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Ⅰ. 임진왜란
  • 2. 왜란의 발발과 경과
  • 5) 조·명군의 반격과 전국의 추이
  • (2) 명군의 평양승첩과 전후의 행동

(2) 명군의 평양승첩과 전후의 행동

 조승훈의 요동군이 평양성전투에서 패퇴한 직후 명은 조선에 칙사를 보내 머지않아 10만 대군을 파병하겠다는 약속을 해왔다. 그러나 11월이 가고 12 월이 되어서도 명군은 압록강을 건너오지 않았다. 다만 11월 중순에 이르러 명은 출병에 대비하여,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의 병력과 병선의 규모 및 그 배치상황 그리고 조선측의 군비실태 등에 관하여 자세히 물어왔을 뿐이었다.087)≪宣祖實錄≫권 30, 선조 25년 11월 계해. 따라서 이 무렵 조선측에서는 宋應昌軍門에 글을 보내, 명의 출병이 조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명을 위한 계책임을 강조하고 출병이 지나치게 지연되고 있는 점을 지적하면서 조곡한 파병을 촉구하였으며, 선조는 스스로 압록강을 건너가서 송응창에게 직접 청병하겠다는 방안을 내놓기도 하였다.088)≪宣祖實錄≫권 30, 선조 25년 11월 임신·갑술. 그런가 하면 또 한편에서는 더 이상 명군을 기다리지 말고 자력으로 평양성을 공격하자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었다.089) 사헌부의 執義 李好閔·掌令 李時彦·持平 柳夢寅 등이 箚子를 올려 주장하기를 일본군을 섬멸하는 데 일각이 급한 시점에서 명과의 약속을 기다리다가 겨울철이 이미 반쯤 지나가 버렸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그들의 속셈은 헤아리기가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고, 따라서 近地의 朝鮮軍民 총동원체제를 이루어 分軍한 다음 추위에 약한 적의 헛점을 이용하여 평양성을 공격하자고 한 것이 그것이었다(≪宣祖實錄≫권 30, 선조 25년 11월 신미).

 그 후 12월 하순에 들어와 비로소 명에서는 李如松이 43,000여의 대군을 이 끌고 압록강을 건너왔다. 이것은 조승훈군의 평양패전으로부터 5개월여가 지난 뒤이며, 명조가 칙사를 보내 대군파병을 통고한 지 4개월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이여송은 東征軍을 인솔해 오기 직전에 「영하의 변」을 평정하여 寧夏候에 봉해지면서 무장으로서는 최고의 명성을 떨치던 인물이었다. 그는 조선에 출병하던 정월 초순부터 교전하여 정월 안에 평양을 수복하고 경성의 수복은 2월을 벗어나지 않을 것이며 나머지 도의 수복도 3월을 넘기지 않을 것090)≪宣祖實錄≫권 33, 선조 25년 12월 계묘.이 라고 공언하면서 위세를 과시하고 일본군을 얕보고 있었다.

 이여송군은 병부시랑 송응창을 經略軍門으로 하여 그의 통제를 받되, 都督 同知 이여송 자신이 提督軍務의 임무를 띠고 사실상 전군을 지휘하였다. 전군을 3군으로 편성하여 左協大將에 부총병 楊元, 中協大將에 부총병 李如栢, 右協大將에 부총병 張世爵을 임명하여 각 군을 통솔케 하고, 병부원외랑 劉黃裳과 병부주사 袁黃을 贊劃으로 삼아 12월 25일 의주에 도착하였다. 의주에서 선조를 접견한 뒤 28일 현지를 출발하여 새해 정월초 안주까지 진군하였다. 이 때 이여송은 유성룡으로부터 평양의 지리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듣고 난 후 작전계획을 구상한 것으로 보인다.091) 柳成龍,≪懲毖錄≫권 2.

