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Ⅰ. 임진왜란
  • 5. 왜군 격퇴의 전략·전술
  • 2) 해전
  • (1) 해전의 전개

가. 1차 침입기의 해전

 임진왜란으로 통칭되는 7년간의 전란은 일본군의 1차 침입기(선조 25년;1592)와 강화회담기, 그리고 2차 침입기(1597)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이 중 해 전은 1차 침입기와 2차 침입기에 집중되었다.

 왜군이 상륙지점에서 소탕되리라고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상주와 충주의 방어선이 무너지자, 위기의식을 느낀 조선조정이 수군에게 내린 최초의 명령은 “적선단을 기습공격하여 적으로 하여금 후방을 염려하게 만들라”256)≪李忠武公全書≫권 2, 狀啓 1, 赴援慶尙道狀.는 것이었다. 조정이 수군에게 이와 같은 명령을 내린 의도는 수군이 적선단을 공격하게 되면, 적의 후인세력이 더 이상 상륙할 수 없게 되고, 이미 상륙하여 북진하고 있는 세력도 후방이 교란됨으로써, 병력의 일부를 후방으로 돌려 그들의 후방을 보강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 결과 왜군의 북진이 지연되면 이 기회를 이용하여, 조선은 반격군을 편성 반격 태세를 취할 시간적 여유를 갖기 위함이었다. 조선조정이 수군에게 내린 명령은 경상좌수사 朴泓의 장계를 기초로 한 것으로 당시 육군 18,000여 명을 부산에 상륙시킨 일본 선단은 90 여 척에 불가하였다. 이 정도의 침략규모라면 경상도 수군과 전라도의 수군이 연합하여 해상을 차단하고, 李鎰의 지상군이 반격을 가하면 적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고 조선조정은 판단하였다.

 조정의 출동명령이 전라도 수군에 접수된 것은 왜군이 침략해 온 지 13일이 지난 4월 26일이었으며, 그 사이 왜군의 2번대와 3번대의 병력 33,000여 명이 제1진과 합세하여 북상중에 있었으며 일본 군선도 500여 척으로 증가되어 있었다.257) 위와 같음. 상륙에 성공한 일본 육군이 신속하게 북진을 감행하자 일본조정에서는 그들의 수군에게 남·서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지상군을 지원하라는 지시를 하였고, 그 지시에 따라 일본 수군은 서서히 서진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지상군의 패전으로 수륙군 연합방위체제가 와해된 상태에서 李舜臣 함대가 주축이 된 조선 수군은 5일 5일부터 해상전투를 시작하였다. 그것은 4월 27일 조정으로부터‘경상우수사 원균과 합세하여 적선을 격파하라’는 요지의 명령이 宣傳官 趙銘을 통하여 이순신에게 하달되었기 때문이다.258) 위와 같음. 이 순신은 5월 5일 거제도 서쪽 미륵도 남단에 있는 唐浦 앞바다에서 경상우수 사 원균과 합세하기로 하고 이 사실을 전라우수사 李億祺에게 통보한 후 출 항하였다. 작전은 5월 4일부터 9일까지 5일간 실시되었다. 작전에 동원된 조선 수군의 함선은 판옥선 28척 협선 17척·포작선 46척으로 총 91척이었다. 소집된 군졸들도 사노·관노·내노는 물론 승려까지 징발한 오합지졸의 군대였다. 그러나 조선 수군은 첫 출전인 玉浦와 合浦·赤珍浦 해상에서 적선을 발견하고 해전을 실시하여 모두 42척의 적선을 격침 또는 소각시키는 전과를 거두었다.259)≪李忠武公全書≫권 2, 狀啓 1, 玉浦破倭兵狀.≪선조실록≫에는 당시의 전투상황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옥포 앞바다에 이르니, 적선 30여 척이 사면에 휘장을 두르고 있었다. 왜적들은 우리 수군을 보고 노를 빨리 저어 진지를 나와 우리 군과 바다 가운데서 만났는데 아군이 적선 26척을 불살라 버렸다(≪宣祖實錄≫권 27, 선조 25년 6월 기유).

 지상군에 주력한 왜군이 상륙과 북진에 성공하고, 해상에서도 조선군의 저 항이 없자 자만한 일본 수군들은 경계태세를 늦추고 연해에서 약탈을 자행하기 시작하였다. 이순신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공격하였으며 적이 전열을 정비하기 전에 적선을 격침시켰던 것이다. 이순신 함대의 첫 출전이 규모면에서 큰 전투를 한 것은 아니었으나, 승승장구하던 왜군에게 최초의 패배를 안겨준 전투였으며, 조선 수군에게는 해전의 자신감을 갖게 한 전투이기도 하였다. 또한 패보만 접하고 있던 조정에 戰局을 회복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한 전투였다.

