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Ⅱ. 정묘·병자호란
  • 2. 정묘호란
  • 1) 후금의 침입과 조선의 대응

1) 후금의 침입과 조선의 대응

 후금의 누르하치는 天命 10년(1625) 수도를 遼陽에서 瀋陽으로 옮기고 盛京이라 하였으며, 계속 요서지방으로 진격하여 山海關을 공격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寧遠城을 공격하다가 袁崇煥의 강한 저항을 받았는데 이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그는 그 이듬해에 죽었으며, 그의 아들 皇太極(洪太主, 洪歹是;누르하치의 여덟번째 아들)이 즉위하니 그가 곧 太宗이다. 태종은 집권한 지 얼마 안된 인조 5년(1627)에 조선을 침입하여 정묘호란을 일으켰다. 호란의 원인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대조선 강경론자인 청 태종의 등장을 들 수 있다. 누르하치는 조선에 대해 적지 않은 불만을 품고 있으면서도 끝내 화친정책으로 일관하였다. 그러나 태종은 사르후에서의 전쟁에서 승리한 다음, 조선이 매번 명과의 관계를 들어 화의에 쉽게 응하지 않으므로 억류중이던 조선의 장병을 모두 죽여버리자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조선이 화의를 말하지만 믿을 수 없고 또 遼東을 도우려 하니 요동공격에 앞서 조선을 징벌하자고 제의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천명 5년(1620) 6월에 누르하치가 제장을 불러 조선문제를 논의할 때 代善(貴盈哥;누르하치의 둘째 아들)은 억류중인 조선장병을 풀어 주자고 하였으나, 청 태종은 조선의 신의를 믿을 수 없으니 회보를 기다려 결정하자고 이의를 제기한 만큼 조선문제에 날카로운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청 태종은 집권 후 누르하치가 고집하던 八旗의 聯政體制를 준수할 생각이 없었고 오히려 권력집중화를 도모하는 데 힘썼다. 누르하치의 생존시에는 절대권자인 汗 밑에 이른바 四大王(代善, 阿敏, 莽古爾泰;누르하치의 다섯째 아들, 皇太極)이 세력균형을 유지하였으나 황태극이 새로 汗에 즉위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있던 사람이 곧 아민과 망고르타이였다. 따라서 청 태종은 집권화에 방해가 되는 이들을 제거할 원대한 포석으로서 먼저 아민을 출정시켜 소외된 불평을 해소시킴과 동시에 출정과정에서 충성심을 시험하기로 하였다. 이와 동시에 寧遠 전투에서 실추된 병사들의 사기를 앙양시키는 것도 곁들였다.395) 金鐘圓,<丁卯胡亂時의 後金의 出兵動機>(≪東洋史學硏究≫12·13, 1978), 58∼70쪽.

 둘째 청 태종의 즉위년에서 天聰 원년(1627)에 걸친 대기근과 漢人의 도망 및 반란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사회문제를 들 수 있다. 호란 후에 인질로 끌려갔던 原昌君(李玖)이 돌아와서 인조에게 전하는 말에 “심양에 飢荒이 심해서 노약자는 대부분 이미 굶어 죽었다”는 것이다. 그가 목격한 것은 4월 중순이었는데 이로 미루어 보면 전년의 추수가 흉작이었다. 그리하여 은냥이 있어도 물건을 살 수 없고 도적이 횡행하여 인명을 살상하고 심지어 사람을 잡아먹을 정도로 극심한 식량난에 봉착한 것이다. 호란이 끝나고 후금의 요청에 따라 쌀 3천 섬을 보내준 것은 식량난의 해결이 호란의 한 요인이었음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셋째 모문룡의 등장으로 후금의 요서진출에 방해가 되었던 점을 들 수 있다. 후금은 遼·潘 지방을 함락하고 그 지역의 한인으로 하여금 경작케 함으로써 후금사회는 차츰 농경체제로 이행되었다. 이 때 한인은 생산기층을 형성하였고 이들의 농업생산과 잉여노동력의 착취를 통하여 후금의 권력구조가 형성되었다. 따라서 한인의 역할이 중대하였다. 그러나 이 한인들이 과중한 공과의 부담과 민족적 차별대우에 견디지 못해 도망가거나 반란을 일으키는 일이 잦았다.

