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개요

 조선왕조 500년간에 대해 지금까지 학계는 일반적으로 임진왜란을 기준으로 전기와 후기로 구분해왔다. 그러나 이번 新編≪한국사≫에서는 초기·중기·후기로 나누는 새로운 시기 구분을 도입했다. 중기 설정이 새로운 점이다. 이 구분에서 중기는 대체로 15세기 말엽에서 17세기 말엽까지 곧 성종 후반에서 숙종 전반기에 이르는 약 2세기의 기간이 이에 해당한다.

 종래의 전기·후기의 양분법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었다. 첫째, 임진왜란이란 外侵을 구분점으로 삼는 것은 역사를 내재적으로보다는 타율적으로 인식하게 할 위험성이 높으며, 둘째로 그간의 여러 部面의 연구들은 임진왜란 직전과 직후 사이에는 단절보다는 연속성이 더 많다는 점을 밝혔다. 이런 문제점은 양분법을 더 이상 취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조선시대사 인식에서 임진왜란을 중요시하는 사고는 아마도 일제 식민주의사관의 창출 과정에서 조장된 것이리라고 짐작되지만, 돌이켜 보면 이에 대한 충분한 증거나 뒷받침의 노력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도 오랫동안 이를 답습하기만 해온 점도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적으로 16∼17세기는 사림세력의 성장과 그들에 의한 붕당정치(또는 사림정치)가 펼쳐진 시대이다. 15세기의 정치가 양반관료제로 출발했다면, 16∼17세기의 붕당정치는 양반관료제 위에 정파정치로서 붕당정치를 실현시킨 것으로 전자와 명확히 구분된다. 그리고 그것은 18세기의 탕평정치, 19세기의 세도정치 등과도 명확히 구분된다는 점에서 한 시대의 정치형태로 규정해도 좋다. 경제적으로도 이 시기에는 15세기에 확립된 수취제도와 부역제도가 질적 변화를 일으키고, 농업 발달을 토대로 상업·수공업이 발달하는 변화가 일어났다. 사상적으로는, 성리학과 예학이 크게 발달하는 시대적 특징을 보였다. 임진왜란이 이런 시대적 흐름을 중절시키지 않았다는 것이 그간의 연구들의 한결같은 보고이다. 그간의 학계의 연구성과에 의하면, 16∼17세기의 역사상은 18세기에 군주들이 사림의 붕당정치의 폐단을 해소하기 위해 탕평정책을 취하여 스스로 정국을 주도하는 체제를 만들면서 비로소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15세기 말엽 이후 사림세력의 형성과 득세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주지하듯이 사림은 기성 훈구세력과 연산군으로부터 네댓 차례의 사화의 탄압을 받았다. 사화의 빈발은 파쟁성의 발로가 아니라 체제 변동을 지향한 것에 대해 치른 대가였다. 재야 유생들이 주축이 된 사림세력은 훈구대신들을 중심으로 한 기성의 중앙관료들이 사회적·경제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관권을 남용하는 현상이 곧 국기를 흔드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으로 판단하여 이에 대한 치열한 비판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사화는 곧 이에 대한 훈구세력의 보복행위로 일어났던 것이다. 한두 차례의 탄압으로 비판과 저항이 꺾이지 않은 것은 지방사회에서 정치적·사회적 비중을 높여간 중소지주층의 공통된 여망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의 중소지주층은 수적 확대뿐만 아니라 성리학을 통한 지식인화의 과정을 거침으로써 정치적·사회적 입지를 더 확고하게 다져갔다. 성종대의 유향소 복립운동, 중종대의 향약보급운동, 그 이후의 서원건립운동 등 일련의 사회질서 재편운동이 한결같이 학문적 근거를 지향한 것은 지식인 집단으로서의 사림세력의 새로운 특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사림세력은 정치의 현장에서 붕당을 인정하는 새로운 정치적 특성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전까지는 漢唐 유학의 영향 아래 신하들 사이의 붕당이 인정되지 않았다. 이에 반해, 16세기에 사림세력이 형성되면서 그들은 붕당의 존재를 인정하는 宋代의 歐陽修와 朱熹의 붕당론에 큰 관심을 보이고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스스로 정치세력을 인정해야 할 필요성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정치에서 붕당은 부정될 것이 아니라, 공도의 실현을 추구하는 붕당은 오히려 推獎되어야 삼대의 이상정치가 실현될 수 있다는 주장이 정론으로 자리 잡아갔다.

 사림세력의 새로운 붕당관은 반대세력으로부터 심한 반발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사림세력이 정치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점진적으로 정치체제에 이를 구현시켜 갔다. 신진기예의 사림들이 중앙 주요관서의 낭관직에서 자천제의 실현을 통해 대신세력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면서 상호 결속을 강화해 대신 중심의 일방적 정사처리에 제동을 걸거나, 언관직에서 合啓의 집단적 활동을 통해 왕을 간쟁하고 훈척세력의 비리를 비판 또는 탄핵하는 것이 제도로 정착되었다. 언관들은 낭관들이 각 부서에서 당상관과 대립할 때 그들을 지원하여 주었고, 전조낭관이 삼사 관원의 인사를 주도하는 관계를 유지하면서 더욱 밀접한 관계를 이루었다.

