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5. 경제개혁의 추진
  • 4) 공납제 개혁론

4) 공납제 개혁론

조선왕조 賦稅의 대종을 이루는 貢納은 성종대에 貢案을 정비함으로써 제도상의 단락을 짓게 되었다. 그러나 뒤이어 연산군대에 이르러서는 국왕 자신의 무절제한 낭비와 왕실의 용도가 많아짐에 따라 부득이 공물을 대폭 加定한 이른바 辛酉貢案(또는 癸亥貢案)을 다시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뒤로도 “常貢 외에 加定·引納이 없는 해가 없다”는 형세로 공물의 수요가 대폭 늘어나고 있었으므로, 호조의 요청으로 공물의 가정을 아예 법제화하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764)≪燕山君日記≫권 43, 연산군 8년 3월 임오 및 권 59, 연산군 11년 9월 신해.
이하 공납제 개혁론에 관한 서술은 高錫珪,<16·17세기 貢納制개혁의 방향>(≪韓國史論≫12, 서울大, 1985)을 많이 참조하였다.

연산군대에 일단 가정된 공물은 16세기의 중종대 이래 여러 차례의 개정 시도가 있었지만, 거의 한번도 제대로 성취되지 못하였다. 조선왕조의 관인 지배체제가 안정되면서 왕실을 비롯한 各司의 쓰임새가 더욱 더 사치스럽고 번다해졌으므로 연산군대가 아니더라도 공물의 수요는 늘어나기 마련이었다. 그러므로 공납제가 대동법의 시행으로 결말날 때까지 貢額을 줄이는 선에서 공안을 개정해야 한다는 숙원은 언제나 난해한 국가적 과업으로 짐지워져 있었다.

또한 16세기 공납제의 폐단으로 큰 물의를 일으킨 것은 공공연하게 만연한 防納 현상이었다. 방납은 대개 勢家의 하인이라든가 豪商 등의 독점적 謀利行爲로서 중앙의 관권이나 각지의 수령 등과 결탁하여 자행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가령 “各司의 하인으로 방납하는 자는 그가 받아들이는 물건을 중간에서 꾀를 써서 백단으로 點退하니, 外吏는 부득이 高價로 방납인에게서 사야 비로소 관에 바칠 수가 있다. 그러므로 관에 바쳐지는 물건은 모두 다 품질이 나쁜 것들이요, 특히 任土作貢의 뜻에 어긋나는데, 방납인은 重價를 요구하니 그 값이 달마다 해마다 오른다”765)≪中宗實錄≫권 88, 중종 33년 8월 갑인.는 형세로 치닫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공납제가 안고 있는 기본 폐단, 즉 공안을 개정해야 한다는 것과 방납을 근절해야 한다는 것의 두 가지 문제는 중종대 사림계가 정치 요로에 등장하면서 제대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먼저 趙光祖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 나라의 田稅는 1/30인데 공물은 과다하니 그 때문에 민생이 날로 곤궁해진다. 경비의 쓰임새를 헤아려 적절히 줄인 뒤에라야 대체로 민생을 안정시킬 수 있다… 지금 각 읍의 공납을 살펴보면 土産이 不均하고 또한 모두 방납을 하고 있는데, 1升을 바칠 경우 1斗를 징수하고 1匹을 바칠 경우 3∼4필을 징수하니, 묵은 폐단을 그대로 따라 이같이 극단한 데까지 이르렀다. 조정이 어찌 생민을 위한 계책을 마련하지 않을 것인가(趙光祖,≪靜菴集≫권 3, 參贊官時啓 5·6).

