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Ⅱ. 정묘·병자호란
  • 3. 병자호란
  • 6) 전후처리와 조·청관계
  • (3) 피로인 쇄환문제

(3) 피로인 쇄환문제

 청군은 이미 정묘호란 때 조선 西北邊界民을 被擄로 납치하여 끌고간 뒤 開市에서 贖價로 막대한 이득을 취하여 이들의 경제적 가치가 높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청군은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싸우면서도 포로 획득에 혈안이 되었다. 특히 청군이 장기간 주둔했던 남한산성 주변과 강화도, 그리고 인근 경기 지역에서는 도성에서 피란한 많은 사대부 집안의 부녀자들이 포로로 사로잡혔다. 청군이 일반 백성들보다 양반가의 사람들을 더 많이 취하려 한 것은 후일 거액의 속가를 얻기 위함에서였다.

 그러나 피로인의 대다수는 贖價를 지불할 능력이 없는 빈민들이었기 때문에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도 이들의 쇄환이 시급했다. 그리고 더 많은 피로인을 송환해 오기 위해서 刁蹬索高(속여서 터무니없이 값을 올리는 것)의 폐단을 없애 1인의 속가가 1백 냥이 넘지 못하게 하고 이를 어기는 願贖人은 무거운 죄로 다스리게끔 하였다. 그러나 1차 贖還 때는 청의 刁蹬索高로 빈손으로 돌아온 원속인이 많아서 결국 자제에 의한 속가의 定價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조선에서 2차로 쇄환사를 파견할 때 국서를 봉정하여 平價贖還을 정식으로 간청하였으나 청나라의 거절로 속가의 정가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그후 양반계층은 피로인 가족을 조속히 송환시키기 위해 거액의 속가를 마련하여 사신 왕래의 인편을 이용하는 비공식 행위를 하였다. 이 때문에 피로인의 속가는 날로 폭등하여 실제 거래액이 1인당 150냥에서 250냥이 보통이었으며, 신분이 높은 사람의 경우에는 수백 냥으로부터 천오백 냥에 달하기도 하였다. 이같은 고가의 속가를 마련하기 위해서 원속인들은 노비와 전택을 파는 일도 많았다. 이같이 가산을 탕진하고도 기회를 놓치는 사람들이 허다했다. 또한 公贖人과 半公半私贖人을 나라에서 管餉米나 호조 및 각사의 官費·瀋館所儲費 등으로 속환해 왔으나 瀋館을 통한 공속인의 경우는 대부분 청의 勒買에 의한 것으로, 청나라측에서는 피로인을 불시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는 가장 손쉬운 재원으로 삼았으며, 이로 인한 瀋館의 피해도 컸다.484) 朴容玉,<丙子亂被擄人贖還考>(≪史叢≫9, 1964), 92쪽.

 속가의 상승으로 빈궁한 백성들은 고국으로 돌아올 길이 막연하게 되자 피로인 가운데는 목숨을 내걸고 탈출하여 국경을 넘어 조선경내로 들어오는 자도 많았다. 조선의 입장으로는 이들 도망한 피로인들을 청국관헌에 체포되지 않도록 비호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청은 정상적인 절차를 밟아 속가를 지불하고, 송환된 피로인 이외에는 도망자를 모두 색출해서 다시 청으로 압송할 것을 요구하였고, 아울러 조선에 귀화한 한인과 만주인도 함께 송환할 것을 강요하였다. 조선피로인 逃還者·귀화만주인·귀화한인을 三色人이라 말하는데, 청의 성화같은 독촉에 못견디어 삼색인 송치를 결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각 도에 3색인의 刷送을 명하자 수령들은 책임을 면하려고 도망자의 진위를 가리지 않고 쇄송하여 민심이 흉흉해졌다. 더욱이 한발이 심하여 민심이 더욱 악화되자 인조는 8도에 敎諭를 내리고 刷送逃人의 가족에게 역을 덜어 주는 등 회유책을 썼다.

 청에 억류된 피로인들 중 여인의 경우는 시녀나 장수의 婢妾이 된 자가 있는가 하면, 정절을 잃고 비관 자살하는 자도 있었다. 男丁의 경우는 농민·군인·기술공 등에 종사하였으며, 청 황제의 사랑을 받아 관에 들어간 자도 있었다. 그러나 포로가 되었다가 송환된 부녀자 처리문제는 조선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즉 청군에게 끌려갔다가 정절을 잃고 귀향한 양반가문의 부녀자, 즉 還鄕女에 대한 처리문제가 그것이다. 정절을 잃은 부녀자들이 송환되어 오자 국왕에게 실절한 아내와의 離異(이혼)를 청원하는 사대부의 상소가 그치지 않고 올라왔다. 그런데 다음의 기록에서

임진왜란 때 사대부의 부녀들이 적진에 잡혀갔다가 살아서 돌아온 자를 시집에서 이혼하고 改娶할 것을 청하여 조정에서는 의논이 많았다. 선조가 이르기를‘이것은 음탕한 행동으로 절개를 잃은 것에 견줄 것이 아니니 버릴 수 없다’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청나라로부터 속환된 자에 대하여 조정에서 다시 장가드는 것은 허락하고, 인연을 끊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옳다는 의논이 있었으니 임금이 傳敎하기를‘先朝의 정한 예에 따라 시행하라’고 하였다(李肯翊,≪燃黎室記述≫권 26, 仁祖朝故事本末 江都敗沒 殉節婦人).

라 하고 있듯이 인조도 선조의 전례대로 失節이 불가피했음을 들어 인도적 차원에서 버리지 말 것을 지시하였다. 최명길도 인도적인 견지에서 버리지 말 것을 주장했지만 유교적 절의와 명분의 고수를 주장하는 거센 여론에 밀려서 실현을 보지 못하고 수많은 환향녀들이 그 가문으로부터 축출당하였다.

 그런데 청이 入關한 후에 귀화한 한인과 여진인의 쇄송을 면해주고, 세폐의 양을 감해주고, 조선의 인질을 모두 돌려보낸 것을 보면 속가의 索高·도망자 쇄송의 엄한 힐책 등은 경제적인 의미 뿐이 아니고 조선을 견제하려는데서 취한 조치였다고 볼 수 있다.

<李章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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