 평양성을 공격하기에 앞서 이여송은 먼저 부총병 査大受를 평양 인근의 順安에 파견, 심유경의 和議使節이 온 것처럼 꾸민 다음 적진에 사람을 보내 평양 교외에서 회담할 것을 제의케 하였다. 이를 사실로 받아들인 일본측에서는 20여 명의 병사와 함께 소서행장의 裨將 平後寬(武田吉兵衛)을 순안에 파견하였다. 여기에서 평후관은 사로잡히고 그의 병사들 대부분이 죽음을 당했는데 그 중 일부가 탈출함으로써 명군의 출병사실이 비로소 일본군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일본측의 기록에 의하면 이 사건이 있기 전까지 평양성의 일본군은 명의 출병사실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을 뿐 아니라 추위에 시달리고 극도의 군량난을 겪어 옥수수만으로 연명하는 실정이었다고 한다.092) 北島万次, 앞의 책, 207쪽.

 약 15,000명의 일본군을 공격목표로 하여 개시된 평양성전투는 이여송군의 4만 병력 외에 도원수 김명원 휘하의 조선측 병력 8천 명이 가세하여 정월 6일부터 3일간에 걸쳐 전개되었다. 주로 火箭과 포격에 의한 火攻戰을 구사하여 성내 초토화작전에 성공한 명군은 불과 3주야의 교전 끝에 평양성에서 일본군을 완전히 제압하였다. 이 전투로 적병 1,285급을 참획했고 말 2,985 필에 군기 45,002건을 노획하였으며, 조선인 포로 1,015명을 구출하는 대첩 을 거두었던 것이다.093) 李肯翊,≪燃黎室記述≫권 16, 宣祖朝故事本末 求救對朝收復京城. 이 전투 결과 평양이 수복됨에 따라 이어서 개성까지 탈환하였으며 평안·황해 경기·강원 4도를 아울러 회복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무렵 함경도의 가등청정군 역시 조선의 鄭文孚軍의 공격을 받아 패전을 거듭한 데다가 개성까지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퇴거하였다.

 한편 소서행장은 평양패전 이후 잔류병력을 이끌고 밤중에 얼어붙은 대동강을 건너 황해도 鳳山城으로 패주하였다. 그러나 봉산성에 주둔하고 있던 大友義統軍(오토모 요시무네) 역시 평양패보를 듣고 이미 현지에서 철수한 뒤였으므로 다시 白川·개성을 거쳐 서울로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함께 배천에 주둔하고 있던 黑田長政과 개성의 소조천융경이 명군의 추격을 받아 모두 서울로 철수하였다. 이 때 일본군은 조선침략 이후 가장 심각한 사태에 직면하였다. 당시 石田三成(이시다 미츠나리) 등 三奉行으로부터 일본군의 실정을 자세히 보고받은 풍신수길은 가등청정에게 임진강을 확보케 하고 소서행장과 흑정장정에게는 개성을 장악하도록 명하였으나 지시에 고쳤을 뿐이었다. 즉 평양패전으로 인하여 전세가 반전되는 계기가 이루어진 가운데 일본군은 개전 초기와는 달러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094) 北島万次, 앞의 책, 208∼210쪽.

 평양성을 탈환한 직후 이여송은 곧 바로 중협대장 李如栢을 선봉으로 삼아 개성까지 장악한 뒤 승승장구하여 서울탈환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여송은 먼저 1월 25일 부총병 사대수로 하여금 조선측의 방어사 高彦伯과 함께 군사 수백을 거느리고 출전하여 적정을 살피게 하였다. 이들은 碧蹄 남방에 위치한 礪石嶺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여 80여 급을 참획하였다. 27일 이 사실을 보고 받은 이여송은 대군을 뒤에 두고 남군의 포병도 대동하지 않은 채 휘하의 정천여 정예한 기병만을 이끌고 벽제를 향하여 진군하였다.095)≪宣祖實錄≫권 35, 선조 26년 2월 경인. 이전에 서울의 일본군은 명군이 진격해 올 것에 대비하여 작전회의를 갖고 도성내에서 명군을 맞을 것이 아니라 교외에서 맞아 공격할 것을 결의하였다. 따라서 소조 천융경을 주장으로 한 일본측의 대군이 사전에 여석령 후방에 매복해 있었는 데 군기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이여송이 여기에 뛰어든 것이었다.

