7월 계묘. 동왕 13년에는, “부익부 빈익빈이 지금처럼 심한 때가 없었다. (옛 井田法은) 형세상 우리 나라에서 시행하기가 어려우나, 한전·균전의 법은 三代 이하의 良法이니 마땅히 대신과 의논해서 시행해야 할 것이다”고 하고, 나아가서는 “또한 노비도 많이 가진 자는 혹 5, 6천 口씩이나 되니, 이것도 마땅히 口數를 제한해야 할 것이다. 구수를 한정하면 良民이 날로 많아질 것이다”고 하는, 본격적 논의가 일어나게 되었다.761)≪中宗實錄≫권 32, 중종 13년 2월 경인.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2개월 뒤에는 가장 깊이 있는 균전·한전론의 자리가 마련되기에 이르렀다. 즉 이 해에는 士林의 遺逸로서 朴遂良 등 여러 사람을 발탁하였는데, 이들이 경연에 나아가 왕정을 역설하면서 朝講에서 夕講에 이르기까지 군신간에 종일토록 논의하게 되었던 것이다.

(朴)遂良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민의 빈·부가 懸絶하여 부자의 전지는 阡陌을 잇닿고 빈자는 立錐의 땅도 없습니다. 井田法은 지금 비록 시행할 수 없으나, 만약 균전법을 시행하면 民이 실제 혜택을 입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좌의정 申)用漑가 말하기를, ‘均田은 과연 善政이요, 전에도 이 논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만약 부자의 전지를 감해서 빈자에게 준다면, 부자의 자손이 가난해질 경우에는 도로 빼앗을 수 없을 것이니, 이 역시 큰 폐단입니다’라고 하였다. 수량이 말하기를, ‘仁政은 반드시 經界하는 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한 고을 안에 1인이 수백 結의 전지를 가졌다면 5, 6년이 지나면 한 고을의 전지가 반드시 5, 6인의 집으로 모여들 것이니, 어찌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지금 만약 균전을 시행한다면 이는 진실로 선왕의 遺意입니다’라고 하였다. 용개가 말하기를, ‘수량의 말은 지금 비록 행할 수는 없지만, 역시 지당한 논의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균전은 과연 좋은 일이지만, 형세상 행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記事官 柳成春이 말하기를, ‘박수량이 아뢴 바 균전의 일은 현실의 병폐를 깊이 맞힌 것입니다. 그가 초야에 있으면서 반복 商量한 것임에 틀림 없습니다. 臣 또한 외방에서 본 바, 順天 등지에서는 豪富民 1家의 축적이 혹 1만 석이나 5, 6천 석에 이르고, 落種하는 전지도 2백 석지기에 이릅니다. 천지의 소생인 財貨 百物이 반드시 그 돌아갈 곳이 있는 터인데, 어찌 1인에게 모아져서야 될 것입니까. 한 고을 안에 2, 3인이 경작하면 그 나머지는 경작할 땅이 없는 것입니다. 조정의 臣僚로서 서울에서 생장한 자는 어찌 이같은 폐단을 알 것입니까. 지금 만약 균전을 한다면 자기의 소유를 베어내어 남에게 주는 것이므로 怨毒이 없지는 않겠지만, 민은 그 실제 혜택을 입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균전의 일은 형세상 지금 행할 수가 없다. 제 것을 베어내어 남에게 주는 일이 원망을 살 뿐만 아니라, 빈민은 경작하지 못하고 오히려 호부가에 還賣할 것이니, 또한 무익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참찬관 權橃이 말하기를, ‘古今의 법이란 오래 되면 반드시 폐단이 생기지만, 어찌 시행해보지도 않고 먼저 그 末流의 폐단을 따질 것입니까. 박수량은 江陵 사람이니, 강원도는 土瘠民貧한데도 그가 눈으로 본 것이 이와 같은데, 하물며 전라·경상도의 경우이겠습니까. 그 호부가는 집에 담장을 쌓고 도망다니는 자들을 모두 여기에 끌어 모읍니다. 이같은 일을 금한다면 兼幷을 좀 억제하고 良民은 그 혜택을 고루 입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대신과 의논할 것이다’라고 하였다(≪中宗實錄≫권 33, 중종 13년 5월 을축).