 조선 수군의 2차 출전은 5월 29일부터 6월 10일까지 11일간 실시되었다. 왜군은 서진하던 그들 수군의 일부가 이순신 함대에 의하여 격멸된 이후에도 북상하는 그들의 육군을 호응하기 위하여 남해서안을 통해 북상하려는 기도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 때까지도 경상우도 수군이 재건되지 못했으므로 일본의 수군은 경상도 연해를 따라 노략질을 하면서 서진을 감행하였다. 왜군의 서진 소식에 이순신은 전라좌수사 이억기와 더불어 전라도 수군의 출전을 협의하였고, 그 결과 6월 3일 여수 해상에서 집결, 경상도 해역으로 출전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순신이 2차 출전 준비를 하고 있던 5월 27일 경상우수사로부터 다음과 같은 급보가 전달되었다.

적 전함 10여 척이 이미 사천·곤양 해안까지 침입했으므로 본영의 함선들을 노량으로 이동시키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李忠武公全書≫권 2, 狀啓1, 唐浦破倭兵狀).

 이순신은 경상우수사 원균이 적침을 받아 전라도와의 경계인 노량까지 물러났다는 사실에서 머지않아 전라좌수영까지 왜군의 위협을 받게 될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순신은 상황의 긴박성을 전라우수사 이억기에게 통보하고, 6 월 3일 계획되었던 출전 일자를 5월 29일로 앞당기기로 하였다. 이순신은 2차 출전에서 거북선을 출전시켰다. 조선 함대는 사천 선창에 13척의 적선이 있고 육상에 수백 명의 왜군이 장사진을 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해전에 유리한 지역으로 적선을 유인한 후, 거북선으로 돌격하고 판옥선으로 공격하여 적선 13척을 격파하였다. 이후 당포에서 적선 21척을, 당항포에서 적선 30척과 부수병력을 격파하였다. 그리고 거제도 율포에서 적선 7척을 격침시켰다. 조선 수군은 약 10일 간에 걸친 2차 출전에서 4차례의 해전을 하는 동안 적 선 72척을 격침시키고 적병 88명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조선 수군이 이와 같은 전승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적선이 분산되고 전투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을 때 기습선제공격을 할 수 있는 이순신의 지휘능력과 해전을 능률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조선 군선의 견고성과 장대함 그리고 火砲의 우수성에서 기인된 것이었다.260)≪宣祖實錄≫권 141. 선조 33년 정월 갑술.

 5월과 6월에 조선 수군이 해전에서 연전연승을 하였으나 육전 상황은 반대로 조선군이 패퇴일로에 있었다. 일본 수군은 육전의 승세에 고무되어 6월 하순부터 다시 가덕도 부근으로 진출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 무렵인 6월 28 일에 일본의 豊臣秀吉(도요토미 히데요시)은 연이은 일본 수군의 패전을 질책하고 九鬼嘉隆(구키 요시다카)·加藤嘉明(가토 요시아키라)·脇坂安治(와키자카 야스하루) 등 수군장이 협력하여 조선 수군을 무찌르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에 따라 웅천에 집결해 있던 脇坂의 함대와 부산포에 주둔해 있던 九鬼·藤의 함대가 합세하여 조선 수군을 격파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이로 인해 경상도 남해안에는 일본 함선들의 움직임이 빈번하였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일본 수군의 해상 준동을 분쇄하기 위하여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협의를 거쳐 전라 수군의 3차 출전을 결의하였다.

 조선 함대가 3차 해상작전을 실시한 기간은 7월 6일부터 12일까지 6일 간이었다. 당시 조선 수군의 세력은 전라좌도 전선 23척, 전라우도 전선 24 척, 경상우도 전선 7척으로 구성되었다. 조선 함대는 왜선이 견내량에 정박해 있다는 첩보에 따라 그곳을 향해 항진하였다. 그곳에 정박해 있던 일본 수군은 협판안치가 지휘하는 함대였다. 당시 풍신수길의 명령에 따라 脇坂·九鬼·加藤軍이 웅천 해상에 집결하여 조선 수군을 무찌르도록 되어 있었으나, 협판 안치는 자기 능력을 과신하고 조선 수군을 과소 평가하여 자신의 함대만을 인솔하고 견내량까지 진출한 것이었다. 일본 수군의 세력은 대소전선 73척이었다.261)≪李忠武公全書≫권 2, 狀啓 1, 見乃梁破倭兵狀. 일본 수군이 정박하고 있는 견내량이 조선 수군이 작전을 전개하기에는 협소한 지역이라고 예측한 이순신은 적 선단을 넓은 바다로 유인하여 섬멸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순신이 운용한 전술은 鶴翼陣이었다. 학익진은 조선 수군이 보유하고 있는 銃筒들의 포신이 짧고, 화살의 탄도가 곡선이므로 명중률 이 좋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여 적 선단을 원으로 에워싸 발사하게 되면, 탄착점이 중앙으로 모여 명중률을 높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 전법이었다. 이 전법은 적중하여 한산도해전에서 적선 59척을 격침시키는 전과를 이룩하였다.