즉 이에 이르러 공물이 너무 과다하므로 국가경비를 줄이는 방향에서 공안을 개정하도록 한다는 것과 非土産의 공물을 고쳐 정함으로써 방납의 폐단을 근절하자는 논의가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던 것이다.766) 高錫珪, 앞의 글. 그래서 앞서 살핀 균전·한전론의 경우와 같이 공납제의 폐단도 경연에서 집중 논의되기에 이르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공물은 詳定된 지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폐단이 없을 수 없다. 만약 물산에 따라 고쳐 부과한다면 그 폐단이 없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特進官 金克愊이 말하기를, ‘上敎가 지당합니다. 폐단을 진언하는 이가 역시 貢案을 개정하는 일을 말할지라도 該曹에서는 그 개정이 어려울 뿐더러 폐단이 오히려 더 심해진다고 합니다… 小臣이 충청도관찰사가 되어 보니 그 도 사람들이 그 땅의 不産物을 전라도에서 사오는데 그 값이 평상시보다 10배나 됩니다. 감사·수령은 때맞추어 封進하기에만 힘쓰고 鄕吏·營吏는 모두 다 濫徵하므로 백성들은 사방에서 구해 들여야 하는데, 혹 구하기도 하고 혹은 구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감사·수령된 자가 그같은 폐단을 모르지는 않지만 또한 부득이합니다. 그러나 어찌 안심되는 일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공안의 개정은 분란스럽게 자주 해서는 안된다. 다만 한 번만 개정하면 公私가 다 편하고 폐단도 제거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김)극핍이 말하기를, ‘지금 만약 공물을 균평히 정하자면 반드시 8도의 물산을 다 취합하여 그 所産을 써서 상정해야만 대체로 폐단을 구제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檢討官 奇)遵이 말하기를, ‘각 지역마다 産·不産을 참작해서 정하면 민이 혹 편히 여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領事 申)用漑가 말하기를, ‘지역과 물산이 동일하지 않으므로 만약 (전체를) 취합하여 分定한다면 잘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掌令 鄭)順朋이 말하기를, ‘전체를 다 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혹 옛 것을 그대로 두어 고치지 않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공안은 가벼이 개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가장 오래 된 터이므로 폐단이 없을 수 없다. 모여서 논의를 하면 그 폐단을 고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中宗實錄≫권 29, 중종 12년 8월 무신).

균전·한전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공안의 개정에 대해서도 국왕은 관점의 일관성조차 의심케 하는 정도로 지극히 미온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니 이후로도 논의가 적극적으로 진행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과연 대신들의 논의를 거쳐 결정된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각 지역의 물산에 따라 恒貢을 정함으로써 백성도 편하게 하고 폐단도 없게 한다는 것, 이는 실로 良法이다. 그러나 물산은 고금이 각기 다르고 군현의 殘盛 또한 한결같지 아니하니, 지금 멀리서 헤아려 改正할 수가 없는 것이다. 各司로 하여금 그 收納하는 貢物의 足·不足을 고찰토록 하고, 각 도 감사로 하여금 그 지역의 産·不産을 審問토록 하여 정리하여 계문한 후에 다시 논의하기로 한다(≪中宗實錄≫권 33, 중종 13년 5월 병인).

이 내용은 앞서 살핀 바 50결 한전론 등 현안의 7가지 시사문제의 하나로 논의되어 결정된 것이었다. 그나마 그 해 11월의 기묘사화로 이 결정조차 아예 시행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오랜 뒤 다시 사림계가 부분적으로 등장하면서 공납제의 폐단이 다시 거론되었다.

부세는 常貢의 定數가 있고 용도는 橫看에 세밀하게 갖추어져 있다…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여 횡간의 밖에 또 別例의 쓰임새가 있고 별례의 밖에 또 불시의 需用이 있어 금년의 貢賦가 부족하면 내년의 것을 백성에게서 취해 쓰되 이름하여 引納이라 하니 실제로는 再稅인 것이다.…府庫가 텅 비고 경비가 잇댈 수 없는데도 內旨를 날마다 내려보내니 有司는 措辦할 길이 없어 일체를 모두 市廛에게 책임지워 豪貴之家에서 매입해 들이게 하는데, 아침에 宮內로 들어갔다가 저녁에는 나오는 것으로 끝없이 순환하여 그 값이 날로 오른다.… 田野의 백성은 인납 때문에 시달리고 市井의 백성은 貿易으로 시달리는데, 이익은 豪貴한 자에게 돌아가고 해는 국가로 돌아온다(≪中宗實錄≫권 90, 중종 34년 5월 을해).

內旨란 王妃(王大妃)의 傳敎를 가리키는 것이요, 여기 豪貴家란 바로 勳戚家이다. 공납의 폐단을 자행하는 장본으로 바로 宮禁과 훈척이 지목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16세기는 대체로 훈척정치가 계속되면서도 특히 그 가운데 權奸이 정권을 농단하여 官人의 人事에서부터 부정을 자행함으로써 극도로 지배질서를 문란케 하고 있었다.

