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Ⅰ. 임진왜란
  • 3. 강화회담의 결렬과 일본의 재침
  • 3) 정유재란의 발발
  • (2) 일본의 재침

(2) 일본의 재침

 조·명군이 선조 30년 6월 중순까지 일본의 전면적인 재침에 대비하여 지상에서 방어전을, 해상에서 선제공격전을 전개하려고 하는 사이에 왜군도 재침 준비를 거의 완료하고 호남으로 향한 수륙병진의 침공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선조 29년 12월과 선조 30년 정월 사이에 왜군의 선봉인 소서행장과 가등청정 등은 多大浦(동래)·釜山浦(부산)·西生浦(울산) 등지에 교두보를 재구축 하였고, 선조 30년 3월 중순부터 왜군의 주력 141,500여 명이 계속 바다를 건너 왔다. 왜육군은 4,5월 사이에 거제·안골포·가덕도 등지를 장악하고, 金海·昌原·咸安·晋州·固城·泗川·昆陽 등지를 왕래하면서 작전의 전개지역을 확대하고 있었다.

 왜수군 역시 4월경에 藤堂高虎(도토 다카도라)·脇坂安治(와키자카 야스하루)·加藤嘉明(가토 요시아키라) 등이 연합함대를 구성하고 거제도 등 요새화된 함대 기지를 거점으로 남해안 해상에서 작전을 펼치면서 7월에 들어와서 왜육군과 합동으로 통제영이 있는 한산도의 조선수군을 공격하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소서행장은 이 작전을 위해 요시라로 하여금 일본 후속군의 도해시일을 조선군측에 알려 조선수군을 유인하려고 하였다.

 도체찰사 이원익과 도원수 권율은 이를 간파하지 못하고 조선수군이 부산 앞 해역으로 나아가면 패전할 가능성이 높다는 수사들의 의견조차 무시하였다. 또한 남원을 방어하던 부총병 양원이 선조에게 조선수군으로 하여금 왜군의 도해 및 보급로를 공격할 것을 제의하자, 조정은 조선수군의 조·일해상로 차단작전을 도체찰사와 도원수에게 독촉하였고 이들은 통제사 원균에게 즉시 이 작전을 수행할 것을 강요하였다.

 원균은 도체찰사 종사관 남이공의 감독하에 선조 30년 6월 18일부터 3도 수군의 전함선 200여 척을 이끌고 한산도의 통제영을 출항, 무모하게 부산앞 바다를 건너는 왜군을 찾아 공격에 나섰다 6월 19일, 원균의 함대는 안골포 의 왜수군을 급습하고 가덕도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배를 버리고 인접 해안이나 섬에 상륙하여 대항하다가 島津義弘(시마츠 요시히로)軍의 원병을 얻어 반격하였으므로 寶城郡守 安弘國이 전사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원균도 七川島(거제군 河淸面)로 후퇴하였다가 한산도로 귀환하였다.

 이 패전에 낙심한 원균은 7월 8일 경상우수사 裴楔로 하여금 熊川의 일본 연합함대를 다시 공격케 하였으나 또 패하였다. 이에 권율은 원균을 도원수처(泗川郡 昆陽面)에 소환하여 질책하였다.

 원균은 권율의 처사에 격분하여 휘하 전함선을 이끌고 부산의 왜본영을 급습하기로 정하고, 7월 14일 한산도를 출항하였다. 이 때 부산앞 해역에는 600여 척의 일본 대함대가 대기하고 있었고, 한산도에서 부산에 이르는 남해 연안의 곳곳에서 왜군이 조선함대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었다. 통제사의 함대는 부산 앞바다의 絶影島 해역까지 진출하였지만 풍랑과 왜함의 연이은 유인공격에 지쳐서 회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조선함대가 퇴로상 정박할 수 있는 가덕도와 거제 永登浦 등지에는 왜군이 미리 와서 선점하고 있다가 상륙하려는 조선수군을 지상에서 공격하여 왔으므로 14일 저녁에야 간신히 거제 漆川梁에 입항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왜수륙군이 다시 야습을 감행하여 왔으므로 조선수군은 지리멸렬하였다. 다음날 원균은 이곳을 탈출하려다 도진의홍군의 추격을 받아 전사하였고, 전라좌수사 李億祺 등도 모두 전사했다. 다만 경상우수사 배설만은 12척의 배를 이끌고 한산도로 후퇴하였다가 도망하였다.

