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Ⅰ. 임진왜란
  • 2. 왜란의 발발과 경과
  • 1) 왜란의 발발

1) 왜란의 발발

 조선에 아무런 예고없이 일본의 대군이 침략을 시작한 것은 선조 25년(1592) 4월 14일이었다. 일본은 이미 전쟁 전에 몇 번의 외교사절을 보내왔고 이에 대하여 조선에서도 通信使로 黃允吉과 金誠一을 일본에 파견하여 외교적인 접촉을 갖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외교교섭에서 조선은 일본이 의도한 침략의 속셈을 파악하지 못하고 다만 선린만을 희구하였다. 이리하여 외교 교섭은 결렬되었고 일본의 침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우려에서 몇 사람의 무능한 수령을 교체하고 영남과 호남지방의 연안을 중심으로 그 요해처에 城池의 수축과 무기의 정비에 힘을 썼다. 그러나 이것마저 민심의 동요만 일으켰을 뿐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중지하고 말았다.

 이에 비하여 일본은 외교교섭이 결렬되자 바로 침략군을 편성하기 시작하여 1진에서 16진까지를 육군으로 구성하고 그 외에 수군 약간을 두었는데 총 병력은 281,800여 명이었다. 이들의 선발대인 1진에서 4진까지는 3월 1일부터 그들의 본거지인 名護屋012) 현재 일본 구주북서단에 위치한 사가현 동송포군 진서정의 옛 이름으로 임진왜란의 전초기지.을 떠나 壹岐島로 출발케 하고 5진 이하는 각 기 인솔하는 대장의 근거지를 떠나 명호옥에 집결하는 시기를 정했다.

 일본은 이와 같은 치밀한 계획을 수립하여 그들의 선발대 17,000여 명을 군선 약 700여 척에 태워 부산포에 상륙시켰다. 4월 13일 오후 5시경 경상 도 가덕도의 응봉봉수대는 다음과 같은 긴급한 상황을 경상도와 전라도의 각 감영과 중앙에 보고하였다.

왜선의 수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대략 90여 척이 가덕도 남쪽에서 부산포를 향하여 항해중인데 그 뒤를 따라 계속 오고 있습니다(李舜臣,≪壬辰狀草≫, 因倭警待變狀一).

 그러나 이와 같은 보고를 가장 먼저 받은 경상도 좌수영과 우수영에서 일본군을 부산포에서 저지시켰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침구를 수수방관하였다.

 일본군 선발대 대장인 小西行長(고니시 유키나가)은 다음날인 14일 부산성을 공격하였다. 釜山僉使 鄭撥은 선박 3척을 거느리고 絶影島에 나가 있다가 일본군 침입의 급보를 접하고 급히 성으로 들어와서 지키다가 전사하였다. 부산진을 함락시킨 일본군은 15일 東萊城을 약 2만의 군대로 포위 공격하였다. 부산성에서도 군관민이 용감히 일본군에 저항했고, 동래성에서도 東萊府使 宋象賢의 지휘하에 군과 민이 합심하여 끝까지 처절한 저항을 하였지만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되었다.

 일본군의 침입을 막아야 할 慶尙左水使 朴泓은 수영을 버리고 언양으로 도주하여 慶尙左兵使 李珏과 진을 치고 있다가 경주로 도주하였다. 또한 慶尙右水使 元均은 일본군이 거제도로 향한다는 소문을 들고 虞候로 하여금 우수영을 지키라고 명령을 내린 다음 자신은 白川寺로 향하여 나가다가 연해의 어선을 보고 적선으로 오인하여 노량진으로 도주하여 버렸다. 뿐만 아니라 우후는 일본군이 침입한다는 잘못된 보고를 믿고 수영 중의 늙고 연약한 남녀를 피란시킨 다음 전선 백여 척과 화포를 비롯한 군기를 바다에 침몰시켰고, 南海縣令 奇好謹은 창고에 불을 지른 후 도망쳤다. 이와 같이 경상도의 좌·우수영의 수군은 일본군을 막기는 커녕 일본군의 침입 이전에 스스로 무너지고 말았다.

