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Ⅱ. 정묘·병자호란
  • 1. 호란 전의 정세
  • 1) 후금의 흥기와 조선의 대응

1) 후금의 흥기와 조선의 대응

 16세기말에서 17세기 전반에 걸쳐 동아시아의 정세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明과 조선이 壬辰倭亂으로 말미암아 극도로 피폐되어 주변을 돌아볼 여력이 없을 때, 滿州에서는 누르하치(奴兒哈赤:1559∼1626)가 女眞族의 여러 부족을 어울러서 큰 세력으로 성장한 다음 마침내 後金國을 건설함으로써 明·淸 교체의 터전이 마련된 것이다. 그리고 조선과 후금의 관계도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 따라서 먼저 여진족의 발전과정과 더불어 후금건국의 경위를 살펴보는 것이 조선과 여진족의 관계변천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명대 여진은 建州·海西 및 野人여진으로 나뉘고 다시 그 밑에 크고 작은 부락으로 갈라져 있었다. 건주와 해서여진은 처음에 三姓(지금의 黑龍江省 依蘭縣 근처)을 중심으로 하고 松花江 유역과 흑룡강 중·하유역에서 동으로 해안에 이르는 지대에 흩어져 살았으며 명대에 이르러 점차 남하하였다.

 건주여진의 한 갈래인 建州衛는 婆猪江 지류, 富爾江 상류의 吾彌府(지금의 遼寧省 桓仁縣 경내)에 살다가 얼마 안되어 酋長 李滿住의 인솔하에 渾河 상류 蘇子河 유역으로 옮겼다. 違州左衛도 여러번 옮긴 끝에 건주위와 합류하였다.

 명말에 이르면 건주여진은 인구가 늘어나고 부락이 번성하여 撫順 이동의 혼하 유역에서 동으로 長白山, 남으로 鴨綠江까지 뻗어 있었다. 해서여진은 계속 옮겨서 開原 변경 밖의 輝發河 유역에서 북으로 송화강 중류에 이르렀다. 야인여진은 부락이 늘어남에 따라 건주·해서 여진의 이동과 이북의 광할한 지역 곧 송화강 하류지역에서 흑룡강 유역, 그리고 동쪽으로 해안에 이르게 되었다.301) 周遠廉,≪淸朝興起史≫(吉林文史出版社, 1986), 3∼4쪽.

 명정부는 여진족의 招撫를 중시하여 衛所를 두어 다스리게 되었는데 永樂 원년(1403)에 처음으로 建州衛軍民指揮使司를 설치하고 阿哈出을 指揮使로 임명하고 誥·印·冠帶·襲衣 및 鈔幣를 내려준 것이302)≪明太宗實錄≫권 25, 永樂 원년 11월 기해. 建州衛의 효시였다. 그 뒤 계속하여 奴兒干衛·毛憐衛를 두었으며 영락 7년에는 흑룡강·송화강·烏蘇里江 등 유역에 걸쳐 모두 130개의 위소를 설치하고 여진족의 추장을 指渾使·千戶 및 鎭撫로 임명하고 아울러 이들 모두를 통괄할 奴兒干都指揮使司를 두었다.303)≪明太宗實錄≫권 93, 永樂 7년 6월 기미. 이들 위소는 점점 불어나서 正統 12년(1447)에는 204개의 衛와 58개의 地面(站·城)이 있었고 다시 萬潛년간에는 381개의 위와 39개의 千戶所·지면(站·寨)으로 늘어났다.304) 周遠廉, 앞의 책, 4쪽.

 명정부의 여진통치책은 중국 역대왕조의 그것을 답습하여 覊縻策을 썼는데 순종하고 충성을 다하는 여진족의 추장에게 명의 황제가 직접 관직을 수여하였다. 곧 某衛의 都指揮使·都指揮同知·都指揮僉事·指揮使·指揮同知·指揮僉事·千戶 등의 職帖이었다. 후대에 이르면 공이 크거나 세력이 강한 추장에게 都督·都督同知·都督僉事로 봉하거나 특별히 우대하는 뜻으로 龍虎將軍이라는 높은 직함을 내리고 일반적으로 그것을 세습하게 했다.305) 周遠廉, 위의 책, 5쪽. 그러나 반대로 명정부에 거역하고 변경을 침략하여 사람과 가축을 겁략하는 일이 생길 경우, 대군을 동원하여 정벌을 행하였다. 따라서 관직과 誥(職牒)·印·冠帶·襲衣(朝服)·鈔幣(화폐)를 내리는 것은 명에 예속하여 법도를 지켜 朝貢을 바치고 충성을 다하는 대가였다.

