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Ⅱ. 정묘·병자호란
  • 3. 병자호란
  • 1) 재침 전의 조·만관계
  • (2) 모문룡과 동강진문제

(2) 모문룡과 동강진문제

 앞에서 말했듯이 후금의 정묘 1차침입은 모문룡의 존재가 하나의 원인이 되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그리하여 화의가 성립된 뒤에도 후금은 의주에 병력을 남기어 椴島를 감시했다. 물론 조선을 감시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조선에서는 의주에 주둔한 후금군의 약탈행위를 들어 조속한 철수를 요구하면서 모문룡군의 상륙을 금지시키겠다는 다짐도 하였다. 이에 후금도 寧遠에 서 군사를 철수시킨 뒤라 조선의 요구에 응하는 체하여 이 해 7월에 군대를 완전히 철수하였다.

 조선은 숭명배금사상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에 모문룡으로부터 많은 시달림을 받으면서도 관계를 끊지 못하였다. 정묘호란 이듬해인 인조 6년(1628) 8월 모문룡군은 조선에 오는 후금의 사신행렬을 습격하려고 획책하였다. 이러한 일을 사전에 알아차린 후금은 다수의 병력을 동원하여 사신 일행을 호송하게 하는 한편, 조선에 강력한 항의를 제기하고 국서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사항을 요구하였다.454)≪仁祖實錄≫권 20, 인조 7년 3월 기축·4월 병신.

1. 모문룡군의 상륙을 금지시킬 것.

2. 모문룡군이 상륙할 경우 바로 후금에 통보할 것.

3. 후금군이 도문룡군의 상륙을 막는데 필요한 병선과 군량을 조달할 것.

4. 모문룡군에 대한 식량·물자 등 일체의 원조를 중단할 것.

 그러나 조선정부는 이와 같은 후금의 요구조건을 묵살하고 여전히 모문룡군을 비호하여 후금과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그런데 모문룡은 본국에 대하여 전공이나 拓民의 수를 과장하여 보고하고 지나치게 많은 양의 餉銀을 요구하였다. 한편 정묘호란 이후로 동강진의 병력은 종전의 기능을 상실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인조 5년 11월에 명나라 조정에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다. 熹宗과 毅宗의 교대로 그 동안 실권을 장악하고 모문룡을 비호해 오던 魏忠賢 일당이 실각하여 명나라 정부에서의 모문룡의 위치가 역전되고 보니 모문룡은 후금에 대하여도 화해를 구하는 등 二心을 품게 되었다. 이에 명의 遼東經略 袁崇煥은 인조 7년 6월 모문룡을 旅順 雙島에 유치하여 죽였다. 그가 조선영토에 들어온 지 약 10년 만의 일이다. 그 뒤 동강진에는 인조 7년에 陳繼盛을, 동왕 9년에는 黃龍 등을 차례로 주재시켰지만, 部將들의 알력이 심하였다. 또 동왕 11년에 孔有德·耿仲明·尙可喜 등 유력한 將兵이 후금에 투항함에 따라 동강진은 자연히 내부에서 와해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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