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Ⅰ. 임진왜란
  • 2. 왜란의 발발과 경과
  • 3) 수군의 승첩
  • (3) 조선 수군의 승리 요인

(3) 조선 수군의 승리 요인

 무모한 침략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임진왜란을 실패로 끝낸 결정적인 요인의 하나가 그들 수군의 패배에 있었다는 사실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045) 이에 대해서는 일본 학자들의 견해도 동일하다. 예컨대 德富猪一郎이 풍신수길의 오판으로 일어난 전쟁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주 요인으로서 조선의 「의병봉기」와 「수군의 우세」 그리고 「명나라 군대의 來援」 등을 지적한 것은 그 한 예이다(德富猪一郎, 앞의 책, 601∼605쪽).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조선 수군이 해상에서 적을 완벽하게 제압할 수 있었던 요인이 무엇이었는가를 밝히는 문제이다. 조선 수군의 총수로 활약했던 이순신이 임진왜란 해전사에서 차지하는 위대한 전공을 가장 높이 평가하는 데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다만 그의 휘하에서 악전고투를 계속했던 수많은 수군 장졸들의 역전의 공과 그들의 희생 그리고 수군의 전쟁준비를 뒷받침하기 위해 실전의 군사들 못지 않게 고통을 치렀던 연해지역 민중의 희생을 빼놓고 말한다면 성웅으로 극대화한 이순신의 전공이란 결국 공허할 뿐이다.

 그리고 해전을 승리로 이끈 요인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조·일 양국의 수군제도나 전선의 성능을 포함한 각종 화력의 우열성이 비교되어야 하고, 실전을 수행한 병력 실체와 그 전투력도 함께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이미 드러난 사실이지만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에 비해 편제·선박·화력에 있어서 모두 우월하였다. 일본선의 船底는 V형으로 원양 항해에는 유리하였으나 전투할 때 급히 방향을 바꾸기가 힘들었고, 조선 군선은 크고 견고하였으며 선저가 U형이어서 기동력이 뛰어났다. 또 일본 수군은 선에 뛰어올라 싸우는 육박전에 능했으나 조선 수군은 전선에 대포를 적재하였고 天·地·玄·黃字의 총통과 碗口 등 각종 철포까지 적재하였으며 弓箭으로서 神機箭·火箭 등을 보유하여 화력에서도 일본 수군을 압도하였다.046) 趙成都,<委辰倭亂時 朝·日軍事力比較>(임란 4백주년 학술세미나 발표요지, 한국문화재보호협회, 1992). 아울러 실전이 펼쳐진 해역의 조건을 이용하는 데에도 關防이라 불리운 지형지물, 즉 서남해 해상의 많은 해안 굴곡과 潮水 등을 교묘히 활용할 줄 알았던 것도 조선 수군이 해전에서 승리한 요인의 하나로 작용하였다.047) 許善道,<壬辰倭亂에 있어서의 李忠武公의 勝捷-그 전략적 전술적 의의를 중심로->(≪韓國學論叢≫3, 國民大 韓國學硏究所, 1980), 300쪽. 이와 같이 해전의 승패에 영향을 준 구체적인 요인들이 보다 소상히 밝혀져야 조선 수군의 승리요인을 바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우선 양측의 기분전력을 비교해 볼 때 일본측에 비해 조선측의 수군제도 자체가 우위에 있었다는 점부터 확인해 둘 필요가 있다. 앞에서 본대로 임진왜란 전부터 이미 조선의 수군제도는 직접 바다에 접한 연해지역 총동원체제와 흡사한 군사제도였다. 전라도 수군의 경우에 나타난 편제를 보면 도내 연해지역의 지방행정과 연계, 체제상 그것과 일치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평상시 연해지역 諸鎭의 첨사나 만호, 혹은 현감·군수 등이 주로 일상의 대민행정을 담당하지만 유사시에 대비하여 모두 전시배치가 정해져 있었으며 水操와 같은 동원훈련이 있을 때에는 현지 주민들을 인솔하여 수영에 집결했던 것이다.048) 有馬成甫, 앞의 책, 158쪽. 따라서 임진왜란 때에도 실전에 참가한 대부분의 해상병력이 바다와 舟楫에 익숙한 연해지역의 주민들로 편성된 것이 사실이다. 바꿔 말하면 조선 수군은 처음부터 해상에 대한 적응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그만큼 안정된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반하여 일본수군의 경우에는 사정이 전혀 달랐다. 사실상 당시의 일본인들은 그들이 섬나라 사람이란 것 외에는 바다를 거의 모르고 있었고, 조선 침략전쟁 전에 해전을 치러본 경험이 없었으므로 임란 해전에서 아무런 능력도 발휘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049) 이에 대한 일본인 학자의 표현을 빌어보면, “당시의 일본인들은 거의 완전한 육상동물이었다. 그들은 호랑이를 물속에 던져놓은 것과 같은 모양이 되어 해전에서는 그 능력의 십분의 일도 발휘할 수가 없었다”라고 하였다(德富猪一郎, 앞의 책, 668쪽). 당시 일본측의 수군이란 그 이름과 소속만 육군과 차이가 있었을 뿐 전투기능상에 있어서 특별한 차이가 없었고, 협판 안치와 같은 수군 소속의 장수들이 한때 육전에 참가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수군의 기능과 역할을 극히 도외시했던 풍신수길은 임란 전에 있었던 九州정벌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조선침략전에서도 수군에게는 수송업무의 감독이나 운송선의 원호 외에는 거의 임무를 부여하지 않았다.050) 有馬成甫, 앞의 책, 11쪽.
德富猪一郎, 위의 책, 671쪽.
풍신수길은 사전에 해상전투가 있을 것을 예상조차 못하였으며, 이것은 곧 조선의 사정을 그만큼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조선측과는 달리 제도적 수군양성이 전무한 상태에서 무모한 침략전쟁을 일으켰으므로 그 결과는 자명하였다.