 여진족은 흩어져 살고 있었는데 생활수준이 각 부족마다 차이가 있었다. 대체로 건주·해서여진은 야인여진에 비해 생활수준이 높고 사회발전단계도 상당히 앞서 있었다. 15세기 30년대에서 16세기초에는 건주·해서여진은 牛耕과 철제 농기구의 사용이 보편화되고 농업이 생활을 영위하는 중요한 부분이었다. 땅이 비옥하고 개·돼지·닭·오리를 많이 길렀으며 농업생산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을 뿐 아니라 길쌈도 잘해서 중국사람의 생활과 다를 바가 없었다고 한다.306) 周遠廉, 위의 책, 8쪽. 그리고 목축업이 또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는데 그들이 기른 말은 중국인과의 교역에 중요한 물품이었으며, 가축은 곧 바로 일정한 화폐로 쓰였다. 무엇보다 여진족이 즐기는 것은 수렵과 채집이었다. 여진족이 사는 곳에는 인삼(산삼)·진주 및 각종 모피가 많이 생산되었고 이것 또한 중국인과의 교역에서 주요한 상품이 되었다. 그들은 농산물·축산물 및 수렵·채집품을 중국인과의 교역장소였던 이른바 「馬市」(關原·鐵嶺·撫順·淸河·寬奠·靉陽)에 내다 팔고 많은 銀兩을 손에 넣었을 뿐 아니라, 그들이 필요로 하는 철제 농기구(鏵-보습 등)·남비(혹은 솥·가마솥 등)·웃옷(襖) 및 대량의 소를 바꾸어 갔다.307) 周遠廉, 위의 책, 7∼12쪽.

 여진족은 중국인과의 교역으로 얻은 소와 철제 농기구를 써서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업생산을 증대시켜 점차로 농경사회로 이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량의 은냥을 얻게 됨으로써 계층변화가 현격하게 되었고 은냥을 많이 가지게 된 사람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어 마침내 국가가 탄생하게 되었다.

 淸太祖 누르하치의 世系는 분명하지 않으나 建州左衛의 계통을 이은 것 같다. 그의 직계 조상은 猛哥帖木兒(맹가티무르;孟特穆)로 알려져 있다. 그의 발상지는 송화강 하류의 依蘭 부근이었는데 부하를 거느리고 豆滿江 하류지 역으로 옮겨 살다가 뒤에 다시 阿木河(斡木河, 조선에서는 吾音會=옴회 곧 會寧의 골짜기를 가리킴) 부근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조선이 건국하자 태조 李成桂에 臣服하고 수도로 가서 공물을 바쳤고, 태종 4년(1404) 3월에 다시 入貢하고 上護軍에 제수되었다.308)≪太祖實錄≫권 8, 태조 4년 9월 기사.
≪太宗實錄≫권 7, 태종 4년 3월 무신·갑인.

 그러나 명의 永樂帝가 조선의 동북변경에 흩어져 살고 있는 여진족에 대해 빈번하게 사신을 보내 초무의 손을 뻗치는 바람에 맹가첩목아는 明廷에 入朝 하고 勅書 및 賞賜를 받게 되었다. 그는 조선의 동북변경의 소요에 가담함으로써 회령지방에 더 머무르지 못하고 태종 11년 4월 건주위 추장 李顯忠을 찾아 鳳州로 옮겨갔다.309)≪太宗實錄≫권 21, 태종 11년 4월 병진. 따라서 맹가첩목아의 명에의 入貢은 건주위에 합류한 다음의 일이었다. 곧 영락 11년(조선 태종 13년;1413) 10월에 그는 건주위 都 指揮使 이현충과 함께 명에 입공하였고 동 14년 2월에 건주위에서 左衛를 분리해서 신설하고 도지휘사로 임명되어310)≪明太宗實錄≫권 144, 永樂 11년 10월 갑술·권 173, 永樂 14년 2월 임오 및 권 185, 永樂 15년 2월 기사. 독립된 세력집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후 맹가첩목아는 영락 20년 3월 明成祖의 蒙古親征에 참가하였는데, 그것이 화근이 되어 몽고군의 습격을 받아 봉주의 건주위는 피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맹가첩목아는 영락 21년(조선 세종 5년;1423) 4월 다 시 阿木河의 옛터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이것이 건주좌위의 東遷이었다. 이 때 이동한 것은 좌위의 정규군 1천 명과 부일 및 어린이 합계 6,250명이었고, 후속부대로는 맹가첩목아의 어머니와 아우 於沙哈·凡察 등과 楊木答兀 등이 6월에 합류하였다.311)≪明太宗實錄≫권 253, 永樂 20년 11월 병진.
≪世宗實錄≫권 20, 세종 5년 4월 을해·6월 계유·병자 및 권 21, 세종 5년 8 월 신해.
그리고 맹가첩목아는 계속 명에 충성했었으므로 宣德 원년(조선 세종 8년) 정월에 都督僉事로, 동 8년 2월에 다시 右部督으로 승진하였다. 그의 아우 범찰도 형의 명을 받아 선덕 7년 2월에 入京하여 馬 匹·方物을 바치고 鈔幣·絹·布 등을 받았으며 그 다음달에는‘招諭遠夷歸附’의 공으로 都指揮僉事가 되었다.312)≪明宣宗實錄≫권 13, 宜德 원년 정월 계축·권 99, 宣德 8년 2월 무술 및 권 87, 宣德 7년 2월 정유 3월 임술.

