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Ⅰ. 임진왜란
  • 5. 왜군 격퇴의 전략·전술
  • 1) 육전
  • (1) 관군의 군령·군사지휘권

(1) 관군의 군령·군사지휘권

 왜군의 북침이 급속도로 진전되어 도성의 위급이 목전에 다가오자 선조는 서쪽으로 피난하면서 비변사의 권한을 강화하여 전쟁수행의 직접적인 최고군령권자인 都體察使를 임명하고 작전지휘의 최고책임자로 都元帥를 임명하였으며 都巡邊使·巡邊使·防禦使·助防將 등 京將을 파견하여 전쟁을 수행하는 비상체제를 갖추었다. 이는 평상시에 관찰사와 수령이 해당지역의 행정체제를 유지하면서 군령·군사권을 겸하도록 한 것과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도체찰사는 전쟁수행에 있어서 직접적인 최고군령권자로 時任議政 중에서 겸하도록 하는 것이 통례였다. 도체찰사가 최고군령권자라는 입장에서 보면 군령체계상 1명을 두는 것이 당연한 처사였겠으나 전쟁 초기의 어려운 시기라 이를 속히 극복하기 위한 방편에서 3명 또는 4명의 체찰사를 임명한 때도 있었다. 이들은 지역적인 면에서는 관할권을 달리하였으나 실제로는 같은 지역내에 2명의 체찰사가 공존하는 경우도 있어 「兵民策應」의 절제권이나 군령권 행사에 있어서 혼선을 가져올 수도 있었다.228) 車文燮,<朝鮮中期 倭亂期의 軍令·軍事指揮權硏究>(≪韓國史學≫5,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3), 11쪽.

 도체찰사는 명나라 원군이 남쪽으로 내려간 뒤로는 명나라 장수의 陪臣으로서 함께 남하하여 그들의 자문에 응할 뿐 작전권을 명장에게 넘겨 도체찰사의 권한을 행사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꼭 그러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조선의 대신들은 명나라 군사와 행동을 같이하면서 명나라 장수와 함께 체찰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229) 車文燮, 위의 글, 29쪽.

 왜란중에 도체찰사로 임명되었던 사람은 柳成龍·鄭澈·兪泓·沈守慶·尹斗壽·金應南·李元翼 등이었으나 실제 군령권을 장악하여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장기적으로 가장 큰 역할은 유성룡과 이원익이 하였다.

 최고군령권자가 도체찰사였던 데 반해 전투지휘의 직접적인 최고책임자는 도원수였다. 왜란중에 도원수는 2품직의 문관이 임명되었는데 전투지휘의 최 고책임자로 무관을 기피하고 문관으로 정한 데는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우리 나라의 武將들은 문자를 제대로 알지 못하여 韜略(병법)을 알지 못한다. 왜인은 비록 글을 알지는 못하지만 평생 武를 업으로 삼아서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조부대로부터 익혀 와서 그것을 깨우칠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문자를 익히지 않아도 슬기로운 지혜가 있다고 하나 다 싸움을 익힌 왜인들만 같지 못하다(≪宣祖實錄≫권 133, 선조 34년 정월 병진).

 위에서 보다시피 軍事籌劃에 있어서는 무장들보다 글을 잘 아는 문관에게 기대를 더 걸었기 때문이었다. 왜란중에 도원수였던 金命元과 權慄은 다같이 문관이었다.

 도원수는 육전은 물론 수전에 있어서도 최고의 작전지휘권자였다. 따라서 수전의 최고지휘권자인 三道水軍統制使도 도원수의 지휘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수륙합동작전이 있을 때 적용되는 것이었으며 수전이 단독으로 이루어질 경우에는 통제사가 자기의 주장대로 작전에 임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그러므로 도원수가 직접 호령을 내릴 수 있는 장수들은 순변사·방어사·조방장 등 경장들이었다.

 때로는 도원수가 도체찰사의 권한까지 행사한 적도 있었다. 선조 26년(1593) 유성룡이 영의정으로 승진하여 중앙으로 올라간 후 좌의정 윤두수가 도체찰사를 겸하기까지의 공백기간은 도원수 권율이 군령·군사권을 함께 행사하여 도체찰사의 권한을 대행한 적이 있었다. 또 선조 30년 정유재란 때 도체찰사 이원익이 신병으로 상경하여 요양을 하고 있는 기간에도 권율이 도체찰사의 권한을 대행하였다. 중신들 중에는 도체찰사의 임무를 도원수가 행사케 하자면서 도체찰사 무용론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영의정 유성룡이 도원수는 전투에 임하여 策應해야 하고 經理의 모든 일은 반드시 대신이 처리해야 된다고 강력히 주장하면서 도체찰사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그대로 존속시키게 되었다.