 일본군은 소서행장의 뒤를 이어 후속부대가 계속 부산에 상륙해 왔다. 4월 18일 加藤淸正(가토 기요마사)의 2번대는 22,000여의 병력으로 부산에 상륙했고, 黑田長政(구로다 나가마사)의 3번대 1만여 명이 多大浦를 거쳐 김해에 상륙하는 등 4월과 5월 사이에 조선에 침입한 일본군의 총수는 약 20만 명에 이르렀다. 일본군은 그들의 진로를 中路·左路·右路로 나누어 서울을 향하여 북상하였고, 그들을 지원하는 수군은 남해안을 돌아 서쪽으로의 진출을 계획하고 있었다. 일본군의 서울까지의 진로는 다음과 같았다.

中路:東萊-梁山-淸道-大丘-仁同-善山-尙州-鳥嶺-忠州-驪州-楊根-龍津나루-서울

左路:東萊-彦陽-慶州-永川-新寧-軍威-龍宮-鳥嶺-忠州-竹山-龍仁-서울

右路:金海-星州-茂溪-知禮-金山-秋風嶺-永同-淸州-서울

 일본군이 조선의 저항을 받지 않고 상륙했고, 이후의 전투에서 조선군이 실패한 것은 다음과 같은 요인 때문이었다. 조선은 건국 이래 2백 년간의 평화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군정이 문란하고 군비가 갖추어져 있지 않았으며 또 실전의 경험이 전혀 없었다. 반면에 일본군은 오랜 전란을 겪어 전쟁의 경험이 풍부하였고 잘 훈련되고 조직된 군대에 수적으로도 압도적으로 많았으므로 이들을 대적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조선 군대의 주무기가 활인데 비하여 그들은 신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므로 조선군에 공포심을 일으키게 하여 싸우기도 전에 패배의식이 팽배하고 있었다. 또한 지방관이나 군지휘관은 일본군이 경내에 침입하기도 전에 도주하였다. 이것은 지배층에 불만을 품은 민중이나 군졸들이 반항하는 사례가 있어서 일본군을 대적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조정에서는 4월 17일 경상좌수사 박홍으로부터 일본군 침공의 급보가 전해지고 연이어 경상도감찰사 金睟의 보고가 있자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잇따른 급보는 경상도의 여러 고을이 차례로 일본군에게 함락되었다 는 것뿐이었다. 이러한 흉보에 조정은 물론 백성들도 일본군 침입의 공포분 위기 속에서 불안에 떨고 있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비상대책으로 황급히 申砬을 都巡邊使, 李鎰을 巡邊使, 金汝岉을 從事官에 임명하여 일본군의 침공에 대비하는 한편, 김성일을 경상우도招諭使, 金玏을 경상좌도安集使로 삼아 민심의 수습과 일본군에 대한 항전을 독려토록 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관군의 저항을 받지 않고, 서울을 향하여 북상하는 일본군을 지세가 험하여 전략적 요충인 鳥嶺·竹嶺·秋風嶺에서 방어하기 위하여 이일에게 조령을, 劉克良과 邊璣 등에게는 각기 조령과 죽령을 방비하도록 조처했다.

 그러나 이일은 거느리고 임지로 나가야 할 정병 3백여 명을 확보하지 못하고, 서울에서 3일간이나 허송하고 있었다. 이일이 급히 남하한 후 조정에서는 柳成龍을 都體察使로 삼아 순변사 이일과 도순변사 신립을 돕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여 일본군을 조령 등지에서 막으려 하였다. 이와 같은 것이 당시 조정에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조치였으며 일본군을 서울 이남에서 막아보려는 마지막 시도였다.