 한인의 도망과 반란을 부채질한 사람이 모문룡이었다. 그는 광해군 13년 (1621) 요동이 함락되었을 때 廣寧巡撫 王化貞에 의해 練兵遊擊에 임명되었으며, 王의 명으로 유민을 招撫하여 요동의 회복을 꾀하였다. 그 해 7월에 그는 300여 명의 병력으로 압록강 하류의 鎭江을 기습하여 승리를 거두어, 연전연패의 명군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그리고 앞에서 보았듯이, 광해군 14년 평안도 철산 앞의 단도에 설진하여 후금에 대한 견제작전을 폈다. 후금의 배후지역을 습격하여 내부를 교란시켰을 뿐 아니라 진강·海州 등지의 반민을 받아들이거나 혹은 그들과 밀통하여 반란을 유도함으로써 후금의 요서진출에 큰 장애물이 되었다. 그리고 모문룡을 비호하고 그의 활동을 돕기 위해 병사·병기 및 식량을 공급하는 것이 조선이었기 때문에 조선정벌을 단행하기에 이르렀다.396) 金鐘圓, 위의 글, 70∼91쪽.

 청 태종은 먼저 江東(조선과 모문룡)을 공격하여 화근을 없앤 다음 산해관과 영원성 등지로 출격하겠다고 하였는데, 그는 누르하치의 요서진출 우선론과는 정반대로 공격목표를 조선으로 그 방향를 바꾸었다. 이에 덧붙여 인조반정 이후의 조선정국의 불안정과 척화론의 대두가 침략을 자극하는 촉매제였다. 그리고 인조 10년(1625) 1월 李适의 난의 한 패였던 韓明璉의 아들 韓潤이 후금에 와서 “모문룡의 군사는 오합지졸이고 그 곳(철산)에는 재화가 많으며, 義州城이 함락되면 安州도 쉽게 무너진다. 선왕(광해군) 때에는 사절이 끊이지 않았는데 신왕(인조)은 모문룡을 믿고 사자를 보내지 않는다. 지금 먼저 의의 글을 보낸 다음 군사를 평양에 진주시켜서 신왕에게 항복을 권하면 응할 것이다. 신왕은 즉위 이래 인심을 잃었고(백성들은) 선왕을 그리워한다. 우리 아버지와 이괄이 겨우 3천 명을 거느리고 서울을 빼앗았는데 신왕을 따르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 大金國의 汗이 조선관원을 거느리고 왔다고 하면 누가 항복하지 않겠는가”고 하는 정보제공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姜弘立의 종용도 크게 작용하였다.397) 金鐘圓, 위의 글, 61∼70쪽.

 마침내 天聰 원년(1627) 정월 태종은 大貝勒 阿敏, 貝勒 濟爾哈朗·阿濟格·杜度·岳託·碩託 등에게 3만 명의 대군을 거느리고 조선을 정벌하게 했다. 후금군은 한윤을 향도로 압록강을 건너고 13일 義州를 공격하였다. 나라의 관문이고 국방상의 요지인 의주에는 적의 침공을 막을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았고 군수품도 마련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습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성을 지키던 장병들은 용감하게 싸워 적병을 다수 죽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지탱하지 못하였다. 부사 李莞, 通判 崔夢亮 등이 피살되고 대소의 장관과 수만 명의 민병이 도육되거나 피로되었다. 후금군은 의주에 대관 8명과 병사 1천 명을 남겨서 지키게 하고 일부의 병력으로 철산의 모문룡을 공격하였으나 모문룡이 身彌島로 도망감으로써 잡지 못했다.398)≪仁祖實錄≫권 15, 인조 5년 정월 을유·무자 및 권 16, 인조 5년 4월 정유.
≪淸太宗實錄≫권 2, 天聰 원년 3월 신사.