 아목하에 복귀한 맹가첩목아는 명과 조선에 대해 각별히 공손한 태도를 보이고 北京에 직접 조공을 바쳤다. 漢城에는 長子 阿谷 등을 시켜 공물을 바침으로써 兩屬關係를 유지하여 종족의 안전을 꾀했다. 그는 선덕 8년 10월에 뜻밖의 참변을 당하였다. 그가 동천할 때 같이 온 양목답올은 開原三萬衛의 천호였는데 당시 開原城의 군민과 가축을 노략질한 다음 무리를 모아 동으로 달아나서 맹가첩목아와 동행하게 된 것이다. 이 양목답올에 대한 明廷의 추궁이 계속되고 직접 혹은 간접으로 楊을 초유하고자 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았다. 따라서 건주좌위의 맹가첩목아에게 勅諭하여 양목답올의 무리를 잡아 보내게 명하는 한편, 都指揮 裴俊을 시켜 그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이것이 양목답올의 두 차체의 습격을 빚는 자극제였다. 첫번째는 선덕 8년 윤 8월 15일 이었는데, 이 때는 배준과 건주좌위 도지휘사 범찰과 지휘사 아곡이 선전하여 잘 막아냈다. 그러나 두번째 습격은 양목답올이 전번의 실패를 거울삼아 각처의 野人(여진) 약 8백 명을 모아 동년 10월 19일 배준의 본영과 맹가첩목아·범찰·아곡 등의 집을 포위·방화하고 맹가첩목아·아곡 등 남자를 모두 살해하고 부녀와 일체의 가재도구를 약탈해갔다.313)≪明宣宗實錄≫권 99, 宣德 8년 2월 무신.
≪世宗實錄≫권 62, 세종 15년 11월 을사.
이로써 건주좌위는 거의 멸망 상태에 이르게 되었고 이 사건이 淸朝의 發祥傳說에 영향을 미쳐≪淸太祖實錄≫에 「肇祖 孟特穆」으로 나타난 것이라 생각한다.

 맹가첩목아가 죽은 다음 그의 아들 童山(또는 童倉·充善이라고도 부름)과 아곡(또는 阿古·權豆라고도 적음)의 처가 「七姓野人」에 잡혀가고 오직 범찰이 난을 피했다가 산산히 흩어진 무리를 모으고 맹가첩목아를 대신해서 건주좌위를 통솔하였다. 명에서는 전년의 양목답올의 1차 습격 때 배준을 도와 잘 물리친 공을 인정해서 범찰을 선덕 9년 2월에 도독첨사로 승진시키고 좌위를 관장하게 하였다.314)≪明宣宗實錄≫권 108, 宣德 9년 2월 계유.

 범찰이 좌위를 다스린 지 얼마 안되어 동산이 毛憐衛 指揮 哈兒禿 등의 도움으로 贖還되었다.315)≪世宗實錄≫권 80, 세종 20년 정월 신묘. 그러나 좌위는 안으로 맹가첩목아의 지위를 계승하고자 하는 동산과 좌위지배의 新印을 明宣德帝로부터 받은 그의 숙부간의 알력과, 밖으로 조선과 야인여진의 위협 때문에 아목하 근처에서 편안히 살 수 없어서 명에 상주하여 요동지방으로 옮기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正統 5년(조선 세종 22년) 6월에 명의 허락을 받아 300여 호를 통솔하고 갖은 고생 끝에 渾河 지류 蘇子河 일대에 도달하여 건주위의 李滿住와 함께 거주하게 되었다.316)≪世宗實錄≫권 89, 세종 22년 6월 정해·병신.

