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Ⅰ. 임진왜란
  • 1. 왜란 전의 정세
  • 3) 조선의 국내정세와 군사준비 실태

3) 조선의 국내정세와 군사준비 실태

 16세기 조선사회는 점차 쇠퇴의 기미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安邦俊은 ≪隱峰全書≫에서 임진왜란 전의 주요 사건을 열거하면서 조선의 국내정세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萬曆 임진년 4월 일본적이 대거 入寇하였다. 이보다 10년 전 粟谷 李珥선생은…10만의 병과 都城戍軍 2만 명을 양성할 것을 청원하였는데…갑신(1584) 정월 율곡이 돌아갔다. 뒤에 당국자들은 오직 偏黨을 逢迎하는 데 힘쓰고 또 역적의 술수에 빠져들어 있었으며 鹿屯島의 屯田과 海西地方의 蘆田으로 백성을 이사시키고 玉非의 자손을 추쇄하는 일로 능사를 삼으니 팔도의 인심이 크게 이반되었고 원망하는 소리가 하늘에 사무쳤다. 서남 연해의 鮑人들은 수령이 침탈함으로써 일본에 도망해 들어가 강진의 沙火同같은 자가 곳곳에 있어도 조정이 걱정으로 여기지 않았다. 5년 뒤인 정해년(1587) 봄 3월에 왜적선 16척이 영남 외양으로부터 곧바로 興陽 損竹島에 와 닿으니…조야가 크게 놀랐다…이 해 9월 平秀吉이 사신을 보내 화친하기를 바랐다 (安邦俊,≪隱峰全書≫권 6, 記事 壬辰記事).

 이와 같이 당시의 상황은 지배층의 편당, 정치기강의 해이, 세제의 문란 등의 폐단으로 민심이 이반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민심의 이반과 연계된 폐단들은 모두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이전부터 나타났고, 위정자도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기에는 무력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점들이 일찍부터 지적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정되지 못하였다는 것은 바로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치적으로는 4차의 士禍를 겪으며 지배층으로 등장한 사림세력에 의해 종래의 6曹체제보다는 3司를 중심으로 한 公論정치가 강화되었다. 그런데 3사간의 공론을 모은다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으며 또한 공론화된 의견은 의정부의 3공이라 하여도 무시할 수가 없어서 사림지배 아래에서의 정치는 사림의 의견이 모아져야만 정치를 행할 수 있는 상호견제의 정치풍토를 이루게 되었다. 선조 8년(1575)에 이르러 기성관료와 신진관료 사이에 동서 분당이 싹트게 되었다. 분당의 초기에는 李滉과 曹植의 문인들이 많았던 東人이 李珥와 成渾의 학맥으로 이루어진 西人을 압도하였다. 이들은 선조 22년 己丑獄事로 일시 실각하기도 하였으며 서인 鄭澈의 建儲議事件을 계기로 남북으로 분열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와 같은 붕당정치는 당파간의 상호견제 속에서 공론에 의하여 정국을 이끌어 가는 한층 진보된 정치형태라는 장점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당파간에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정국운영이 이루어지는 양상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한편 지방에서는 중앙의 붕당과 연관을 가지면서 서원을 중심으로 한 스승 밑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향약과 같은 조직을 통하여 상호부조와 결속을 다지는 현상도 나타났다. 또한 각 지역에는 학문과 행실이 뛰어나 존경받는 인물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러한 조직과 인물들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각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키는 주체세력이 되었다.

 경제적으로는 건국 이래 여러 종류의 공신에게 지급된 공신전과 별사전이 모두 세습되고 양반관료들에 의한 토지의 매입·겸병·개간 등으로 인한 면 세전의 확대에 따라 국가의 수입이 줄어들고 농민들의 생활이 곤궁해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특히 직전법이 폐지된 이후에는 관리들에 의한 토지소유의 확대가 심해져 삼남지방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침탈의 범위가 확대되어 갔다. 또한 농민들에게는 농장의 전호로서 2분의 1의 전세뿐만 아니라 특산물의 공납이 큰 부담이었다. 이 공납은 규모뿐만 아니라 수납의 절차도 복잡하여 중간에서 전문적으로 공물을 납부하는 防納制가 생겨나 부담이 가중되었다. 이외에도 군역의 요역화와 收布代役制의 발생, 환곡제도의 고리대금화 등으로 농민의 부담은 더욱 가중되었다. 게다가 15세기 이래 계속되는 전국적인 가뭄과 홍수, 흉년·蝗災와 전염병의 발생 등으로 농민들은 근거지를 잃고 떠돌아다니거나 명종 때 활동하던 임꺽정의 경우처럼 대규모의 도적으로 변하기도 하여 국가재정의 근간이었던 농촌은 날이 갈수록 황폐하여져 갔다. 이에 따라 중종대에 203만 석에 달하였던 三倉의 貯置米가 임진왜란 직전에 이르러서는 50여만 석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007)≪宣祖實錄≫권 140, 선조 34년 8월 무인.

