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Ⅰ. 임진왜란
  • 3. 강화회담의 결렬과 일본의 재침
  • 3) 정유재란의 발발
  • (1) 조선의 일본재침에 대한 대비

(1) 조선의 일본재침에 대한 대비

 조선은 명·왜가 추진한 강화교섭이 결렬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고, 명나 라 조정이 교섭 도중에 명군의 완전철병을 일방적으로 단행하여 교전당사국간의 무력균형이 깨졌으므로 풍신수길이 재침을 단행할 것으로 단정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조선은 명·왜간의 강화교섭이 시작된 선조 26년(1593) 3월부터 일본의 대대적인 재침이 개시되는 선조 30년 7월까지 거의 휴전상태가 유지되는 동안 일본의 재침에 대비하고 있었다.

 사실 조선은 왜란의 전화와 계사·갑오·을미년의 대기근과 송유진 및 이몽학의 난을 비롯한 반란 등이 계속되었으므로 왜군을 방어하면서 조선군의 자위력을 배양하기란 매우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러나 명이 대왜강화교섭을 진행하고 명군의 단계적 철수를 단행하였으므로 조선은 自守방어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선조는 우선 조정을 재편하여 대왜방어론을 주장하는 영의정 유성룡 중심의 남인들이 정국을 주도하게 하고, 서인의 좌의정 윤두수는 분조의 무군사를 총관케 하였다. 이로써 조선의 대왜전 수행전략은 조정의 대왜방어론과 분조의 대왜진공론으로 이원화되었던 것이다.

 영의정 유성룡은 앞서부터 전력상 조선군이 대왜공격전을 수행하기는 어렵지만 방어전만은 가능하다고 보고, 조선군의 전력을 보강하기 위해서 중앙에 訓鍊都監을 설치하고 지방에는 束伍軍을 설치하도록 주도하였다. 포수(銃兵手) 등을 양성함으로써 조총으로 무장하여 長兵戰을 보강한 왜군에116) 李泰鎭,≪朝鮮儒敎社會史論≫(知識産業社, 1989), 215쪽 참조. 대항하도록 왜란의 장기화에 대비하였으며 왜군이 조기에 개전하여 올 경우 조선군은 산성을 거점으로 청야전을 전개할 계획하에 왜군의 진격로를 제어할 수 있는 요해처에 산성을 수축하게 하였다.

 반면 분조의 좌의정 윤두수는 조선군 단독의 대왜전을 견지하였다. 명군의 완전 철병에 이르러 경략부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은 급속히 약화되었으므로 조정도 명의 강요로 성립된 2차 분조를 해체하였다. 그러나 선조는 윤두수를 도체찰사로 임명하여 하3도의 군령권을 계속 장악케 하였다.

 도체찰사 윤두수는 선조 27년(1594) 9월 도원수 권율과 통제사 이순신으로 하여금 거제의 왜군을 수륙병진으로 공격케 하였다. 이 진공작전은 육군의 부진으로 실패하였으므로 윤두수는 면직되고 서인도 일시 실세를 면치 못했다. 따라서 집권남인의 산성 중심의 방어 및 청야전이 일본의 재침에 대비하는 조 정의 기본전략으로 확정을 보게 되었다.

 그러므로 영·호남에서 산성수축이 진행되었다. 전라감사 이정암의 의견에 따라 호남에서는 南原의 蛟龍, 潭陽의 金山, 井邑의 笠巖, 順天의 乾達, 康津의 修仁, 同福의 瓮城山城이 수축되었다. 영남에서는 곽재우의 의견에 따라 伽倻山의 龍起山城 등을 쌓아 선조 28년 6월까지 수축한 산성이 많아졌으므로 조정에서는 추곡을 수납하여 이들 산성에 쌓아두도록 조치하였다.117) 車勇杰,<朝鮮後期 關防施設의 變化過程-壬辰倭亂 前後은 關防施設에 대한 몇 가지 問題->(≪韓國史論≫9, 國史編纂委員會, 1981), 54∼55쪽.