 조선수군의 한산도방어가 무너지자, 왜수군은 일시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였으므로 왜군은 호남에 대한 수륙병진의 호기를 맞게 되었다. 앞서 풍신수길은 왜군의 재침을 재촉하고 있었는데 이 기회에 영·호남을 전면 침공할 것을 왜장수들에게 다시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왜군은 8월 상순 육군을 좌우군으로 나누고 경상좌우도의 요충 인 진주와 전라도 방어의 핵인 남원 및 그 寶藏인 전주를 차례로 공략하려는 계획하에 진군하였다. 왜수군도 남해안에 상륙하거나 섬진강을 거슬러 남원공략에 나서 왜군은 호남으로 수륙병진하여 왔다. 좌군대장 宇喜多秀家(우키다 히데이에)와 그 선봉인 소서행장은 고성·사천·하동을 경유하여 전주로 향하였다. 우군대장 毛利秀元(모리 히데모토)과 그 선봉인 가등청정 (가토 기요마사)은 서생포·密陽·草溪를 경유하여 진주로, 鍋島直茂(나베시마 나오시게)는 김해·창원을 경유하여 진주로 각각 향하였다. 왜수군도 섬진강을 거슬러 岳陽으로 나아갔다.

 한편 조·명군도 왜군의 전면공격에 대비하여 도체찰사 이원익은 선산 금오산성에, 도원수 권율은 성주·금산방면에, 경상우병사 김응서는 합천에, 求禮 縣監 李元春은 남원에 포진하였고, 또한 도독 마귀의 지휘로 양원·오유충·진우충·모국기는 각각 남원·충주·전주·성주를 방어하고 있었다.

 일본의 좌군과 수군은 求禮와 雲峰에 집결하여 8월 12일 남원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당시 성내에는 接伴使 鄭期遠·전라병사 이복남 등이 이끄는 조선군과 부총병 양원이 이끄는 요동병 총 4천여 명이 성을 지키고 있었다. 이 조·명합동 수성군은 열세한 병력으로 군·민이 3일간 항전하였으나 수성전의 경험이 없던 양원의 작전실패로 8월 15일 남원성은 적에게 함락되어 이복남 등 조선군의 장수들은 모두 전사하였으며 양원 등 명병 100여 명만이 탈출하였다.

 왜군은 남원성을 함락시킨 후, 전주로 향하였는데 이곳을 지키던 유격 진우충마저 도망하였으므로 전주까지 무혈로 점령하였다. 그러나 왜군은 남원성 함락을 위해서 그 주력을 집중시키려고 육해로 대우회작전을 전개하여 7월 27일부터 8월 15일 함락까지 20여 일간을 소비하였으므로 조·명군은 왜군의 북상에 대비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7월 22일 3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 된 이순신은 칠천량해전으로 붕괴된 조선수군을 왜수군의 추격을 받지 않고 다시 정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남원성전투는 왜군이 전투에서 이겼지만 전략적으로는 서울로 향한 북상작전에 큰 좌절을 맛보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한편 전주로 진격하려던 왜우군의 선봉인 가등청정은 서생포를 출발하여 창녕·安陰(현 安義)를 경유하면서 창녕에서 경상좌방어사 곽재우가 지키던 화왕 산성을 공격하려다가 守城軍의 위세에 눌러 黃江을 건너 경상우도로 피해갔다. 이 때 곽재우군은 가등청정군의 후미를 공격하여 큰 타격을 입혔다.

 그리고 가등청정군은 영·호남간의 요충인 안음 黃石山城에서도 안음현감 郭䞭과 함양군수 趙宗道의 수성전에 직면하여 성을 함락시켰지만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이 전투에 참전하였던 과도직무군은 다시 성주방면으로 북상하여 8월 중순 高靈에 진출하려다가 도체찰사 이원익 휘하의 尙州牧使 鄭起龍의 군대에게 공격을 받고 큰 손실을 입었다. 이로써 임진왜란 때 왜군의 북상로 가운데 중로로 진출하려던 왜군은 조선군에게 저지되었다. 이리하여 왜우군은 가등청정을 필두로 전주에 들어가 일단 왜좌군과 합류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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