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Ⅰ. 임진왜란
  • 2. 왜란의 발발과 경과
  • 3) 수군의 승첩
  • (1) 임란 전의 해방체제와 전라좌수군

(1) 임란 전의 해방체제와 전라좌수군

 임진왜란 해전에서 일본수군을 격퇴하여 制海權을 장악한 조선의 수군은 전라좌·우수군과 경상우수군이었고, 특히 그 주력은 이순신이 이끈 전라좌수군 이었다. 따라서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라좌수군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조선 전기의 수군제도부터 파악하여야 할 문제이므로 여기에서는 당시의 海防體制와 수군실태를 살펴본 다음 임진왜란 직전의 전라좌수군의 움직임이 어떠하였는가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船軍·驥緖軍 등으로 불러온 수군이 제도적으로 정비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말이었다. 우왕 때부터 전라도의 수군정예자를 선발하여 도성의 관문인 喬桐과 江華에 정착케 하여 구분전을 지급하였고, 공양왕 때 海島人을 召募하여 3丁을 1戶로 하는 水軍充定의 원칙을 세우고 각 도 연해의 경작지에 대해 면세조치를 취함으로써 처음으로 전국적인 규모로 수군제도를 확립하였다.021) 李載龒,≪朝鮮初期 社會構造硏究≫(一潮閣, 1984), 116∼117쪽. 조선 초기에 들어와서는 태조 때부터 軍籍이 작성된 후 태종 때에 軍船加造策이 이루어지는 등 해방체제의 정비에 보다 구제적인 정책적 노력이 기울여졌다. 한편 水軍抄定 방법에 있어서는 아직 뚜렷한 원칙이 제시되지 못한 것으로 보아 고려말의 전통을 이어 여전히 연해지역민이 抄軍의 대상이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022) 朴炳柱,<朝鮮朝 水軍定額 및 水軍役攷>(≪論文集≫17, 麗水水産專門大, 1983), 156쪽. 그러나 일정한 자질을 갖춘 수군의 인적 자원은 처음부터 제한되어 있었으므로 반드시 연해민이나 해도인만이 수군으로 충원된 것은 아니었다. 먼 곳의 山郡人이 충원된 경우도 있었으며, 특히 水軍役의 기피현상이 두드러지면서 軍額 확보가 어려워지자 천인계층이나 죄를 지은 사람으로 충당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성종 때부터는 水軍世傳의 원칙을 법제화하기에 이르렀으나 이것 또한 철저히 지켜질 수가 없었다.023) 方相鉉,≪朝鮮前期 水軍制度≫(민족문화사, 1991), 36∼37쪽.

 이와 같이 해방의 기본이 되는 수군병력조차 확보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곧 임진왜란 전에 조선왕조의 수군제도가 근본적으로 완비되지 못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비단 수군만의 문제가 아니라 陸守軍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군역만 있었을 뿐 실제로 군사가 없는 상태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이다. 성종 때 이미 군역의 布納化가 실시되어 番上·入番의 군사를 代立·放歸시키는가 하면 정부가 代立價를 公定하기까지 하였고, 지방수령이나 병사·수사가 留防 대상에게 군포를 거두면서 자의로 군역을 면제시키는 水軍收布가 공공연히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024) 陸士韓國軍事硏究室,≪韓國軍制史≫近世朝鮮前期篇(陸軍本部, 1968), 201∼253쪽.