 좌위가 이동한 다음, 동산·범찰간의 지휘권을 둘러싼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명에서는 정통 7년 2월에 좌위를 나누어서 우위를 신설하고 도독첨 사 동산을 都督同知로 승격시켜 좌위를 관장하게 하였으며, 아울러 범찰도 도독동지로 승격시켜 우위를 관장하게 하였다.317)≪明英宗實錄≫권 89, 正統 7년 2월 갑진. 동산은 그 후 右都督으로 승진하였을 뿐 아니라 좌위의 세력을 크게 떨치게 만들었다. 그는 건주위의 이만주와 좌위의 범찰이 나이가 들어 세력이 부진한 틈을 타서 建州三衛를 모두 관장하려고 꾀함으로써 자못 건주여진의 세력이 통일되는 듯하였다. 그리고 자기 힘만 믿고 모련위 등 여진부족과 합세하여 요동지방의 漢人사회를 침범하여 사람과 재물을 노략질하는 일을 자주 일으켰다. 심지어 開原에서 동쪽으로 遼陽에 이르는 600여 리의 수만여 호에 참담한 피해를 입히는 일도 있었다.

 명에서는 동산 등을 불러 여러 차례에 걸쳐 꾸짖고 타일렀으나 그는 겉으로 복종하는 듯하다가 풀려나자 다시 노략질을 일삼았다. 마침내 명은 동산 등을 廣寧城에 구류하였다. 成化 3년(조선 세조 13년:1467) 7월에 總兵官 武靖伯趙輔가 그들의 죄상을 알리는 勅論를 읽는 동안 동산 등이 폭동을 일으켜 일부는 현장에서 살해되고 동산 등은 다시 잡혀있다가 처형당하였다.318)≪明憲宗實錄≫권 44, 成化 3년 7월 갑자·경진 및 권 45, 成化 3년 8월 경자.

 이어서 동년 9월에는 提督軍務左都御史 李秉과 총병관 조보가 5만여 명을 거느리고 건주좌위 및 우위를 정벌하였다. 거의 같은 시기에 조선에서는 智中樞府使 康純과 魚有沼·南怡 등이 1만 명을 거느리고 건주위를 공격하였다. 이 정벌에서 건주위는 추장 이만주와 그의 아들 古納哈, 豆里의 아들 甫羅充 등 24명이 참살당하였고 이 밖에도 많은 인명이 피살되거나 포로로 잡힘으로써 건주삼위는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319)≪明憲宗實錄≫권 47, 成化 3년 10월 갑인·임술.
≪世祖實錄≫권 44, 세조 13년 10월 임인.

 동산이 죽고 난 다음, 그의 장자 脫羅와 손자 脫原保가 건주위를 통솔했다.320)≪明武宗實錄≫권 12, 正德 원년 4월 계해. 동산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는 妥羅(脫羅), 둘째는 妥義謨(脫一莫), 셋째는 錫寶齊篇古(石報奇)였다고 전한다. 석보제편고와 그 아들 都督 福滿이 각각 누르하치의 高祖父와 曾祖父라고 한다. 복만의 넷째 아들이 覺昌安(叫場·敎場)이고 또 각창안의 넷째 아들이 塔克世(他失·塔失)인데 이들은 누르하치의 祖·父이다.

 嘉靖(1522∼1566) 말년에서 萬曆(1573∼1619) 초기에는 건주좌위가 크게 쇠퇴한 반면에 右衛 都指揮였던 王果와 그의 아들 阿台의 세력이 가장 강성하여 자주 명의 변경을 침범하고 다수의 지방관을 살해하였다. 만력 2년(1574)에는 명과의 貢市를 끊고 遼陽·瀋陽을 대거 침범함에 따라 동년 10월 명의 遼東 總兵 李成梁이 수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왕고의 소굴을 토벌하여 1천여 명을 참수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왕고를 사로잡아 대궐로 보내 처형하였다.321)≪明神宗實錄≫권 2, 萬曆 2년 11월 신미.
≪淸史穚≫列傳 第 9, 王果傳(孟森 등편≪淸代史料彙編≫, 香港益漢書樓, 1977).
왕고가 죽은 다음, 그의 아들 아태가 대신 나서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명의 변경을 노략질함으로써 만력 11년 2월에 이성량이 다시 아태의 소국인 「古勒」寨를 공격하게 되었다. 이 정벌을 계기로 누르하치가 군사를 일으키는 동기가 마련된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각창안과 탑극세는 이 때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각창안은 그의 큰 아들 禮敦巴圖魯의 딸을 아태에게 시집보냈고, 아태의 딸을 그의 넷째 아들 탑극세의 처로 맞이함에 따라 두 집안은 이중의 인척간계를 맺게 되었다. 또 각창안은 왕고의 部長이 되어 가세를 일으키는 좋은 기회를 잡게 되었다.