 일본 수군이 옥포의 서전에서부터 연전연패할 수밖에 없었던 또 하나의 요인은 전선과 화력의 열세였다. 일본 선박은 선체가 좁고 낮았을 뿐 아니라 매우 취약하여 풍랑을 만나면 곧장 해체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돛대 또한 순풍이 아니면 사용하기 어려운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또한 조선측의 판옥선과 비교할 경우 마치 완구와 실물의 차이 정도로 비유될 만큼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051) 德富渚一郎, 위의 책, 609∼610쪽. 게다가 양측 화력의 우열도 현저하였다. 일본 수군이 전선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경쾌한 유람선이라고 해도 좋을 선박에 조총을 주무기로 한 데 대하여 조선 수군의 판옥선은 선체가 높으며 크고 육중한 데다가 선상에 大口徑의 각종 화포를 설치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수군은 원격전에서는 화포를 이용하여 적을 공격하고 근접전에서는 전선으로 적의 전선을 부딪쳐 깨뜨리는 전법을 구사하였다.052)≪宣祖實錄≫권 206, 선조 39년 12월 무자.
≪李忠武公全書≫권 14, 紀實 下 和國志.

 그런데 종래 해전승첩의 주된 요인의 하나로 인식되어 온 거북선의 위력이란 것은 사실과 달랐다. 우선 그것은 모두 3척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 중에서도 초기 해전에 동원된 것은 2척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裝甲船이란 점에서 射夫들이 전투하는 데에 불편하였으며 판옥선에 탑승한 군사들에 비하여 사상자도 많았다.053) 조선측의 戰船監造軍官이었던 羅大用이 “거북선은 射夫가 활동하는 데에도 불편하였다”(≪宣祖實錄≫, 위와 같음)라고 증언한 것과, 이순신의 장계 가운데 거북선이 최초로 동원된 2차 출전 때부터 4차 출전 때까지 전라좌수군의 사상자는 모두 165명이었는데 그 중에 두 척의 거북선에 탑승한 사상자가 24명이었다. 이것은 판옥선 23척의 사상자 통계 141명과 비교해 볼 때 거북선에 탑승한 군사들의 피해가 훨씬 컸음을 말해 준다. 만일 거북선의 위력이 대단하였다면 정유재란 이전 휴전기에 단 한 척이라도 더 건조되었어야 했을 텐데 그렇지 않았으며, 명량해전에서는 보이지도 않았던 사실만으로도 그것의 위력이 지나치게 과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조선 수군의 전력은 실전을 수행한 군사들의 전투력에서도 월등하였다. 수군병력의 대부분이 해전에 강한 해안지방의 토착민이란 점도 작용하였지만, 특히 수군편제 안에 연계된 비정규적 토병제도 전투력 증강에 적잖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평상시 수영 가까운 곳에 거주하였던 토병들은 전시에 수군진에 전속된 일종의 傭兵的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054) 土兵이란 비정규군으로서≪경국대전≫에도 명문화되지 않은 존재이나 변방의 각 鎭堡에 설치되었던 특수군이었다. 토병이 될 수 있는 자격은 그 고장에서 生長하여 현지의 지리뿐만 아니라 敵情을 파악할 수 있는 자라야 가능했다. 그리고 토병은 처음에 주로 함경도와 평안도의 국경지대에 설치되었으며 赴防을 조건으로 하여 最戰哨基地에서 경작지를 지급받아‘且耕且戍’하면서 영주하였다. 따라서 일종의 용병적 성격을 띤 존재였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이에 대한 기존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영호남의 남방에 있어서는 거론만 되었을 뿐 이 제도가 실시되지 않은 것으로 파악하였다(李章熙,<朝鮮前期의 土兵에 대하여>,≪藍史鄭在覺博士古稀紀念 東洋學論叢≫, 1984). 이같은 토병의 존재는 전라좌수군의 예를 통하여 확인되는데 분명한 것은 임진왜란중 조선 수군이 기능적 특수군까지 갖춘 상태에서 일본군을 격퇴하였다는 사실이다.

