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Ⅰ. 임진왜란
  • 4. 왜란중의 사회상
  • 2) 송유진·이몽학 등의 난
  • (2) 이몽학의 난

(2) 이몽학의 난

 임진왜란 이후 흉년이 계속되다가 선조 28년(1595) 풍년으로 아사상태에 있던 민중을 구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의 수혜는 지배계층의 수탈의 소지를 제공하였다. 당시 중앙정부는 강화를 둘러싸고 남인·북인·서인의 3파전이 치열하였으며 일본의 재침에 대비하기 위하여 각처에서 산성을 수축하는 등 민중의 부담이 가중하여 민중의 원망과 괴로움은 현실여건과 타협할 수 없는 사회모순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러한 불안한 기회를 이용하여 반란을 획책한 것이 李夢鶴이었다.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킬 즈음에 민중의 동태를 趙慶男은 “이 때에 인민들은 난리를 겪어 곤핍한데도 백방으로 침탈을 당하여 한번 속여서 미혹시키는 말을 듣고 따르는 자가 몰려와서 며칠이 채 안되서 1만여 명에 이르렀다”181) 趙慶男,≪亂中雜錄≫권 2, 갑오 7월.고 기록하고 있다. 운집한 군중들은 당연히 중앙정부를 전복하려는 반란세력에 호응하게 되었다. 농민들은 마음이 끌려 그들이 지나가면 논밭에서 김을 매다 호미를 들고 환성을 올렸다고 하며, 행상들은 몸둥이를 들고 즐겨 날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182) 위와 같음.

 이몽학은 반란을 일으키기 얼마 전부터 募粟官 韓絢 등과 함께 鴻山에 있는 無量寺에서 모의를 하고 조련을 실시하였으며‘同甲契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친목회를 가장한 반란세력 규합에 열중하였다. 한현은 先鋒將 權仁龍·金時約 등과 함께 어사 李時發 휘하에 있으면서 호서지방의 조련을 관리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민심이 떠나 있고 방비가 없음을 알아채고 이몽학과 함께 때를 틈타 모사할 것을 꾀했다. 이 때 한현은 부친의 상을 당하여 洪州로 내려가면서 먼저 이몽학에게 거병하도록 하고 자기는 內浦로부터 상응할 것을 약속하였으나 실은 이몽학의 거사에 대한 성패만을 관망했다. 이몽학은 金慶昌·李龜·張後載·승려 凌雲·私奴 彭從 등과 함께 홍산 雙防築에 주둔하였으며 僧俗軍이 1천여 명에 가까웠다.

 선조 28년(1595) 7월 6일 이몽학 일당은 야음을 틈타 홍산현을 습격하여 현감 尹英賢을 사로잡고 곧 이어 林川郡을 습격하여 군수 朴振國을 납치하였다. 윤영현과 박진국은 반란세력에 투항하여 한편이 되었고 이몽학은 이들을 큰 손님으로 접대하는 한편으로 인신을 넘겨 받아 이를 활용하여 무기를 빼내고 두 고을 사람들을 협박하고 가담케 하여 무리가 수천 명에 이르게 되었다. 다음날 이몽학 일당은 定山縣을 함락하였고 현감 鄭大卿은 겨우 몸만 빠져 탈출하였다. 8일에는 靑陽縣을 함락하니 현감 尹承緖가 도주하였고, 9일에 大興郡을 함락하자 군수 李質粹는 산중으로 숨어들어 적정을 중앙에 보고하였다.

 이와 같이 여러 고을이 연달아 무너지고 수령들이 모두 패하여 반적에게 降附하거나 도주하니 관원과 백성들은 반적에게 복종하여 그 무리가 수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扶餘현감 許守謙은 반군이 경내에 침범하기도 전에 겁에 질려 수하인이 무기를 반적의 진영으로 운반하는 것을 보고도 감히 처단하지 못하고 반군이 이르자 문서를 보여주었다. 瑞山군수 李忠吉은 아우 세 명을 逆黨에게 몰래 부역케 하여 왕래하며 도와주었다고 하니 이러한 형세를 간파한 이몽학은 대흥을 함락한 같은 날에 홍주를 침범하였다.

 홍주목사 洪可臣은 갑자기 당하는 일이라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본 고을 官屬인 李希·申壽 두 사람이 거짓으로 적에 투항하고 홍주성이 견고하니 곧바로 공세를 취해서는 안된다고 하여 공격을 늦추게 하였다. 그리 고 성안의 허실을 조사하여 보고하겠다고 속이고 다시 성안에 들어가서 적정을 목사에게 알려주었다. 반란군들은 늦게까지 이희·신수의 회보가 오지 않자 그제서야 그들의 흉계에 빠졌음을 알게 되었다. 그 동안 홍가신은 수성의 완비를 기하게 되었고, 본 고을에 사는 무장 朴名賢·林得義도 성안으로 들어오는 등 많은 무사들이 모여들었다. 체찰사종사관 辛景行은 내포에 이르러 변이 있음을 듣고 이웃 고을 수령들에게 전령하여 구원을 요청하였고, 충청 수사 崔湖 또한 군사를 이끌고 당도하여 홍주성의 수비태세는 완전히 갖추어 졌다.

 박명현은 무사들을 내보내어 반란군의 선봉대를 습격하여 많은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반란군은 물러가지 않고 홍주성 2, 3리까지 이르러 각 진에 1천여 명씩 5진으로 편성하여 성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저녁이 되자 반란군의 장수 몇 명이 말을 타고 성 아래로 와서 “天運이 이와 같거늘 어찌하여 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나와서 호응하지 않는가”라고 외치기도 하였다. 밤이 되어 성중에서 화포와 火箭을 반군을 향해 퍼붓자 동문 밖 민가가 불에 타서 화광이 하늘로 치솟았다.

