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Ⅰ. 임진왜란
  • 2. 왜란의 발발과 경과
  • 5) 조·명군의 반격과 전국의 추이
  • (1) 조선 관·의병의 활약

(1) 조선 관·의병의 활약

 일본군의 주력부대인 소서행장군이 개전 2개월만에 평양성까지 점령하였지만, 행재소가 위치한 의주를 눈앞에 둔 상황에서 더 이상 북침을 계속할 수 없었다. 옥포해전 이후한산도해전에 이르기까지 거듭된 해상전투의 패배로 인해 조선측에 해상권을 빼앗기면서 보급선이 차단되기 시작했고, 삼남지방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의 활약으로 후방이 교란당하면서 전후방의 연락망이 단절된 때문이었다. 아울러 위에서 본대로 일본군은 조승훈군의 평양성공격을 일단 저지하기는 하였으나 의외로 빠른 명군의 개입으로 남북 양방으로부터 위협을 받는 국면에 처하였다고 느끼고 있었다.

 한편 조선측은 6월초, 큰 기대를 모았던 전라·충청·경상도의 三道勤王 兵이 용인전투에서 패산된 후 경상도와 전라도를 중심으로 일어난 의병에게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이 때 이미 경상도 의령을 거점으로 하여 일찍부터 의병운동을 시작했던 郭再祐부대가 7월 중에 의령·현풍·영산 일대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며 경상우도지방을 회복해갔고, 경상좌도에서도 의병장 鄭世雅·權應銖 및 경주판관 朴晋 등이 이끄는 향병의 활약으로 영천성과 경주성을 수복함으로써 영남 동부의 여러 읍을 되찾았으며 동해안으로부터 육로로 통하는 일본군의 후방 보급로를 차단시키는 개가를 올리고 있었다.081) 文守弘,<壬亂중 慶尙左道地方의 義兵活動-임진년 永川·慶州城 收復戰을 중심으로->(≪素軒南都泳博士華甲紀念 史學論叢≫, 1984), 417쪽.

 7·8월 중에 전개된 공방전에서 가장 큰 성과를 거둔 것은 전라도에 쳐들어온 일본군을 격퇴하여 곡창 호남지방을 지킨 일이었다. 먼저 광주목사 權慄이 현지의 여러 읍으로부터 군사를 모아 체제를 갖추면서 전라도 관군을 되살린 뒤 7월 중에 있은 梨峙(배재)전투에서 전주침공을 기도하던 小早川隆景(고바야카와 다카가게)군을 크게 쳐부수는 전과를 올렸다. 이 무렵 전라도 관·의병은 배재에서 뿐만 아니라 가까운 여러 곳에서 전라도 방위를 위한 혈전을 펼치고 있었다. 즉 6월 하순에 전주 인근의 任實 雲巖에서는 고경명 휘하의 남원의 병장 梁大樸의 부대가 적을 급습하여 대첩을 거두었고,082) 趙湲來,<高敬命의 의병운동과 금산성전투>(≪霽蜂의 사상과 구국정신≫-향토문화의 탐구 조선명현연구 Ⅲ-, 광주, 1992), 50∼52쪽. 배재전투와 거의 동시에 진안의 熊峙(곰재)에서는 김제군수 鄭湛·의병장 黃璞 등이 합세하여 사력을 다해 전투를 하였으며, 금산에서는 고경명의 의병군이 금산성에 주둔하고 있던 소조천융경의 주력부대와 맞붙어 처절한 의병항쟁을 펼쳤다. 배재전투의 승첩과 함께 임실·진안·금산 일원에서 관·의병이 총력전을 펼친 결과 호남지방을 보전할 수 있었으며, 이것은 곧 조선의 병참기지를 확보하여 국력 회복의 기초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조선측의 반격작전이 더욱 활기를 띤 데에는 광해군의 分朝活動의 힘도 적지 않았다. 국왕이 중신들을 대동하고 의주의 행재소에 머무는 동안 왕세자 광해군은 천신만고의 고난을 무릅쓰고 북행과 남행을 되풀이하면서 전세회복에 온갖 노력을 다하였기 때문이다. 광해군의 분조는 적은 인원과 열악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적의 후방지역까지 남하하면서 조정의 건재함을 널리 알려 민심을 진정시키고 적에 대한 항전의지를 격발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金千鎰·李廷馣 등 여러 의병장의 봉기와 그들의 활동을 고무시켰고, 巡邊使 李鎰을 맞아들여 관군의 재건에 힘쓰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해서지방의 요지인 연안 성 수복의 배경을 이루었으며 육상으로 남과 북의 명맥을 통하게 하였음은 물론이고 강화도를 중심으로 한 해로를 확보하여 의주행재소에서 삼남지방으로 나라의 기맥을 닿게 하였던 것이다.083) 許善道,<壬辰倭亂史論-壬亂史와 올바른 認識->(≪韓國史論≫22, 國史編纂委員會, 1992), 200∼203쪽.

