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Ⅱ. 정묘·병자호란
  • 3. 병자호란
  • 2) 청의 침입과 조선의 대응

2) 청의 침입과 조선의 대응

 조선에 대하여 세폐의 증액과 군신관계의 수립을 강요하는 등 온갖 위협을 거듭하던 청 태종은 조선의 완강한 거절에 부딪치자 인조 14년(1636) 12월에 다시 조선침입을 위한 군사를 일으켰다. 청 태종은 침입에 앞서 鄭親王 濟爾哈朗을 심양에 남겨 군무를 총괄하도록 하고, 武英郡王 阿濟格을 牛莊에 주둔시켜 명군의 해로를 통한 조선의 지원을 차단케 하고, 貝勒 阿巴泰를 噶海城에 배치하여 변방민과 함께 명나라 전선을 지키게 하였다. 다음 청 태종은 청병 7만 8천 명, 漢兵 2만 명, 蒙古兵 3만 명으로 혼합 편성된 도합 12만 8천 명의 조선 원정군을 12월 1일까지 심양에 집결하게 하여 지휘부서와 침략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다음날 청 태종은 친히 禮親王 代善, 睿親王 多蘭袞, 豫親王 多鐸, 貝勒 岳託·豪格·杜度 등을 거느리고 원정의 길에 올랐다. 9일에 압록강을 건넌 예친왕 다탁은 선봉 馬夫太에 명하여 바로 서울로 진격케 하였다. 마부태는 의주부윤 林慶業이 白馬山城을 굳게 지키고 있음을 알고 이를 피하여 밤낮으로 급행한 끝에 심양을 떠난 지 10여 일만에 서울에 육박하게 되었다.

 조선에서는 12일에 의주부윤 임경업 狀啓로 청군의 침입소식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내용은 적이 “9일 압록강 건너편에 적병이 가득차더니 이날 저녁 에 길을 나눠서 강을 건너고는 속도를 갑절로 하여 급히 나간다”459) 李肯翊,≪燃藜室記述≫권 25, 仁祖朝故事本末 丙子虜亂丁丑南漢出城.는 것이었다. 다음 13일 都元帥 金自點의 馳啓로 청병이 安州에 이른 것을 알게 되고,460) 위와 같음. 이날 저물어서 김자점의 장계가 또 도착하여 적이 이미 평양에 이르렀다고 전하니 상하가 황망하여 몸둘 바를 모르고 우물쭈물하며 결단을 내리지 못했고 성안은 흉흉하여 성문 밖으로 나가는 자가 줄을 이었다. 다음 14일 開城留守의 치계로 청군이 개성을 통과하였음을 알게 되자, 귀양보낸 사람 등 모든 죄인을 용서하라고 명하고, 새로 임명한 수령들은 署經을 거치지 않고 바로 부임하도록 하였다. 또 급히 判尹 金慶徵을 都檢察使로 삼고, 副提學 李敏求를 副檢察使로 명하고 江華留守 張紳으로 舟師大將을 겸하게 하여 강화를 지키게 하였다. 또 原任大臣 尹昉과 金尙容을 시켜 廟社의 신주를 받들고, 세자빈 姜氏와 元孫, 鳳林·麟坪大君을 陪護하여 강화도로 난을 피하게 하였는데 老病宰臣 朴東善 등이 또한 먼저 갔다. 한편 상중에 있는 沈器遠을 起復하여 留都大將을 삼았으나 상중에서 나왔기 때문에 수하에 군사가 없었다.

 그날 밤 중 인조도 서울을 버리고 남대문을 나와 강화도로 향하려 하는데 捕卒들이 달려와 적이 延曙驛을 통과하였고, 胡將 馬夫太가 수백 기를 거느리고 이미 弘濟院에 도착하여 한 부대로서 陽川江을 차단하고 강화로 가는 길을 끊었다고 보고하였다. 왕이 다시 도성 안으로 들어와 남대문 문루에 앉으니 상하가 황황하고 도성 남녀들의 우는 소리가 길에 가득하였다. 이 때 왕이 일이 다급하게 되었으니 장차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니 모든 대신들이 황망하여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그 때 전 鐵山府使 池汝海가 體察府의 褊備로서 칼을 집고 앞에 나와 “적이 국경을 범한 지 사흘도 못되어 여기에 당도하였으므로 군사와 말이 피로하고 지쳤을 것이니 砲兵을 이끌고 沙峴에서 그 선봉을 무찌르면 반드시 감히 달려들지 못할 것이고 大駕는 강화도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5백 명의 정병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중신들이 적의 군사가 많고 적은 것을 알 수 없으니 5백 명으로 시험적인 공격을 할 수 없다고 반대하여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이 때 이조판서 최명길이 同知中樞府事 李景稷과 함께 弘濟院에 가서 적의 군사를 만나 술과 고기를 주어 위로하며 머물게 하고, 맹약을 어기고 군사를 발동한 이유를 힐문하며 짐짓 시간을 끌어 지체하도록 하였다. 해가 기울게 되니 인조는 세자와 백관을 이끌고 水口門으로 나와 밤이 늦어서 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 이에 앞서 都監將官 李興業이 馬隊 80여 기를 거느리고 적을 막도록 하였는데, 昌陵의 건너편에 이르러 모두 함몰되었다.

 영의정 金瑬와 李聖求 등은 남한산성이 지리적으로 불리함을 들어 새벽에 틈을 타서 적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강화도로 들어갈 것을 청했고, 李植은 인천으로 가서 바닷길로 강화도에 들어갈 것을 청하여 廟堂의 의논이 비밀히 결정되었던 까닭에, 다른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15일 새벽 왕이 성에서 나왔으나 눈 내린 뒤라 산 언덕에 얼음이 얼어서 왕이 탄 말이 미끄러졌다. 왕은 말에서 내려 보행하였는데, 여러 차례 넘어져서 몸이 성하지 못하여 다시 남한산성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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