 조정과 백성들은 신립과 이일이 북상중인 일본군의 예봉을 조령 등지에서 저지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이일이 4월 24일 상주에서 가등 청정군에게 패배하여 충주로 물러섬으로써 일본군은 조령과 죽령에 이르게 되었다. 한편 이일의 뒤를 이어 서울을 출발한 신립은 4월 26일 충청도의 병력 8천여 명을 丹月驛에 집결시켰다. 이 때 충주목사 李宗張과 종사관 김여물이 조령에서 일본군을 방어해야 한다고 역설하였으나 신립은 일본군이 이미 조령을 넘었다는 풍문을 듣고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일본군을 막으려고 하였다.

 신립은 기병을 위주로 싸우고자 평야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일본군을 기다렸다. 소서행장이 이끄는 2만여의 일본군이 아군을 공격하자 신립은 기마부대를 독려하여 용감히 싸워 많은 적에게 피해를 입혔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전세가 불리하여 끝내 패전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신립을 비롯한 김여물·이종창·변기 등의 장수와 많은 군사를 잃어 충주 방어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이일과 신립 등이 조령과 추풍령 등의 방비를 위하여 서울을 출발한 후 조정에서는 일본군의 서울침공에 대비하여 서울방비의 조치를 취했다. 즉 右議政 李陽元을 守城大將, 李戩·邊彦琇를 각각 左·右衛將, 李忠侃을 都城巡檢使로 삼아 도성의 성첩을 급히 수축케 하였다. 그리고 北兵使였던 金命元을 都元帥로 삼아 도성의 외각인 한강을 수비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일이 상주에서 패전하였다는 소식과 연이어 신립이 충주방어에 실패했다는 보고를 전해들은 도성의 인심은 흉흉해졌다. 이는 천연적으로 지세가 험한 요새인 죽령·조령·추풍령 등지에서 일본군을 막지 못했다는 사실과, 충주 이북에는 어떤 방어선도 고려하지 않아 서울이 위험하였기 때문이었다. 조정에서는 민심의 안정을 위하여 왕의 둘째 아들인 光海君을 세자로 책봉하였고 각 도의 관찰사는 시급히 군사를 이끌고 서울에 와서 도성을 지키도록 명령하였다. 또 이와는 별도로 각 지방에 관리를 파견하여 병사를 모집하여 서울에 모이도록 하였다.

 도성의 방어를 위하여 성의 수축명령이 내려졌으나 전혀 시행되지 않았고, 수비하는 군사도 크게 부족하였다. 이에 兵曹判書 金應南은 부족한 군사를 채우기 위하여 각 고을의 백성과 공·사천, 서리 등을 모조리 징발하여 성첩 3만여를 지키도록 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이 명령에 따라 나와서 성을 지키려는 사람은 겨우 7천여 명에 지나지 않았고 그나마도 대부분이 오합지중이어서 도망칠 생각만 가지고 있었다. 그 위에 병조에 소속되어 있는 상번군사까지도 하급서리와 결탁하여 도망가기 일쑤였고 이를 감독해야 할 상관들도 성을 지키려는 생각은 없고 자기의 보신만을 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도성이 위기감에 휩싸였던 4월 29일 조정에서는 종친과 대신의 건의에 의하여 평양으로 천도하고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함경도에 臨海君을, 강원도에 順和君을 보내 구원병을 모으기로 하고 李元翼과 崔興源을 평안도와 황해도의 순찰사에 각각 임명하여 군사를 모집하도록 조처하였다.

 4월 30일 새벽 왕은 평양으로 가고자 서울을 출발하였다. 왕의 일행이 서 울을 벗어나자 도성은 혼란이 극도에 달했다. 왕의 西遷 소식이 전국에 퍼지 자 백성은 불안감을 더해 갔고, 일본군이 침입도 하기 전에 피란소동이 일어 났다. 이러한 현상이 백성들 사이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전라도관찰사 李洸이 전라도군을 이끌고 도성을 지키고자 북상하여 공주에 이르렀다가 왕이 도성을 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해산시켰던 일도 있었다.

