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Ⅰ. 임진왜란
  • 4. 왜란중의 사회상
  • 1) 군량미 조달과 농민의 실상
  • (2) 명군 내원 이후의 군량조달

가. 명나라 군량의 운반

 7년에 걸친 전쟁기간에 명나라가 조선에 파견한 총 인원은 전투병력과 비전투요원의 인원에 관한 기록을 통하여 밝힐 수 있으나149) 李肯翊,≪燃藜室記述≫권 17, 宣祖朝故事本末 亂中時事摠錄. 군량미나 銀兩에 관한 것은 기록마다 차이가 있어서 어느 것이 정확한 내용인지 규명하기가 어렵다. 왜란중에 호조판서로 군량미 운송의 총책을 맡았던 李睟光의≪芝峰類說≫에서는 명나라가 壬辰·丁酉亂 전후에 걸쳐 帑銀 수만 냥과 山東穀 20만 섬을 보내왔다고 했는데,150) 李睟光,≪芝峰類說≫권 3, 兵政部 征伐 李肯翊의≪燃藜室記述≫을 보면 糧銀이 약 5,832,000여 냥이고, 交易米豆銀이 3백만 냥, 實用本色糧米 수십만 斛, 諸將賞銀 3천 냥, 山東糧 2십만 斛으로 되어 있다.151) 李肯翊,≪燃藜室記述≫권 17, 宣祖朝故事本末 亂中時事摠錄. 어느 기록이 맞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병력뿐이 아니고 많은 양의 군량미와 군수물자를 보내왔음은 분명하다.

 이 많은 양의 군량미를 일시에 운송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러나 명나라 원군이 왜군을 추격하여 서울을 수복하고 남쪽으로 진격함에 따라 보급로는 길어졌고 의주에 쌓아 둔 명나라 양곡을 남쪽까지 운반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있었다. 양곡 운송방법은 두 가지가 있겠는데 하나는 육로를 택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해로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해로를 이용하면 육로보다 힘을 적게 들이고 한 번에 많은 양을 운반할 수 있는 이점은 있으나, 계절의 장애를 받을 뿐만 아니라 배의 부족 등 곤란한 점이 많아 초기에는 육로를 택하는 일이 많았다.

 육로로 운반하는 데에는 민간인으로 싸움에 나갈 수 없는 나이 많은 사람들과 부녀자도 동원되었으며. 이것으로 부족해서 왜란초 무력한 관군을 대신하여 싸워 많은 전과를 올렸던 의병과 승군(義僧軍)까지 동원되었다. 정부는 각 처의 의병들을 차출하여 의병장으로 하여금 인솔케 하고 군량미를 목적지까지 운반하여 명군에게 공급하게 하였으며, 명령을 어기는 자는 의병장을 군율에 회부하도록 하였다. 의병을 군량미 운송에 동원한 것은 의병의 해체와도 연관성이 있기는 하나,152) 李章熙,<壬亂中 糧餉考>(≪史叢≫15·16, 高麗大, 1971), 361쪽. 그만큼 양곡의 운반이 다급했던 것만은 틀림없다. 늙고 쇠잔한 관군과 의승군까지 군량미 운송에 동원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의병이나 의승군의 일부가 군량미 운반으로 전락한 것은 명군이 조선에 들어온 지 얼마되지 않은 때였다. 처음에는 명군이 남쪽으로 전진하기 이전인 관계로 군량운송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으나, 왜군이 선조 26년(1593) 4월 19일 서울에서 철수하여 남쪽으로 쫓겨가자 싸움터가 그 곳으로 옮겨감에 따라 군량의 수송거리도 몇 배로 늘어났다. 이에 종전의 수송인력으로는 명군이 급식할 수 있는 충분한 양의 군량미를 운반할 수 없어 인력을 늘리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그러므로 부득이 실전에 참가한 관군을 차출하여 군량운송에 충당하였으며, 그것으로 부족하여 난중에 지휘관을 확보하기 위하여 선발한 무과급제자 중 미처 싸움터에 나가지 못한 자들까지 군량을 운송하는데 충당하는 일도 있게 되었다.153)≪宣祖實錄≫권 35, 선조 26년 2월 계사.

 명나라가 보낸 군량미의 수송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대체로 육로와 해로 두 길을 택하였다. 선조 25년 12월 명군이 내원한 이래 선조 27년 8월 일단 본국으로 철수하기까지의 기간은 주로 육로로 수송하였으며, 이를 위하여 정부는 수복지역의 소나 말을 징발함은 물론 왕의 호위병과 동궁행차에 따르는 군인 중 말을 소유한 자와 호남의병 가운데 말이 있는 자를 차출하여 명군의 군량미를 운반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처는 기강이 해이하여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했고, 한 사람이 2斛을 운반하는 괴로움을 면치 못했다. 또한 대부분의 소나 말이 왜군에게 약탈당한데다 명군이 수용으로 매일 수백 두씩 도살되었으므로 운반에 이용할 마소도 날로 부족했다. 그러므로 男負女戴하는 경우도 허다하여 의주에 적치된 명군의 양곡을 목적지까지 운반하는 도중에 소모되는 양이 더 많아서 출발지의 양과 도착지의 양에 상당한 격차가 나타났고, 따라서 군량미 보급의 절대부족을 면할 수 없었다.

 해로는 丁酉再亂으로 명군이 재차 내원하면서 많이 이용되었다. 정부는 이를 위해 각처에 산재한 배들을 조사하여 보내도록 하였으나 司饔院의 漁父船, 宮家와 內需司의 배 등을 빙자하여 거절하는 예가 많아서 기대하는대로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이들 중에는 避役을 위해 구실을 붙이는 예도 있었지만, 관료들이 소유한 배도 적지 않아 권력을 배경으로 出役을 기피하여 타인의 눈총을 받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긴박한 상황에서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력이 다하여 전선을 만들 수 없는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군량미를 운반할 배를 만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이러한 궁여지책에서 나온 것이었다.

 한편 운송과정에 있어서 별도로 지정한 관원을 배치하여 감시케 하였으나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선박 중에는 運糧船을 가장하여 비어서 내왕하는 배들이 많았으며, 적재한 군량미를 목적지까지 운반하지 않고 도중에 달아나 는 자도 있어 私家에서 유용되는 것도 많았다. 이에 대한 여러 가지 방지책이 제시되기도 하였으나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의주에 쌓아둔 명나라 군량미를 육로나 해로로 운송하는 과정에서 많은 난관이 있었다. 운송 도중에 많은 양이 소모되었을 뿐 아니라. 소모인력이 부족하고 수송수단도 원활하지 못하여 명나라에서 보낸 양곡으로 명군을 급식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부족량을 국내에서 조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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