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Ⅱ. 정묘·병자호란
  • 3. 병자호란
  • 1) 재침 전의 조·만관계
  • (3) 범월쇄환의 시비

(3) 범월쇄환의 시비

 조선과 만주 사이에 犯越·採蔘·捕獵·刷還 등의 문제가 시작된 것은 임진왜란 이후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과 만주는 지정학적인 위치관계와 변경민들의 생계문제로 범월이 없어지지도 않았고 단속도 제대로 되지 못했다.

 범월쇄환의 조항은 정묘조약에도 들어 있지만, 이 조약 후 처음으로 후금이 단속을 요구해온 것은 인조 6년으로 보이며, 이에 조선정부도 동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사람으로 범월하는 자는 해마다 끊이지 않았는데, 범월하는 까닭은 포랍·채삼·補魚 등 다양했다.

 越境者로 체포된 조선인은 조선사절 편에 호송되어 오는 자도 있고 후금사절 앞에서 참수하여 조선정부가 월경을 철저히 금지하고 있다는 의지를 보여 주기도 하였다. 후금은 犯越採浦者 중에는 조선 지방관의 지시고 越江해 온 사람도 있다 하여 그 지방관의 관직·성명까지 밝히는가 하면, 조선의 지방관원이 직접 採蔘軍을 인솔하고 넘어 들어와 인삼을 채취하는 일까지 있다고 항의하기도 하였다. 후금 관원에 붙잡힌 조선의 범월인들은 대부분이 조선사절 편에 인계되어 본국으로 돌아오지만, 그 중에는 후금 관원에 의해 참형되기도 하였다.

 후금이 범월단속을 시끄럽게 끌고 나온 데는‘各守封彊’이라는 영토에 대한 관념도 있었겠지만, 조선에 대한 위압견제의 구실로 이용하려는 의도가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그 밖에도 군량결핍에 허덕이고 있는 후금으로서는 인삼·貂皮가 중요한 재원의 하나였으므로 이를 보호해야 했다. 그런데 조선은 후금에서 蔘價를 억제하자 人蔘無用을 내세워 후금의 貿蔘 요구에 불응하면서도 범월을 방관할 뿐 아니라 심지어 변경 관헌의 사주로 범월채삼이 점점 증가하는 실정이었다.455) 金聲均,<朝鮮中期의 對滿關係>(≪白山學報≫24, 1978), 26쪽. 이러한 犯越採捕의 시비도 분쟁의 한 요인이 되었다.

 한편 후금으로부터 조선의 서북변경에 모여든 망명자에 대한 처리문제도 東江鎭 문제와 연관성을 띠고 복잡한 관계를 갖게 된다. 망명하여 귀화한 자들은 대부분 여진족의 치하에서 불만을 느끼고 탈출한 漢人들이며, 후금정권에 대해 불평하는 여진인도 상당수에 달했다. 이들은 후금에 대한 적개심과 복수심으로 충만하여 椴島의 동강진과 조선 서북변경에 흩어져 살면서 후금에 대하여 적대활동을 벌이면서 후금의 배후를 견제하는 세력으로 나타났다.

 후금은 망명자가 발생할 때마다 그 송환을 요구하였으나 조선정부는 이를 듣지 않고 계속 받아들여 서북변경에 거주하게 하던가, 동강진으로 들여보내 협조하지 않았다. 이에 위협을 느끼게 된 후금은 명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기에 앞서 조선에 대한 재침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을 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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