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Ⅱ. 정묘·병자호란
  • 3. 병자호란
  • 4) 의병의 봉기
  • (1) 호남의병

(1) 호남의병

 병자호란 때도 여러 곳에서 의병이 봉기했다. 그런데 의병이 조직적으로 구성되기는 후방지역인 호남이었다. 청의 침입 소식이 전해지자 옥과현감 李興浡·대동찰방 李起浡·순창현감 崔薀·전翰林 梁曼容·전찰방 柳楫 등이 자진하여 의병 모집에 앞장섰다. 인조 14년(1636) 12월 19일 포위중인 남한산성에서 위급을 알리며 의병을 규합하고 군량과 무기를 수집하여 청의 침략군을 무찌르라는 교서가 전달되자 起兵의 움직임은 더욱 박차를 더하게 되었다.

 이흥발 등 위의 다섯 사람은 募義廳을 설치하고 그달 25일 도내에 격문을 보내어 각 고을에 募義都有司·有司를 나누어 배정하고 일제히 궐기하였다. 曹守誠·曹熀 등은 和順에서, 柳玶은 光州에서, 金璇·羅海鳳 등은 羅州에서 먼저 起義하여 모였으며, 그 밖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다음해 정월 20일 이들은 礪山에 모여 召募使의 책임을 띠고 공주에 있는 鄭弘溟을 대장으로 정하는 한편, 전라감사 이시방과도 합세할 것을 결의하였다. 정홍명은 당시 충청도 의병장으로 공주에서 각처로부터 모여든 의병들을 점검하여 전투에 임할 수 있는 사람만을 선발하였는 데 실적이 좋았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그가 의병장이 된 것은 관에 의한 것이어서 의병장으로서 소모사를 겸하였는지 아니면 의병장이 되었다가 소모사에 차정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호남의병의 구성은 정홍명을 대장으로 추대하기 전에 이미 갖추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도내 각 읍의 의병 소모의 책임자는 都有司였으며, 이것이 정해진 고을은 玉果·昌平·光州·南平·綾州·和順·同福·樂安·興陽·寶城·長興·海南·珍島·古阜·高敞·順天·靈光·茂長·興德·咸平 등으로 적게는 2, 3인에서 많게는 14인의 도유사가 있는 곳도 있었다.465) 각 고을 도유사의 성명은≪湖南丙子倡義錄≫권 1, 通文과 募義廳文狀에 명기되어 있다.

 의병 소모에 활약한 인사들 중에는 정묘호란 때 의병막부의 핵심 간부로 활약했던 인물이 많다 유즙·安邦俊·李敏求·申滭·柳玶·朴忠廉·具瑩·高傳敏·金海壽·金集·李德養·奇義獻·高傳立·朴琮·李鼎泰 등이 이러한 인물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병자 호남의병의 경우 정묘의병의 인사가 다수 참여하였으며, 이들에 의해서 의병활동이 주도되었던 것 같다.

 각 고을에는‘前銜 進士·忠義·校生·品官으로 싸움터에 임할 수 있는 젊은 사람이어야 하며, 특히 勇力이 절륜하고 計慮가 뛰어난 자를 초출하여 명단을 작성하여 일각을 지체치 말고 裝束을 갖추어 본청으로 보내야 하며, 나이 많은 사람들은 종군의 대가로 종을 대신 보내든가 아니면 군량·군기·전마를 모아서 보내되 각 고을의 도유사는 거두어들인 실적을 우선적으로 급히 보고해야 한다’는 내용의 통문이 하달되었다.466)≪湖南丙子倡義錄≫권 1, 通文.

 그후 소모사 정홍명은 號召使의 직함을 받고 이흥발·이기발·최온·양만 용·유즙 등 5인이 주축이 되어 여산에 모인 의병을 이끌고 포위된 남한산성을 향해 출정길에 올랐다. 그러나 청주에 이르렀을 때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청나라에 굴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진군을 포기하고 의병을 해산하여 각자 자기 고향으로 돌아감으로써 호남의병은 청군과 일전을 겨뤄보지도 못하고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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