 이렇게 되자 해상방위을 전담한 수영에서도 수군병력을 보유하지 못하여 정기적으로 실시되는 水操訓鍊은 군사를 임시로 고용하여 형식적인 훈련에 그칠 뿐이었다.025) 柳彭老,≪月坡集≫권 1, 壬辰上疏. 육군에 비하여 훨씬 고역이었던 수군은 군역 자체에 더욱 큰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經國大典≫에 규정한 대로 육상의 番上·留防正兵이 四番輸次制에 의해 각각 3개월씩을 복무한 데 비하여 수군은 「二番一朔相遞」로서 매년 6개월씩을 복무하는 과중한 군역을 떠맡아야 했다. 뿐만 아니라 수군은 漕運·屯田·宮闕修築·築城 등 온갖 잡역에까지 동원·사역되었고 이 때문에 수군역의 기피와 유망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다.026) 方相鉉, 앞의 책, 86∼97쪽. 그리하여 다소 부유한 자들은 군적을 작성할 때부터 뇌물을 주어 모두 빠져나가서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만 남았다가 결국 유망함에 따라 마침내 기본병력을 채울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실정에서도 정부가 수군의 정비와 해상방위에 대한 적극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않은 데에는 또 다른 원인이 있었다. 일찍부터 국방 책임자들이 조선의 수군으로는 해상에서 일본군을 막아내기 어렵다고 속단함으로써 처음부터 육상방위에 주력할 것을 고집해 왔던 것이다. 이는 조선 초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까지 일관된 흐름이었다. 즉 일본군이 해전에 능한 반면에 조선측은 육전에 능한 것으로 오판하여 적이 쳐들어올 경우 그들을 육지로 끌어올려 대적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027)≪世祖實錄≫권 6, 세조 3년 정월 신사.
≪宣祖修正實錄≫권 25, 선조 24년 7월.

 그러나 해상방위에 대한 기본인식이 이와 같았는데도 불구하고 뒷날 조선 수군이 승리한 원인과 관련된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세조 때부터 제도화되어 국방체제의 근간이 되어온 鎭管體制가 을묘왜변(명종 10;1555)을 전후한 시기에 制勝方略이란 새로운 제도로 바뀜에 따라 해방체제에도 적잖은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과거의 진관체제는 육상과 해상에서 차이가 있었다. 육상의 진관체제는 지방행정 단위인 읍 자체를 군사조직 단위인 鎭으로 편성하여 각 읍의 수령으로 하여금 군지휘관으로서의 임무를 겸하게 하였지만, 수군의 경우에는 행정 구획과 관련시키지 않고 연해지역 요해처에 설치된 수군진만을 묶어 진관조직으로 편제하였다.

