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Ⅱ. 정묘·병자호란
  • 2. 정묘호란
  • 3) 의병의 활약

3) 의병의 활약

 정묘호란은 인조 5년(1627) 1월 13일 후금군이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침 범한 다음, 정주·곽산·안주·평양·황주·평산 등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화의를 제기하여 여러 차례에 걸친 교섭 끝에 마침내 3월 3일에 강화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후금군은 계속 의주에 군병을 주둔시키고 있다가 8월에 이르러 남아있던 군대를 철수시킴으로써 실질적으로 전쟁이 종료되었다.

 조선의 관군은 연전 연패하여 황해도 平山 이북지방은 완전히 침략군의 말발굽에 유린당하는 처참한 지경이었다. 조선의 지배층은 대부분 문신들이 정권을 장악하여 국방을 소홀히한 것이 패전의 중요한 요인이었다. 또한 변경을 지키는 수장들의 태만과 안일한 태도와 서민들의 동요가 적군이 쉽게 침입하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곧 의주부윤 李莞은 오랫동안 군민으로부터 인심을 잃음으로써 많은 부하들이 적군에게 항복할 뜻을 가지고 있었다. 적군이 공격했을 때 그는 술에 취해 있다가 황급히 응전하였으나, 반란군이 이미 성문을 열고 적군을 맞이함으로써 성이 함락되고 그는 포로로 잡혔다. 그리고 龍骨山城에 서는 座首가 적과 내통하는 음모가 있었고 또 協守長 張士俊은 적에 피랍된 처자를 찾기 위해 성을 넘겨주려고 모의한 일이 있었다.437) 李肯翊,≪燃藜室記述≫권 25, 仁祖朝故事本末 丁卯虜亂. 또 1월 20일 적군의 일지대 2백여 명은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가 昌城을 공격하였다. 이 때 부사 金時若은 여러 장수들과 더불어 방어계획을 세웠으나 士卒들이 두려워 도망자가 나날이 늘어났고 정탐하는 군졸도 사라졌을 때 적군이 성밑에 다다라 항복을 권유하자 군졸들이 다투어 성을 넘어 도망갔다. 김시약이 엄하게 단속하자 도리어 거역하므로 마음대로 거취를 정하게 하고 외롭게 지키다 마침내 성이 함락되었다. 김시약은 사로잡혔으나 적이 칼로 위협해도 굴하지 않고 그의 두 아들과 함께 장렬하게 죽었다.438) 위와 같음.
≪仁祖實錄≫권 16, 인조 5년 4월 정유.

 그러한 반면에 뜻밖에 적의 침공을 받고 미처 손을 쓸 수 없었던 각계 각층의 많은 사람들이 역량을 모아 적을 격퇴하기 위해 과감히 나섰다. 적이 통과한 청천강 이북지역은 1월말부터 의병투쟁에 나서서 적의 배후를 끊고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청천강 이남과 황해도에서도 의병부대를 편성하여 공격에 나섰다. 다음에 의주·용천·운암·철산·선천·곽산·정주·평양·용강 등지에서의 의병들의 활약상을 살펴보겠다.

 먼저 의주에서는 崔孝一의 활약이 컸다. 그는 담략이 있고 활솜씨가 대단하고 훈련판관을 지낸 무인이었다. 李适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 후금군이 의주를 공격할 때 맹렬히 싸웠으나 힘이 모자라 성이 함락되자 한 때 모문룡에 의탁했다가 의병장 鄭鳳壽 휘하에 들어갔다. 그리고 前司果 白宗男을 의병장으로 삼아 그의 사촌동생과 함께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침입군을 격퇴하였고 의주부에서 적의 포로가 되었던 4천여 명을 인솔하고 정봉수에게 귀속하였다.439)≪龍灣誌≫人物, 崔孝一.
≪仁祖實錄≫권 18, 인조 6년 2월 갑오.

 그리고 龍岡에서는 伏兵將 黃山立 등 18명이 민병을 모집하여 용강지방을 적의 침략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또한 洪淟, 李元立, 金應立 등도 용감히 싸워 적을 참살하였다. 뿐만 아니라 召募將 李必達도 의병을 거 느리고 적을 격퇴시킨 공이 컸다.440)≪仁祖實錄≫권 15, 인조 5년 3월 갑오.

 鐵山에서는 평민 金礪器가 철산의병부대를 지휘하여 적과 여러 차례에 걸쳐 전투를 벌인 끝에 적의 머리 셋을 베고 40여 명을 사살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 이 공으로 그는 堂上官으로 승진하였다. 그리고 慈山郡에서는 진사 林豹變이 의병을 일으킨 공으로 감사 金起宗의 추천으로 상을 받았다.441)≪仁祖實錄≫권 15, 인조 5년 2월 갑인·3월 갑오.