 선조 27년 권율이 도원수에서 면직되자 이원익이 도체찰사 겸 府元帥府事 로 임명되어 남쪽에서의 군령·군사지휘권 이외에 임전책응하는 도원수의 권한까지 겸하여 행사하였다. 왜란중에 도체찰사가 공석인 때는 있었으나 도원수가 없어지고 체찰사권으로 귀일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이러한 일은 이듬해 정월 권율이 다시 도원수로 임명되기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도원수는 전투 전체를 지휘하는 명령권자이기 때문에 그 비중이 매우 컸다. 그리하여 한때 下三道 뿐 아니라 上四道에도 도원수를 두어야 한다는 논의가 여러 차례 있었다. 그러나 각 도에 각각 巡察使가 있고 戎務의 총책을 맡은 節度使가 있으며 水邊에는 상·하 두 사람의 別將이 있으므로 다시 도원수를 둘 필요가 없다는 반대여론에 부딪쳐 결국 이후에도 도원수는 종래대로 하3도에만 한 사람을 두었다.

 그런데 선조 26년 6월 김명원이 도원수자리에서 물러난 뒤 전쟁이 끝날 때까지 권율이 잠시의 공백을 빼고는 계속 이 자리를 맡았으므로 왜란중의 육전의 실제적인 군사지휘권은 권율이 행사하였다. 그러나 조선 관군이 명나라 원군과 연합해서 전쟁을 수행하는 기간에는 명나라 군사 위주의 작전이 수행되어 도원수의 군사지휘권이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한편 도원수가 관군을 지휘하는 데에는 도원수로서의 기능을 다할 수 없는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 도원수는 도체찰사의 지휘를 받아야 하는데 작전상의 차이로 대립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전쟁수행에서도 비변사를 중심으로 견제 받는 일이 많아서 자기주장대로 작전을 수행하기가 어려웠다. 또한 장수들 간에는 名位와 爵秩이 서로 비슷해서 각기 독자적으로 호령을 하려 하고 힘을 합쳐 싸우려는 마음이 없는 까닭에 임기응변하여 다 자기들 뜻대로 하면서 적을 진격해야 할 때도 함께 나가지 아니하고 패해도 서로 구원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230)≪宣祖實錄≫권 49, 선조 27년 3월 무신.

 지방의 각 관원들도 관찰사를 중시하여 도원수의 명령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와 해결방안에 대하여 海平府院君 윤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권율이 전라감사로 있을 때는 호령하면 잘 실행되었는데, 한번 도원수가 된 이후로는 각 관원이 감사를 중히 여기고 도원수의 명령을 듣지 않으려 한다고 한다. 혹 도원수로서 관찰사를 겸하게 하면 명령을 행사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御使를 내려보내 從事官을 칭하게 한다면 일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다(≪宣祖實錄≫권 51, 선조 27년 5월 계묘).

 관찰사나 수령들이 군직을 띠고 있음에도 도원수의 명령을 듣지 않는다는 것은 중대한 문제이다. 그래서 윤두수는 도원수에게 관찰사를 겸직케 하고 어사를 내려보내 도원수의 종사관을 삼도록 하면 도원수의 명령이 행사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건의에 대해 선조는 도원수가 관찰사의 직을 겸할 수 없다고 거절하면서 관찰사 중에 도원수의 명령을 듣지 않는 자가 있으면 도원수가 스스로 치죄하라고 하였다.

 도원수의 명령을 듣지 않는 것은 관찰사나 수령만이 아니었다. 도원수의 휘하에 있는 제장들도 도원수의 호령을 듣지 않았다. 그것은 爵秩이 비슷한 장수가 많았던 데도 원인이 있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 그 예라 하겠다.

오늘의 근심이 되는 것은 장수가 많은 데 있다. 장수가 많으면 명령이 많은 장수들에게서 나오게 되어 그때그때 맞추어 따를 수 없었으며, 이것은 (싸움에) 패하는 이유가 된다(≪宣祖實錄≫권 72, 선조 29년 2월 계축).

 도원수 권율도 다음에서 보듯이 도원수의 군사지휘권이 제대로 행사되지 못하여 많은 고민을 했던 것 같다.

(도원수) 권율은 누차 큰 공을 세웠으나 항상 마음이 편안하지 못했다. 金應瑞·李時言 등 諸將들도 그의 명령을 받아들여 행하지 않아 권율은 근심과 분통함을 견디지 못하였고 (이 사실을) 狀啓로 조정에 알리면 조정에서는 김응서 등의 죄를 명백히 다스리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권율로 하여금 끝내 그의 才用을 펼 수 없게 하였으니 아까운 일이다(≪宣祖修正實錄≫권 81, 선조 30년 정월).

 도원수와 제장간에 원만하지 못한 명령체계는 전쟁에 큰 해독으로 작용하였으며 이길 수 있는 싸움에서도 패배를 자초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장수들간에도 질시와 반목이 심했는데 경상도 좌방어사 김응서와 우방어사 高彦伯의 불화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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