 이 무렵 李元翼이 右議政兼四道都體察使로 부임하여 영·호남지방에서 먼저 전쟁과 반란 등으로 야기된 민심의 이산을 수습하는 데 힘써 산성수축의 토목 공사는 부진하였지만118)≪宣祖實錄≫권 73, 선조 29년 3월 무진. 영남에서는 公山·龍起·金烏·富山山城이 보수되거나 개축되었다. 반면 선조 28년 10월에 영의정 유성룡은 한강 이북 4도의 도체찰사를 겸임하여 경기·황해도의 요해처에 축성을 힘썼다. 그 후에도 한강 이남에서 禿城·可隱·公山·天山·婆娑·龍津·上黨山城이 보강되어 鳥談 등 嶺路의 관방시설과 함께 일본의 재침에 대비하게 되었던 것이다.

 선조 29년 9월 명·왜간의 강화회담이 결렬되고, 跟隨使가 11월에 비밀서 장으로 왜군이 다음해 2월경 재침할 것이라는 정보를 알려오자 왜군이 본격 적으로 침공하는 선조 30년 7월까지 약 10여 개월 동안 비변사는 임진왜란 의 승·패전을 참작하여 대왜전의 수행대책을 수립하였다.

 비변사는 먼저 奮義復讐軍을 전국적으로 조직케 하는 한편 서울에 와있던 도체찰사 이원익을 하3도로 급히 보내 도원수 권율 이하 조선군을 총독케 하고, 일선 조선군의 지휘관도 주로 실전경험이 풍부한 의병장 출신의 郭再祐·洪季男·李福男·高彦伯 등과 관군출신의 鄭起龍·韓明璉·李時發·朴名賢 등으로 보강케 하였다. 또 선조 29년 11월 중순 告急請兵奏聞使 鄭期遠을 명에 보내 南兵과 명의 수군을 청병케 하였다.

 그리고 비변사는 일본의 재침목표를 한강이남의 재점령으로 보고,119) 許善道,<壬辰倭亂論>(≪千寬宇先生還曆紀念 韓國史學論叢≫, 一潮閣, 1985), 545쪽에 보면 왜군은 호남을 첫번째 점거목표로 삼았고, 이런 까닭에 三道水軍統制使 李舜臣을 제거하려는 이간책을 자행하였다고 하고 있다. 이로써 보면 두번째 목표는 서울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 침공시기를 선조 30년(1597) 2월과 7월 사이로 예상하였고, 그 침공로는 영남에 서 서울로 통하는 직행로와 영남에서 남원을 경유하여 전주·공주·서울로 이어지는 호남을 거치는 우회로고 추정하였으며 왜군이 동남계절풍이 부는 7월을 기해 우회로를 택해 영남에서 호남으로 선공하여 올 것으로 판단하였다.

 조선군의 대왜전 수행전략은 도체찰사 이원익을 비롯한 집권남인의 의견에 따라 지상전에서 임진왜란 때 幸州山城의 대첩과 仁川山城 및 水原 禿城을 잘 방어한 예를 참작하여 山城固守防禦戰과 淸野戰을 병행하기로 하였다.

 이와 같은 비변사의 결정은 조선육군이 왜군에 비해 전력상 매우 열세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조선군이 왜군의 진출로 중 요해처의 산성을 고수하여 적군의 예봉을 꺾고 그들의 군량보급로를 끊어 왜군이 전진하여도 싸울 곳이 없고 후퇴하더라도 약탈할 곳이 없어 스스로 물러가게 하려는 방어전략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이 전락에 따라 왜군의 진출로라고 예상되는 요해처의 산성은 조선군의 방어거점으로 급히 전환되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의 침공로 가운데 중로에 위치한 창녕의 화왕산성·대구의 공간산성·선산의 금오산성, 좌로에 위치한 경주의 부산산성, 중·좌로의 합류지점에 위치한 조령의 關防·충주, 충주에서 다시 분기되는 양로에 위치한 여주의 파사산성, 안성의 瑞雲山城·죽산의 右城·광주의 南漢山城 그리고 왜군이 호남을 침공할 때 예상되는 침입로에서 安義의 黃石山城·鎭安 북방의 龍潭山城·三嘉의 岳堅山城은 모두 대왜전의 방어처가 되었다.