 이어서 후금군의 주력은 定州를 거쳐 郭山에 이르렀고 17일 凌漢山城을 공격하였다. 이 때 성을 지키던 宣川府使 奇協은 피살되고 守城大將 定州節制使 金搢과 郭山郡守 朴惟健이 포로가 되었다. 후금군은 계속 남하하여 20일 청천강을 건너 安州城 아래에 진을 치고 있다가 이튿날 새벽에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안주성 방어를 책임진 평안병사 南以興과 安州牧使 金浚은 성안에 있던 2만 명의 백성 및 군사와 한 덩어리가 되어 용감하게 잘 싸웠다. 그러나 정규병 2천 명으로써 적의 압도적인 대군을 당해낼 수 없었다. 마침내 성이 함락되고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고 또 잡혀서 끌려갔다. 남이흥과 김준 등의 지휘관들은 화약을 터뜨려서 장렬하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안주는 전략상으로 중요한 곳이기 때문에 남이흥이 일찌기 왕(인조)에게 “수만 명을 양성한다면 싸울 때 효험이 나타날 것이다”399)≪仁祖實錄≫권 5, 인조 2년 3월 무진.라고 주청하였으나 듣지 않아서 이러한 변을 당한 것이다.

 능한산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인심이 흉흉하였고 평양에서는 品官들이 처자를 데리고 도망가다가 효시당했다. 후금군은 24일에 평양에 진 주하였고 그 이튿날 黃州가 함락되었다. 평양감사 尹暄은 후금군이 도착하기 전에 미리 후퇴하였고 황해병사 丁好恕도 미리 황주를 떠나 버렸다.400)≪仁祖實錄≫권 15, 인조 5년 정월 무자·경인·임진·계사.
≪淸太宗實錄≫권 2, 天聰 원년 3월 신사.

 이에 앞서 17일 후금의 대군이 곧 안주에 도착할 것이라는 보고가 있자 왕은 중신들을 모아 대책을 논의하였다. 긴급한 문제가 하삼도에서의 징병과 黃州·平山에 별장을 보내어 구원하는 일이었다. 그런 다음 수도방어를 위한 남한산성 및 임진강의 수비가 논의되었다. 그리하여 張晩을 四道體察使로, 李元翼을 하삼도 및 경기체찰사로, 金瑬를 부체찰사로, 沈器遠을 都巡檢使로, 李溟을 경기관찰사로, 金超宗을 體府贊劃使로, 李延龜를 兵曹判書로, 金自點을 勾管江都事로 임명하였고 留都大將에 金尙容을 앉혔다. 李元翼은 근왕병을 뽑는 「號召使」를 겸하였고 별도로 沈器遠·鄭經世를 남쪽으로 보내되 정경세는 영남지방의 징병을 전담하게 하였다. 징병의 수는 3만으로 하고 각도 병사와 인솔하에 調發하게 하였다. 23일에는 兩司의 여러 신하들은, 왕이 친정의사를 보이고 군·민을 타이르며 근왕병을 불러모아서 몸소 전진하면 3군의 사기가 싸우지 않아도 배로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오히려 왕은 안주가 함락되고 적군이 肅川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자 24일에 「分朝」를 단행하였다. 곧 李元翼·申欽 등은 세자를 호위하고 전주로 향하였다. 그리고 왕은 26일 도성을 떠나 29일에 강을 건너고 鎭海樓에 이르렀다.

 체찰사 및 호소사를 남쪽으로 보내어 근왕병을 징집케 하였으나 아무 소식이 없었다. 병조판서 이정구는 군병의 수도 파악하지 못하였다. 왕이 도감군(훈련도감), 수원병이 몇명이냐 묻자 병판은 도감군을 각지로 분송하고 남아 있는 수가 얼마인지 모르며 수원군의 수는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다고 하니 왕은 “병을 주관하는 장관이 병수를 모르다니 옳은 일인가”401)≪仁祖實錄≫권 15, 인조 5년 정월 기축.라고 힐책하였다. 국난을 당한 당시의 위정자들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함경도와 강계 등 7읍에는 精兵이 건재했으므로 이들을 원병으로 끌어다 쓰라는 왕명이 있었으나 구체적인 활약상은 보이지 않았다.