 도성에 남아 있던 일반 민중만이 아니라 양반들 사이에서도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 만다”는 유언비어가 일기 시작한 상황에서 도성의 민중들이 난동을 부렸다. 이들 난민들은 먼저 공·사노비의 문적이 보관되어 있는 장례원과 형조의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이어 경복궁·창경궁·창덕궁 등 궁궐과 관아를 약탈하거나 방화하기를 서슴지 앉았다.

 왕의 일행이 천신만고 끝에 惠陰嶺을 넘었을 때는 호종하는 자가 유성룡·李山海·李恒福 등 1백여 명에 불과하였다. 왕이 개성에 이르렀을 때 그 곳 백성들은 왕의 일행을 환영하기는 커녕 오히려 실정을 들어 비난하고 돌을 던지기까지 하였다. 왕의 행렬이 개성을 떠나 5월 7일에 평양에 이르렀을 때 평안감사 宋言愼이 3천여 기의 군사를 거느리고 대가를 맞이하자 호종하는 신하들은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한 후 겨우 20일만에 서울에 이르게 되었다. 한강방 어의 책임을 맡았던 도원수 김명원이 한강에서 물러나 임진강에 진을 치고, 수성대장 이양원과 부원수 申恪이 서울을 포기하고 양주로 물러서자 일본군이 5월 2일에 한강을 건너 3일에 도성에 들어간 것이다.

 양주로 후퇴하였던 신각이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고 있을 때, 때마침 함경도 남병사 李渾이 그의 휘하병을 거느리고 서울로 가는 도중에 이들과 합류하였다. 신각과 이혼은 이곳에서 서울을 유린한 일본군이 인근지방에 출몰하여 약탈을 자행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양주의 蟹踰嶺에 복병을 대기시켰다가 일본군을 기습공격하여 60여 명을 살해하였다. 조선측의 피해없이 일본군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둔 일은 일본군의 부산상륙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서울에 차례로 들어온 일본군은 대오를 재정비하고 작전회의를 거친 후 각 부대의 진로를 숙의하였다. 이 회의에서 소서행장의 부대는 평안도, 가등청정의 부대는 함경도, 흑전장정의 부대는 황해도로 진로를 정하는 한편, 서울을 지키는 부대와 강원도·전라도·경상도방면에 침입하거나 후방의 안전을 꾀하기 위한 부대를 두기로 하였다.

 조정에서는 일본군이 서울에 침입했다는 보고를 개성에서 받아보고 다시 길을 재촉하여 평양에 이르렀다. 이 때 어전회의에서 이항복은 명에 구원을 요청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尹斗壽는 “명군이 한번 우리 나라의 경내에 들어오면 그 후에 난처한 일이 더 많아질 것이다”라는 이유로 명나라 원군의 요청을 적극 반대하였다.013) 朴東亮,≪寄齋史草≫, 임진 5월 19일 스스로의 힘에 의하여 일본군을 무찌르려는 그의 정신과 선견지명은 높이 평가받아야 할 것이지만, 상황은 이미 조선의 힘으로 일본군을 물리칠 수 없는 지경에 다다르고 있었다.

 도원수 김명원이 후퇴를 거듭하여 임진강에 이르자 조정에서는 도순변사 韓應寅으로 하여금 평안도 정병 3천과 합심하여 일본군을 맞아 물리치도록 하였다. 그러나 5월 15일 조선군은 임진강변에 도착한 소서행장 등과 대치하 고 있다가 18일 기습을 시도했으나 도리어 일본군에게 패배하여 申硈·劉克良 등의 장수와 많은 병사를 잃었다. 따라서 임진강의 방어선이 무너지고 일본군은 5월 27일 임진강을 건너게 되었다. 임진강전투의 패보에 접한 조정 에서는 마침내 李德馨을 구원사로 삼아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기로 결정하였다. 일본군은 조선이 포기한 개성에 들어온 다음 6월 1일 이곳을 출발하여 황해도 安城驛에 이르러서 가등청정은 함경도로, 소서행장은 평양으로 향하였다.

