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Ⅰ. 임진왜란
  • 3. 강화회담의 결렬과 일본의 재침
  • 4) 일본군의 패퇴
  • (3) 일본군의 패퇴

(3) 일본군의 패퇴

 136) 許善道, 앞의 글, 542∼550쪽 참조.풍신수길은 조·명 연합군의 4로 총공격이 단행되기 앞서 8월 18일 병사하였다. 그는 유명으로 자신의 죽음을 일체 비밀로 한 채, 왜군의 철수를 지시하였다. 따라서 조정이나 명군은 8월 상순부터 확인되지 않은 풍신수길의 와병이나 사망설이 유포되고 있었지만 왜군을 전면공격하려는 작전계획에 따라 이러한 사실에 개의하게 않았다.

 양군의 공방전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9월 말에 이르러 德川家康(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일본의 5大老가 철귀령을 왜군의 제장에게 전달하자 왜군은 조·명연합군의 공세가 약화되는 기회를 이용하여 일제히 본국으로 철병하려고 계획하였다. 가등청정이나 도진의홍은 조·명 연합함대의 봉쇄권역 밖에 있어 철수가 비교적 용이하였지만 왜교의 소서행장은 조·명연합함대에 의해서 퇴로가 봉쇄당하고 있어서 본국으로의 철귀조차 매우 어려웠다.

 소서행장은 10월 중순 왜교에서 탈출하려고 하였지만 이 정보를 입수한 조·명연합군에게 수로에서 협공당하였으므로 먼저 제독 유정에게 뇌물을 보내 퇴로를 간청하였다. 그는 도독 진린에게도 뇌물공세로 퇴로를 애원하였고 통제사 이순신에게까지 접촉하려고 하였지만 이순신은 소서행장의 퇴로 애걸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소서행장에게 퇴로를 열어줄 것을 밀약한 진린에게까지 왜군을 섬멸하도록 설득하였다. 소서행장은 명장과의 밀약만을 믿고 수차 10여 척의 선발대로 조선함대의 해상봉쇄를 시험하려고 하였지만 松島를 떠나 猫島에 대기하고 있던 통제사 이순신의 함대에게 쫓겨 왜교성을 탈출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11월 11일을 기해 본국으로 철수하려던 사천의 도진의홍과 고성의 立花統虎(다치바나 무네토라) 및 부산의 왜장들에게 구원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와 같은 왜군간의 교신행위는 도독 진린의 묵인하에 이루어지 고 있었지만 이순신은 이 모든 사실까지 감지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후일 자 신을‘經天緯地之才補天浴日之功’이라고 극찬한 진린을 마침내 설득하였다. 조·명연합함대는 일본의 구원함대가 내도할 것을 예상하고 노량해협을 해전장으로 택하고 11월 10일을 기해 이곳으로 출항하였다.

 소서행장의 구원요청을 받은 도진의홍은 약 500여 척의 왜함대를 이끌고 왜교성에서 소서행장을 탈출시키려고 사천 앞바다의 光洲洋을 지나 노량방면으로 항진하여 왔다. 이 동정은 남해 觀音浦에 대기하고 있던 이순신의 함대에게 모두 포착되었다. 이순신은 昆陽·竹島 부근에서 대기하고 있던 진린의 함대와 좌·우협공작전을 계획하고 11월 l8일 夜潮를 틈타 남해도에서 노량해협으로 들어오는 왜함대를 500여 척의 조·명연합함대로 공격케 하였다.

 이에 왜함대는 큰 타격을 입고 남해 관음포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회항하였다. 11월 19일 통제사 이순신은 스스로 선봉이 되어 왜함대를 맞아싸웠고 결국 조·명연합함대는 노량에서 적함 200여 척을 불태워 부수고 도진의홍 등에게 참패를 맛보게 하였다(노량대첩).

 그러나 이순신은 이 해전에서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그는 절명하는 순간에도 왜군을 끝까지 섬멸시키려는 일념에서 자신의 전사를 격전중인 장병에게 알리지 말 것을 유언하였다. 그는 왜군과 함대결전에 앞서 하늘을 두고‘이 원수를 섬멸하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고 한 맹세를 실천하였다. 소서행장은 이 해전을 틈타서 부산으로 도망하고 이곳에 집결하였던 왜군이 차례로 일본으로 돌아감에 따라 풍신수길의 무모한 침략야욕으로 발발하였던 7년간의 왜란은 종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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