대저 백성에게 親臨하는 관원은 수령보다 중요한 자가 없으니 그 선임은 불가불 삼가야 하는 것인데,…卿大夫가 聖上의 마음을 체현하지 아니하고 私를 좇아 公을 해치며 용렬 비루한 자를 冒薦하여 良法을 먼저 허물어뜨린다. 대저 薦擧하는 자가 이들을 천거하는 것은 이들을 위함이 아니라, 장차 자신을 이롭게 하고자 함이다. 그런 즉 軍民을 割剝하는 자는 수령·邊將이 아니라, 곧 조정이 할박하는 것이다(李彦迪,≪晦齋全書≫권 12, 弘文館上疏).

八方에 별처럼 펼쳐져 있는 郡縣과 바둑판처럼 흩어져 있는 鎭堡에 斧鉞을 받아 나가는 장수는 부채를 지지 않은 자가 없고, 수령의 직위를 띤 자는 모두가 (尹元衡의) 은혜를 입은 자이다. 뭍으로 뇌물의 재화가 달리매 생민의 유망이 殆盡하고, 물로 뇌물의 미곡을 실어 나르매 군졸의 곤췌 또한 극도에 이르렀다. 청탁의 尺牘이 원근에 구름처럼 날아 다니는데도, 方伯은 殿最 때문에 움직이지 못한다(≪明宗實錄≫권 31, 명종 20년 8월 무인).

조정을 천단하는 권간이 부정으로 탐학한 수령·변장을 재생산시키고 있었으니, 그 수령·변장들의 지배 아래 놓인 ‘軍民’은 본질적으로 ‘割剝’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지배질서가 문란하게 되면 언제나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혹독히 피해를 입게 되는 것은 무력한 소농민이기 마련이었다. 이 시기의 소농민층이 그나마 작은 규모의 自營地마저 세력있는 자에게 겸병당하고 유이도산의 길로 나서지 않을 수 없었던 사회적 배경은 그들이야말로 그같은 구조적 ‘할박’의 기본 대상층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그런데다 이 시기 수취제의 대종을 이루고 있는 공납제에서는 더욱 힘없는 소농민층에 과중한 부담이 전가되고 있었다. “무릇 貢賦와 徭役은 民의 所耕田의 結負의 수에 따라 정한다”767)≪成宗實錄≫권 4, 성종 원년 4월 병자.는 것이 법제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원칙적 규정에 불과하였다. 실제로는 “지금 田地가 阡陌에 잇닿아 있는 자는 모두 豪勢하여 공부의 납부를 거부하고 있다”든가, “品官이라든가 勢家는 전지가 천백에 잇닿아 있어도 賦·役에 응하는 자가 絶少하고, 貧賤한 下戶는 입추의 땅이 없는데도 괴로운 侵毒을 입고 있다”768)≪宣祖實錄≫권 7, 선조 6년 3월 정유.
≪光海君日記≫권 157, 광해군 12년 10월 정미.
는 것이 실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소농민층의 파산과 유이도산은 공납제의 측면에서 더욱 구조적으로 규정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전세·요역·공물은 물론 군역까지를 부담하는 국가 기본계층으로서의 양민 자작농층의 몰락은 더욱 급속히 진행되고 있었다. 다소 과장된 표현이겠지만, “지금 전지를 소유하고 있는 것은 사족뿐이니 수많은 백성치고 누가 尺寸의 토지라도 가진 자가 있을 것인가”라거나, 특히 “양민으로서 전지를 소유한 자는 실로 1인도 없다”769)≪中宗實錄≫권 64, 중종 23년 11월 신축. 혹은 “平時인 즉 사족만이 田庄을 소유하고 있을 뿐이요, 백성은 없어서 모두 幷耕해서 먹고 산다” 770)≪宣祖實錄≫권 140, 선조 34년 8월 무인. 이 내용은 倭亂 직후에 논의된 것으로, 난 전의 사실을 ‘平時’의 일이라고 썼다.는 형세가 조성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국가 재정수입의 기본을 이루는 공납이나 기본 國役인 군역을 모두 이같은 병작농민층을 상대로 부과해두고 국가체제를 운용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곧 심각한 체제 파탄의 위기를 조성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權奸의 전횡이 일단락된 16세기말에 가서는 사림정치의 시대가 열리면서 공납제 개혁론이 다시 적극적으로 추진되고 있었다. 이 때에는 당로의 여러 관인들로부터 공납제의 개정에 관한 발의가 나오게 되었으나, 그것을 가장 심도 있게 제시한 것은 선조 7년(1574) 李珥의<萬言封事>에서였다.