 한편 洪龍海·閔灠 등은 自募別將으로서 自寡軍을 편성하여 맹활약을 벌여 왔다. 이들에게 전마를 급여하여 정충신의 진영으로 보내어 활동하게 하였다. 이들은 모집한 자모군 가운데 날래고 건장한 사람 317명을 뽑았고 그 가운데의 13명은 날쌔고 용감하여 군대가 의지하는 중요한 인물이었다. 이들이 출동하려고 하는데 공급할 전마가 없었으므로 부득이 訓鍊都監 馬隊의 말을 내어 주도록 명하였다. 그 후 민람은 毛羅山에 복병을 두고 左衛將 趙光弼 등과 함께 적군을 맞이하여 용감히 싸운 결과 10여 명을 사살하고, 수급 3, 胡馬 6마리 및 활과 칼을 군문에 바쳤다 이 공으로 민람·조광필·許益福 등은 당상관으로 승진되었고 春山 등은 상을 받았다.442)≪仁祖實錄≫권 15, 인조 5년 2월 갑인·3월 신미·계미.

 定州의 의병부대는 남쪽 해변에 있는 慈聖山의 험준한 봉우리를 거점으로 용감하게 투쟁을 벌였다. 이들은 적의 공격을 10차례에 걸쳐 막아내는 치열한 싸움이었으나 다행히 아군의 손상은 없었다. 이들은 무기도 없이 오직 三稜杖(세모난 방망이)과 크고 작은 잔돌을 산처럼 쌓아놓고 이것들을 써서 끈질기게 덤벼드는 적을 많이 죽여서 큰 타격을 가하였으나 마침내 양식이 떨어져 커다란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이들은 모두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농민들이었으므로 그들이 거둔 훌륭한 전과를 보고할 수 없었다고 한다.

 宣川에서도 정주에서와 마찬가지로 의병투쟁이 맹렬하였다. 선천의 의병장 池得男은 劒山의 굴 속에 진을 치고 3월초에서 4월 9일에 이르는 한 달 이상 매일 접전을 벌여 적병을 물리치는 대단한 공적을 올렸을 뿐 아니라 적진에 갇혀 있던 남녀 수만 명의 선천인민을 검산굴 속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督府에서는 자모장 毛永然, 許可存 등에게 각각 1백 명씩 군법을 거느리고 가서 함께 지키게 하는 한편 식량을 각별히 원조하게 하였다.443)≪仁祖實錄≫권 15, 인조 5년 4월 임술.

 이에 앞서 定州城의 전투에는 이색적으로 「復讐軍」이 가세하였다. 이 복수군은 金良彦이 「深河役」(1619년의 사르후전쟁) 때 전사한 사람들의 자손 5백 명으로 조직한 군대이고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한 군병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김양언은 체찰사 장만으로부터 「복수장」의 칭호를 받고 능한산성에 머물고 있었다. 이괄의 난 때에 척후장이 되어 안현에서 적을 무찌른 공으로 晋興君에 봉하고 泰川縣監에 제수되었으나 사임하고 나아가지 않았으며, 흰옷과 흰갓을 쓰고 변방을 지키고 있었다. 정묘년 봄에 안주성에 들어가 병사 南以興의 휘하에 속하고 있었는데 적군이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자 바라던 적이 왔으니 원수를 갚고 죽을 곳을 찾아 충효를 다하겠다고 하였다. 적군이 성밑에 닿아 화살이 비오듯하는데 김양언은 성담에 올라가 활을 쏘아 적을 죽인 것이 산더미 같았고 적은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성이 함락되자 주장 남이홍 등이 자결한 다음, 김양언은 더욱더 분발하여 힘닿는 데까지 싸울 생각에서 홀로 鞭棍은 쥐고 몸을 떨쳐 덤벼들어 적을 죽이는데 죽은 적의 시체가 삼대 흩어진 듯 하였다. 군사가 없어지고 힘이 다했으나 그치지 않다가 마침내 몸 10여 곳에 상처를 입고 못위에 서서 죽었다. 성이 함락하고 수일이 지나서 그의 아들 世豪가 못 가운데에서 시신을 찾았는데 노기가 발발하여 살아있는 듯했고 온 몸에 박힌 화살촉이 서너되나 되었다고 한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조정에서 특별히 判中樞府事를 내리고 旌閭를 세웠으며 아울러 「三世殉節記」(祖 金長鍊 壬亂時, 父 金德秀 深河役, 金良彦 丁卯胡亂時 殉節)를 지어 문위에 걸어두게 하였고 나중에 忠武祠에 배향하였다.444)≪江西縣誌≫人物,<金良彦>.