 사회적인 면에서는 지배계층의 엄격한 신분제를 고수하려는 쇄환정책에 따라 발생한 선조 16년(1583)의 玉非의 난과, 붕당정치의 과정에서 선조 22년에 발생한 鄭汝立의 난의 여파가 지배층뿐만 아니라 일반 서민들에게까지 미쳐 전국을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다. 옥비의 난은 6진을 개척할 때 자원 입진하여 속량된 公私賤人의 逃還이 속출하자 선조 16년 쇄환령을 발표하면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당시 도환자와 그 후손들을 엄격하게 전국에서 색출하였는데 이미 사망한 자들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후손이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소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특히 함경도 경원의 관비 출신인 玉非는 영남으로 달아나 숨었다가 良家의 첩이 되었는데 사망한 지 80년이 지나 후손을 많이 두었고 그 중에는 사족과 결혼한 자도 많았으며 심지어는 종실과 결혼한 자까지 있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 쇄환령이 시행되자 사족의 부녀자 가운데는 왕왕 자결하는 자까지 나와‘곡성이 하늘에 가득찰’만큼 화근이 사족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이러한 사태는 옥비의 후손에 한한 것이 아니어서 중외는 소요를 일으키게 되었고,‘팔도의 민심은 크게 돌아섰으며 원한은 하늘에 사무치게’되었던 것이다. 정여립의 난은 선조 22년 10월 황해감사의 밀계로부터 발단되었는데, 기축옥사로 발전되어 당쟁과 결부되어 연좌의 화가 사족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고 무고한 사람들과 일반 서민들까지 많이 연루되어 그 파장은 전국적으로 임진년까지 계속되었다. 이외에도 선조 20년 왜구의 興陽入寇 등으로 조선 내의 사회상은 매우 인심이 흉흉하고 유언비어가 나돌아 기강이 해이한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일본과의 외교적인 상황을 살펴보면 전국시대의 일본을 통일하고 대륙 침략의 준비를 진행하고 있던 풍신수길은 조선의 사정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대마도주 종의조·종의지 부자에게 소위 「假道入明」을 교섭하게 하였다. 대마도주는 조선의 歲賜米와 무역의 이익을 유지하기 위해 양국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통하여 전쟁을 피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그는 선조 20년에 가신인 橘康廣을 일본국왕사라고 사칭하여 조선에 파견하여 일본의 정권이 교체되었음을 설명하면서, 조선왕을 일본에 오도록 하라는 풍신수길의 명령을 변조하여 通信使의 파견을 간청하였다. 그런데 이 사절단이 부산에 도착하자 조선 조정은 그들에 대한 영접 가부, 書契의 오만한 내용의 처리가 문제되었다. 이 에 대해 조정에서는 여러 가지 논란이 있었고 公州敎授 趙憲은 시폐개혁과 일본정벌을 주장하는 萬言疏를 올리기도 하였다. 결국 조정에서는 바닷길에 어둡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조선은 사대교린을 외교정책의 기본으로 하고 있어서 왜구의 내침을 방지하는 데 만족하고 일본 내정에는 무관심하였기 때문에 통신사의 파견에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첫번째의 시도가 무위로 돌아가자 대마도주는 승려 玄蘇를 정사, 종의지를 부사로 삼아 이듬해인 선조 21년 10월과 그 다음해 6월 두 차례에 걸쳐 통 신사파견을 교섭케 하였다. 이들은 공작·조총 등의 예물을 바치고 왜구가 흥양 損竹島를 약탈할 때 이들을 향도한 沙火同 등을 인도하면서 통신사의 파견을 거듭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조정은 더 이상 거절하기 어려웠고, 일본 사정도 탐지하기 위해 선조 22년 9월에 통신사로 정사 황윤길·부사 김성일·서장관 許筬을 파견하였다. 이는 세종 25년(1443) 통신사 卞孝文, 서장관 申叔舟를 파견한 이래 약 150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일본에 파견된 통신사 일행은 풍신수길을 만나고 선조 24년 정월에 귀국하였다. 그러나 정사는 왜적이 침범하리라 하였고 부사는 그렇지만은 않다고 하여 국론이 분분하여 적극적인 대비책을 마련하지 못하였다. 다만 명에 대해서 과거 일본과의 국교를 비밀에 부치고 있었으나 왜사들이 말하는 「가도입명」에 관하여는 통보하였다. 이로써 이미 막연하나마 왜군의 전쟁준비의 정보를 얻고 있었던 명이 조선도 일본의 침략준비에 가담하려 한다는 의심을 풀었고 이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원정군을 파견하는 동기가 되었다.

