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Ⅱ. 정묘·병자호란
  • 3. 병자호란
  • 1) 재침 전의 조·만관계
  • (4) 개시와 양국간의 마찰

(4) 개시와 양국간의 마찰

 후금은 호란 때의 禮幣와 해마다 받아가는 歲幣로 막대한 물자를 무상으로 얻어가면서도 이것으로 부족하여 開市에 의한 교역수단을 통하여 더 많은 이득을 취하려 하였다. 개시에 관한 조항은 江都條約이나 平壤條約에 들어있지 않다. 그러나 정묘호란이 끝난 직후에 淸太宗의 요구로 교섭이 시작되었다. 조선은 戰禍로 西道가 피폐하여 응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지만 그들의 독촉에 견디지 못하여 결국 인조 6년(1628) 정월에 개시할 것에 동의하였다. 전화와 흉작으로 개시할 형편이 못되었으나 糧米 3천 석을 간신히 마련하여 그들의 요구에 응하기로 하고 商民을 깨우쳐서 中江開市에 임하도록 하였으며, 매매를 엄히 단속하여 勒買와 약탈 등 불법이 자행되지 않도록 후금측의 횡포를 예방하였다. 그리하여 동년 2월 26일 中江(鴨綠江中의 義州 蘭子島)에서 개시하여 조·후금간에 최초의 국제무역이 시작되었다.

 조선은 약속한대로 米 3천 석을 내어 1천 석은 시장의 상품매매용으로 하 고, 2천 석은 증여케했으나, 후금상인의 횡포가 극심했다. 胡將이 胡商과 경 비군졸을 데리고 鎭江으로 나와 1천여 명이 강을 건너와서 開市하였는데 그 들은 공연히 생트집을 부리면서 農牛 3백 두를 내놓으라고 떼를 썼다. 또 호 상과 馬疋의 糧草를 공급하라고 위협과 공갈을 가하여 할 수 없이 지방관이 糧料 1백 석을 내주기도 하였다. 조선측에서는 장사꾼이 남의 나라에 장사하 러 다니면서 남의 나라에 대하여 식량과 말꼴을 요구한다는 것이 있을 법이나 한 일이냐고 항의하였으나 그들의 行虐은 그치지 않았다. 개시에 상인들이 겁을 먹고 모이지 않자 정부에서는 상인을 모으기에 부심하였으나 市上賣買는 부진했다.456) 金聲均, 위의 글, 30쪽.

 청 태종은 중강개시가 성립되자 즉시 會寧開市를 요구하여 왔다. 조선정부는 국력의 피폐로 물화조달이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하였다. 그러나 청 태종은 회령으로 사람을 보내 지방관을 백방으로 위협하여 개시에 응하도록 억압을 가하였다. 조선은 할 수 없이 商官은 파견하지 않고 다만 현지인의 자유로운 私商을 묵인하기로 하여 동년 10월에 회령개시도 시작하였다.

 중강개시가 시작은 되었으나 개시의 시기와 횟수·기간 등이 구체화되지는 않았다. 후금측에서는 봄·여름·가을·겨울 4계절을 생각한 바 있으나, 봄·여름·가을 3季開市를 요구했고, 조선측은 봄·여름 2계개시를 주장하여 마침내 봄·가을 2계개시로 합의되었다. 그러나 후금 상인의 횡포와 물자난으로 정기개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인조 9년까지 5년간에 겨우 2회 의 春市밖에 열리지 뜻하였고 두 나라 사이에는 개시가 제대로 열리지 못하는 데 대한 책임전가의 설전만이 오고 갔다.

 중강개시가 제구실을 못하게 되자 春秋信使가 들어갈 때 商買를 함께 데리고 가서 貿換케 하도록 합의를 보아 인조 11년부터는 심양에서 교역이 열리었다. 처음에는 朝鮮信使에 따라간 상고에 의하여 심양에서만 무환이 이루어졌으나 다음해부터는 후금의 信使도 상고를 데리고 나와 의주에서도 교역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후금측에서는 춘추정기신사 외에 수시로 오는 사절로 상고를 데리고 와서 무환을 강요하는 일이 있어 분규가 일어났다.

 회령개시는 私市로 열리기는 하였으나 얼마 안되어 중도에 끊어졌다가 인조 13년경에 監市官만 파견하는 조건으로 재개되었으나 감시관과 호상 등에 대한 糧草제공문제 등으로 인하여 분규가 끊이지 않았다.

 공식개시가 잘 안되는 반면 변경의 潛商은 성행하였기 때문에 두 나라간에는 그에 대한 단속과 성행하는 연유를 둘러싸고 분규가 높아갔다.457) 金聲均, 위의 글, 30∼32쪽.

 개시에 만족하지 않은 후금은 약조를 어겨 양식을 강청하고 명을 정벌할 병선을 요구하는 등 압박을 더하였다. 鎭江城에 있던 후금군의 일부는 압록강을 건너 평양에 이르러 식량을 요구하며 郭山의 官庫를 뚫고 민가에도 침입하여 剽掠을 일삼는 등 破約행위가 그치지 않았다. 이러한 위약적인 행동과 위압적인 만행으로 조선 조야에서는 군사를 일으켜 후금을 공격함으로써 君臣의 대의를 분명히 하여야 한다는 斥和排金論者가 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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