 평양에서는 前判官 金峻德, 幼學 李起業·金克念, 文科直赴 李愈, 幼學 金載價 등이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향토를 지키고 용감히 싸워 적을 물리쳤다. 그 뿐만 아니라 사람 2만여 명과 소·말 수천 마리를 적의 약탈과 유린에서 안전하게 보호하였다. 그 공으로 김준덕은 超敍되고 이기업 등은 6품직에 제수되었다.445)≪仁祖實錄≫권 16, 인조 5년 5월 정묘.

 이와 같은 용감한 의병투쟁에 고무된 일부 관군들은 역량을 다해 적을 격멸 소탕하는 투쟁을 벌였다. 곧 평안도 寧邊判官 池汝海 등은 영변과 雲山에 주둔하고 있던 적의 대부대와 싸워 섬멸적인 타격을 주었는데 이 때 적병 1천여 명 가운데서 겨우 50여 명의 기병이 목숨을 건져 도망칠 수 있었다.446)≪承政院日記≫17책, 인조 5년 3월 16일. 이 운산전투에서 池汝海와 함께 용감하게 싸운 折衝 李溭은 加資되고 실직이 제수되었고, 嘉善 孟考男, 析衝 張潛도 아울러 加資되었으며, 지여해는 당상관에 제수되었다. 이 밖에도 여러 사람이 실직에 제수되었고 아울러 전쟁에서 사망한 46명에게 3년간 급여를 내렸다.447)≪仁祖實錄≫권 16, 인조 5년 5월 병인. 또한 前龍川府使 李希健은 龍骨山城이 함락된 다음 분연히 살신보국의 뜻을 굳혔다. 마침 적병이 雲巖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의 印符를 金起宗에게 주고 이번에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 하였다. 기병 30명을 거느리고 적의 배후를 추격하는데 그는 맨 앞장서 공격하다가 적의 화살에 맞아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이에 왕이 교서를 내려 그의 관작을 회복시키고 喪柩가 이르는 고을마다 호송케 하고 그의 처자가 있는 곳을 찾아 恤典을 베풀게 하였다.448)≪仁祖實錄≫권 15, 인조 5년 3월 임신.

 龍川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한 두드러진 인물은 金佑였다. 그는 임진왜란 때 에도 전공을 세워 무직인 部將이 되었다. 그는 용천이 적군에 의해 짓밟히게 되자 피난민들을 小爲浦에 모으고 성책을 쌓아 방어시설을 갖추었다. 소위포 는 연해지방의 요충지대였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에는 椴島가 있고, 서북쪽에는 신도, 북쪽에는 식량이 가까이 있는 천연의 요새지로서 거 기에는 1만여 명이 들어가 싸울 수 있었다. 김우가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투 쟁을 벌이자 용골산성 이남의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소위포는 순식간에 대부대를 이루었으며 적의 침공을 여러 차례 격퇴하였다. 그리고 용천의 장산 지방에서 張遴이 9백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고 그의 형과 조카와 함께 적과 싸워 이긴 다음 소위포에 합류했다. 또 張凞俊도 의병을 일으켜 적을 물리치고 소위포에 들어가 싸우다 전사했다. 李忠傑·忠伋 형제는 임진왜란 때에도 전공을 세웠는데, 이번 호란에서도 의병을 일으켜 활약이 많았다. 형은 적을 참수하고 군마·갑주를 뺏는 등의 공을 세웠고, 아우는 적이 의주성을 공격할 때 東門將으로 성문을 지키다 전사했다. 金宗敏은 의병을 일으켜 싸운 공으로 彌串僉使가 되었고 李矗立도 의병을 모집하여 투쟁을 벌였고, 김종민·이촉립 두 사람은 뒤에 용골산성에 들어가 정봉수의 지휘를 받았다.449)≪輿地圖書≫上(國史編纂委員會, 1973), 平安道 龍川府, 人物.