 그러나 왕고가 이성장의 토벌을 받아 죽고 그 세력이 급격하게 쇠락하자 각창안은 태도를 바꾸어 명병의 嚮導가 되어 앞서 말한 이성량의 「고륵」채 공격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圖倫城主 尼堪外蘭의 꾀에 빠져 「고륵」채가 함락되고 채 가운데 있던 남녀노소들이 도륙당할 때 각창안·탑극세 부자도 함께 명병에 의해 誤殺되었다.322) 今西春秋 注釋,≪滿州實錄≫(滿文體記事, 以下同) 권 1, 219∼223쪽.
瞿九思≪萬曆武功錄≫권 11.

 누르하치는 만력 11년(1583) 5월 부·조의 원수를 갚기 위해 「遺甲 13副」로 기병하였다.323)≪滿州實錄≫권 1, 23쪽. 그는 기병한 지 5년 만에 蘇克素滸部·董鄂部·渾河部·哲陳部 및 完顔部 등의 건주여진의 본부를 통일하였고, 만력 21년에 이르기까지 長白山의 三部 곧 訥殷部·朱舍利部 및 鴨綠江部를 병합함으로써 만주를 둘러싸고 일어났던 군웅들의 세력을 모두 꺾어서 건주여진에 귀속시켰다. 이에 앞서 만력 15년에는 呼蘭哈達(홀란하다) 아래에 費阿拉城(興京老城)을 쌓고 “上이 국정을 시작하여 悖亂을 금하고 도적을 막고 법제로써 기강을 세웠다”324)≪淸太祖實錄≫권 2, 정해 하 6월 임오.고 하였듯이 국가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2년 후에는 이미 누르하치가 스스로 王을 자칭하였다.325)≪宣祖實錄≫권 23, 선조 22년 7월 정사·정묘. 그러면서도 명과 조선에 대해서는 「建州左衛都督」, 「龍虎將軍」을326) 苕上愚公,≪東夷略≫(≪淸入關前史料選集≫1, 中國人民大學出版社, 1984, 北京),<建州>條에는 都督(萬曆 17年), 龍虎將軍(萬潛 23年)으로의 승진기사가 보인다. 호칭하고 공손하게 처신하였고, 특히 명에게는 조공을 바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누르하치가 만주일대에서 급속하게 세력을 신장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천부적인 재능에 기인한 것이지만 여진족 주변 국가의 정세변화도 또한 큰 도움이 되었다. 곧 명과 조선이 임진왜란으로 말미암아 앞뒤를 돌볼 틈이 없을 때 누르하치는 남만주는 물론이고 동해에 이르기까지 모든 여진족의 부족을 통합하였을 뿐 아니라 조선에‘率兵入援’을327)≪宣祖實錄≫권 30, 선조 25년 9월 신미.
≪西厓年譜≫萬曆 20년 임진 9월 註 참조.
자청할 정도로 큰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한편 그는 撫順·淸河·寬奠·靉陽 등 네 곳의 開市(馬市)에서의 무역에서 東珠·人蔘·紫貂·玄狐·猞狸搎 등을 내다 팔고 대신에 식량·농기구 등 생활용품을 구입하여 비축함으로써328)≪淸太祖實錄≫권 2, 무자 춘4월 갑인.
≪皇淸開國方略≫권 1, 신묘 춘정월.
부를 축적함과 동시에 국가경영을 위한 힘을 길러 나갔다.