 이 때 명군은 단검에 기마뿐이었고 화기가 없는 데다가 험로에 진흙이 두껍게 쌓여 있어 제대로 말을 몰아 달릴 수 없었으므로 좌우로부터 장검을 휘두르며 돌격해 오는 일본군을 대적하지 못하고 패퇴하였다. 평양승첩 이후 적을 가볍게 본 李如松은 이 전투에서 낙마하여 부상을 입었을 뿐 아니라 家丁의 심복을 잃고 의욕을 상실하여 坡州로 퇴각하고 말았다.096)≪宣祖修正實錄≫권 27, 선조 26년 정월·2월 을미.

 이후 명군은 전의를 잃고 퇴군하려는 기미가 역력하였다. 벽제패전이 있은 바로 다음날 이여송은 조선측 관료들이 적극적으로 만류하는 데에도 불구하고 東坡로 물러가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군사는 어제 왜적을 이겼을 뿐 별로 패한 일이 없다. 지금 東坡에 주둔하고자 하는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이곳에는 馬草가 부족하고, 뒤에는 강물이 있어 화포와 기계는 물론 남군의 포병들 역시 쉽게 오기가 어려운 관계로 동파로 돌아가 머물면서 며칠 동안 군사를 쉬게 한 뒤 전열을 정비하여 다시 진군 하려는 것이다(≪宣祖實錄≫권 35, 선조 26년 2월 을미).

 그는 또 본국에 보고한 글에서 서울에 있는 적병이 20여만으로 중과부적이며, 자신의 병이 심하여 임무수행이 어렵다는 점을 들어 다른 장수를 대신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에 유성룡 등이 일본군의 병력이 과장되었다고 항의하자 그는 조선인들이 말해준 숫자라고 변명하였으며, 특히 명장 가운데 張世爵은 퇴병을 적극 주장한 인물로서 퇴군을 만류하던 순변사 李蘋을 발길로 차며 물러가라고 호령까지 하였다.097) 柳成龍,≪懲毖錄≫권 2.

 이와 같이 조선측을 멸시한 명군의 무례한 행위는 다른 면에서도 흔히 나타나고 있었다. 군량과 건초의 공급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대신들에게 곤장을 친 사례는 그래도 다른 예에 비하면 오히려 가벼운 경우라 하겠다. 예컨대 병부원외랑 劉黃裳의 경우 선조를 향해 명나라 황제가 속국의 병화를 염려하여 원군을 보냈는데도 조선측에서는 명 때문에 화를 입게 되었다는 언사가 있으니 다시는 그런 일이 없게 단속하라면서 일국의 국왕을 마치 그의 부하처럼 질책으로 대하였다.098)≪宣祖實錄≫권 34, 선조 26년 정월 신유. 이여송 역시 평양성을 탈환한 직후 조선측에 보내온 牌文에서 유성룡·윤두수 등의 대신들이 왜적 퇴치에 게을리한다 하여 悖亂之輩로 규정하고 다음과 같이 협박하였다.

그대들은 나라가 없게 된 데서 나라를 갖게 되었으며 집이 없게 된 데서 집을 갖게 된 것과 다름없다. 만약 … 한다면 군사를 인솔하여 요동으로 돌아가 그대들이 망하는 꼴을 보게 하여 나라를 가졌다가 다시 나라를 잃게 하고 집을 가졌다가 다시 집없는 슬픔을 당하게 할 것이다(≪宣祖實錄≫권 34, 선조 26년 정월 무진).

