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Ⅰ. 임진왜란
  • 1. 왜란 전의 정세
  • 1) 교린정책과 왜변

1) 교린정책과 왜변

 조선왕조의 기본적인 대외정책은 事大와 交隣이었다. 사대정책은 명과의 관계였고, 교린정책은 왜·여진·유구와의 관계였다. 이 중 일본과의 교린정책은 조선왕조가 주로 倭寇를 막기 위한 회유와 견제를 기본으로 하는 羈縻정책이었다. 그러므로 조선은 경계는 하였지만 일본이 적극적으로 교섭하여 오지 않는 한 외교관계를 가지려 하지 않는 소극적인 외교를 하였다. 즉 조선은 일본의 침략이나 외교적 요청이 없는 한 그들의 국내정세를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또 알 필요도 없었다. 이러한 조선왕조의 외교정책의 기본방침은 조선초 태종대에 熊川 개항과 세종 때 三浦 개항 이래 三浦倭亂 후 임진왜란 직전까지 지속되었다. 양국의 외교관계는 주로 對馬島主 宗氏를 중계로 하여 전개되어 조선이 종씨에게 歲遣米를 하사하고 무역에 특혜를 인정하였고 조선은 일본과의 외교를 교린이라 하여도 上國으로서 자처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왜구의 약탈은 고려말 조선초에 이르러 점차 진정되었다고는 하지만 왜구의 위협은 상존하였고 조선 초기 이후에도 간헐적인 왜구의 침공이 있었다. 왜구의 소굴은 농산물의 소출이 거의 없는 척박한 땅으로 이루어진 대마도였으나 이외에 五島열도·구주지방 등지에도 왜구의 근거지가 있었다. 이러한 왜구에 대하여 태종은 상왕이 된 후 강경책과 온건책을 함께 구사하여 세종 원년(1419) 李從茂로 하여금 대마도를 정벌케 하여 왜구의 근거지를 소탕하게 하는 한편 乃而浦·富山浦·鹽浦 등 3포를 열고 倭館을 두며 1년에 세견선을 50척으로 제한하고 圖書(통행증) 소지자만의 왕래, 체류일수의 제한 등을 내용으로 한 癸亥約條(세종 25년;1443)를 체결하여 대마도주의 제한적인 무역을 허락하는 회유책을 폈다. 이로써 대마도를 중심으로 활동한 왜구의 세력을 어느 정도 제거할 수 있었다.

 이러한 조선왕조의 강·온 양면정책은 중종 5년(1510) 4월에 이르러 3포에 거주하는 왜인들이 일으킨 삼포왜란으로 인해 파탄에 접어들게 되었다. 왜인들은 釜山僉使 李友曾을 죽이고 薺浦를 점령하여 첨사 金世鈞을 납치하였으며, 웅천성을 포위하여 성 밑의 인가를 분탕하는 등 3포의 군민을 도륙하고 가옥을 분탕하였다. 대마도주가 부산포·제포·巨濟 등지에 분견한 병선은 수백 척으로 왜세는 한때 기세를 올렸으나 곧 관군에 의해서 진압되었다.

 조선조정은 삼포를 폐쇄하고 왜인과의 교통을 단절하였다. 대마도는 이로 인해 물자의 곤란을 받게 되자 일본정부를 통하여 국교 재개를 요청하였다. 일본의 室町(足利)幕府에서는 日本國王使 弸中을 2차에 걸쳐 조선에 파견하여 강화를 시도하였다. 조선의 조정에서는 찬·부의 양론이 있었으나 야인으로 인한 북방의 긴장고조, 왜구의 재발 가능성과 약재 수입들의 필요에 따른 실리적인 강화론이 우세하여 중종 7년 8월에 이르러 壬申約條를 맺게 되었다. 조선은 강화의 전제조건으로 삼포왜란의 주모자를 처단하여 수급을 보내고, 조선측의 포로를 송환하며, 盛親이 직접 와서 사죄할 것 등을 제시하였다. 이 중 첫째 조건은 약조를 체결한 후에 이루어졌고, 셋째 조건인 성친의 親來陳謝는 이루어지지 않은 가운데 둘째 조건이 해결되어 임신약조가 체결되었다. 이를 살펴보면 세견선을 종전의 50척에서 25척으로, 歲賜米豆를 2백 석에서 1백 석으로 각각 반감하고, 特送船制를 폐지하며, 삼포 중에 단지 제포만을 개항한다는 것이었다.