여기 균전론이 실현되어 빈민이 남의 전지를 차지하게 되더라도 그것을 자기 몫으로 자영하지 못하고 곧 豪富家에 되팔고 말 것이라는 국왕의 인식은 무척 흥미롭다. 토지를 가지게 된다 하더라도 빈민이 곧 자립적 경영주체로 존재해가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균전을 한다면 民이 그 실제 혜택을 입을 것이라는 사림계의 현실인식은 잘못된 것이었는가. 사림계의 주장이 비록 理想論적 측면을 띠고 있기는 하지만, 전혀 비현실적인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즉 국왕이 말하는 빈민이란 이미 유망상태로 들어간 농민을 뜻하며, 사림계가 말하는 빈민은 호부가의 겸병을 그대로 방치한다면 곧 유망상태로 들어가게 되어 있는 無田民 혹은 田少民을 가리키는 것이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미 실제상의 관행에 따라 비록 진황지일지라도 영구히 보유되도록 법제적으로 확정되어 있는 토지의 소유권을 이상론적 정치논의에 따라 문득 균등히 배분한다는 것은 현실상 매우 어려웠다. 물론 국왕은 훈척 등의 계급적 입장을 일차적으로 고려하는 매우 미온적 태도로 일관하고 있었지만, 토지지배관계의 객관적 실제로 말할지라도 실로 혁명적 변화에 해당할 만한 균전론을 실현하기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仁政은 반드시 經界하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사림계의 이데올로기적 공세에 따라 ‘大臣과 의논’한 균전론은 그 다음날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 정책적 결말을 보게 되었다.

(영의정 鄭光弼 등이 논의하여) 말하기를, ‘兼幷之徒의 전지는 阡陌에 잇닿고 빈자는 立錐의 땅도 없다. 民의 곤궁함이 곧 이 까닭에서이니 역시 마땅히 금해야 한다. 금후로는 원래 50결 이상의 전지를 소유하고서도 더 加占하는 자는 소재지 수령으로 하여금 규찰 금제토록 할 것이며, 타인의 이름으로 몰래 등록하는 자도 법에 따라 통금할 것이다. 금후로 逃亡·絶戶人의 전지의 경우… 그 未耕地는 권장해서 起耕케 하고 起耕하는 대로 收稅762) ‘起耕하는 대로 收稅’한다는 뜻은 다음과 같다. 즉 이 시기에는 농민의 流移도산이 심하여 陳荒田이 도처에 있으나 그것을 기경하는 경우 여러 해 쌓여온 陳田稅를 다 물어야 한다는 법례를 시행해오고 있었는데, 이제 빈민의 기경을 권장하기 위하여 이후 기경하는 것에 대해서만 수세키로 한다는 것이다(金泰永, 앞의 글, 135쪽 및 앞의 책, 326∼331쪽 참조).하면 민이 모두 다 기꺼이 경작할 것이요, 無田民도 거의 田業을 가지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中宗實錄≫권 33, 중종 13년 5월 병인).

