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Ⅰ. 임진왜란
  • 4. 왜란중의 사회상
  • 1) 군량미 조달과 농민의 실상
  • (1) 난초의 양식실태

(1) 난초의 양식실태

 조선 전기 전반을 통하여 三倉(常平倉·社倉·義倉)에 저장된 미곡이 가장 많았던 시기는 중종연간으로 총 2,030,000섬에 달했다. 그러던 것이 점차 나라의 씀씀이가 커지면서 줄어들기 시작하여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날 즈음에는 대폭 감소되어 50여만 섬에 불과했다.146)≪宣祖實錄≫권 140, 선조 34년 8월 무인. 이 양은 국가에 소요되는 모든 경비를 제외하면 군사를 양성할 만큼 충분한 것은 아니었지만, 비상시국을 당하여 당면한 군량을 충당하는 데는 결코 적은 양이 아니었다. 그러나 갑자기 일본의 침략을 받아 국토의 대부분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자 침략을 받은 지역의 官穀을 옮겨 놓지 못한 채 불에 타거나 적에게 약탈당하였다. 민가의 미곡도 급속히 품귀현상이 일어났다. 오직 곡창인 호남지역은 왜군의 침입을 막을 수 있어서 군량미 마련에 큰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중앙과 지방의 연락이 두절되고 관곡을 관장할 관원을 별도로 임명하지 못하여 방치된 상태였기 때문에 관군이나 의병할 것 없이 무절제하게 소모하여 곧 바닥을 드러내게 되었다.

 중앙정부는 부족한 군량미를 충당하기 위하여 각 도에 調度使를 파견하여 募粟활동을 전개하게 되었으며, 이에 호응하여 地方士民들도 모속활동을 전개하여 좋은 성과를 올렸다. 사족과 평민들에 의하여 모아진 곡식을 義穀이라 불렀으며, 의곡은 서해를 통하여 피란정부가 있는 의주까지 운반되었다. 또한 부민 중에도 상당한 양의 양곡을 바치는 자가 있어서 어렵기는 하였으나 명나라 원군이 오기 이전에는 그런대로 군량미 보급에 있어서 현상유지가 가능했다. 이 기간은 군량미 걱정보다 적진에 나가 싸워 적을 물리칠 전투병력이 더욱 절실했다고 하겠다. 이러한 상환은 명나라 원군이 다수 압록강을 건너오리 라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바뀌었다.

 선조 25년 11월 왜군이 침입하지 못한 평양 서쪽 沿道 각 고을에는 군량미 5만 섬과 黃豆 4만 섬이 비축되어 있어 소수의 관군과 군마를 먹일 수 있었다.147)≪宣祖實錄≫권 32, 선조 25년 11월 정묘. 그러나 멀지 않아 명의 원군이 많이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조선정부는 명나라 군대의 군량마련을 위하여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대비책으로 같은 달에 軍功廳을 설치하여 모속의 공이 있는 사람에게도 전공에 준하는 賞職을 적용할 것을 결의하고 모속실적에 따른 상직의 규정을 공포하여 募粟者와 納粟者에 대하여 처우를 개선해 줌으로써 효율적인 모속의 방도를 강구하게 되었다.148)≪宣祖修正實錄≫권 26, 선조 25년 11월. 또한 호남양곡을 운반하는 책임은 낮은 관원이 감당하던 것을 堂上官 이상의 높은 벼슬아치로 교체하여 운송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였다.

 동년 12월 명나라 원군이 대거 조선 땅에 들어오자 전투양상은 급속히 전환되었다. 종전까지 조선정부는 군량미에 대한 근심보다 훈련된 병력의 부족함을 더 염려하였다. 그러나 명나라 대군이 들어온 이후부터는 상황이 달라지게 된다. 즉 부족했던 조선의 병력은 명나라 군사로 보충할 수 있었으나 그들에게 제공할 군량미의 조달은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명나라가 이미 수만 명의 군사를 징발하여 계속 들어온다고 한다. 군사를 징발한 것은 명나라지만 군량미를 대는 것은 우리 나라의 책임이다. 우리 나라는 財穀을 탕진하였는데도 명나라 수만의 원군에게 급식을 제공하여야 할 형편이니 오늘의 근심은 싸울 군사가 없는 것을 근심할 일이 아니라 양곡이 없음을 근심할 뿐이다(≪宣祖實錄≫권 34, 선조 26년 정월 정묘).

 비변사가 위와 같이 아뢴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정부는 「無軍」보다 「無糧」이 더 무겁고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명군이 내원할 때는 병력만을 출동시킨 것이 아니라 무기 등 군수물자와 군량미도 많은 양을 보내왔다. 그러나 군량미는 명군에 의해 그들의 진영까지 운반되지 않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까지만 전달되었다. 그러므로 명군의 급식을 위한 조선측의 군량미 조달은 적기에 공급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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