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Ⅰ. 임진왜란
  • 3. 강화회담의 결렬과 일본의 재침
  • 5) 일본의 통교요청과 기유약조
  • (1) 일본의 통교요청

(1) 일본의 통교요청

 137) 이 글은 李鉉淙<倭亂後의 對日關係>(≪한국사≫12, 국사편찬위원회, 1977)와 李敏昊,<壬辰倭亂後 朝鮮의 對日外交-國交再開過程->(≪壬亂水軍活動硏究論叢≫, 海軍軍史硏究室, 1993)을 주로 참고하였다.왜란의 원흉인 풍신수길의 사망과 왜군의 패퇴는 일본내에서 권력투쟁을 야기시켜 조선침략에 전혀 관여한 사실이 없다고 자처하는 德川家康의 江戶幕府 곧 德川幕府의 새 정권을 탄생시켰다.

 일본의 새 집권자로 등장한 덕천가강은 풍신수길정권과의 차별성을 부각시켜 국내정치의 안정기틀을 마련하고 국제적으로도 새 정권의 정통성은 인정받고 문화적으로 새 기술 및 문물을 전수받아 경제적 실리까지 얻고자 하였으므로 조선과의 국교회복을 원하였다.

 한편 조선경제에 의존하여 생활하였던 對馬島는 왜란중 침략군의 향도로 참전하였으므로 왜란이 끝나자 군사적으로 조선의 보복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경제적으로 조선과의 交隣貿易이 단절되어 생활필수품의 공급이 끊기게 되어 생존까지 위협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대마도주 宗義智는 당시 일본정권의 실권자인 덕천가강으로부터 조선과의 외교교섭권을 위임받아 조선과 일본의 중개자로 조선에 접근하여 왔다. 왜란이 끝난 다음해인 선조 32년(1599) 3월부터 隣好를 다시 복구하자는 請和交涉使를 빈번히 조선에 보내 통교할 건을 조정에 간청하였다.

 반면 조선은 왜란으로 국민의 대왜감정이 적개심으로 고조되고 조정에서도 대마도의 정벌론까지 대두되고 있어서138)≪宣祖實錄≫권 107, 선조 31년 12월 임신·계유 및 권 111, 선조 32년 4월 병인. 왜측의 통교요청을 즉각 거부하였다. 그러나 일부 조신들 사이에서는 비참했던 왜란의 경험을 통해 국가의 최급선무는 전쟁재발의 예방이고 왜군에게 납치된 10여 만 被擄人의 刷還을 위해서 대일외교의 유연한 대응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명군 또한 왜군이 퇴귀할 때에 딸려보낸 볼모의 송환에 고심하고 있어서139) 李敏昊, 앞의 글, 524∼525쪽. 조정도 왜측이 보낸 교섭사신의 입국만은 거절할 수 없었다. 따라서 조선과 국교재개를 열망하고 있던 대마도는 선조 32년 3월부터 조선과 일본의 국교가 재개되는 선조 40년(1607) 정월까지 20여 회의 통교교섭사를 조선에 보내어 덕천막부와 함께 국교를 재개하여 줄 것을 간청하였다.

 조정에서는 대마도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초기에는 대왜강경론이 우세하였지만 대마도와 접촉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절실한 요구에 대처하여 일본의 중앙 정부인 막부와는 가능한 한 통교를 단절하되 그 번방인 대마도와는 무역과 통교를 분리하여 무역은 점차 허용하되 통교만은 지연시킨다는 이중의 외교적 대응책을 취하게 되었다.

 대마도주 종의지는 선조 32년 한해만에도 무려 3회나 사신을 보내 조선이 인호를 복구하여 줄 것을 간청하였다. 특히 3회째에는 조선피로인 15명과 명 인 5명을 왜란의 종결 후 처음으로 송환하여 당시 일본이 억류하고 있던 조선인과 명인을 되돌려 보내겠다는 의사를 나타냈다. 대마도주가 명인을 보낸 것은 명군이 보낸 볼모의 송환을 전제로 경리 萬世德으로 하여금 대왜통교를 거부하는 조선에 외교적인 영향력을 행사해 주기를 기대한 조치였다.140) 李敏昊, 위의 글, 525쪽 참조.