이 논의는 국왕의 윤허를 받아 확정되었는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크게 보아 두 가지이다. 하나는 사림계의 집요한 균전론이 여기서는 50결을 상한으로 하는 限田論으로 바뀌어졌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토지소유의 무한정한 확대를 방지한다는 결정이었다. 다른 하나는 逃亡·絶戶 등에 따라 생겨나기 마련인 陳荒田은 무전민 등 빈민에게 권장해서 기경케 하되 이후부터는 기경하는 것에 한해서만 수세한다는 ‘隨起隨稅’의 원칙을 세운 것이었다. 均田的인 것이 아니라, 권농적인 시책이었던 것이다. 결국 50결을 상한으로 하는 지주지는 그대로 보호받기 마련이었으며, 한편으로 매우 부지런하고도 선량한 농민의 경우는 수기수세의 원칙에 따라 주인없는 진황지를 얻어 경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균전론적 시책이 폐기됨에 따라 호부가의 지주지는 물론이요, 사림계를 포함하는 일반 지주층의 지주지도 고스란히 보장받는 것으로 국가정책이 귀결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사림계의 균전론 주장은 결국 ‘대신과 의논’한 결과 50결 한전론과 無主田에 대한 권농적 시책으로 결말났다. 이 결정을 주도한 영의정 정광필은 당시의 훈척의 권력구조에서도 훈척의 입장이 아니라, 오히려 사림과 취향이 매우 가까운 인물이었다. 그런데 사림계의 균전론적 주장은 결국 사림 취향의 대신과의 논의과정에서는 그들 모두의 사회경제 지반을 계층적으로 보장하는 선에서 국가정책으로 결정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도망·절호 등 주인없는 진황전을 기경하는 빈민이 얼마나 새로운 臣民으로 정착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실로 의문이거니와,763) 진황전에 대한 빈민의 ‘隨起隨稅’규정이 준행되지 않았음은 명종 21년(1566) 栗谷 李珥가 “오래 진황한 전지에도 그 세를 감하지 않아서, 비록 流亡·絶戶하여 푸나무가 수풀을 이루어도 또한 반드시 一族切隣에게서 징렴하니…진황전은 募民 기경케 하여 수기수세한다면 세번째 우환을 없앨 수 있다”고 한 상소의 구절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李珥,≪栗谷全書≫권 3, 諫院陳時事疏, 丙寅). 50결을 상한으로 하는 限田의 시책이란 것도 처음부터 결코 그대로 시행될 수가 없었다. 위의 결정으로부터 1년이 더 지난 경연 자리에서의 관련 논의를 보면 다음과 같다.

侍講官 奇遵이 말하기를, ‘井田은 시행하기가 어렵지만, 均田은 쉽게 할 수 있다. 전지가 균등하지 않으므로 부익부하고 빈자는 입추의 땅도 없어 유이 파산하고 있으니, 제도가 불공평한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참찬관 鄭順朋이 말하기를, ‘정전의 제도는 지대한 것이니 쉽사리 할 수 없다. 모름지기 한전법을 세워 兼幷을 과도히 하는 자를 억제함이 옳을 듯하다’라고 하였다. (기)준이 말하기를, ‘근자에 50결로 한정을 했으나, 이미 그것을 시행할 수가 없다. 어찌 50결을 가진 백성이 있을 것인가’라고 하였다. 순붕이 말하기를, ‘경상도는 토지가 비옥하고 人居가 조밀하여 50결이면 다 경작할 수 없고, 더욱이 균등하지 않은 폐단이 있다. 10결이면 살아갈 수가 있겠지만, 빈민이 어찌 10결을 얻을 수 있겠는가. 경기의 인민도 10결이면 饒足한데 10결을 가진 자가 몇이나 될 것인가. 이 때문에 빈부가 균등하지 못한 것이다’라고 하였다(≪中宗實錄≫권 36, 중종 14년 7월 계사).

논의는 장황하였지만 아무런 결론도 초점도 없이 그야말로 ‘논의’로만 그치고 지나가는 어투에 불과한 것이었다. 다만 전년도에 결정한 50결 상한의 한전론조차 시행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만은 간접적으로 읽어낼 수 있다.

중종대 사림계열의 균전·한전론은 이상의 논의를 마지막으로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바로 이 해말에는 기묘사화가 일어나 사림계가 일망타진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후 16세기를 통하여 사림계열에서는 균전론이라든가 한전론을 조정에서 거론한 사료가 발견되지 아니한다. 오히려 기묘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의 하나인 南袞의 입에서 ‘美意’라고 거론되거나 명종대에 큰 흉년을 만나자, 왕정을 말하면서 지나가는 말로 언급된 적이 있을 뿐이다. 왕정을 이상적인 것으로 추진하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이제 兩亂 이후 사회적 모순이 한층 더 커지고, 그 해결을 위해 한층 더 체계적인 검토가 사회적으로 요청되는 조선 후기 실학의 시대에 가서야 본격적으로 논의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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