 한산도해전 후 조선 수군은 왜선 40여 척이 정박해 있는 안골포를 공격하여 적함선 30여 척을 격파하고 250여 명을 사살하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함선의 피해는 없었으나 전사자 19명과 부상자 100여 명이 발생하는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3차 출전에서 이룩한 조선 수군의 승리는‘수군을 강화하여 해상 보급로를 확보하라’는 풍신수길의 명령에 따라 편성된 일본의 정예함대를 무찔러 남해안의 제해권을 확보했다는 데 그 의의가 있었다. 한산도해전의 승리에 대하여 柳成龍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겨놓았다.

만일 적이 수륙으로 합세하여 서쪽을 침략할 계획을 했었다면 이 견내량 해전의 대승이야말로 적의 팔 하나를 자른 것이다. 行長이 평양을 얻었다 하여도 그 군세가 고립되어 감히 전진을 못했던 것이며, 조선은 전라도와 충청도는 물론이요, 황해도 평안도의 연안 일대를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柳成龍,≪懲毖錄≫권 1).

 한산도에서 패한 일본 수군은 이후 남해안에서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못했다. 또한 평양을 점령한 일본 육군은 북진을 멈추고 조선측에 강화 제의를 해왔다. 조선이 강화 제의를 거절하자 일본측에선 50일 기한으로 휴전하겠다는 일방적 제의를 해왔다.262) 柳成龍,≪懲毖錄≫권 1의 평양회담 결과 내용 참조. 또한 경상도순찰사 김수는 북진하던 일본의 지상군이 양산과 김해 지역으로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이순신에게 통보해 주었다.263)≪李忠武公全書≫권 2, 狀啓 2, 釜山破倭兵狀. 이러한 정보를 종합한 이순신은 연합함대를 구성하여 부산을 공격하게 되면 일본 지상군은 군수품과 인원 부족이 초래되어 조선이 반격군을 조직할 시간적 여유를 갖게 피고 해상을 통한 일본의 증원군을 차단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조선 수군의 연합함대가 구성된 것은 8월 25일 蛇梁에서였다. 이 때 구성된 함대 세력은 판옥선 74척·전선 166척·협선 92척으로 총 332척이었다. 해상작전은 5월 24일부터 9월 2일까지 수행되었다. 당시 부산 연해에는 470여 척의 왜선이 무리를 지어 정박해 있었다. 적세를 확인한 조선 선단은 요새화된 적 기지를 공격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작전계획을 구상하였다.264) 위와 같음.

 첫째 조선 수군은 장사진을 형성하여 일제히 포구내로 진입하여 적 선단을 공격한다.

 둘째 적이 전투태세를 갖추기 전에 기습전을 감행하여 적선을 격파시킨다.

 위와 같은 전투계획에 따라 8일간의 해전을 치룬 결과 조선 수군은 적의 대소군선 130척과 군수물자 200여 점을 노획하였다. 부산포 공격은 왜군의 전투 기피와 해상 악화 그리고 장기간 전투에 필요한 군량의 불비로 왜군을 완전히 섬멸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앞서의 해전들이 일본 수군의 서진을 방어하는 수동작전이었던 반면, 부산포해전은 능동적으로 왜군의 전략적 요충지를 공격하여 일본 수군의 해상 교통로를 교란시켰다는 데 큰 의의가 있었다.265) 張學根,<壬亂倭亂期 官軍의 活躍>(≪韓國史論≫22, 國史編纂委員會, 1992), 87쪽. 그 결과 부산포해전 이후 남해안에서의 왜군 출몰은 현저히 줄어들었으며 조선에서 왜군의 대항세력은 수군뿐이라는 의견이 조선의 조야와 왜군 사이에 유포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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