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Ⅰ. 임진왜란
  • 3. 강화회담의 결렬과 일본의 재침
  • 3) 조·명군의 활약
  • (1) 조·명군의 활동상

(1) 조·명군의 활동상

 전주에서 집결한 왜군 중 좌군의 일대는 益山에서 扶餘로, 다른 일대는 錦 山·珍山에서 懷德으로 진출하였고, 우군의 가등청정은 淸州로, 모리수원과 黑田長政(구로다 나가마사)은 공주를 거쳐 서울로 북상하였다. 남원성패보에 접한 조정은 명군과 함께 서울을 지키기로 하여 함경감사 宋言愼의 1,200여 군이 서울로 왔고, 평양에 있던 경리 양호도 서울로 들어왔다.

 양호는 먼저 조·명군의 패전으로 야기된 조선의 정치·외교적인 혼란을 수습하라고 경략 형개의 世子監軍 요구에 따른 선조의 禪位 주장을 일축하고, 감군 蕭應宮의 대왜강화교섭의 재개론을 배제하고 조선군과 함께 명군이 북상하는 왜군과 결전할 결의를 굳건히 하였다.

 이 때 서울로 향하던 왜우군은 조선군의 공격을 받았다. 9월초 공주로 전출하려던 왜군은 礪山·恩津 등지에서 충청방어사 朴名賢 부대의 요격을 받았고, 懷德·林川·韓山방면으로 침입한 왜군도 충청병사 李時言의 방어전을 겪었다. 특히 그 선봉인 가등청정은 전주·진천을 경유하여 청주로 향하였고, 모리수원의 1만여 군과 흑전장정의 5천 군만은 天安을 거처 稷山까지 북상하였다.

 한편 명군도 왜군이 금강을 건널 때부터 哨探兵으로 적의 동정을 정탐하면서 그들이 여산에 이르자, 경리 양호와 도독 마귀는 천안에 주둔중인 명병을 용맹한 휘하병으로 교체하여 왜군의 북상을 견제하면서 그 후방에는 8천 명의 명군으로 대비케 하였다.

 9월 4일 혹전장정군이 천안에 이르자, 명군은 그날 야음을 틈타 비밀히 부총병 解生, 참장 楊登山, 유격 牛白英·頗貴 등 2천의 정예병을 긴급히 출 동시켜 왜군의 진출로에 잠복하고 있다가 5일 흑전장정의 선봉대가 직산 북방 10여 리에 위치한 素沙坪으로 진출하자 이들과 접전하였다. 양군은 본대까지 합류하고 다음날까지 전투를 계속하였지만, 명군은 증원군까지 합세하였으므로 왜군이 패퇴하였다(직산대첩). 이 전투는 대회전이었으므로 명군의 평양수복전에서 처럼 결정적인 승리는 얻을 수 없었지만 왜군의 서울로의 진격을 좌절시켜 왜군도 이를 계기로 후퇴하게 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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