 왕은 선전관을 보내어 하삼도의 징병을 재촉하였으나 소식이 없었고 약속된 전라병사도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충청수사 鄭應聖이 병기를 갖춘 군선을 거느리고 江都에 왔고 水原의 기병이 또한 도착했으나 양식이 없어서 마을을 찾아다니면서 구걸해야 할 형편이었기 때문에 모두 크게 분노하였다. 군량이 떨어졌을 뿐 아니라 화약이 없어서 총과 대포를 쏠 수 없었다. 전쟁에 대비한 태세가 전연 갖추어지지 않았던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다.402)≪仁祖實錄≫권 15, 인조 5년 정월 무자·기축·신묘·정유. 2월 갑진·을사.

 왕이 강화도로 떠나고 난 다음 도성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피난가서 텅 비었다. 남은 사람은 무뢰배·난민들인데 이들은 작당하여 닭이나 개를 함부로 살륙하였고 체포하려는 관원에게 칼을 빼어 대항하는 따위로 무법천지가 되었다. 그리고 전선을 독찰하는 도체찰사 장만은 도성을 떠난 지 7일 만에 겨우 개성에 닿았고 이어 平山까지 갔었다. 적군이 평양과 황주를 함락하자 원병차 파견했던 申景瑗의 군사가 놀라서 도망갔고 장만도 평산에서 개성으로 후퇴해 버렸다. 따라서 평산 이북은 완전히 후금군의 수중에 떨어졌고 평산에서 도성에 이르는 지역도 거의 무방비 상태였다. 임진강의 여러 나루터를 지킬 계획이었으나 하삼도의 징병이 여의치 않아 그것마저 수포로 돌아갔다.

 이제 조선정부가 취할 방법은 오직 한가지 후금과 강화하는 것 뿐이었다. 후금군은 定州에 이르렀을 때 화의를 제기했는데 평안감사 尹暄이 이를 보고함으로써 조정에 알려졌다. 이것이 첫번째 胡書이다. 정월 18일 兩司에서는 적군이 화의를 청해 왔는데 그 우롱과 공갈의 말투는 몹시 통분한 일이니, 엄한 말로 꾸짖고 거절해야 하며 결코 국서를 보내어 굴욕을 받을 수 없다는 의견을 제시함으로써 답서를 보내지 않았다.

 그런 다음 22일에 윤훤은, 강홍립의 奴子 彦伊 등이 와서 “胡將이 국서를 보내려고 하는데 평양에서 받지 않으면 곧바로 서울에 가서 올리겠다”고 하므로 다시 胡書를 베껴 올려서 조정의 처치를 기다린다고 하였다. 이 때의 胡書는 적장 아민이 보낸 것인데 그 내용은 이른바 「四宗惱恨」을 담은 것이었다. 첫째 사르후전쟁 때 조선이 명을 도와 출병하였고, 둘째 모문룡을 숨기고 그에게 식량과 말먹이를 공급하여 양국의 우호를 그르쳤고, 셋째 모문룡을 조선에 머물게 하여 후금의 逃民을 받아들이고 후금의 땅을 빼앗게 하였으며, 넷째 先汗과 新汗에 대하여 吊賀의 사절이 없었다는 네 가지를 들고, 화의를 원하면 빨리 사람을 보내어 이 문제를 의논케 하자는 것이었다. 이것이 두번째 胡書이다.

 이 호서를 받고 왕은 대신, 備局 및 兩司 장관을 불러 의논하였다. 그리하여 후금에 억류되어 있던 朴蘭英의 아들 朴雴, 강홍립의 아들 姜王肅 등에게 답서를 주어서 25일 출발케 하였다. 이 국서의 내용을 요약하면, 첫째 조선은 2백 년간 명을 섬겨 왔는데 사르후전쟁 때에는 천자의 칙명을 받고 출병했으며 모문룡은 명의 장관이니 조선 땅에 의지하는 것은 의리상 어쩔 수 없다. 둘째 두 나라는 원한도 없고 은혜도 없으며 사절의 왕래도 없으니 慶吊간에 通問하지 않음은 당연하다. 셋째 후금이 까닭없이 조선을 갑자기 공격하여 많은 인민을 죽였으니 후금이 먼저 조선을 저버린 것이다. 따라서 조선과 더불어 通和하고자 하면 먼저 군사를 물리친 다음에 논의함이 옳다는 것이었다.403)≪仁祖實錄≫권 15, 인조 5년 정월 병술·경인 및 권 16, 인조 5년 4월 정유.