祖宗朝에는 용도가 심히 簡約하여 백성으로부터의 수취가 넘치지 않았다. 연산군 중년에 용도가 侈張하여 常貢으로써는 그 지공에 부족하게 되자 이에 加定하여 그 욕구에 충당하였다. 臣이 옛날 이 일을 故老에게서 듣고서도 깊이 믿지 않았더니, 전일에 政院에 있으면서 호조의 貢案을 가져다 살펴본 즉 여러 가지 공물이 모두 弘治 辛酉년에 加定한 바로서 지금까지 준용되고 있는데, 그 때를 상고해보니 곧 燕山朝였다. 신이 모르는 사이에 책을 덮고 크게 한숨쉬며 말하기를, ‘그랬었구나. 홍치 신유년은 지금부터 74년이나 되니 그 사이 聖君이 臨御하지 않은 바도 아니요, 賢士가 立朝하지 않은 터도 아닌데 이 법이 어째서 개혁되지 않았는가’하고 그 연유를 캐어 보니, 70년 사이가 모두 權姦이 나라를 맡고 있었으며 두세 명의 君子가 비록 입조하더라도 뜻을 펴보기도 전에 奇禍가 반드시 따랐으니, 어느 겨를에 여기에 의논이 미칠 수 있었을 터인가. 그것은 반드시 금일을 기다리게 된 것이다. 또한 物産은 수시로 변하는 것이요, 民物 田結은 수시로 증감하는 것인데, 공물의 分定은 이미 국초에 있었고 연산조에는 다만 거기에 따라 加定했던 것이지 土宜를 따라 변통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은 각 군현의 공납이 所産이 아님이 많으므로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하거나 배를 타고 뭍짐승을 잡는 격이어서 다른 고을에서 바꾸어 들이거나 서울에서 사들이지 않을 수 없으니, 백성의 경비는 백 배나 되어도 公用은 넉넉지 못하다.… 연산조에 가정한 것을 모두 제거하여 조종의 구제를 회복하되, 인하여 列邑의 물산의 유무, 전결의 다소, 民戶의 殘盛을 고찰하고 추이하여 한결같이 균평하게 量定할 것이며, 반드시 本邑이 각 사에 납부토록 한다면 방납은 금하지 않아도 저절로 혁파될 것이요, 민생은 倒懸에서 풀려나는 듯할 것이다. 오늘의 急務로서 이보다 큰 것이 없다(李珥,≪栗谷全書≫권 5, 萬言封事, 甲戌).

즉 민생을 괴롭히는 최대 현안인 공납제를 개혁하는 방안은 각 군현의 물산·전결·민호의 다소를 기초로 하여 부담이 균평하도록 공안을 개정함과 동시에 또한 本邑으로 하여금 당해 공물을 당해 기관에다 직납토록 함으로써 방납을 근절케 하자는 두 가지가 그 기본 내용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771) 이 밖에도 그는<司諫院乞變通弊法箚>등 여러 곳에서 기회가 있는 대로 같은 논조의 공납제 개혁론을 전개하였다(李珥,≪栗谷全書≫권 7, 司諫院乞變通弊法箚).

그런데 한편으로 이 시기에는 토지소유관계의 분화뿐 아니라, 職役관계에도 분화가 크게 일어나고 있었으며, 따라서 사회적 분업도 다각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군역을 비롯한 番上 혹은 여러 종류 選上의 경우 代立이 성행한 지 오래되었으며, 지방 場市뿐 아니라, 서울을 비롯한 도시 상업 또한 무시 못할 정도로 번성하고 있었다. 실제로 15세기 이래의 누누한 금령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성행해오고 있는 방납현상도 그같은 사회적 분화현상의 한 가지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것은 곧 사회적 분화와 전개의 순리적 방향의 일환이었다. 다만 관권과 결탁한 일부 모리배의 독점적 수탈행위에 맡겨져 운용되고 있었다는 사실로 인하여 방납은 반드시 개혁되지 않으면 안되는 문제로 부각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이미 방납자의 자의적 수탈행위에다 맡겨두지 않고, 각 군현 단위로 官이 농민들로부터 米·布를 거두어 당해 공물을 직접 마련하는 방법을 스스로 고안하는 경향도 나타났다. 그같은 현상이 언제,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는 자세하지 않지만, 가령 이이는 선조 2년(1569)에 올린<東湖問答>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소개하였다.