 한편 소위포에는 용골산성에 있던 李立이 찾아와 합세함으로써 소위포 의병 부대의 전투력과 사기가 한층 높아졌다. 그는 이미 임진왜란 때 素沙전투에서 전공을 세워 판관이 되었다. 그리고 용골산성에서 정봉수부대와 합세하여 반역자 張士俊을 처단하고 항전을 계속하였다. 적이 소위포의 김우부대를 집요하게 공격하자 이들을 돕기 위해 이립이 소위포로 찾아갔다. 김우는 그를 반가이 맞이하고 이립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여 전체의병을 지휘케 하고 김우는 부장으로서 그를 도왔다. 이리하여 소위포 의병부대는 목책을 설치하고 싸울 준비를 갖추었을 뿐 아니라, 용골산성의 의병부대와 긴밀한 연계 밑에서 투쟁을 진행하였다. 이 때 소위포에 모여든 사람은 3천여 명이었고 3일간 전투를 벌여 무수한 적들을 살해하고 마침내 격퇴하였다. 소위포 의병부대의 활동은 6월초까지도 계속되고 있었다. 6월 1일에 의병장 이립이 올린 장계에, 명의 장수 總督太監 및 監軍都督이 와서 적의 동태를 묻고 군량을 급여하고 또 兵勢를 도왔으며, 도독이 의병가족을 大楮島로 옮기려 한다고 전했다. 그리고 이 장계를 앞에서 언급한 龍川校生인 張遴이 적진의 위협을 무릅쓰고 가져 왔으므로, 이립에게 전공에 알맞는 관직을 내리고 장린에게는 상을 내렸다. 또 같은 날 비변사에서 올린 보고에, 모문룡이 소위포 의병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 하는데 그렇게 되면 용골산성의 병마도 점차 그에게 겸 병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립은 본국의 명령을 받아 지키고 있는 데 만약에 국왕의 명령이 없으면 한 걸음도 옮길 수 없다는 비장한 결의를 보였다.450)≪朝鮮人名辭書≫(朝鮮總督府中樞院, 1937), 李立.
≪仁祖實錄≫권 16, 인조 5년 6월 을묘.

 정묘호란 때의 의병투쟁에서 으뜸가는 공적을 세운 것은 정봉수의 의병부대였다. 정봉수는 임진왜란 때 무관으로 전투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고, 이번 호란 때에도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용골산성에서 용감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정봉수는 2월 27일에 산성에 들어가서 용천·의주·철산 등 3읍의 피난민이 갈 곳을 몰라 서성대는 것을 타일러서 성중으로 불러 모은 것이 4천 명이나 되었는데 이들 난민들이 그를 추대하여 의병장으로 내세웠다. 그는 金宗敏을 의병중군으로 삼고 彌串僉使 張士俊·李光立 등과 마음을 합쳐서 함께 전략을 꾸미고 징예군을 뽑아 두었다가 정세를 보아 출전케 하였다. 이러한 용골산성의 소식이 金起宗을 통해 알게 되자 정부에서는 적의 대부대가 철군하면서 힘을 다해 공격하면 원병도 없이 외로운 성이 온전하게 지탱하기 어렵다. 하물며 성중에 식량이 떨어졌으니 적병이 도착하지 앉아도 스스로 보전하기 어려워서 많은 충의의 인민들이 모두 호구에 빠진다면 참으로 불쌍한 일이다. 본도감사에 명하여 사태를 살펴서 몰래 소식을 물어서 절망하지 않게 하며 지키지 못할 형편이면 山郡으로 철수시켜 성 전체가 대패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지시했다.451)≪仁祖實錄≫권 15, 인조 5년 2월 을유·정해.

 용골산성은 철산의 운암성과 마찬가지로 용천에서 양책으로 통하는 교통상의 요지이고 군사상 중요한 요충지였다. 따라서 여기를 지키면 의주로부터 선천·곽산·정주·안주로 통하는 적의 후방을 견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용천·철산을 거쳐 서해로 침입하는 적의 통로를 차단할 수도 있었다. 사실상 정봉수의 용골산성 의병부대는 청천강 이북의 광범한 지역 사람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성원 속에서 활동을 전개했다. 정봉수 등이 용골산성을 굳게 지키고 있음을 본 정부에서는 그의 官秩이 낮아서 호령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까 걱정인 되어 특별히 당상관으로 승진시켰다. 그리고 미곶첨사였던 장사준은 정봉수가 오기 전에 스스로 의병장을 자처하고 있다가 적과 내통하여 성을 함락치킨 죄가 있었는데 얼마 안되어 다시 성을 회복하고 정봉수와 함께 합심협력하여 성을 잘 지킨 공이 인정되어 곽산군수로 제수되었다.

