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Ⅰ. 임진왜란
  • 3. 강화회담의 결렬과 일본의 재침
  • 1) 강화회담의 진행과 결렬
  • (1) 평양수복 전 조·명과 일본의 교섭

가. 조선과 일본의 접촉

 임진왜란초 왜군은 명분없는 침략을 감행하면서도 조선군의 강력한 응징이 예상되는 부산·동래·임진 및 대동강전투에 앞서 조선을 무혈로 점령하려는 수단으로 강화를 요청하는 和·戰의 양면 전략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조선군은 부산·동래 등지에서 결사 응전하였고, 조선조정은 왜군이 교섭을 제의했다는 사실을 선조 25년(1592) 4월 하순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 때 조선은 왜군이 서울로 신속하게 북침하는 것을 지연시키려는 목적에서 그들의 제의에 응하여 同知中樞府使 李德馨을 왜군의 진영에 보냈다. 그러나 왜군이 앞서의 약속을 어기고 이미 충주를 점령하고 있었으므로 이덕형은 중도에서 돌아왔다. 이로써 조선이 일본과 최초로 대좌하려는 시도는 무산되고 말았다.

 왜군은 선조 25년 5월초 서울을 점령한 후, 임진강 남안에 이르러 이 곳을 지키고 있던 都元帥 金命元에게도 교섭을 제의하여 왔다. 그러나 당시 조정은 東人이 실각되고 西人이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다. 집권서인은 전의조차 상실한 선조와 그 측근이 遼東으로 피란하자고 하는 「渡遼內附論」에 한사코 반대하면서 명에 청병하자는 논의까지 묵살하고 있었다. 서인을 중심으로 한 朝臣들은 조선군이 임진강을 스스로 지킬 수 있고, 이 방어전에 실패할 경우에도 평양을 고수할 수 있다고 주장하여 조선군의 자주·자력방어책을 견지하고 있었으므로 김명원도 왜군 제의를 무시하고 공격전을 전개하였다.

 조선군의 임진강전투가 실패한 후, 선조 25년 6월 상순 왜군이 평양을 위협하자, 선조가 요동으로 피란할 목적으로 평양에서 우선 떠날 것을 주장하였으므로 조정은 국가붕괴의 정치적인 위기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로써 조신들은 명에 청병할 것에 합의하고 명군의 내원이 있기까지 왜군의 공세를 지연시키는 일에 더욱 힘쓰게 되었다.

 이 무렵 대동강 남안에 이른 小西行長(고니시 유키나가)은 이번에도 회담할 것을 제의하여 왔다. 조정은 대사헌 이덕형으로 하여금 대동강 위의 선상에 나아가 왜군의 대표와 대좌케 하였다. 이 접촉에서 이덕형은 왜군이 먼저 철군할 것을 강력히 제의하였지만 왜군측은 끝내 이를 거부하고 명으로 가는 朝貢路를 조선이 허용하여 줄 것만을 요구하였으므로 회담은 결렬되었다. 이로써 조정은 왜군의 침략의도를 완전히 파악하게 되어 일본과 협상으로 난국을 해 결하려는 교섭행위를 단념하게 되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