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Ⅰ. 임진왜란
  • 5. 왜군 격퇴의 전략·전술
  • 1) 육전
  • (2) 전란초의 방어체제

(2) 전란초의 방어체제

 조선 초기의 군사제도는 병조를 정점으로 하여 중앙에서는 五衛都摠府 밑에 五衛가 왕권호위 및 도성방어에 임하고 있었으며, 지방에서는 관찰사·병사·수사를 중심으로 주민이 고을을 스스로 지키는 鎭管體制가 정연하게 편성되어 있어 겉으로 보기에는 결함이 없는 국방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각종 모순의 발생은 軍役代立의 폐단을 조장하였고 이를 시정하기 위하여 16세기 초부터는 이른바 放軍收布란 納布制가 시행되었으나 番價가 치솟아 戶·保의 군역의무자들은 가중되는 부담으로 流亡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군역제의 붕괴는 5위제도나 진관체제의 붕괴를 가져왔다. 진관체제는 과거 서북변계에 군사를 집중적으로 두었던 制勝方略的인 체제로 바뀌게 되었다. 따라서 남쪽에서 변란이 일어나면 중앙에서 도체찰사·도원수·도순변사·순변사·방어사·조방장 등 변방에 밝은 재상을 중심으로 하는 경장을 파견하여 전란을 수습하도록 하였고 마침내 최고군령기관인 비변사까지 두게 되었다.231) 車文雙, 앞의 글, 5∼6쪽. 이로 인하여 평소 군사권을 겸하고 있던 지방의 관찰사나 수령들은 작전에 관한 한 그 지휘권이 경장에게 이관되어 군사권이 그만큼 약화되었다고 하겠다.

 제승방략에 따른 방어체제로의 전환으로 부산진에 이어 동해부가 쉽게 함락되었다는 급보를 받은 중앙정부는 그 대책을 논의한 끝에 다음과 같은 무장들을 선발하여 왜군의 북침에 대비케 하였다. 즉 李鎰을 순변사로 삼아 鳥嶺·忠州방면의 中路를 방어케 하고, 成應吉을 좌방어사로 삼아 竹嶺·충주방면의 左路를 방어케 하였으며, 趙儆을 우방어사로 삼아 秋風嶺·淸州·竹山방면의 西路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또 劉克良을 조방장으로 삼아 죽령을 지키게 하였으며 邊璣를 조방장으로 삼아 조령을 지키게 하는 한편, 慶州府尹 尹仁涵이 儒臣으로 겁이 많다고 하여 前江界府使 邊應星으로 교체시켰다. 또 申砬을 도순변사로 삼아 이일의 뒤를 이어 떠나게 하고 좌의정 유성룡을 체찰사로 삼아 제장을 검독케 하였다.

 이일 등이 내려가기에 앞서 경상도순찰사 金睟는 왜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자 각 고을에 공문을 발하여 수령들이 인솔하는 군사를 적당한 지역에 배치하고 경장이 도착할 때까지 대기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聞慶 이하 각 고을 의 수령들은 자기의 소속 군졸을 이끌고 大丘川邊에 나아가 노숙하면서 순변사가 당도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수일이 지나도 순변사가 오지 않고 왜군이 점점 가까워지자 군사들이 놀라 동요한데다 마침 많은 비가 내려 군장이 젖었으며 군량미의 보급마저 끊어지자 밤중에 모두 흩어졌다. 이에 수령들은 하는 수 없이 單騎로 순변사가 있다는 문경으로 바삐 돌아갔으나 그 고을은 이미 텅비어 있었다. 이어 잔여 군사를 이끌고 咸昌을 거쳐 尙州에 이르니 목사 金澥는 산속으로 숨어버리고 판관 權吉만이 읍을 지키고 있었다. 이리하여 제승방략에 의한 작전 시도는 처음부터 빗나가고 말았다.

 한편 선조는 도순변사 신립을 떠나 보내고난 다음 병조의 업무가 소홀하고 군사들의 원망이 많다 하여 병조판서 洪汝諄을 파하고 김응남으로 교체시켰으며 沈忠謙을 참판에 임명하는 한편 각 도의 군사를 징발하여 와서 돕도록 하였다. 또한 선조는 內需別坐인 金公諒으로 하여금 내수사 奴子 가운데 활 잘쏘는 사람 200명을 뽑아 이끌고 궁내에 들어와 숙직케 하는가 하면 종실로서 摠管衛의 將號를 가진 사람들을 대궐 안에 숙직시키면서 궁궐 내의 경비를 강화시켰다. 그 후 이일의 상주패보에 이어 신립의 충주패보가 잇따라 날아오자 선조는 西行을 단행하기로 하고 이에 앞서 왜군의 서울침공에 대비하여 도성의 방어계획을 세웠다. 즉 우의정 李陽元을 守城大將으로 삼고, 李戩을 左衛大將, 邊彦琇를 右衛大將, 申恪을 中衛大將으로 삼고, 商山君 朴忠侃을 京城巡檢使에, 漆溪君 尹卓然을 부사로 삼았으며, 전판서 김명원을 도원수로 임명하여 한강방어의 책임을 맡겼으며, 경기관찰사에게 명하여 民軍을 징발하여 淺灘을 파내어 왜적의 도강을 막도록 하였다. 또한 李誠中을 守禦使에, 丁允福을 東西路號召使에 임명하였다. 그런데 선조가 도성을 떠나기 앞서 수도의 방어책을 강구하는 과정에서 적임자를 찾기 위해 수일간에 변동이 있었던 것 같다. 중위대장 신각을 부원수로 삼아 도원수와 함께 한강을 지키게 하였고, 변언수를 留都大將으로 삼은 것은 그 예이며, 호칭에서도 수성대장 이양원이 도검찰사가 되었다가 다시 유도대장으로 바뀌는 것 등은 그러한 예라 하겠다. 왕자를 각 도에 파견하여 근왕병을 일으킬 것을 시도한 것도 이 때 였다.

 그러나 한강방어의 책임을 맡고 있던 도원수 김명원은 군사 1천 명을 이끌 고 적의 도하를 막기 위해 濟川亭(현 용산구 보광동 소재)에 진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적이 쏘아 날아온 포환이 정자 위에 떨어지자 김명원은 감히 적에 대항하지 못하고 행재소를 향하여 퇴각하다가 종사관 沈友正이 “한강은 지키지 못하였으나 바라건대 臨津을 지킴으로써 그 뒤를 막자”고 하여 임진으로 향하였다.232) 李肯翊,≪燃藜室記述≫권 15, 宣祖朝故事本末 壬辰倭亂大駕西狩. 그는 임진에 이르러서야 적의 동태를 아뢰었는데 선조는 김명원이 군사가 없었던 것을 참작하여 한강에서 후퇴한 죄를 문책하지 않고 다시 경기도와 황해도의 군사를 발하여 임진을 지키도록 하였다. 그러나 군령체계가 일원화되지 않아 2, 3인의 대장이 각자 호령을 행세하는데다 사기가 떨어지고 전술의 미숙까지 겹쳐 임진의 방어전도 실패하였으며 그 후 평양성의 수비도 수포로 돌아갔다. 이리하여 전쟁초의 방어계획은 제대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악전고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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