 박립·강숙 편에 보낸 조선의 국서는 27일 中和에서 적장에게 전달되고, 적장 아민은 조선국왕에게 보내는 답서를 阿本·董納密 등을 시켜 조선측에 전하게 했다.404)≪仁祖實錄≫권 16, 인조 5년 4월 정유.≪淸太宗實錄≫권 2, 天聰 원년 3월 신사. 동일한 胡書를≪仁祖實錄≫에는 安州에서,≪淸太宗實錄≫에는 中和에서 보낸 것으로 적고 있다. 어느쪽이 착오인지 가려내기 어렵다. 이 호서는 이른바 「七宗惱恨」을 담은 세번째 胡書인데 앞서의 「4종뇌한」에 세가지를 덧붙인 것이지만 상술할 만한 것이 못된다. 이 때 아민은 5일간의 기한을 주고 그 안에 화의를 원하면 속히 사신을 보내야 하고 만약에 이 기한을 어기면 다시 진격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리고 아민은 아본 등의 胡差를 보낸 지 얼마 안되어 다시 備禦 札弩, 巴克什科貝 등을 시켜 네번째의 호서를 조선으로 보내게 하였다.405) 여기에서도 같은 내용의 胡書를 조선측은 평양, 청측은 중화에서 보낸 것으로 적고 있다.

 이와 같이 후금측이 연거퍼 화의를 재촉한 까닭은 명과 소강상태에 있지만 언제 전쟁이 재발할지 모르는 위험한 처지에 놓여 있고, 군수품의 조달이 어려울 뿐 아니라 조선의 의병이 봉기하여 도처에서 후금군을 공격함으로써 허리를 잘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조선의 수도가 비어 있어서 깊이 침입하는 것이 무모하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아민이 계속 침공을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貝勒들은 平山에서 화의의 성립을 기다리고 있었다406)≪淸太宗實錄≫권 2, 天聰 원년 3월 신사..

 한편 조선에서는 정월 28일 장만의 보고를 통해 姜王肅 등과 함께 호차 3인 이 호서를 가지고 서울로 직행한다는 것과 강홍립의 私書(장만이 보낸 서신에 대한 회답)를 보낸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이튿날 權璡이 胡 千總 1인, 從胡 1인을 대동하고 行都(강화도)로 가는데 행차가 몹시 급했다는 보고도 아울러 받았다. 조선의 국왕은 대신들을 이틀에 걸쳐 접견하고 호차의 접대, 예물 증여 및 후금과의 국서왕래가 명에 미칠 영향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특히 왕이 직접 호차를 만나고 이른바 「凶書」(賊書, 胡書)를 친히 받을 것인지 하는 문제는 커다란 논쟁거리였다. 그리고 네번째 호서에 대한 회답기한이 2월 3일까지이고 그것을 어기면 후금군이 진격한다고 하므로 兵曹에 명해서 영리한 무관을 뽑아서 差官을 삼고 그 편에 회답서를 보내게 했다.407)≪仁祖實錄≫권 15, 인조 5년 정월 병신·정유.

 2월 1일 왕은 호차의 접대사신인 申景禛을 만난 자리에서 밖에서 접대하고 안(行在所)으로 들어오지 않게 하면 대단히 좋겠다고 하였다. 호차를 직접 만날 의사가 없었다. 그 이튿날 다섯번째의 호서를 받았다. 그 내용을 간추리면 조선이 참으로 和議를 원한다면 南朝(명)를 섬기지 말고 그들과의 사절 왕래를 끊고 하늘에 맹세하여 영원히 형제의 나라(후금이 형, 조선이 아우)로써 함께 태평을 누리자는 것이었다. 이 호서를 놓고 왕과 신하들은 말할 나위도 없이 事大의 의례는 결코 끊을 수 없다는 의견이었다. 그래서 회답국서는 별도로 중신을 파견해서 전하기로 하고 먼저 접대사신을 시켜 예물을 내려주고 간단한 회답서를 호차 편에 보내기로 했다. 2월 5일 조선은 晋昌君 姜絪에게 刑曹判書의 假銜을 내리고 회답사로서 후금진영에 파견했다. 후금측은 조선의 사절이 이름으로써 화의의 단서가 열릴 것이라 기대하였다.408)≪仁祖實錄≫권 15, 인조 5년 2월 무술·기해·경자·임인 및 권 16, 인조 5년 4월 정유.
≪淸太宗實錄≫권 2, 天聰 원년 3월 신사.