 왕의 서천은 처음부터 확고한 계획에 따른 것이 아니었으나 일차적으로 목적지는 평양이었다. 그러나 북상해 오는 일본군의 그칠 줄 모르는 침략의 위세에 조정의 논의는 구구하였다. 함흥으로 또는 강계로 피하자는 논의와 평양을 사수하자는 주장이 서로 맞섰다. 그러나 평앙을 사수하자는 윤두수와 유성룡 등의 주장이 관철되어 우의정 윤두수에게 도원수 김명원과 순찰사 이원익을 거느리고 평양을 지키도록 명하였다.

 이러한 조정의 평양방어 결정은 불안 속에 나날을 보내고 있던 평양성민을 안정시키고 군사와 합심하며 성을 지키려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그러나 평양성의 사수결정은 왕의 확고한 신념에서 나온 것이 아니어서 다시 평양을 떠나고자 하였으므로 평양성 내의 백성들이 성을 빠져 나가는 등 성내가 어수선하게 되었다. 이에 선조는 세자에게 명하여 “우리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곳을 지킬 작정이니 염려치 말라”고 성내의 백성들을 타이르게 하였다. 조정의 이러한 조치로 백성들이 다시 성안으로 모여들게 되었고, 식량의 확보를 위하여 가까운 고을에서 조세미를 반입하여 평양성의 창고에 10만 석을 비축하였다.

 이와 같이 평양성의 방비가 진행되는 동안 일본군의 북상은 멈추지 아니하고 대동강 연안에 이르게 되어 조정에서는 다시 북행을 결의하였다. 조정의 평양 이탈은 평양성민의 분노를 자아내었다. 이들 중 위정자의 무능과 무책임에 격분하여 난을 일으키려는 불온한 움직임이 있었고, 성밖으로 나가려는 궁녀들과 대신들의 길을 막고 구타하는 불상사도 있었다.

 윤두수 등에게 평양성의 방어를 명령하고 왕의 일행은 6월 13일 평양을 떠나 肅川·安州를 거쳐 寧邊에 이르러 함경도로 가려고 하다가 이항복·이덕형의 의견에 따라 의주로 향하였다. 조정의 대신들은 이와 같이 평양을 떠난 후에도 어디로 향해서 가야 할 것인지 계획조차 없었다. 왕은 博川에 이르러 지금까지의 정치적 잘못을 뉘우치고 分朝의 뜻을 굳히고 군국의 대권을 세자인 광해군에게 맡기려 하였다.

 왕의 일행이 定州에 머물고 있을 때 평양성 함락의 패보를 받은 왕은 세자와 다른 방면으로 분리행동하는 이른바 분조의 뜻을 결정한 다음 광해군에게 廟社의 신주를 받들고 江界를 목표로 나아가게 하고 각 지방에 근방의 군사를 징모하도록 하였다. 왕의 일행은 嘉山·정주·龍川을 거쳐 6월 23일 의주에 이르러 의주목사의 거소를 행중으로 정하였다.

 평양성을 지키고 있었던 윤두수와 김명원은 6월 13일 소서행장의 일본군이 대동강에 이르자 다음날 새벽에 정병들을 뽑아 일본군에게 기습을 시도했으나 도리어 패배를 당했다. 그리하여 평양성의 방어선도 무너지고 비축했던 막대한 군기와 화약 등의 군수물자를 못 속에 버리고 후퇴하였다. 이 평양성의 失陷으로 조선의 운명은 붕괴 직전에 놓이게 되었다.