 한편으로 조선조정에서는 임란 1년 전부터 만일에 대비한 방어책을 세웠다. 첫째는 각 도의 성곽을 수축하고, 둘째 무기를 점검하고, 셋째 무신 중에 뛰어난 재질이 있는 자는 서열에 구애받지 않고 발탁하는 일이었다. 특히 조정에서는 일본이 육전보다는 수전에 능하다는 판단 아래 전국, 그 중에서도 경상·전라도의 성곽 수축에 힘쓰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영천·청도·삼가·대구·성주·부산·동래·진주·안동·상주 및 좌·우병영의 성을 증축하고 垓字를 깊이 파게 되었다. 이에 대해 일부 양반들은 왜군이 침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반대하였고, 성곽수축과 군사훈련에 동원된 백성들은 지방통치관인 수령과 군사지휘관인 병사 등에게 원망을 품게 되었다.008)≪宣祖修正實錄≫권 25, 선조 24년 7월. 임란이 일어나기 1개월 전인 3월에 전라도 강진에서는 서울에서 내려온 巡察使 申砬의 독촉으로 성곽을 수축하는 승군과 군사훈련에 동원된 곡성들의 원성이 높았다고 했는데 이는 경상도도 거의 같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떤 이는 “우리 마을 앞에는 내가 흐르고 있어 아무리 장사라 하여도 뛰어넘을 수 없는데 하물며 동래·부산 앞은 망망대해인데 왜인이 어떻게 넓은 바다를 넘어올 수 있겠는가” 라고 하며 전쟁이 일어나지도 않을텐데 성곽을 수축하여 민폐만 크게 일으킨다고 반대하였다.009) 柳成龍,≪懲毖錄≫권 1. 따라서 城堡의 수축은 형식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고, 2백 년간 평화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전쟁대비란 백성의 원한만 샀지 일본 대군을 격퇴할 방비가 되지 못했다. 다만 서열에 관계없이 무장을 뽑아 李舜臣·權慄 등과 같은 인물이 발탁되었다.

 국방전략상 조선은 鎭管法체제를 유지하다가 을묘왜변 이후 制勝方略으로 개편하였고 임진왜란 전에 다시 진관법으로 돌아가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그 대로 시행되고 있었다. 이 제승방략은 적의 침략이 있으면 지방군이 지정된 곳으로 집결하고 중앙에서 지휘관을 파견하여 지휘하는 체제였으나 대군이 침공할 때에는 실전에 적용될 수 없는 전략이었다. 이는 실제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도순찰사 金睟가 즉시 제승방략의 分軍法을 시행했으나 실패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국가의 각 방면에서의 쇠퇴의 기미는 軍紀문제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군사들의 군기문란도 심각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한 예로 선조 11년(1578) 에 일어난 경상도병영의 군사난동사건을 들 수 있다.010)≪宣祖實錄≫권 12, 선조 11년 4월 병술. 평소부터 군기의 정비와 훈련에 태만한 자는 용서없이 결죄한 虞候의 처사에 대하여 원망이 많았던 경상병영군은 병사가 교체되는 시기를 틈타 밤중에 성문을 열고 전원이 탈출하여 반기를 들었다. 이 사건은 다음날 우후가 스스로 군사들이 결진한 곳으로 나아가 과거의 일을 사과하고 訓諭한 후에야 진정되었다. 이 소식이 조정에 보고되자 주모자들을 잡아서 효시케 하였으나, 이 소식을 들은 무장들은 이러한 일이‘근래에 늘 있는 일’이라고 하였다. 중앙의 위정자들이 지방사정에 얼마나 어두웠고 당시의 군정이 어느 정도 문란했는지 짐작케 한다. 군기의 문란과 더불어 官紀도 해이해져 선조 23년 정월에는 繕工畵員·銀匠이 종묘 의 守僕과 공모하여 태묘의 寶器를 훔치고 증거를 없애기 위해 방화한 일도 일어났다. 이러한 세태에 대하여≪宣祖修正實錄≫에서는 “때에 나라가 태평한 지 오래되어 士論은 바야흐로 성하지만, 풍속은 각박하고 악했다”011)≪宣祖修正實錄≫권 23, 선조 22년 정월.라고 간명히 평하고 있다.

 또한 柳成龍은≪懲毖錄≫에서 임란 초전의 패인을‘軍政의 근본이라든가 장수를 뽑아 쓰는 요령, 또는 군사를 조련하는 방법 등 어느 한 가지도 되어 있지 않았던 까닭에 전쟁은 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조선왕조는 건국 이래 큰 외적의 침입없이 2백 년간 태평시대를 구가하였다. 그리고 소규모로 왜구의 침입 등이 있었으나 일본과는 대마도주를 통하여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므로 일본이 전 국력을 동원하여 침략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崔永禧>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