 이 때를 기하여 충청병사 李時言은 온양에서 곧바로 홍주로 향하여 禮山 無限山城에 이르렀고, 어사 이시발은 維鳩에 포진하고 중군 李侃은 청양에 포진하여 군세를 크게 떨치면서 홍주로 향하려고 하였다. 이에 이몽학은 홍주성을 함락시킬 수 없음을 알고 “한현이 오게 되면 목사를 참수하여 그 머리를 기에 매달아 놓겠다”고 외치면서 11일 새벽에 무리를 이끌고 德山을 향하여 달아났으며 도망자가 속출하였다. 박명현은 이 틈을 타서 성안에 있는 병졸을 이끌고 청양까지 추격했고, 최호 등 모든 장수들이 군졸을 이끌고 적진 아래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全州判官牙兵 尹誡는 때를 엿보다가 부하 군졸을 이끌고 밤중에 적 속에 뛰어들어 총통을 연발하면서 도원수와 전라감사 및 忠勇將 金德齡 등의 병마가 이 곳에 이르렀으므로 날이 밝으면 사살하겠다고 위협하면서 반란군의 두목을 참수하여 그 머리를 가지고 오는 자는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외쳤다. 그리하여 반란군중은 이몽학이 홍주성에서 퇴각할 때 김덕령·洪季男이 중앙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도성으로 곧바로 향하고 있다고 흰소리한 말을 믿지 않게 되었으며, 그 중 일부는 반란두목을 살해하기 위해 앞을 다투어 이몽학의 군막으로 난입하였다. 이들 중 김경창·林億命·太斤 등 3인이 먼저 이몽학의 머리를 베어 헌납하였으며 난민들은 일시에 흩어졌다.

 이 때 한현은 반란군 수천 명을 이끌고 홍주에 주둔했으나 이시언과 홍가신 등의 진군으로 반민들이 패주함에 따라 사로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앞서 피살된 이몽학은 머리와 수족이 잘려 서울로 압송되어 철물전 길가에서 梟示되었다가, 3일이 지난 다음 사방을 돌아가면서 효시되었다. 서울로 압송되어 추국을 받고 승복한 뒤 처형된 자가 33명이나 되었으며, 외방에서 처형된 자가 1백여 명이나 되었다. 이들 모두에게 緣坐律을 적용하려 하였으나 그렇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기 때문에 외방자에 한해서는 정황을 확실히 파악할 수 없다는 이유로 제외시켰다. 연좌율에 적용되어 희생된 경우는 한현의 아들 毅然이 교수형을 받았으며 이몽학과 한현의 친인척들이 각처로 유배되었고 이몽학의 홍산가옥이 破家瀦宅당했고 홍산현도 혁파되었다.

 이리하여 반란주도자의 처리는 일단락되었으나 반란주모자의 搜見文書나 심문과정에서 의병장들의 이름이 오르내려 조야에 큰 충격을 주었다. 즉 이몽학을 복주할 때 그의 문서 속에 김·최·홍씨 성이 발견되었고, 한현은 결박당한 뒤 도원수가 묻는 말에 김덕령·崔聃齡·흥계남이 공모했고 또 郭再祐·高彦伯은 모두 나의 심복이라고 대답했다.183) 趙慶男,≪亂中雜錄≫권 2, 병신 7월. 이로 인하여 이들은 각기 서울로 붙잡혀 와서 곤혹을 치렀으나 대부분 “왕이 다 죄를 묻지 않겠다”하여 풀려났다. 그러나 김덕령과 최담령은 끝내 석방되지 못하고 옥에 갇혀 추국을 받았다. 김덕령은 옥에 갇힌 지 20여 일간 6차의 국문을 받다가 승복하지 않고 마침내 杖殺당했다. 얼마 후 최담령도 수차 국문을 당하고 불복하다가 옥사했다. 김덕령에 대해서는 후대에 신원되어 모든 죄상이 벗겨지고 陞階하여 追諡까지 받았으나 지나친 반민의 색출은 민가에 많은 피해를 주었다.

 추국이 끝난 다음 이몽학 토평에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포상이 있었다. 이몽학을 참수한 임억명·김경창은 嘉善에 特陞되고 후에 김경창은 임억명보다 공이 낮다 하여 通政으로 강등했다. 태근에게는 특별히 6품 실직을 제수하였고 반란군이 홍주성을 침입했을 때 적의 침입을 지연시킨 이희·신수에게도 6품실직을 주었다.

 한편 朝臣 가운데 공을 세운 이시언과 최호를 가선에, 이시발·홍가신을 각각 등정으로 승계했다. 박명현에게는 포상을 내리지 않다가 廷臣들의 연이은 간청으로 후에 가선을 승계했다. 또한 추국을 담당한 관원에게도 가자와 상품이 사급되었다. 그 후 이몽학난 토평에 따른 封功문제는 수차에 걸쳐서 논의되다가 선조 37년(1604)에 3공신(扈聖·宣武·淸難) 祿封결정에 따른 교서가 반포되어 이몽학난의 토평공신인 淸難功臣 1등에 홍가신, 2등에 박명현·최호, 3등에 신경행·임득의 등이 결정되어 이에 따른 승계와 은전이 내렸고,184)≪宣祖實錄≫권 180, 선조 37년 10월 을해. 다음해에 청난원종공신을 녹봉했는데 은전을 받은 사람은 臨海君 이하 수천 명에 달했다.185) 藤井誠一,<李夢鶴の亂について>(≪靑丘學叢≫22, 1935), 1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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