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Ⅰ. 임진왜란
  • 5. 왜군 격퇴의 전략·전술
  • 1) 육전
  • (4) 의병의 지휘권과 전략·전술

(4) 의병의 지휘권과 전략·전술

 의병의 지휘권문제를 말하기에 앞서 의병과 관군의 정의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일반적으로 알고 있기로는 군사를 불러모으는 사람이 있어 곳곳에서 義旅를 모집하여 각자 군을 형성하여 주·현의 부름을 받지 않는 자를 의병이라 하였고, 수령이 군민을 징발하여 원수의 절제를 받는 자를 관군이라 하였다.242)≪宣祖修正實錄≫권 26, 선조 25년 12월. 의병과 관군을 구별하는 말로 이 이상 간단명료하게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의병의 개념을 규정짓기는 어렵다. 의병은 관군과는 달리 혈연적 또는 지연적으로 서로 깊이 맺어 있어서 왜군과 만나 싸울 때 향토를 보존하겠다는 신념이 강해서 쉽게 패하지 않았다는 특성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의병을 지휘한 사람을 의병장이라 불렀다.

 의병의 지휘권을 가진 의병장이 되는 것은 크게 두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의병을 일으켜 스스로 의병장이 되는 경우이고, 둘째는 주위 의병들에 의해 추대되는 것이다. 전자든 후자든 의병을 일으킨 처음에는 「의병장」 또는 「의병대장」으로 호칭되었다. 그러나 의병장에게 賜號가 주어지면서부터 그 호칭은 다양하게 되었다. 의병장의 호칭을 그대로 갖고 있는 의병장이 있었는가 하면, 사호를 받게 됨으로써 종전의 의병장의 기능이 확대되기도 하였다. 또 한 의병과 관련되면서 의병장과 같다고는 할 수 없는 사람이 사호를 받고 의병을 고무하는 기능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의병장에게 사호를 내리는 데는 이미 갖고 있는 관직이나 품계가 높고 낮음에 따라 호칭을 달리 하였던 것 같다.왕이나 왕세자가 내린 사호로는 八道義兵都大將·招討使·倡義使·義兵都大 將·忠勇翼虎將軍 등이 있다.

 사호를 받지 못한 의병장 중에는 의병장이란 본래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는 이도 있었지만 별도의 호칭을 갖고 있는 의병장도 있었다. 天降紅衣大將軍(郭再祐)·倡義大將(鄭文孚)·全羅左義兵將(任啓英)·全羅右義兵將(崔慶會)·繼義將(崔慶長)·靑鶴將軍·白鶴將軍·敵愾義兵將(邊士貞)으로 스스로 불렀던 것은 그러한 예이다.243) 李章熙,<壬辰倭亂 義兵性格의 分析>(≪韓國史論≫22, 國史編纂委員會, 1992), 143∼146쪽.

 의병장은 각기 휘하에 유능한 참모를 두고 있었으며 그들 중에는 전투에 능한 무사들도 상당수 있어서 싸움에 임할 때 그들의 활약 여하에 따라 승패가 좌우되기도 하였다. 의병단의 전술전략은 다양했다. 전략·전술에 능한 의병장은 적을 맞이하면 수성전을 고수하며 가급적 야전을 피하였으나 때에 따라서는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용병술을 발휘하여 적진에 뛰어든다든가 아니면 擬兵術을 써서 위장전술로서 적의 접근을 막기도 하고 적을 유인하여 매복병으로 하여금 기습을 가하기도 하였으며, 야간에 적이 태만한 틈을 타서 기습하는 전술을 구사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權應銖의 영천성 수복전에서 보듯이, 풍향을 이용하여 화공법을 쓰기도 하였다. 특히 의병의 유격전은 왜군에게 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의병들은 선조 25년(1592) 11월에 이르러 실전의 공은 세우 지 못하고 폐단을 일으켜 문제가 심각해졌다. 그러므로 조정에서는 의병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 그 절제책을 강구하게 되었다. 남쪽의 의병을 禹性傳으로 하여금 영솔케 하고 경기·충청·전라의 의병을 권율과 權徵에게 분속시키거나 각 도 순찰사가 영솔하게 하자는 방안이 논의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실천에 옮겨지지 않았고 전 우의정 심수경이 의병장을 칭하자 조정에서는 심수경에게 建義大將의 칭호를 주고 제도의 의병을 절제케 하였다. 그러나 여러 곳에 난립한 의병을 심수경 한 사람이 통솔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더욱이 선조 26년 정월 평양성을 수복한 뒤 명나라 원군이 전쟁의 주도권을 잡게 됨에 따라 전쟁 초기와 같은 전투력과 민심유지를 위한 의병의 존재의의는 상실되어 갔다. 그리고 질서가 회복되어 감에 따라 관군이 의병보다 우위에 서게 되었으며 의병이 조정과 수령의 강력한 절제를 받게 되어 이후 의병의 활약상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244) 崔永禧,<壬亂義兵의 性格>(≪史學硏究≫8, 1960), 26쪽. 이 때쯤 되면 전쟁 초기에 활약이 컸던 의병장들은 싸움에서 전사했거나, 공을 세운 의병장들은 벼슬에 기용되어 이미 의병장의 자리에서 떠나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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