 그러나 후금군은 中和에서 평양으로 물러나서 사세를 관망한 다음 진퇴를 결정한다고 했는데 7일 다시 平山으로 진격한다는 소식을 듣자 조선정부는 和事가 끝장난 것이 아닌가 걱정했다. 더구나 이날 강숙·박립 등이 가져온 여섯번째의 호서에는, 평양·황주를 잃은 장관을 체포하고 신관이 와서 군병을 정리하고 후금군에 대항하려고 하니 강화의 참뜻이 없는 것이다. 후금의 差官을 홀대하며 조선관원이 망녕되게 스스로를 높임으로써 국가의 대사를 그르쳤다. 그리고 회답서에 여전히 명 연호인 天啓를 쓰고 있어서 화의를 논의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날 왕과 대신들은 한결같이 화의가 끝장났다고 생각했으며, 심지어 적군 이 개성까지 진격하여 맹약을 강제할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한 사람도 난국을 타개할 식견을 가진 자가 없었고 오직 기울어져 가는 명나라의 눈치를 살피고 거기에 한가닥 기대를 걸고 있을 뿐이었다. 임진의 요새도 내버리고 오직 고도에서 최후의 결전을 결의했으나 군량은 떨어져가고 화약도 극히 적은 양 밖에 없으며 고대하던 근왕병도 오지 않았다.409)≪仁祖實錄≫권 15, 인조 5년 9월 계묘·갑진 및 권 16, 인조 5년 4월 정유.

 한편 회답사 姜絪은 2월 8일 瑞興에서 적장 아민을 만났다. 이 때에 전한 회답의 내용은, 후금군이 까닭없이 조선을 침입한 것을 꾸짖고, 후금이 진심으로 화의를 원한다면 조선도 성심껏 상대할 것이고 명에 대한 事大와 후금에 대한 交隣은 각각 길이 다르니 각자가 자기 나라를 지키고 자기 도리를 다하면 서로가 편안과 즐거움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화의가 정해지고 후금군이 이 곳에 주병하고 있으면 조선도 후금의 요구에 따르겠다고 하고, 아민이 요구하는 「屯兵秣馬地」로 세 곳을 지정하였다.

 강인은 후금군이 서울로 진격을 계속하다가 사신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머무르고 있다는 것과, 화의가 정해진 다음 철군할 것인데 조선이 명과의 관계를 끊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니 빨리 지시를 내려달라는 馳啓를 올렸다(8일 도착). 그리고 姜弘立이 귀국하니 그 편에 적진의 사정을 구전할 것이며, 회답서에 「천계」 두 자가 옳지 않다는 것과, 胡人 高哥와 劉海(劉興祚) 의 말에 和事는 이미 정해졌으나 다만 한 가지가 남았는데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물러가지 않는다고 한 내용의 치계를 올렸다(9일 도착).410)≪仁祖實錄≫권 15, 인조 5년 2월 을사·병오.
≪淸太宗實錄≫권 2, 天聰 원년 3월 신사.

 후금측은 조선의 회답사 강인이 도착한 다음 얼마 안되어 副將 유해로 하여금 배를 타고 강화도로 직행하여 조선왕을 알현케 했다. 유해의 일행에는 강홍립과 박난영이 동행하여 9일 도착했다. 강인의 치계와 유해의 방문은 조야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留都大將 金尙容은 유해가 임진강의 나루를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 도성을 버리고 도망감으로써 성안은 큰 난리가 일어났는데, 宣惠廳과 戶曹가 도적의 습격을 받고 불타버린 것이다. 그리고 9, 10일 양일에 걸친 대신들의 논의는 설왕설래 의견이 백출하였다. 곧 「永絶天朝」(명과의 관계단절)문제, 적장의 과다한 세폐징구(목면 4만 필, 소 4천 두, 면주 4천 필, 포 4천 필 등) 문제, 質子, 姜絪·姜弘立의 충성심에 관한 것, 임진강방어, 斬使, 적장 접견시의 典禮(行禮) 등에 관한 것이었다.