 이제 조정에서 최후로 의지하고자 한 것은 명나라의 구원병이었다. 임진란 이 발발하자 조선에서는 명나라 요동도사에게 일본군의 침공을 급히 보고하였고 개성에서 평양으로 북행이 결정되면서 韓潤輔를 요동에 보내 재차 전황을 급보하였다. 이 때 佟養正(寬奠堡副總兵)이 원군의 요청에 응하여 5월 19일 義順館에 와서 의주목사인 黃璡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가겠다는 뜻을 말했으나 황진은 조정의 뜻을 몰랐기 때문에 이 제의를 거절하였다.014) 李烱錫,≪壬辰戰亂史≫上(壬辰戰亂史刊行委員會, 1974), 230쪽.

 왕이 서울을 떠난 후 임진강의 수비가 위태로워지자 조선은 명나라에 사태의심각성을 알리고 재삼 구원군을 요청하는 특사를 보냈다. 그러나 명나라에서 아무런 원군에 대한 소식이 없자 왕은 가산에서 정주에 이르러 다시 군신과 의논하였고 윤두수 등 일부 대신의 반대가 있었으나, 앞에서 말했듯이 이덕형을 원병을 구하는 특사로 결정하였다. 구원병의 요청이 거듭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명나라에서 이에 쉽게 응하지 않은 이유는 명나라가 寧夏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골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반란을 진압한 후에도 원병의 요청에 주저하였던 것은 임진란 전에 조선과 일본이 합세하여 명나라를 침공하리라는 유언비어가 퍼졌고, 난이 발발하자 순식간에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접한 명나라로서는 조선이 쉽게 무너진 것에 대해 강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명나라는 요동지방의 방비강화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사태의 추이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앞에 말한 퉁양정이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가겠다는 제의는 명나라의 공식적 입장이 아니고 요동도사의 독단적인 행동이었으며 다분히 탐색적인 성격으로 보여진다.

 영변에서 왕의 일행과 헤어진 세자는 우의정 兪泓·우찬성 崔滉 등을 거느리고 함흥으로 가다가 일본군이 관북으로 직행한다는 정보를 듣고 孟山 楚川驛을 거쳐 伊川에 이르렀다. 이 이천분조에서 세자는 의병장 金千鎰에게 手書를 보내 그의 창의를 칭찬하고 각 도에 격문을 보내 모든 군읍에 효유하여 토적부흥의 뜻을 밝히도록 하였다. 세자 일행은 8월 4일 宣川으로 이동했으며 그간 朔寧에 와 있던 成渾을 부르는 등 애국지사의 분기를 촉구하였다. 이와 같이 의주에서는 명나라의 원군요청에 주력하였고 분조에서는 국내의 勤王之士의 분기를 촉구하려는 데 진력하고 있었다.

 조정의 적극적인 외교에 의하여 명나라에서는 7월에 遼東副總兵 祖承訓으로 하여금 정병 3천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서 조선을 구원하도록 하였다. 명나라의 원군소식은 조정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 백성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이리하여 조승훈의 명군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도원수 김명원의 관군이 참여한 제1차 평양수복작전이 전개되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런데 제1차 평양수복작전 후 조선 관군 단독으로 제2차 평양탈환작전이 8월 1일에 순찰사 이원익의 지휘하에 감행되었다. 이 작전도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지만 조선의 관군이 일본군은 적극적으로 공격하였다는 사실은 주목해야 할 것이다. 전란 초기에 일본군에게 연전연패를 거듭했고 그들의 공격이 있기도 전에 후퇴만 했던 관군이 이제는 선제공격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군의 변모는 초기 일본군의 기습에 패퇴를 거듭하였으나 조선 수군의 선전과 적의 후방을 위협하고 있는 의병의 활동, 그리고 상징적이기는 하지만 명군의 내원에 크게 고무되어 일어났다.

