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Ⅰ. 임진왜란
  • 4. 왜란중의 사회상
  • 3) 항왜와 부왜·부로
  • (1) 항왜

가. 왜군의 투항동기

 降倭란 투항한 왜군을 말하는데 왜란중에 왜군이 투항하게 된 동기는 크게 두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조선왕조 건국 이래 왜구를 막기 위해 취해진 대왜정책의 전환이었고, 둘째는 난중에 항왜를 위한 조선정부의 항왜 誘致政策의 奏效라 하겠다. 전자는 투항의 먼 원인으로 들 수 있으며 후자는 직접 원인이 되겠다. 조선정부는 초기부터 왜구의 침입을 방지하자는 의도에서 왜인이 큰 손실을 끼치지 않는 한 조선의 내왕을 묵인하였고, 그들 중 귀환을 권유하는 사례까지 있었다. 또한 귀화인 중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하는 자에게도 요구를 들어주었던 것 같다. 이와 같은 조선 초기의 대왜정책은 일본과의 경제적인 이득이나 문화적 교류를 목적으로 취했던 것은 아니었으며, 어디까지나 왜구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한 정책적인 외교수단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러한 조선의 대왜정책은 조선을 내왕하는 왜인들로 하여금 호감을 느끼게 하여 내왕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귀화하였으며, 조선정부는 이들을 내륙지방에 거주하게끔 하였다.

 중종 이후에 오면 왜구가 조선에 피해를 끼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서 조·일 양국간에는 통교가 일시 끊어지는 때도 있었으나, 북쪽 野人과 왜구의 침입이 동시에 있을 것을 염려하여 곧 재개하였으며, 그 이상의 충돌을 피하려던 것이 조선의 외교방침이었다. 그리하여 조선정부의 초기 대왜정책은 별다른 변동없이 임란 전까지 계속되었고 이 때까지 조선을 내왕하던 왜인이나 귀화인 중에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는 자도 있었다. 이들에 의해 조선의 대왜정책은 일본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조선의 발달한 문화도 소개될 수 있어서 왜란중 왜군이 투항하는 데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난중에 왜군이 투항을 결심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세 가지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왜군진영에 기근이 극심했다는 것, 조선정부가 항왜를 후대한다는 소문이 왜군진영에 전파된 것, 일본이 이길 수 없는 전쟁이라는 것을 깨닫고 본국으로 철수했을 때에 겪어야 할 생활고 등이 그것이었다.

 왜군들은 기근으로 전투력을 상실하기는 조선 관군과 다를 것이 없었다. 어찌보면 그들의 식량난은 조선측보다 더욱 심각했던 것 같다. 정유재란 때 울산산성 안에 둔진하고 있던 왜장 가등청정군의 모습이 그것을 잘 말해준다. 그들은 군량미가 다하여 종이를 씹어 먹었고 벽의 마른 흙을 삶아 먹기도 하였다고 한다. 소나 말이 있는 동안은 그것을 잡아서 끼니를 이어갈 수 있었으나 그 많은 군졸이 언제까지 그것으로 연명할 수 없어 굶주림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건장한 왜군은 밤이 되면 성을 빠져나가 명군이나 관군 전사자의 몸을 뒤져 볶은 쌀과 육포 등을 찾아내어 생명을 잇는 자도 있었다. 왜군 중에는 신분이 낮은 농민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싸우다 조선군에 죽음을 당했을 뿐 아니라, 일본 지휘관들의 혹독한 벌을 받아 조금만 방심해도 가혹한 매질을 면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이 곤경에 처한 왜군에게 “조선은 항왜를 후대한다”는 소문이 왜군진영에 공무로 출입하는 조선군관 등을 통하여 전해졌다.

우리는 지난해 정월에 처음으로 바다를 건너와 각자 主將을 따라다녔다. 혹은 薺浦에 설진하고 있는 小西行長 管下에 있는 장수 有馬修理大夫에 예속되었다가, 또 平戶島法印에 예속되기도 하였으며, 동래에 주둔한 樹下 등의 장수에 예속되기도 하였다. 고되게 수비하는 즈음에 조선이 후대한다는 소식을 듣고 매번 조선진영으로 도망치려 하였으나 실제로 그 정황을 알 수 없어 행동에 옮기지 못하였는데, 금년 3월에 전라병영에서 매를 가지고 칼을 바꾸러 소서행장 진영에 온 군관이 있었다. 그는‘너희들이 내 말을 따라 우리 진영에 온다면 필시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우리를 설득하여 우리들은 그 말을 믿고 투항해 왔다(≪宣祖實錄≫권 62, 선조 25년 4월 신유).

 위와 같은 항왜 助國郎·老古汝文 등이 진술한 내용 중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이 투항하게 된 동기의 하나가 조선은 항왜를 후대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왜군 중에 하급병사는 본국으로 철수해 보았자 생활대책이 마련되어 있지 못했다. 대부분이 농민인 하급 병사들은 농사를 지을 조그마한 땅도 소유하지 못했으며, 관인에 속하지 않은 자는 한 말어치의 씨앗을 땅에 뿌려 낟알 1斛을 징수당하는 것이 상례여서 생활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풍년이 들더라도 겨나 쭉정이를 먹어야 할 실정이어서 산에서 고사리나 칡뿌리를 캐먹으면서 아침·저녁의 끼니를 채우는 실정이었고 사역에 동원되어 힘겨운 노동력을 제공해야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서로 말하기를 “조선은 참으로 樂國이요, 일본은 陋邦”198) 姜沆,≪看羊錄≫, 賊中封疏.이라고 하면서, 조선을 부러워하여 투항을 하기로 마음먹은 자가 급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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