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Ⅰ. 임진왜란
  • 3. 강화회담의 결렬과 일본의 재침
  • 4) 일본군의 패퇴
  • (1) 조·명연합군의 반격전

(1) 조·명연합군의 반격전

 조·명군의 추격전에 몰린 왜군은 전면전을 개시한 지 불과 2개월여 만에 모든 전선에서 총퇴각하여 동쪽으로 울산·機長에서부터 서쪽으로 남해·순 천에 이르는 남해 연안의 요충지에 성을 쌓고 방어태세에 들어갔다.

 명나라 조정도 이 기회를 틈타 중국을 위협하는 조선내 왜군을 소탕하려고 하자, 경략 형개와 경리 양호는 대왜반격전을 계획하고 三協의 공격군을 편성하였다. 그리고 그 주된 공격목표를 부산과 함께 조·일해상로에 위치한 가등청정의 거점인 울산성으로 선정하였다. 이곳은 왜군의 군수보급자 도해를 위 한 왜군의 교두보로 왜군이 지키지 못하면 다른 지역의 왜군도 군량보급로와 퇴로를 잃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선조 30년(1597) 10월 하순 제독 마귀와 선조는 조·명 연합군을 구성하여 반격에 나설 것을 협의하고, 조선군은 초탐전과 유격전 및 명군의 향도와 전 투 그리고 군량의 조달과 운송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조선군의 역할 비중이 매우 커졌으므로 경리 양호는 선조에게 친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명군의 작전계획은 4만여 병력을 左·右·中協으로 分軍하여 각 협을 부총병인 李如梅·李芳春·高策이 맡고, 경리와 제독은 좌·우협을 지휘하여 경주에 집결시킨 후 울산의 가등청정을 공격하고, 중협군만은 호남으로 남하하여 남원을 거점으로 순천의 소서행장이 가등청정을 구원할 수 없게 견제하는 것이었다.

 이 때 조선군도 각 협에 편입시키기로 하였으므로 조정은 조선군을 3영으로 나누어 충청병사 이시언의 2천여 병력은 좌협에, 경상우병사 成允文·경상좌방어사 權應銖의 2,200병력은 중협에, 경상우병사 정기룡·경상우방어사 고언백의 1,300병력은 우협에 소속시켰다. 그리고 황해·평안·강원·함경도에서 차출된 2천 명씩을 각 협에 추가로 배치시키기로 하여 도원수 권율 휘하의 총 11,500명의 군대가 명군과 함께 작전하게 되었다.

 한편 조정은 임진왜란 때 조·명 연합군이 평양수복 후 왜군을 무력전으로 몰아낼 수 있는 결정적인 승기를 잡고도 이 기회를 잃게 된 최대의 요인을 작전의 적기에 군량을 공급하지 못한 데 있었다고 반성하고,122) 李章熙,<壬亂中 糧餉考>(≪史叢≫15·16, 高麗大, 1971), 373쪽 참조. 이 작전에 필요한 군량조달과 공급에 치밀한 계획과 조치를 취하였다.

 명나라 조정도 20여 만 석의 지원곡을 약속하면서 조선에서 5만여 작전군 의 한달분 군량을 작전지 근처의 군수보급기지에 먼저 비축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조정은 임진왜란 때 인력에 의존한 군량수송으로 야기되었던 난점을 고려하여 해운과 선운을 계획하고, 명군의 주둔지는 가능한 한 해로와 수로로 연계될 수 있는 곳을 선정하고 내륙지역만은 駄運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명나라 조정은 당시 해로가 결빙되어 불통이라는 이유로 약속한 지 원곡을 조선에 보내지 못했으므로 조정은 조·명 연합군의 반격전에 필요한 군량의 절대량을 국내에서 조달·공급하였다 이러한 조치가 가능했던 것은 병신·정유년의 풍작에 기인한 것이었는데 정유년 호조의 집계로 보면 호남을 제외한 곡식의 전국재고량은 민간이 소유한 수량만도 종자를 포함하여 米 23만여 석, 豆 23만여 석, 皮雜穀 49만여 석에 이르렀던 것이다.123)≪宣祖實錄≫권 92, 선조 30년 9월 기축.

 군량 조달의 총책인 호조판서 김수는 작전개시 직전까지 정유재란을 면한 경상좌도와 강원도 등지에서 전세를 수납하여 작전군의 1개월 보급량의 군량을 충주·공주·남원·안동·밀양·경주·의령에 일단 조치하였고, 특히 조·명연합군의 작전거점인 경주에 26,000여 석, 그 배후지인 안동에 2만여 석을 비축하였다.124)≪宣祖實錄≫권 95, 선조 30년 12월 기묘.

 병신·정유년의 풍작은 영남의 민중들에게 크게 작용하여 이 기회에 왜군을 조선 영토에서 몰아내야 한다는 전의로 연계되어 군량을 마련하고 운송하는데 자발적인 협조를 낳게 되었다. 이 결과 전투가 종결된 후 대구·경주·영해 등지에는 1만여 석의 군량재고가 남아 있게 되었다.125)≪宣祖實錄≫권 96, 선조 31년 정월 기유.

 조정이 군량을 마련하자, 선조 30년 12월 상순 4만여의 제독 마귀의 군대 는 서울을 떠났는데 당초 순천의 소서행장을 견제하는 임무가 부여된 중협군까지 중도에서 울산공격에 합류하였다. 이리하여 조·명 연합군은 경주에 집결하게 되었고 도원수 권율과 경리 양호도 뒤따라 경주로 갔다.

 12월 20일 5만 천여 조·명 연합군은 경주에서 집결을 완료하고 23일부터 울산 島山城을 포위·공격하여 선조 31년(1598) 정월 4일까지 왜군과 혈전을 전개하였다. 이를 1차 울산성전투 또는 도산성전투라고 한다. 이 攻圍戰은 시종일관 조·명 연합군의 공성전과 왜군의 수성전으로 이어졌다. 二重城인 도 산성의 외성은 토성과 목책으로 수축되어 있어 개전 초기에 돌파하였지만, 내성은 험한 지형을 최대한 살려 석축으로 쌓고, 土堀과 房屋을 적절히 배치하여 조총전에 매우 유리하게 되어 있었다. 성을 공격하는 기계와 기구를 준비하지 못한 조·명 연합군은 화포공격등 화공전만으로 힘을 쓰지 못하였다. 그 리고 성의 배후지는 바다로 통하여 서생포와 부산포방면의 왜군이 응원하여 왔으므로 조·명연합군은 혹독한 추위 속에서 많은 부상자와 전사자를 남긴 채 공위전을 풀고 회군하였다.

 그러나 정유재침을 주장한 가등청정도 시종 군량부족과 식수마저 끊긴 열세 속에서 최악의 고전을 경험하게 되어 왜란이 종결될 때까지 북상을 단념하고 수성에만 힘쓰게 되었다.

 조선군은 이 공위전에서 용맹성을 발휘하였다. 조선군은 개전초에 명군과 함께 도산성의 외성을 돌파하는 전투에 참가하였고, 별장 金應瑞는 왜군의 식수원과 급수로의 차단작전을 주도하였다. 또 조선군은 단독공격전에 나서 도 산성의 목책 안까지 돌입하여 왜수성군과 근접전 및 화공전을 전개하였다. 철수작전시에 경상우병사 정기룡은 조·명 연합군의 퇴로를 확보케 하는 활약상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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