 한편 유해는 접대하는 주석에서 형언하기 어려운 오만불손한 태도를 취했다. “너희 나라는 존망이 이번 일(劉海의 파견)에 달렸으며 나는 결코 姜絪과 같이 四拜(姜絪이 阿敏을 만났을 때의 行禮)를 하지 않겠다”411)≪仁祖實錄≫권 15, 인조 5년 2월 병오·정미.고 말했다. 또 따라온 胡人 가운데 하나는 접대에 불만을 품고 저녁을 먹지 않는 행패를 부렸다. 이에 弘文館에서는 秘密疏剳로 호차의 접견을 철회하고 강홍립·박난영을 빨리 죽여서 많은 사람들의 억울한 심정을 풀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接待堂上은 왕이 유해를 만나지 않으면 내일(11일)까지 기다렸다가 떠나겠다고 유해가 협박하였다고 전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대신들 사이에는 主和·絶和의 입씨름이 오갔는데, 왕은 유해를 만나지 않으면 적병이 반드시 진격한 것을 우려하여 마침내 11일 접견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바로 이 접견석상에서 일이 벌어졌다. 이날 국왕은 위용을 갖추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유해가 국왕 앞에서 揖을 하려고 할 때에 왕이 손을 들지 않았으므로 유해는 크게 화가 나서 물러갔다. 좌우의 신하들은 이를 보고 격분했으나 李貴는 땅을 치며 “큰일났다. 큰일났다”412)≪仁祖實錄≫권 15, 인조 5년 2월 정미·무신.고 탄식하였다.

 유해의 퇴거가 반드시 화해의 난항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이날 밤 왕은 대신들과 만나서 인질을 보내기로 의견을 모으고 종실 가운데 한 사람 또는 부마를 뽑아야 하는데, 거짓 종실이나 부마도 그 대상에 넣고 논의를 진전시켰다. 왕은 화의가 마무리되면 유해에게 마땅히 「謝單」(예물)이 있어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화의를 낙관하였다. 그리하여 李繼先의 아들 李溥를 왕의 동생이라 하고 이름을 傳라 고치고 遂成君이라 부르기로 하였다. 左通禮 李弘望을 호행관으로 정하여 후금진영에 보내기로 정하였으나 12일 대신들이 이에 반대하였다. 다시 물색하여 13일에 마침내 原昌副令 李玖를 原昌君이라 하고 그의 집에 은수저 등의 예물을 보내고 李弘望을 堂上으로 승진시켰다.

 그리고 15일에 왕은 이구·이홍망 등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廟堂(정부)에서 미리 알려준 명과의 관계를 결코 끊을 수 없다는 말을 다짐하면서 國書를 전했다. 그 내용은 왕제를 군전에 보내니 함께 맹약을 정한 다음 군사를 조선땅에서 물러나게 하고 지금부터 양국의 병마가 한걸음도 압록강을 건너지 못하게 한다. 각기 강역을 지키고 금약을 준수하여 백성을 편하게 하고 군사를 쉬게 하며, 부자·부부는 서로가 잘 보존토록 하자는 것이었다. 또 이들 편에 목면 1만 5천 필, 면주 2백 필, 백저포 2백 5십 필, 호피 6십 장, 녹피 4십 장, 왜도 8자루, 안장달린 말 한 필을 딸려 보냈다.

 이날 유해는 從胡 2인을 시켜 전일의 실례를 사과하였으므로 왕은 이에 답하고 예물을 내려 주었다. 유해는 燕尾亭에서 “금나라의 副將 劉는 명을 받들고 조선에 와서 강화하는데 이날을 기약하고 맹세하거니와 세세한 일로 다투지 안고 부당하게 징구하지 않으며 화의가 이루어지면 곧 회군하겠다”고 하였다. 王弟도 군전에서 함께 서약을 하는데 “이 맹약이 거짓일 때는 皇天이 금나라의 二王子(阿敏)에게 벌을 내릴 것이다”라고 서약하였다.413)≪仁祖實錄≫권 15, 인조 5년 2월 무신·기유·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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