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Ⅱ. 정묘·병자호란
  • 3. 병자호란
  • 1) 재침 전의 조·만관계
  • (1) 정묘화약에 대한 양국의 시각

(1) 정묘화약에 대한 양국의 시각

 丁卯和約에서 후금과 조선은 「兄弟之盟」으로서 서로 침입하지 않고 평화를 유지하기로 약속하였으나, 두 나라는 그 결과에 대하여 만족하지 못하였다.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후금의 침입은 비록 50여 일에 불과한 짧은 기간이었으나, 그 동안의 약탈이 극심하여 淸川江 이북의 땅은 거의 황폐되었고, 부원수 鄭忠信은 그 지역을 포기하고 退守의 계책을 세우자는 이른바 「淸北抛棄論」까지 내놓았으나 평안감사 閔聖徽의 반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더욱이 조선은 아무런 이유없이 침략을 당한 것에 분개하였으며, 후금의 군사적 위압에 굴복하여 할 수 없이 화의조건을 수락하였으나 형제의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崇明排金思想이 강한 당시로서는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치욕적인 것이었다. 또 전화의 피해도 컸을 뿐만 아니라, 해마다 많은 액수의 歲幣 와 수시의 요구에 응하는 것은 당시의 피폐한 조선의 경제력으로 매우 무거운 부담이었다. 또 후금의 침입은 그 목적의 하나가 東江鎭을 토벌하여 毛文龍의 세력을 없애는 데 있었다. 그러나 모문룡은 난중에도 무사하였고, 난 후에 약간의 활동이 없지 않았으나 명·청간에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평안도 북쪽의 碧潼·廣坪 등의 城堡를 공격하여 여자와 재물을 약탈하는 등 그 폐단이 많았으며, 조선정부를 위협하여 식량·물자를 요구하므로 조선은 토지에 부가세를 가하여 이것을 동강진 毛陣營에 보내주는 일이 생겨 경제적으로 더욱 곤란을 당하게 되었다.

 후금측에서도 정묘화약에 대하여 그들 나름대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정 묘호란이 종결된 이후에도 모문룡의 세력은 그대로 동강진을 근거로 하여 은밀히 조선과의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 후금의 배후에서 계속 도발행위를 일삼고 있었고, 장차 후금이 명나라와 총력전을 벌이게 될 때 모문룡의 군사가 그들의 對明作戰에 큰 장애 요인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후금은 종래의 화약조건을 개정하여 조선으로 하여금 그 영내에 있는 모문룡군에 대하여 만족할만한 조치를 취하도록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조선은 정묘화약이 양국의 합의에 의한 것이 아니고 후금의 강요에 못이겨 체결된 것인 만큼 내면적으로 명나라와의 동맹관계를 강화시켜 후금을 견제하려는 기도를 포기하지 않았다. 또 조선은 사신 및 國書의 왕래 등 후금과의 외교적인 접촉이 있을 때마다 문자나 언어를 통하여 은연 중에 후금을 모독하는가 하면, 후금의 세폐 증액요구를 거부하고 도리어 감액을 요구하며 반항적인 태도를 취하여 후금의 의구심을 자아냈다. 그리하여 후금은 조선을 완전히 굴복시켜 그들의 영향력 아래에 두기 위한 화약의 개정을 모색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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