 누르하치는 만력 26년(1598) 전월에 瓦爾喀部를 공격하기 시작한 이래로 10년간 扈倫 4部(조선에서는 忽刺溫이라 부름. 海西女眞 곧 葉赫·哈達·輝發·烏喇)와 豆滿江 유역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哈達(1599)과 輝發(1607)을 차례로 멸망시키고 烏喇의 布占泰(부잔타이)를 대패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이로부터 두만강 유역 및 吉林 일대에 걸쳐 누르하치와 포점태가 패권을 겨루게 되었다.329)≪淸太祖實錄≫권 2, 무술 춘정월 정해;권 3, 萬曆 27년 추9월 정미, 萬曆 35년 춘정월 을축·추9월 병신. 그 귀추는 앞으로 조선과의 관계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누르하치의 세력이 급격히 성장하여 남만주 일대를 풍미하자 조선정부에서는 滿浦鎭의 鄕通事 河世國(瑞國)을 建州에 보내어 국정을 정탐하게 하였다. 하세국은 선조 28년(1595) 11월에 탐문한 정보를 보고하였는데, 누르하치와 그의 동생 小乙可赤(舒爾哈齊)이 거느린 군사가 1만 5천명이고 木柵으로 된 성을 가졌으며 각종의 기술자가 쉴새없이 작업을 계속할 뿐 아니라 성 밖에서는 1천여 명의 군사가 무장하여 군사훈련을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330)≪宣祖實錄≫권 69, 선조 28년 11월 갑신·병술·무자 및 권 70, 선조 28년 12월 갑진. 이러한 보고에 놀란 조선정부는 보다 정확한 정보를 입수할 목적에서 같은 해 12월에 무인출신인 南部主簿 申忠一을 回禮使로 삼고 하세국과 함께 누르하치에게 파견하였다. 신충일이 다음해 정월에 돌아와 국왕에 보고한 「建州紀程圖記」331)≪宣祖實錄≫권 71, 선조 29년 정월 정유.
李仁榮,<申忠一의 建州紀程圖記에 대하여>(≪震檀學報≫10, 1939), 附錄.
는 당시 누르하치에 대한 중요한 사실을 전하는 귀중한 사료이다. 이 圖記에는 누르하치와 그의 동생이 190여 명의 장수를 거느리고 있는 사실을 비롯하여, 경로의 산천·여정·부락·성책·생활상태·연회의 광경·누르하치의 世系, 烏喇·葉赫 및 몽고와의 관계, 누르하치와 그의 동생 小乙可赤과의 관계, 八旗制 등을 싣고 있다. 보고를 받은 선조는 누르하치의 일은 크게 우려가 되므로 그 방어책으로서 산성을 수축하며 邊將을 잘 뽑고 積穀鍊兵해야 한다고 대단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후 선조 34년(1601) 10월에는 누르하치가 그의 副將 忙刺哈(忘自哈)을 만포진에 보내어, 북방초인(烏喇)과 같이 자기도 조선의 서울에 가서 職帖을 받고 싶다는 뜻을 전하게 하였다. 이에 만포진 僉使 金宗得은 “老酋(누르하치)가 이미 天朝(명)의 용호장군의 직을 받았는데 우리 나라에서 어떻게 관직을 줄 수 있는가”332)≪宣祖實錄≫권 142, 선조 34년 10월 정해.라고 거절하였다. 이 문제에 대해 使臣은 “老酋는 성질이 사납고 교만한데 어찌 우리 나라의 관직을 받으려 하겠는가. 이말은 단지 (우리를) 업신여기고 시험하려는데 지나지 않는다”333) 위와 같음.고 하였다.

 건주여진(좌·우위)이 會寧 방면에서 蘇子河 상류로 이동한 다음, 조선과 여진족 간의 교섭은 주로 길림 방면의 홀라온(오라)이 맡게 되었다. 그들은 조선으로부터 직첩을 받고, 필요한 물자를 교역하여 생활하였다. 烏喇는 종래 내왕하던 葉赫(汝許)과의 교역로가 끊어짐에 따라 조선의 함경도 변경지방에 몰려와서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는 수밖에 없었다. 조선정부도 이들을 위무하고 覊縻할 뜻에서 百官의 관복과 직첩을 내리고 또 해마다 면포 1百 同을 급여하여 왔다.334)≪光海君日記≫권 25, 광해군 2년 2월 경신.