 제2차 평양전을 계기로 조선 관군은 재건되어 본래의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을 실증한 것이 제1차 진주전의 승리와 정주의 대승리였다. 선조 25년(1592) 10월 일본군은 전라도에 침입하고자 그 교통의 요지인 진주를 점령하려고 하였다. 加藤光泰(가토 미츠야스) 등이 이끄는 약 3만 명의 일본군은 김해를 출발하여 진주성을 공격하여 왔다. 이 때 진주목사 金時敏과 판관 成守慶·昆陽郡守 李光岳 등 진주성을 지키는 군대 8,600여 명은 6일간의 격전 끝에 적을 격퇴시켰다. 그런데 진주성을 지키는 소수의 조선군이 일본의 대군을 패퇴시킨 것은 郭再祐·崔慶會·李達·崔堈·任啓英 등의 의병장과 固城縣令 趙凝道 등의 관군이 성밖에서 후원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진주전에서 일본군은 약 3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쉽게 승리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성중의 굳센 저항과 성 외곽의 의병과 관군이 오히려 그들을 공격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게 하여 후퇴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으니 임진란 발생 후의 대승이라 아니할 수 없다.

 9월에 전라도순찰사로 승진한 權慄은 수원의 禿山城에 주둔하였다가 명나라의 원군과 호응하여 서울을 탈환하고자 助防將 趙儆과 함께 이듬해 9월 幸州山城으로 진을 옮긴다. 이 때 일본군은 제3차 평양전에서 패퇴하여 서울로 후퇴중이었다. 그들은 비록 碧蹄館에서 명군을 패퇴시켰으나 다시 북상할 능력이 없었고 그런 계획은 염두에도 없었다. 또한 가등청정의 군대도 조선 관군과 의병의 압력에 견디지 못하여 계속 남쪽으로 후퇴중이었다. 권율은 전라도병사 宣居怡에게 금천(지금의 시흥)에 주둔하면서 성원케 하고 강화도에 머물고 있었던 倡義使 김천일에게 해안을 따라 출전케 하였다. 그리고 충청감사 許頊은 통진에 머물게 하고 별도로 충청수사 丁傑에게도 임무를 맡겼다. 조선의 총 병력은 약 1만이었는데 권율은 조경과 僧軍將 處英 등 약 2,300 명과 함께 행주산성에 머물고 있었다. 이에 대해 일본군은 宇喜多秀家(우키다 히데이에)를 총지휘관으로 하는 3만의 군대를 3진으로 나누어 2월 12일부터 행주산성을 공격하였다. 조선군은 권율의 지휘하에 잘 싸웠고 邊以中이 만든 火車와 飛擊震天雷 그리고 銃筒의 화약무기를 동원하여 화력으로 그들을 압도하고 수차에 걸친 육박전에서도 번번히 적을 격퇴하였다. 행주에서 아군이 승리한 이후 일본군은 다시 서울 이북에 출병할 수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서울에서 철수를 서두르게 되었다.

 한편 이보다 앞서 이미 선조 25년 6월 소서행장의 제의에 의하여 대동강 상에서 이덕형과 柳川調信(야나가와 시게노부)의 휴전회담이 이루어진 뒤 8월 에 沈惟敬과 일본군의 회담이 평양에서 성립되어 평양 북방 斧山院에 말뚝을 세워 이를 경계로 하는 휴전협정을 맺게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3월 다시 열린 용산회담의 결과 일본군은 서울에서 남해안으로 철수하고 포로가 된 臨海·順和 두 왕자를 돌려 보냈다.

 조선은 끝까지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회담을 반대하였으나 이를 관철시키지 못하였다. 명나라는 외정에 따른 막대한 전비부담과 희생을 최소화하려는 의도였고 일본군은 연이은 수군의 패전 그리고 조선의 관군과 의병의 공격을 받아 보급에 위협이 가중되어 전선을 후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양국의 사정으로 강화회담이 진전되어 일본군은 남쪽으로 철수하고 명군도 주력 부대를 철수하여 이후 5년간 소강상태가 계속되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