 이와 함께 지금까지 거의 밝혀지지 않은 것으로서 조선 수군의 전력을 보강한 또 다른 요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라도 연해지역의 전직관료·무과출신·유생·승려 등 다양한 신분계층의 인사들이 병역과 관계없이 자발적으로 해전에 참가하였다는 점이다. 육상에서 의병이 일어난 것과 같이 해전에서도 해상에 익숙한 연해민들이 봉기하여 수군과 결합하였으니, 해상의병이 바로 그것이다. 해전은 육전과 달라서 전선과 특수한 장비를 갖추지 않고서는 아예 전투가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해상의병의 대부분은 육상의병과 달리 독자적인 활동을 편 것이 아니라 수사 휘하에 들어가 활약하였다.

 전라좌수영을 중심으로 일어난 해상의병의 움직임이 활발해진 것은 전라좌수군이 몇 차례의 해전을 치르고 난 후인 선조 25년(1592) 7월 이후의 일이었다. 당시의 상황은 옥포해전으로부터 한산도해전에 이르기까지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완전히 제압함으로써 해전에 자신감을 갖게 된 동시에 그간의 병력손실로 인해 상당한 충원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8월에 들어서서 전라좌수 사 이순신은 수영 관내의 제읍에 격문을 띄워 의병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개월 만에 순천·흥양·광양 등지에서 4백여 명의 승려들이 달려와서 결집하였고 진사·한량·校生 등 향반층에서도 의병을 이끌고 모여들었다. 이 들은 모두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지휘통제하에 들어가 직접 해전에 참전하거나 해안지역 요해처를 지켰다.055) 趙湲來,<壬辰倭亂과 海上義兵>(≪擇窩許善道先生停年紀念 韓國史學論叢≫, 一潮閣, 1992).

 이와 같은 해상의병의 활약에 대하여 조선 수군의 총수였던 이순신은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이번 난리통에 자신들의 편안함을 돌보지 않고 義氣激發하여 군사를 모아 각기 수백여 명을 인솔해 와 나라의 수치를 씻으려 하니 참으로 가상하다. 해상에 진을 친 뒤 군량을 스스로 준비하여 두루 공급하면서 어렵게 이어 댄 노고의 情狀은 관군 보다 배나 더함이 있었는데 아직도 그 수고로움을 꺼리지 않고 더욱 힘쓰고 있다. 지난날 전투에서 적을 치는 데 있어서도 뚜렷한 전공을 남겼으며 여전히 나라를 위한 충의심에 변함이 없으니 극히 가상할 일이다(≪李忠武公全書≫권 4, 請賞義兵諸將狀).

 이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2년 뒤에 順天校生 출신의 의병장 成應祉와 의 승장 守仁·義能 등의 활동에 대한 포상을 요청한 글 가운데 일부이다. 해전 에 자원하여 군량을 스스로 마련하면서 떨친 의병의 의기와 전공이 정규군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강조한 것으로 보아 조선 수군이 제해권을 장악함에 있어서는 해상의병의 역할도 작지 않았음을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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