 그러다가 누르하치가 만력 35∼37년(조선 선조 40∼광해군 원년)에 걸쳐 오라 및 동해지방에 대한 대대적인 정벌을 벌렸다. 오라정벌은 싸움터가 조선의 경내인 「門巖」(烏碣巖)이었기 때문에 전투상황이 조선조정에 소상히 알려졌다. 문암의 전투에서 오라의 병사가 7, 8천 명이 전사함으로써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어 마침내 노추에게 복속될 처지에 놓였다. 때문에‘서북지방(건주위)의 근심이 이로부터 더욱 커지게 되었다’335)≪光海君目記≫권 14, 광해군 원년 3월 신묘 및 권 23, 광해군 원년 12월 병인.
≪宣祖修正實錄≫권 41, 선조 40년 2월 갑오에는‘鍾城·烏碣巖’이라 적고 있다.
고 함경감사 張晩이 馳啓하였다. 이 때부터 조선정부의 관심이 함경도 지방의 오라 대신에 서북지방의 건주여진의 발흥에 기울어지게 되었다.

 광해군 즉위년(1608) 7월에 선조 昇遐를 알리러 갔던 告訃使 李好閔이 장계에서, 당시 요동지방에서 이름을 크게 떨치고 있던 廣寧總兵 李成梁(李如松·如栢의 父)이 密奏를 올려 “군사를 시켜 조선을 습격하여 빼앗고 그곳에 郡縣을 설치할 것을 청하였다”336)≪光海君日記≫권 6, 광해군 즉위년 7월 병술·계축.는 사실을 알리자 조정대신들의 논의가 물끓듯 하였다. 병조판서 李廷龜는 이성량이 함부로 날뛰는 모습을 전한 다음, “지금 만약에 몰래 老酋(成梁과 老酋는 친분이 두터웠음)를 시켜 우리의 변경을 침범하고 황제의 명령을 받들고 구하려고 왔다고 큰소리치면서 스스로 鐵騎를 몰고 온다면 그것을 장차 어떻게 막을 것인가”337) 위와 같음.라고 깊은 의구심과 함께 국가의 위기가 조석간에 달려있음을 걱정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누르하치는 도리어 명과 조선이 협력하여 자기를 공격하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이른바‘協勢入擣’설338)≪光海君日記≫권 25, 광해군 2년 2월 신해·정사.로 응수함으로써 양측간에 자못 험악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에 앞서 누르하치로부터 國書가 처음으로 조선에 전달된 것은 선조 38년(1605) 11월이었다. 그는 이 때에‘建州等處地方國王佟’339)≪事大文軌≫권 46, 萬曆 33년 11월자 국서(서울대 규장각 소장).이라고 공식문서에 정식으로 국왕을 자칭하였다. 그리고 이 국서에는 조선과 오라와의 관계, 건주의 조선과의 우호관계 수립희망, 窇蔘·犯越者의 처단 및 綁(縛)拏解送에 관한 것이 담겨 있다.340) 위와 같음.이에 대한 조선의 답서는 두만강 僉節制使의 명의로 같은 해 12월에 발송되었다.40) 이 답서에는 양국의 우호관계, 오라 卜璋台(布占泰) 의 불법침입에 관한 것, 건주위의 海西(烏喇) 曉諭로 조선침범을 못하게 하는 것이 실려 있다. 누르하치의 국서는 양국간의 최초의 것이고, 또 조선의 국방에 대한 인식과 외교방향이 변화하게 된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 때는 누르하치가 呼蘭哈達의 南崗에서 赫圖阿拉(헤투아라)으로 이주한지 2년째 되는 해였다.341)≪滿州實錄≫권 3, 萬曆 31년(계묘). 헤투아라로 도읍을 옮긴 다음부터 누르하치의 세력이 날로 팽창하였다. 만력 35년(1607) 이래로 장백산의 동북지방 일대를 원정하여 많은 포로를 거두어 들였고, 두번에 걸친 오라정벌과 동해지방의 여러 부족을 어우른 다음, 마침내 만력 41년 1월에는 오라를 멸망시켰다.342)≪淸太祖實錄≫권 4, 萬曆 41년 춘정월. 이로부터 누르하치의 세력은 오직 여허만 제외하고 전 여진부족을 통할하는 데 이르렀고 이제는 後顧의 염려가 없어졌기 때문에 마음놓고 遼東지방을 넘보게 되었다.