 반면 조신들은 당파를 가리지 않고 해전에서 조선수군이 왜수군과 결전을 수행할 수 있는 충분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비변사는 왜군 의 도해 및 군수보급로인 부산앞 조·일해상로를 조선수군으로 하여금 선제공격하도록 결정하고 선조 29년 11월 조선수군이 巨濟 長門浦로 진출하여 이 곳을 함대기지로 삼고 부산 앞바다로 나아가 바다를 건너오는 왜군을 해상에서 공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왜수군이 閑山에서 참패한 후 해전을 기피하면서 지상군의 엄호를 받을 수 있는 남해연안의 요새화된 함대기지를 거점으로 연안에서만 작전하고 있었으므로 이들 왜수군의 거점을 뒤에 두고 부산 앞바다로 나아갈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순신은 왜수군의 거점을 수군과 육군이 합동으로 공격할 것을 조정에 촉구하면서 조정의 무리한 해상 작전의 명령에 신중하게 임하였다. 선조와 조신들은 이에 실망하였고 특히 진공론을 주장하여 온 서인들은 이순신을 집중적으로 비난하였다. 이에 조정은 조선수군이 왜수군과 결전하는 일에 겁낼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는 忠淸兵使 元均을 慶尙右水使로 전임시키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 조정은 도원수 권율의 권유로 소서행장과 가등청정의 강화교섭을 둘러싼 갈등관계를 이용하여 양자의 行間工作을 추진하도록 결정하고, 도체찰사 이원익에게 가등청정이 선조 30년 1, 2월 사이 도해할 때 조선수군이 가등청정군을 해상에서 공격하는 작전을 결행하도록 위임하였다.

 왜군 역시 재침의 결정적 장애가 될 통제사 이순신의 수군을 유인하여 격멸할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그러므로 조정이 소서행장에게 가등청정의 제거를 전제로 통교할 것을 청하자, 소서행장은 첩자인 要時羅로 하여금 이순신을 제거토록 역공작을 시도하여 가등청정의 도해시기를 慶尙右兵使 金應瑞에게 허위로 정보를 제공하여 왔다.

 통제사 이순신은 이 정보를 의심하였으나 도원수 권율의 명령에 따라 가등청정이 도해한다는 해역으로 휘하 함대를 빈번히 출동시키면서도 결정적인 해상작전만은 유보하였다. 이 사실이 조정에 보고되자, 선조는 격노하여 무모한 원균을 새 수군통제사로 임명하고 이순신을 하옥시켰다. 이로써 조선수군은 패전을 자초하게 되었다.

 한편 비변사는 왜군이 서울로 북상할 경우 그 북상로의 요해처에서 적군을 저지하거나 서울을 지킬 방어대책을 수립하고 아울러 명군이 구원하러 올 경우 조·명 연합군의 작전 및 명군에 대한 군량공급 대책을 수립하였다.

 조선군은 왜군과 1차로 접전지역이 될 영남에서 선산의 금오산성·경주의 부산산성·삼가의 악견산성·대구의 공산산성·가야의 용기산성·창녕의 화왕산성을 집중적으로 방어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왜군이 영남에서 호남으로 침공할 때는 남원·전주에서, 다시 충청도로 침입할 경우는 공주에서 방어하기로 하였고, 贊劃使 이시발은 조령·죽령 등의 요해지에 복병케 하였고 충청병사 李時言은 秋風嶺의 赤巖을 방비케 하였다.120)≪宣祖實錄≫권 82, 선조 29년 11월 신축.

 하3도의 감사는 모두 산성에서 고수케 하였고, 도체찰사 이원지도 星州로 남하하여 선산의 금오산성을 지키면서 조선군의 산성고수전과 청야전을 지휘·감독하였으며 선조는 산성고수전의 준비를 황해도에까지 실시케 하였다.