백성들이 공물을 스스로 備納하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으니, 하루 아침에 방납을 폐지한다는 말을 들어도 (공물을) 마련할 수가 없어 도로 高價로 전날의 防納之徒에게서 사사로이 사올 수밖에 없다. (방납하는 무리가) 깊이 감추어 두고 아끼어 값이 전일의 갑절이나 될 터이니, 방납의 이름은 비록 폐지된다 하더라도 방납의 실제는 오히려 더 심하게 될 것이다… 내가 보기에 海州의 공물법은 전지 1결마다 米 1斗씩을 거두어 관이 스스로 물건을 마련하여 서울에다 납부하니 민간은 다만 出米만을 알고 있을 뿐이요, (공물의) 값이 오르는 폐단은 대체로 알지 못한다. 이는 진실로 금일의 백성을 구제하는 양법이다. 만약 이 법을 사방에 頒行한다면 방납의 폐단은 얼마 안 가서 저절로 혁파될 것이다… 대신과 당해 기관으로 하여금 8도의 圖籍을 모두 가져다가 인물의 殘盛, 전결의 다과, 물산의 豊嗇을 강구하여 공물을 다시 부과하여 그 苦歇을 한결같이 균평히 할 것이요, 공물로서 國用에 절실치 않은 것은 적절히 헤아려 줄이되, 반드시 8도의 군현이 각기 마련할 수 있는 것으로 정함으로써 모두 해주의 1결 1두와 같이 한 연후에야 그 법령을 반포할 수 있을 것이다(李珥,≪栗谷全書≫권 15, 雜著 2, 東湖問答 右論安民之術).

즉 전국 각 지역의 인물·전결·물산의 다과를 기초로 하는 균평한 부담의 공안을 다시 작성하되, 국용에 절실하지 않은 공물을 줄여 정할 것이며, 반드시 당해 지역의 산물을 부과함으로써 군현단위로 민간에서 쌀로 거두고 이를 관이 調辦하여 직납하도록 한다는 개혁안이었다. 지금까지 공납제 개혁논의에서 거론되어 오던 현안을 모두 수렴하되, 민간으로부터 代貢收米한 것을 재원으로 하여 각 관(군현)이 공물을 마련하여 각 기관에 직납한다는 내용이었다.

한편 金誠一은 선조 16년(1583)에 황해도를 순무하는 도중 白川〔배천〕·해주·載寧 등지에서 이미 시행하고 있는 이른바 ‘大同除役’이라는 ‘便民’의 공납법을 널리 준행할 것을 건의하였다. 즉 그는 “각 관이 먼저 공물이 얼마인지 전결이 얼마인지를 계산한 다음, 물건의 귀천과 값의 경중을 헤아려 전결에다 분정”한다고 하여, 각 군현이 공물가를 균평히 환산하여 전결 기준에다 부과하는 방법을 소개하면서, “타도에서도 또한 이를 행하는 곳이 있다”고 보고하여 이를 널리 시행할 것을 적극 건의하였던 것이다.772) 金誠一,≪鶴峰全集≫續集 권 2, 黃海道巡撫時疏.

이같은 방법이 어떻게 하여 황해도 일부에서 먼저 시행되기에 이르렀는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사림계열 인사들의 정계진출과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이해된다. 그것은 곧 각 군현 단위로 공납제를 詳定함으로써 민생에 좀더 편의한 방법을 모색해가는 과정으로서 장차 大同法의 출현을 위한 전초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해석된다.773) 高錫珪, 앞의 글. 그리고 그같은 개혁론이 이이라든가 김성일 등 사림계에 의하여 적극 소개되고 권장되어 가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의미있는 일이었다.

이같은 군현단위의 개별적 변통책의 결과, 임란 후 비로소 국가적 시책인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시행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곧 16세기의 사림계에 의하여 제시된 공납제 개혁안의 연장선상에서 취해진 조처였다. 즉 대동법은 공물의 물목과 액수를 크게 축소하는 선에서, 그리고 또한 다소 戶役의 성격을 띠고 있던 공물 대신 전결이라는 단일 대상에 대하여 米·布를 수납하는 방법으로 개선하여 전국적으로 실시하는 내용으로 정착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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