 선조 33년 대마도주 등은 3차례 사신과 1차례 書契를 보내 조선에 강화 할 것을 촉구하는 한편 조선피로인 500명과 명군이 볼모로 보낸 40여 명의 明官을 전원 송환하여 통교를 진심으로 원하고 있다는 성의를 표하여 왔다. 이를 계기로 비변사는 통사 朴大根을 대마도에 처음으로 보내 대마도주와의 접촉을 시도하였다.

 이 때 박대근은 조선이 일본과 국교를 재개하는 문제가 명과의 협의사항임을 알려 그들의 요구를 명나라 조정과 협의하겠다는 의사를 대마도주에게 전달하였다. 이러한 조선조정의 변화는 대마도의 통교교섭사의 왕래에 따라 조선의 대왜 피로인 중 송환자와 탈출자들이 일본의 국내사정을 알려오는 가운데 前佐郞 姜沆이 풍신수길의 사망 후 풍신수길파와 덕천가강파가 내분중에 있어서 일본이 군사를 움직일 여력이 없다는 비교적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였기 때문이었다. 또 선조 33년 9월까지 명군도 완전히 철병하게 되어141) 柳承宙,<倭亂後 明軍의 留兵論과 撤兵論>(≪千寬宇先生還曆紀念 韓國史學論叢≫, 一潮閣, 1985), 643쪽. 조선조정으로서도 계속 일본의 정세를 정탐할 필요성이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조선조정은 통교문제에 있어서 일본의 중앙정부(덕천막부)와 대마도를 하나로 보아 통교단절의 입장을 견지하고, 교역문제에 있어서는 대마도에게 覊縻策을 써서 교역만을 허용하려고 하였다.

 당시 대마도와의 교역은 형식상 금지되어 있었지만 현실에서는 대마도 사신이 올 때마다 進獻物을 올렸으므로 조선의 하사품이 답례로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왜사를 따라온 潛商의 밀무역도 실제로는 근절시킬 수 없어서 교역은 점차 증가추세를 나타내게 되었다.142) 李鉉淙, 앞의 글, 355∼356쪽 참조. 그러므로 조정은 이러한 현실을 기정사실화하여 대마도의 절박한 경제적 어려움을 일단 풀어주어 대마도를 통해 일본 중앙정부의 동향도 탐지하고 그들의 국교재개의 요구를 단절시키는데 이용하려고 하였다.

 선조 33년 9월 대마도주 종의지와 柳川調信(야나가와 시게노부)은 조선이 교역만을 허용하려는 회유책에 만족하지 않고 서면으로 청화하여 왔다. 이 때 조선조정은 대마도가 조선피로인을 완전히 송환하는 데 성의를 다하면 許和하겠다는 뜻을 비로소 대마도주에게 전하는 한편 선조 34년 11월에는 東萊召募官 千摠 全繼信과 통사 孫文彧을 대마도에 보내 적정을 정탐케 하였다.

 한편 덕천가강은 德川幕府를 정식으로 출범하기에 앞서 조선과 국교를 재개하려고 자신은 왜란과의 관계에서 「盡反秀吉所爲」하였다는 명분을 앞세우고, 대마도주에게 국교의 교섭을 강화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에 도주 종의지는 선조 35년 橘智正을 조선에 보내 국교의 재개를 간청하여 왔다.

