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Ⅰ. 임진왜란
  • 5. 왜군 격퇴의 전략·전술
  • 1) 육전
  • (5) 훈련도감의 신설과 신병법

가. 조련 및 화약·무기의 제조

 조선 초기 세종대에서 세조대에 이르는 시기는 여러 종류의 화기가 있었다. 이것은 南倭·北胡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으며 서북변계의 확장과도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國朝五禮序例≫兵器圖說에는 세종말부터 세조 13년(1467)까지 제조되었던 병기류로 銃筒碗口 외 10종의 銃筒, 大箭 외 9종의 箭, 蒺藜砲 외 9종의 폭발물, 大神機箭 등 3종의 로켓화기, 화차 및 기타 2종 등 모두 37종의 화기에 대한 도설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 37종의 화기 중 발사기로 사용된 11종 의 총통은 대형과 소형으로 구분된다. 대형은 銃筒碗口·將軍火筒·一銃筒·鐵信砲 등이며, 소형은 二銃筒·三銃筒·四箭銃筒·八箭長銃筒·八箭銃筒·細銃筒·新製銃筒 등으로 분류되어 있다.245) 蔡連錫,<朝鮮初期(1400∼1467) 火器의 硏究>(≪韓國史論≫7, 國史編纂委最會, 1980), 210∼211쪽.

 조선 초기에는 이와 같이 화기가 많았으나 명종 초기부터는 대형총통과 勝字銃筒에 관한 기록 외에 다른 화약병기에 관해서는 거의 보이지 않아서 그 시설과 사용 및 주조가 쇠퇴하여 없어진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焰硝의 煮取·화약의 제조·火戱의 設施·破陣軍의 편성 등은 그 기능이 활발했다고는 볼 수 없겠지만 존속되고 있었던 것 같다. 따라서 임란의 초기전투에서 전통적 화약병기를 활용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것은 중앙에서는 왜군이 도성에 침입하기도 전에 난민들이 軍器寺를 불태우고, 지방에서는 적이 침입하기도 전에 守將들이 달아나 방치된 상태에서 병기가 적의 손으로 넘어간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또는 명종 말년부터 왜구의 침습이 현저히 줄어들었고 野人의 수상한 동태도 보이지 않아 화기뿐 아니고 군비 전반에 걸쳐 무관심해져 그 영향이 임란이 일어날 때까지 계속된 데 기인한다고 볼 수도 있다.246) 許善道,<李朝中期 火器의 發達>下 (≪歷史學報≫31, 1966), 126∼127쪽. 화약 병기의 제조는 왜란중인 선조 27년(1594)에 訓鍊都監이 설치되면서부터 활기를 띄게 된다.

 무기제조는 조선 초기 이래 군기시에서 계속 전담하여 왔다. 여기에는 군기 제조를 감독하는 관원과 직접 군기를 제조하는 匠人을 두었다. 그러나 임란을 당하여 무기를 제조할 원료와 연료를 조달하기 어려웠으며 공장들마저 흩어져 본래의 기능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군기시는 그렇게 어려운 형편에 놓여 있으면서도 훈련도감이 설치되기 이전까지는 조총과 화약의 제조법을 공장들에게 전습하는 책임을 도맡았다.

 훈련도감의 설치와 때를 같이하여 나라에서는 도감의 역원과 군사 및 장인들에게 料米를 조달하는 한편, 조총·화약·槍刀 등을 제조할 재원과 원료·연료도 공급해야 하였다. 이러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정부는 도성 근교의 開荒地를 屯田으로 수조권을 주어 도감의 농군으로 경작시키고 충청도 40여 곳에 寺社位田을 都監屯田에 귀속시켜 郎廳을 파견하여 수세토록 하였다. 또 황해도 甕津·충청도 泰安·전라도 茂長의 염전에 대한 수조권을 주고 각 읍의 수령이 米布와 교환하여 바치도록 하였으며, 충청·전라·강원·황해·경기 등 5도의 水旱田 1결당 大小米 1말 씩의 三手米를 거두어 보내게 하였다. 그리고 군기를 제조할 철물을 조달하기 위하여 황해도 載寧의 철산지에 鐵峴屯의 수조권을 주고 연간 11,750근의 夫里鐵을 바치게 하여 군기를 제조하는데 힘썼다.

 임란중 훈련도감의 무기생산은 조총과 화약·槍刀제작에 주력하였고 무기를 제조하기 위하여 제조소가 마련되었으며 각 제조장에는 낭청들이 배치되어 공장을 사역하여 제조작업에 임하도록 하였다.247) 柳承宙,<朝鮮前期 軍需工業에 관한 硏究>(≪史學硏究≫32, 1981), 51∼55쪽.

 劒銃주조와 焰硝煮取·검술교습을 하는 데는 투항한 왜군을 활용하기도 하였다. 기술이 있는 降倭들을 도성에 유치하여 그 기술을 습득하도록 한 것이 다. 선조가 “적국의 기술이 곧 아국의 기술”이라고 하면서 일본의 기술을 익히도록 당부한 것처럼 일본인 기술자를 확보하려는 노력이 기울여졌다. 그래 서 남쪽에 머물러 있도록 한 항왜 중에서 수차에 걸쳐 기술이 있는 자를 뽑아서 도성으로 옮겨오도록 하였으며 이러한 노력으로 무기제조나 화약자취를 하는데 큰 진전을 보였다.248) 李章熙,<壬亂時 投降倭兵에 대하여>(≪韓國史硏究≫6, 1971), 46쪽.

 그런데 임란중 束五軍을 諸道 각 읍에 편성하면서 이들에게 지급할 무기까지 중앙에서 생산하기에는 인력이나 재원이 크게 부족했다. 그 때문에 중앙에서는 이를 지방관아에 맡겨 여러 읍의 노동력을 집중시켜 속오군이 소지할 무기를 제조해 활용하는 방안을 강구하여 실용에 옮기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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