 용골산성에서의 의병들의 저항이 완강하여 성을 함락시킬 수 없음을 알고 적은 당황한 나머지 회유책을 펴서 의병활동을 와해시킬 목적에서 이미 적의 앞잡이로 활약했던 장사준을 내세워 투항을 권고하였다. 장사준은 한동안 정봉수와 함께 힘을 합쳐 성을 지키는 척 하다가 앞서 언급한 龍川府使 李希健이 운암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으므로 스스로 머리를 삭발하고 후금의 장수에게 항복하였다. 그는 자기의 처를 인질로 삼고 아민에게 청하여 용천부사가 된 다음 官穀을 내어 술을 빚고 민가의 소를 빼앗아 반찬을 마련하여 오랑캐를 대접했다. 백성들 가운데 혹시 삭발하지 않은 자가 있으면 강제로 깎게 하고 따르지 않으면 위협하거나 죽여 버렸다. 그리고 장사준은 정봉수에게 글을 보내어 항복을 핍박하였으나 정봉수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 이튿날 장사준이 직접 와서 만약에 항복하지 않으면 다만‘너(정봉수) 뿐 아니라 백성들이 헤아릴 수 없는 화를 당할 것이다’라고 협박하였다. 또 몰래 오랑캐 군사 수백 명을 끌어 들여 성 밖 7리쯤에 매복시켰다. 그러나 정봉수는 꾀를 내어 장사준과 그와의 공모자 10여 명을 처단하였으므로 성중의 남녀 가운데 기뻐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이어 후금의 遊騎를 참살하거나 말을 빼앗는 등의 공을 세웠다. 이렇게 되자 크게 화가 난 아민은 3월 17일 의주·창성·곽산에 남아 있던 대병력을 동원하여 성밑에 모으고 10여 시간 동안 무려 다섯 차례에 걸친 대접전을 벌였다. 이 때 성안에 있던 남녀들은 일심동체가 되어 화살·대포·돌을 한꺼번에 내리퍼부어 적의 기병 1백여 명을 선채로 죽이는 대전과를 올렸는데 조선군사의 사상자는 겨우 1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성안에 있는 의병들의 무기와 식량이 떨어지고 또 원병이 끊어져 앞으로 있을 적의 공격이 걱정되었다. 이러한 혁혁한 전과를 보고받은 비변사에서는 김기종·정충신을 시켜 해로로 군량과 무기를 수송케 하고 수훈을 세운 정봉수에게는 용천부사와 助防將이 제수되었고 그 밖의 장사들에게 논공행상이 있었다.452)≪仁祖實錄≫권 16, 인조 5년 4원 신축.

 또 4월 3일에는 몽고병이 재차 용골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성중의 남녀가 한 덩어리가 되어 맹렬한 싸움을 벌여 몽고병의 과반수를 섬멸하는 커다란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적은 용골산성의 의병들을 기어히 굴복시킬 목적에서 4월 13일 護行使 軍官 崔有를 시켜 적의 기병 50명을 이끌고 용골산성에 이르러 출성을 권유했으나 성중에서는 반응이 없었을 뿐 아니라 적에게 일시에 포탄을 퍼부어 물리쳤다. 그런 다음 劉海가 다시 최유를 보내 회유공작을 벌였으나 성중에서는 여전히 소식이 없었다. 또 적의 대병력이 성을 공격하였는데 성중에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적병이 사면으로 성벽을 타고 올라가 성안에 들어서자 일제히 포와 화살을 빗발처럼 쏘아 부음으로써 적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잠깐 성을 포위하고 있다가 이내 龍灣(의주)으로 물러갔다. 정봉수 의 의병부대는 6월 하순경까지 굳게 용골산성을 지키고 있었으나 식량결핍과 원병이 파견되지 않으므로서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었다. 산성의 潰散의 결정적인 요인은 의병 가운데 일부가 반란을 일으킨 데에 있었고 또 그 반란은 모문룡이 원인이었다. 용골산성에서는 양식이 떨어져 정규군에만 급료가 지급되고 노약자에게는 미치지 못하므로써 많은 사람의 원성을 샀다. 그러던 가운데 小爲浦 의병들 중 주로 노약자를 일시에 大楮島로 옮겨 모문룡의 진중에 소속되게 하였다. 이 소식이 성안에 알려지자, 우리들도 앞으로 대저도 안으로 내몰릴 것이다고 걱정한 나머지 성을 무너뜨리고 의병을 해산시키게 되었다. 산성이 무너질 때까지 정봉수는 고립무원의 용골산성을 4, 5개월 동안 굳게 사수하고 적의 대병에 섬멸적인 타격을 가하였던 것이다.453)≪仁祖實錄≫권 16, 인조 5년 4월 기해 신축·기유.

<金鐘圓>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