 이 임신약조는 왜인에 대하여 삼포왜란 전보다 더 많은 제약과 구속을 가한 것으로 왜란에 대한 징계와 제한의 성격을 띤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식량과 생필품의 부족으로 인한 왜구의 침입이 계속되었고, 중종 36년 제포에서 대마도 왜인과 관병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기에 이르자 이것을 문제로 삼아 제포에 거류하는 대마도 왜인 전부를 방출하고 왜관을 부산포로 옮겼다. 이러한 조치에 대해 일본정부에서는 거듭 사신을 보내 복구를 요청하였으나 조선에서는 이러한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따라서 이후에도 왜구의 침입은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는데 그 내용을≪朝鮮王朝實錄≫을 토대로 하여 도표화하면 다음의 <표 1>과 같다.

일 시 왜 선 규 모 침 입 장 소
중종 17년 6월 丙戌 12척 전라도 新達梁
6월 乙丑 10∼15척 전라도 草島·甫吉島·楸子島
18년 5월 癸巳 1척 전라도 草島
5월 丙申 1척 황해도 豊川
20년 9월 戊寅 4척 전라도 世尊巖
36년 6월 壬午 1척 경상도 薺浦 근처
39년 4월 乙酉 20여 척 경상도 蛇梁鎭
명종 7년 5월 辛亥 1척 제주도 旌義縣 川尾浦
8년 6월 丁亥 1척 제주도, 전라도 珍島
9년 6월 丁丑
2척
1척
제주도
전라도 甫吉島
10년 5월 己酉 70여 척 전라도 達梁浦
11년 6월 戊子 1척 경상도 蔚山
6월 辛丑 5척 제주도 濟州·旌義·大靜
7월 甲子
1척
1척
전라좌도 三島
전라우도 靑藤島
7월 辛未 12척 제주도
7월 癸酉 1척 전라도 甫吉島·作只島
12년 6월 壬寅 2척 청홍도 泰安
7월 乙卯
2척
2척
전라도 舒川
    辛山浦
7월 戊午 1척 전라도 草島
14년 5월 丁酉 1척 청홍도 藍浦
6월 丙午 다수 전라도 仇助島·三島·安馬島, 제주도 등지

<표 1>중종·명종대 倭船의 출몰 상황

 왜구의 침입 중 크게 문제시된 것은 중종 17·18년(1522·1523)의 침입, 蛇 梁倭變(중종 39), 乙卯倭變(명종 10;1555)등을 들 수 있다. 10년 내지 20년의 간격을 두고 대거 침입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간에 일본은 중국 등지로부터 화약과 병기의 제조기술을 습득하고, 견고한 선박을 건조함으로써 점차 강성 해져 갔던 것이다. 이에 대해 사량왜변 후 조선은 일본국왕사 이외의 왜인의 입국을 거절하는 강경책을 썼다.

 명종 10년에 발생한 을묘왜변은 삼포왜란보다 피해가 심각하였다. 5월에 서 6월 사이에 왜선 70여 척이 전라도 해남 達梁浦에 침입하여 전라병사 元 績과 장흥부사 韓薀을 살해하고 영암까지 침입하는 등 연해를 횡행하며 약탈과 살륙을 자행하였다. 이 왜변으로 놀란 조정에서는 왜구의 침략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였지만 근본적인 해결방안을 찾지 못했다. 다만 당시 영의정 沈連源이 왜구의 군사력을 평가하면서 중국으로부터 조선기술을 배워 왜선이 견고해지고 銃筒을 쓰는 법도 지극히 정교하여 왜세가 삼포왜란 때에 비할 수 없을 만큼 강성해져서 조선의 병력으로는 감당하기 힘들다고 지적하여 왜구의 강성함만을 인지하고 있었을 뿐이었다.001)≪明宗實錄≫권 18, 명종 10년 5월 기유. 그러므로 삼포왜란 때처럼 왜선을 제압하지 못하고 회유책을 사용하여 동년 10월 대마도주에게 세견선 5척을 증가시켜 주는 것으로 일단락지었다. 그러나 완전한 수습은 이루어지지 않아 그 후에도 당분간 왜침은 계속되었다.

 또 한편으로는 날로 강성해져 가는 일본에 대한 대비책으로 새로운 전선의 건조를 시도하여 임진왜란 중에 큰 활약을 한 板屋船이 등장하게 되었고 대형의 총통과 승자총통 등 화기의 개발에도 주력하였다.002) 金在瑾,≪朝鮮王朝軍船硏究≫(一潮閣, 1977), 67∼73쪽. 그러나 일본 내부에서 실정막부가 붕괴되고 각지의 봉건영주가 할거하는 전국시대에 돌입하게 되자 豊臣秀吉(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일본을 통일할 때까지 약 30년간 일본과의 정식외교는 일체 단절되었고 武備에는 소홀해졌으며 일본의 국내사정을 모르는 채 소강상태를 유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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