 선조와 조신들은 임진왜란초와 대조적으로 국가의 근본인 서울의 방어를 위해서 병조판서 이덕형의 지휘하에 동·서·남·북의 巡檢使가 도성의 자체방어시설을 마련케 하였고, 영의정 유성룡 등의 주장으로 임진왜란시 江灘防禦를 잘해낸 경험을 살려 한강을 지키기로 하였다.

 한강을 중심으로 한 도성의 광역방어책은 매우 계획적인 것으로 驪州 이하 楊州·廣州에 이르는 江灘의 방어처 25곳을 선정하고 京畿左防禦使 邊應星의 휘하 3천여 명이 중심이 되어 방어케 하고, 이 방어선이 무너질 때 廣津에서 西江까지는 聽用軍의 砲·殺手 1천여 명이 지키게 하였다.

 한강 상·하류의 방어는 상류에서 승장 惟政과 義嚴이 남한산성과 파사산성을 각각 지키고, 하류에서 경기수사 李思命이 속오군을 모아 私船으로 강화에서 한강으로 내응케 하였다. 이로써 선조 30년 3월 중순까지 경기 요해처의 산성수축은 거의 완료되어 방어훈련도 실시하게 되었다.

 이 무렵 통제사 원균은 부임한 이래 휘하 함대와 왜함대의 해상결전을 기피하면서 연해안에서 작전을 전개하고 있었는데, 도체찰부와 도원수부가 부산 앞바다로 진출하여 조·일해상로의 차단작전을 촉구하여 오자, 전임 통제사 이순신의 주장이었던 조선수륙군의 병진공격작전을 조정에 건의하였다. 그는 휘하 함대가 부산 앞바다로 진출하여 작전하기 위해서는 그 길목에 위치한 安骨浦와 加德島를 수륙에서 먼저 협공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비변사는 도원수 권율이 이 작전에 반대하자 조선군의 지휘권을 권율에게 일원화시켜야 한다는 차원에서 원균의 건의를 묵살하였다.

 한편 명군이 내원하기 시작하고, 왜군도 6,7월경 재침하리라는 정보가 이 어지면서 왜수군이 안골포·가덕도·부산포·서생포 등지에서 작전활동을 점증시키자 비변사는 조선수군이 선제공격한 것을 도체찰사 이원익에게 촉구하였다. 이에 따라 이원익과 권율은 통제사 원균으로 하여금 하3도 수군 3만 명과 함선 134척을 한산도에 집결시키게 하고, 함대를 두 선단으로 재편하여 한산도를 기지로 교대로 해상에 나아가 왜함대와 결전케 하였다. 그러나 원균 이 이 해상작전의 실시를 기피하자, 이원익은 종사관 南以恭을 한산도 統制營에 보내 조선함대를 한산도와 雲島에 반분하고 교대로 해상작전을 전개하도록 독려하였다. 이로써 통제사 원균도 휘하 함대로 하여금 조·일 해상로의 차단을 위한 선제공격에 나서게 되었다.

 한편 조선은 僉知中樞府事 權悏을 告急使로 명나라에 보내 구원하여 줄 것을 재차 요청하였다. 이에 명나라 조정은 병부좌시랑 邢玠로 經略禦倭兼理糧餉, 右僉都御史 楊鎬로 經理朝鮮軍務, 都督 麻貴로 提督備倭總兵官을 삼아 55,000여의 병력을 출병시켰다. 이들 원군의 선발대는 선조 30넌(1597) 6월까지 조선에 들어와 부총병 楊元은 남원, 유격 茅國器는 성주, 유격 陳愚衷은 전주, 부총병 오유충은 충주에 주둔하였고, 경리 양호는 평양에서 도독 마귀는 서울에 들어와서 일본의 재침에 대비하였고 후속군도 계속 이어졌다. 이와 같은 명군의 포진은 왜군이 영남에서 호남으로 먼저 침공할 것을 예상한 조선조정이 명군에 요구한 것으로 명군의 주둔지도 가능하면 군량을 선운으로 보급할 수 있는 곳을 선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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