 다시 말하면 육군의 경우에는 군사가 거주하는 바로 그 읍이 곧 그들의 소속진이 되었지만 수군에 있어서는 수군진 가까이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현지의 수군부대에 소속되지는 않았다. 즉 진관체제 밑에서는 수군이 연해안의 각 鎭浦에만 소속되었지만 이제는 연해지역 각 읍에까지 수군기지를 설치하여 수사 관할하에 둠으로써 종전의 해방체제를 크게 바꿔놓은 것이었다.028) 제승방략의 제도는 연해제읍의 수군편제와 직접 관계되었다(李恒福,≪白沙集≫권 6, 以都體察使在湖南事宜劃一箚). 이것은 삼포왜란 이후 자주 일어난 왜변으로 인해 취해진 해방강화책이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연해지역 전역을 수군 관할구역으로 묶어서 평소에 바다와 선박에 익숙한 주민들을 현지의 수군으로 편성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제승방략의 分軍法이 채택된 이후의 수군제도는, 물론 법제적으로 종전과 다른 뚜렷한 원칙이 성문화된 것은 아니지만, 그 편제와 수군충당의 방법에서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분명하다. 연해지역에 거주하는 다양한 신분계층이 여러 가지 형태의 수군병력으로 편성되어 해상방위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임진왜란 당시 해전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鮑作·土兵·私奴·寺奴 등 수군 관할구역내의 하층민들이 광범위하게 수군조직의 하부구조를 이루었던 사실이 그것을 입증해 준다. 특히 그 중 포작과 토병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장건하고 활을 잘 쏠 뿐 아니라 舟楫에 익숙한 군사들”029)≪李忠武公全書≫권 2, 陳倭情狀.이라고 평가하였을 만큼 강한 전투력을 갖춘 해전의 용사들이었다. 포작은 일정한 거처없이 해상을 떠돌면서 고기잡이로 생계를 영위하던 천민신분으로, 전라도에서 을묘왜변이 있은 직후부터 이들을 해상방위의 보조병력으로 활용코자 하였고,030) 李浚慶,≪東皐遺穚≫권 7, 答上兄書.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이순신이 전라좌수영에서 46척에 달하는 포작선을 동원하였을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비정규군이 임란 전에 이미 전라도의 수군편제에 연계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그것이 훗날 수군이 승첩하는 한 요인으로 작용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왜란 발발 1년 전인 선조 24년(1591) 2월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였다. 그는 평소 말이 적고 웃음도 적은 과묵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관로에 오른 후 직무원칙에 어긋난 일이 있을 때면 결코 용납하지 않아 상사와의 관계도 소원하거나 서로 화합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그가 관력 15년이 되도록 말단의 현감직에 머물러 있었던 까닭도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평생지기이면서 당시 우의정으로 있던 柳成龍의 추천에 의해 하루아침에 정3품관인 수군절도사로 발탁되었다. 특히 유성룡은 전란이 일어나기 직전에≪增損戰守方略≫이란 병서를 구하여 이순신에게 보내준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은 이순신 자신이 만고에 기이한 병서라고 그 내용에 감 탄하였듯이 水陸戰의 火攻戰法 등 갖가지 전술이 기록된 책이었다고 하니031) 李舜巨,≪亂中日記≫, 임진 3월 5일. 이것은 곧바로 벌어진 해전에서 그에게 큰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순신은 전라좌수사가 되기 전에 전라도순찰사군관 겸 선전관을 거쳐 정읍 현감을 지냈으므로 전라도 사정에 대하여 비교적 밝았을 것이다. 특히 선조 13년(1580) 7월부터 이듬해 정월까지 그가 鉢浦萬戶로 있었던 점을 감안할 때 전라좌수영 관내의 전반적인 실정에 대해서도 이미 상당한 이해가 있었으리라 믿어진다. 이러한 것은 그가 전라좌수군을 지휘하고 통솔하는 데 있어서 적잖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며, 수영 가까운 곳에 그의 모친을 봉양할 수 있었던 것도 그와 같이 안정된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후 이순신은 먼저 각종 군기와 군사시설을 점검하고 번갈아 들며나는 군사들을 점고하는 등 일본군의 침략에 대비하기 시작하였다. 군기를 검열한 결과 관리상태의 부실이 발견되었을 경우에는 소속 수군진의 담당 色吏는 물론 弓匠·監考까지 처벌하였으며, 일개 토병이 작업중 민폐를 끼쳤다 하여 엄벌하였을 뿐만 아니라 탈영자는 즉시 목을 베어 효시하였을 정도로 엄격한 군율을 적용하였다. 선조 25년 2월 하순에는 관내 諸鎭을 순시하며 군비상태를 점검하여 鹿島를 위시한 각 진의 전투준비가 대체로 맞추어져 있음을 확인하였으나, 蛇渡鎭에 많은 결함이 있자 이에 대하여 철저한 사후조 치를 취하기도 하였다.032) 李舜臣,≪亂中日記≫, 임진 정월∼3월 기사 참조. 왜란이 임박할 무렵까지 그가 군비를 갖추는 데 가장 관심을 쏟은 것은 거북선 건조문제와 수영 앞바다에 가설한 鐵鎖裝置였다. 철쇄설치는 3월 하순경에 완료된 것으로 보이며, 거북선은 일본군의 침공 직전인 4월 11일에 帆布 제작을 끝내고 다음날 선상에서 地字砲와 玄字砲를 시험발사하였다. 이로써 수사 이순신이 부임한 후 1년간에 걸쳐 전라좌수군은 적침에 대비한 방어태세를 모두 완료한 셈이었다.

 다시 말하면 전라좌수군의 경우 을묘왜변 이후에 도입된 새로운 해방체제에 의해 좌수영 관내에 거주하는 다양한 신분층의 광범위한 수군병력을 확보하였으며, 아울러 이순신이 부임한 뒤 수사의 행정력을 총동원하여 전선·화포 등 가능한 모든 군비를 갖춘 다음 임진왜란을 맞이하였다고 할 수 있다. 선조 25년 4월 15일 전라좌수군은 마침내 경상우수사 元均으로부터 최초의 變報이 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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