 이와 같은 분위기에서 결국 전반의 전세는 반전되기 시작하였고 조선측 관·의병의 공세 또한 그만큼 가열되어 실지회복에 박차를 가해갔다. 그 가운데에서도 조선측이 침략군을 궁지에 몰아넣어 결정적인 전승을 거둔 것은 제1차 진주성전투와 행주대첩이었다. 진주성전투는 제해권을 상실한 일본군이 남해안지방의 거점 확보가 어려워지자 불리해진 전세를 회복시킬 목적에서 계획적으로 선제공격을 가해온 攻城戰이었다. 그들의 의도는 해안을 따라 호남지방으로 통하는 침공로를 잡아 남방의 병참기지를 확고히 장악하려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10월초 김해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은 진주성을 일거에 점령하기 위해 약 3만 병력을 동원하여 공격을 개시해 왔다. 목사 金時敏과 판관 成守慶, 그리고 昆陽郡守 李光岳 등 수성군 8,600명은 6일간의 격전 끝에 성을 굳게 지키고 적을 물리쳤는데 김시민은 전사하였다. 이곳에서 적의 대군을 격퇴할 수 있었던 것은 곽재우·崔慶會·李達·崔堈·任啓英 등 영호남의 의병군이 성 밖에서 후원하고, 현지의 군민이 일체가 되어 협동작전이 이루어진 데 있었다 이 전투가 守城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임란이 일어난 이후 대첩의 하나로 꼽히는 이유는 일본군이 3만 대군을 동원하고서도 한낱 고립된 성을 점령하지 못하고 작전상으로도 큰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패전은 당시 도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의 본영에서도 풍신수길에게 보고하기를 꺼릴 만큼 충격을 받았다. 따라서 다음해 6월 그들은 다시 진주성에서 복수전을 감행하였다.084) 崔永禧,<日本의 侵寇>(≪한국사≫12, 국사편찬위원회, 1977), 314쪽.

 선조 26년(1593) 2월 한성 근교에서 벌어진 행주산성전투는 명군의 벽제관 패전 이후 조선측 관·의병이 잘 싸워서 일격에 일본군을 섬멸한 대표적인 전 승이었다. 이 전투의 주장이었던 전라도순찰사 권율은 휘하의 군사 2천 명을 인솔하여 미리 행주산성에 진을 치고 있었고, 전라병사 宣居怡 역시 2천 병 력을 이끌고 용인의 광교산에 주둔하고 있었다. 또한 양천에서는 전라도 召募使 邊以中이, 통진에서는 충청병사 許頊이, 그리고 강화도에서는 창의사 김천일이 각각 휘하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서울탈환에 대비하여 연합전선을 구축해 두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군으로서는 명군의 공격을 사전에 저지하기 위해서는 우선 조선 군부터 퇴치해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이 조치를 행주산성에 주둔한 조선군이 명군의 도성 진공작전을 뒷받침할 목적으로 한강수로를 이용하여 명군에게 군량을 공급하기 위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므로 일본군은 3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행주산성을 공격하였다.085) 張學根,<壬辰倭亂期 관군의 활약>(≪韓國史論≫22, 1992), 93쪽. 당시의 전투상황에 대하여≪선조실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권율이 즉시 군중에 동요하지 말라는 영을 내린 뒤 망대에 올라 바라보니 5리쯤 떨어진 들녘에 적들이 가득하였다. 적의 선봉 1백여 기가 접근해 오더니 조금 후에는 1만여의 기병들이 들판을 뒤덮고 일시에 포위하며 돌격해 왔다. 우리측 군사들이 활을 쏘고 돌을 던지며 대소의 勝字銃筒 및 震天雷·紙神砲·大中發火 등 각종 화포를 잇따라 쏘는 데도 적들은 물러가지 않고 부대를 나누어 번갈아 진격해 왔다. 아침 해뜰 무렵부터 저녁 때까지 적은 3차례 진격하고 3차례 물러갔는데 그 들 전사자는 수십 명이었고 부상자도 백여 명에 달하였다. 적들이 마른 풀에 불을 붙여 바람에 날려 성중에 불을 지르면 성안 사람들이 물을 부어 이것을 껐다.… 여러 장수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힘껏 싸우니 적은 마침내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그리하여 적의 시체를 네 곳에 모으고 건초를 쌓아 시체들을 데우는 데 그 냄새가 10리 밖까지 풍겼으며, 우리 군사들이 적의 남은 시체들을 거두어서 130여 급이나 참획하였다(≪宣祖實錄≫권 35, 선조 26년 2월 기유).

 행주산성의 전투는 병력과 조직, 그리고 군사들의 전술면에서 조선측이 일본측보다 열세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화력의 운용과 군관민이 일치된 항전의식에서는 조선측이 우세하였다. 특히 성중 백성들의 民保意識은 군민의 혈전과 독전하는 장수들과의 긴밀한 협조체제를 구축케 함으로써 대첩을 거둘 수 있게 하였다. 행주대첩의 승전보가 전해지자 조정에서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명군으로 하여금 한성수복에 임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러나 명군은 조선측의 기대와는 반대로 강화교섭을 통하여 일본의 침략전쟁을 종결시키려 하였다.086) 張學根, 위의 글, 94∼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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