 이와 같이 누르하치는 다수의 부족을 휘하에 거두어 들이고 요동지방을 제외한 거의 만주전역을 지배하는 세력으로 성장함에 따라, 만력 36년부터는 명에 바치던 조공을 끊고 독자적으로 생활을 영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다수의 인구를 부양하는 문제는 간단하지 않았다. 그들이 식량과 생활필수품을 구하는 길은 조선의 만포진을 통하여 청원하는 것이 당시로서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광해군 4년(16l2) 2월경에는 만포진 건너편은 “비옥한 땅이라 일컬으며 누르하치에게 새로 항복한 무리가 날로 늘어났고, 개와 닭소리가 서로 들리게 되었다”343)≪光海君日記≫권 50, 광해군 4년 2월 계유.고 할 정도로 만포진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의 수가 증가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누르하치도 매번 사람을 만포진에 보내어 물품을 구하고자 했으므로 정부에서는 지방관을 시켜 후일을 염려하여 그들의 접대를 잘 하게 했다.344)≪光海君日記≫권 50, 광해군 4년 2월 갑신.

 저들을 구제하는 것은 보통의 일이 아니었다. 광해군 5년 2월의 평안감사 鄭賜湖의 장계에 의하면, “만포진에 귀순하는 胡人은 1년에 800명을 供饋하 는 것이 정규인데, 근년 이래로 1천여 명이 와서 먹었다. 특히 근래 胡地에 흉년이 들어 하루에도 3, 40명씩 나날이 와서 식사하는 데 며칠이 안되어 1백 여 명이 되니 앞으로 계속할 수 없어서 극히 염려가 된다”345)≪光海君日記≫권 63, 광해군 5년 2월 정미.고 하였다. 이로써 보건대, 만포진에서는 이미<女眞接待事例>를 마련하여 여진족을 구휼하였으므로 만포진은 여진족의 생명선이나 다름 없었다. 누르하치는 문암 승리 이후 광해군 원년(1609) 봄에 사람을 조선지방관에 보내어, 종래 조선에서 오라에 보내던 면포를 자기에게 주기를 청하였다.346)≪光海君日記≫권 15, 광해군 원년 4월 임오. 그리고 그 전년에는 貂皮 80벌을 바치고 대신에 木綿(면포)으로서 값을 쳐서 받아갔다.

 누르하치는 조선을 그들의 생활필수품의 공급원으로 간주하고 있었으므로 최선을 다해서 우호친선관계를 유지하려고 하였다. 오라 정벌을 위해 조선의 변경을 여러 차례 왕래하면서 “함께 天朝(명)를 섬기기 때문에 조선을 범하지 않는다”347)≪宣祖實錄≫권 209, 선조 40년 3월 무자.고 하여 여염집이나 마을에 해를 끼치지 않았다. 심지어 병졸이 사로잡은 鍾城村의 백성부부를 酋長이 풀어주게 하여 화호의 뜻을 보였다. 그 뿐 만 아니라 잡혀갔던 통사 河世國을 풀어주고 四郡(閭延·慈城·茂昌·虞芮)에 살고 있던 胡人을 모두 철거하여 만주지방으로 옮기는 등 깊은 호의를 보였다.

 누르하치는 사실 국가를 건립할 원대한 포부를 갖고 있었던 만큼 조선과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극진한 노력을 기울여왔던게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해군 원년말에서 2년초에 걸쳐 조선과 명이 협력해서 누르하치를 공격한다는 소문이 파다하여 그들을 자극하였던 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이 때의 眞僞는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4년 후인 광해군 6년 6월에는 명에서 누르하치 토벌계획을 세우고 조선에 원병을 요청한 바 있고 조선정부에도 이 사실을 극비로 다루고 朝報에도 싣지 못하게 하는 한편, 변경의 경비를 엄하게 하고 경계태세를 착실히 거행케 하였다.348)≪光海君日記≫권 79, 광해군 6년 6월 병오 및 권 80, 광해군 6년 7월 무오.

 특히 조선정부는 원병문제에 신중을 기하지 않은 수 없었다. 왜냐하면 연전에 서북지방에 질병이 크게 번져서 사망자가 만여 명에 이르렀으므로 국경을 막을 사람이 없었다. 또 城池와 器械간 저들(建州)에 미치지 못함이 많을 뿐 아니라, 병사가 심히 정예하지 못하기 때문에 크게 염려가 된다는 평안병사 李時言의 말에서도 짐작이 된다. 그리고 누르하치가 “나무 한 그루도 일찍이 유린한 일이 없는데 (조선이) 비록 천조(명)와는 부자지간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후의를 저버리고 스스로 난을 만들 수 있겠는가”라고349)≪光海君日記≫권 79, 광해군 6년 6월 병오 및 권 80, 광해군 6년 7월 무오. 입버릇처럼 말했던 것을 미루어 보더라도, 만약에 추진하던 원병 사실이 탄로가 나면 누르하치는 곧바로 조선을 침범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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