 뿐만 아니라 이여송은 국왕이 거처하는 행궁을 멋대로 의주에서 안주로 옮길 것을 강요하였으며, 심지어 평양을 수복하자 마자 자신의 말이 탄환에 맞았다 하여 국왕의 말까지 요구하였다.099)≪宣祖實錄≫권 34, 선조 26년 2월 임인. 이같은 굴욕을 선조와 조정대신들이 참고 견뎠던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이 그들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아 하루 속히 서울의 적을 격퇴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평양승첩을 계기로 적을 얕본 명군은 경솔한 군사행동으로 인해 벽제패전을 자초하였고, 대패라 할 수 없는 이 싸움 이후 크게 사기가 저하되어 동파에서 개성으로, 개성에서 평양으로 퇴군하는 등 서울진격을 회피하였다.

 이여송이 전투를 기피하면서 내건 주된 이유는 군량·馬草·鹽醬 등의 보급 결핍과 당시의 도로사정으로서는 서울진공작전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보급이 원활해지고 도로사정이 호전될 때까지 기다리면서 기회를 보자는 것이었다. 물론 당시 조선측의 실정으로 대규모 병력을 위한 군량을 원활하게 조달해주지 못했다. 그러나 명군의 작전을 불가능하게 할 정도에 이르지는 않았으며, 또한 명에서도 군량이 공급되어 온 점을 감안할 때 이것은 한낱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뒤에 일본군이 도성에서 철병할 때까지 3개월이 지난 후에도 명군은 보급에 큰 문제없이 그대로 머물고 있었던 점으로도 그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4만 대병으로 출병한 명군이 뛰어난 화력과 전투력을 갖추고도 도성탈환에 나서지 못한 데에는 그들 내부의 불화에도 한 요인이 있었다. 출신지역이 다른 南軍과 北軍의 대립과 갈등이 작전방법이나 임전태도에 있어서 많은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병을 위주로 한 북군과 보·포병을 주축으로 한 남군에게는 작전의 형태나 전술을 구사하는 전법에서부터 차이를 보이게 마련이었다. 양군은 평양성전투 때부터 작전방법에서 대립양상을 띠었을 뿐 아니라 전투 후에 결정된 논공서열에서도 반목·대립하고 있었다. 남군의 장령들은 북군출신의 제독 이여송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나타냈다. 예컨대 유격 王必迪의 경우에는 이여송의 작전지휘상의 문제점을 정면에서 지적하여 여러 장수들이 함께 한 자리에서 직접 그를 공격할 정도였다.100)≪宣祖實錄≫권 34, 선조 26년 3월 을사. 이러한 그들 내부의 알력은 경략 송응창과 제독 이여송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명군의 작전 전반에 직접 영향을 미쳐 그들의 전투의지 또한 그만큼 소극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이여송군은 귀중한 평양대첩으로 전세를 반전시키고 도성탈환의 발판을 구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벽제패전 이후 전의를 상실한 가운데 그들 내부의 문제점까지 노출하면서 더 이상 일본군을 공격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일본의 명에 대한 내침의 위협을 미리 제거하려는데 궁극적인 출병목표가 있었다고 볼 때, 평남 이남으로 일본군을 밀어낸 것만으로도 그들의 목표가 달성되었다는 점에 있었다. 명군은 오히려 도성진공작전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군사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主陣을 개성에 둔 그들은 도성의 적을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도성으로부터 공격해 올지 오르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임진강 연안을 파수하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평양에 군사를 파견하여 함경도로부터 쳐들어올 수도 있을 일본군을 방어하겠다는 어이없는 防守作戰에 임하고 있었던 것이다.101) 宋應昌,≪經略復國要編≫권 6, 與劉袁二贊劃書. 그러므로 그 후 일관된 명군의 소극적인 임전태도는 결국 일본군을 그들의 和議對象으로 바꿔 놓았다.

<趙湲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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