 조선은 율지정이 덕천가강의 뜻이라는 이유로 국교의 재개를 간청하자, 그에게 덕천가강의 통교요구의 진위를 증거하여 줄 것과 풍신수길의 침략행위를 덕천가강이 사죄할 것을 요구하고 조선피로인을 전원 송환하여 줄 것을 제의하였다. 이러한 조선의 요구는 막부의 수용거부를 예상하여 계속 일본과 단교 상태를 유지하려는 조정의 뜻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마도주 종의지는 덕천가강이 서명한 강화요청의 서계를 선조 36년(1603) 6월 橘智久를 통해 전하여 왔고, 조정도 교섭사의 청구물품 중 일부인 약재만은 교역하여 주었다. 왜사의 귀국 후에는 통사 박대근을 대마도에 보내 명나라 조정으로부터 조선이 대왜국교를 재개하는 문제에 대한 의사표시가 곧 있을 것이라고 알렸다. 이러한 조정의 응대는 일본과 교섭을 지연시키려는 외교적 조치로서의 의미가 내포된 것이다.

 이에 따라 일본측은 강화문제의 타결을 촉구하기 위해서 상투적으로 종종 사용하던 일본의 재침설을 유포시켰다. 선조 36년 말에 송환된 河東幼學 金 光은 조정이 일본의 강화요청을 끝내 거절하면 일본이 재침할 가능성이 있다고 상소하였던 것이다.143)≪宣祖實錄≫권 171, 선조 37년 2월 무신. 이러한 일본의 재침설은 왜란의 악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민심을 동요시켰다.

 조선은 그 진위를 정탐하기 위해서 선조 37년 8월 승려 惟政을 대마도에 보내 開市를 허용하겠다고 대마도주에게 통보하여 회유하였다. 그리고 그가 귀국하자 조정은 일본의 재침설의 사실여부를 직접 알아 보려고 그를 일본으로 보냈다.

 倭情探敵使 유정은 선조 38년 3월 京都 伏見城에서 덕천가강과 그 아들 德川秀忠(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배석하에 예정하지 않았던 회담까지 갖게 되었다. 이 때 덕천막부의 집권자인 덕천가강은 왜란과 자신은 전혀 무관하였으므로 조선이 통교를 허락하여 줄 것을 유정에게 직접 요청하였다. 그는 유정의 귀국길에 조선 피로인 3천여 명을 송환하여 성의를 표하여 왔으므로 조정에서도 대왜통교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朝議는 찬·반론으로 이어졌으므로 선조는 왜침이 그들의 좌절로 종결된 상태에서 끝내 대왜단교만을 견지할 수 없다는 대왜강화론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측이 계속 통교교섭사를 보내고 조선피로인을 송환하면서 국교재개를 간청하여 왔으나 조의가 결론을 도출하지 못하자, 선조는 불의의 왜침을 예방하는 일이 爲國安民策임을 밝혀 일본과 국교를 재개하기로 결심하였던 것이다. 조선은 마침내 국교재개의 전제조건으로 일본과 강화를 요청하는 국서와 왜란 중 왕릉을 도굴한 犯陵賊의 인도를 요구하였다.

 덕천막부는 선조 39년 11월 왜란 후 최초로 日本國使 율지정을 보내 범릉적 2명을 조선에 인도하고, 국서로 풍신수길의 침략행위를 사죄하며 국교재 개를 정식으로 요청하여 왔다. 조정에서는 범릉적과 국서의 진위문제를 둘러 싼 논의가 분분하였지만 결국 일본측이 일단 조선의 요구에 순종하여 왔다고 간주하고144) 李鉉淙, 앞의 글, 357∼358쪽 참조. 일본과 국교를 재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결정의 배경에는 국초부터 조선의 대외정책의 기조였던 교린의 도를 유지하고 왜란 후 국가의 재건을 위해서 최대의 장애요인이 될 수 있는 일본의 재침가능성을 외교적으로 완전히 배제하여 당시 북방에서 준동을 점증하여 온 여진족에 대비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조선조정은 종래 통신사를 回答使兼刷還使로, 서장관을 종사관으로 호칭하여 선조 39년(1606) 9월 중순 僉知中樞府事 呂祐吉을 정사로, 홍문관 교리 慶暹을 부사로, 좌랑 丁好寬을 종사관으로 임명하였다. 이들이 선조 40년 6일 일본 江戶城에 도착하여 덕천막부의 2대 실권자인 덕천수충과 회담함에 따라 조선과 일본의 국교는 재개되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