 사림세력은 명종대까지는 척신세력과의 투쟁을 계속하다가 선조대에 비로소 정국을 주도하는 위치에 설 수 있었다. 선조 정국에서도 아직 척신정치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었으나 사림계의 진출이 이전에 비해 현저하게 이루어졌다. 이 전환적 상황에서 사림의 붕당관에도 혼선이 야기되었다. 즉 지금까지의 훈척세력과의 투쟁에서는 상대를 소인의 무리(僞朋)로, 스스로를 군자의 당(眞朋)으로 규정하였지만, 같은 사림계가 거의 주도권을 쥔 정국을 어떻게 인식해야 할 것인지가 새로운 문제로 제기되었다. 한쪽에서는 그것을 一朋의 상태로 규정하여 단합을 촉구하였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척신정치의 잔재를 철저히 청산하는 것만이 앞날이 보장될 수 있다는 내부 비판론을 제기했다. 집권세력이 된 사림계는 이 쟁론 끝에 동인·서인으로 분당하는 사태를 맞았다. 이 자체 분열현상은 선조 일대에 학연을 중심으로 격렬하게 전개되어 남인·서인·대북·소북 등 많은 붕당의 출현을 가져왔다. 조선왕조 500년간에 최대의 외침인 임진왜란도 사림세력의 이러한 분열 속에서 맞았다. 붕당 분열로 인한 정국의 혼미는 인조반정(1623)으로 서인과 남인 양대 붕당이 공존하는 체제가 확립되면서 비로소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인조대 이후의 붕당정치는 상대세력과의 공존을 토대로 한 공론정치의 실현을 중요한 명분으로 삼았다. 이 시기의 정국에는 반정공신을 비롯한 비붕당적 요소도 큰 비중을 차지했으며, 무엇보다도 인조를 비롯한 국왕들은 붕당에 대해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사림의 붕당정치 지향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서인계가 집권세력으로 朱子 붕당론의 입장을 고수하였고, 남인과 일반관료들도 대체로 붕당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폐단 시정에 관심을 표했기 때문에 정국은 원칙적으로 붕당정치의 형태로 이끌어졌다.

 17세기 붕당정치는 비변사 중심의 공존체제와 삼사언론의 활성화, 천거제의 시행 등으로 이루어졌다. 붕당정치기의 정사는 비변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인조∼현종 연간에 비변사의 당상 이상의 관직은 서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남인이 소수로 참여하는 형태로 이끌어지다가 숙종 즉위초에 남인이 대거 진출하여 반수를 차지하는 변화를 일으켰다. 비변사의 公事는 대개 유사당상 이상의 합의를 거쳐 왕에게「備邊司啓」로 입계되었다. 이 과정에서 주요 관직에 대한 擬薦權, 붕당간의 이해조정 등이 이루어졌다. 중요 관직에 대한 비변사의 擬望은 왕에게 75% 정도 받아들여진 것으로 확인된다. 17세기에 대신의 국정 주도가 두드러지지만, 그 권력의 기초는 어디까지나 비변사에 있었고 비변사의 집단적 힘을 통해 권력의 정당성이 확보되었던 것이다.

 삼사의 언론은 대간 개인보다는 부서별, 또는 合啓의 형태로 입계되는 것이 관례화 되었다. 언론이 힘을 얻기 위해서는 공론의 표방과 전체 구성원들의 의견 통일이 필요하였으며, 대간이 합계하면, 홍문관도「常規의 道」로 이에 동조하는 것이 관례였다. 붕당정치기에 삼사는 공론정치를 표방하고 상호 비판과 견제를 통해 권력이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의해 집중적으로 행사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숙종대 환국시대에 접어들면 집단간의 정치적 대립이 격화되면서 삼사는 그 선봉에 서서 대립을 더욱 조장하기도 했으며,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경향도 나타났다.

 각지에 산재한 서원은 붕당정치의 중요한 기반이었다. 붕당이 학파적 성격을 강하게 띠는 한, 서원이 각 정파의 公論 생산지가 되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사림의 공론을 존중하는 붕당정치는 서원에 남아있는 명망있는 선비들을 중앙정계에 불러들이는 천거제를 발달시키기도 하였다. 중종대의 遺逸천거, 學生천거, 賢良科 등을 잇는 제도로서 선조때 6품직에 천거제가 활발하게 시행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명망있는 산림에게 대간직을 주기도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인조대에 고정적인 산림직으로 성균관 司業(종4품)·祭酒(정3품 당상관), 世子侍講院 贊善(정3품 당상관)·翊善(종5품)·諮議(종7품) 등을 설치하였다. 공론정치의 활성화란 측면에서 이 시대에 朝報가 발달한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조보는 언론기관이 활성화된 성종대부터 발행된 것으로 보이며, 중종대에는 조정에서 결정된 일을 승정원에서 주관하여 의정부나 대간 등 정부기관에 알리는 공식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선조대에는 지방거주 사림도 조보를 구해 볼 정도가 되고, 선조 12년(1579)에는 조보를 활자로 인쇄한 사실도 확인이 된다. 재야사림들의 지방의 공론을 수렴하는 형식으로 通文도 발달하였다.

 사림의 붕당정치는 17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주도 붕당의 교체현상으로 換局이 빈발하는 새로운 양상을 보였다. 숙종 즉위년(1674)에서 영조 4년(1728)사이 50년간 아홉 차례의 환국(갑인환국·경신환국·기사환국·갑술환국·경인환국·병신환국·신임환국·을사환국·정미환국)이 거듭한 것은 다른 시기의 정치집단의 교체에 비해 짧은 시기에 집중적으로 발생했다는 점 하나로서도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이후로는 국왕의 탕평책 추구로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시대성이 더욱 부각된다. 환국은 복수의 붕당이 대립하며 공존하는 붕당정치적 상황에서 국왕이 붕당 사이의 균형을 깨고 주도 붕당과 견제 붕당을 바꾸는 형태로 발생하였다. 환국의 핵심은 붕당전체의 교체라기보다 붕당 내부에서 실질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소수 권력집단의 교체이기는 했지만, 국왕의 의지가 그 변동의 핵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이전에 보지 못하던 새로운 현상이었다. 숙종대는 실제로 국왕이 붕당정치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국왕이 명실상부하게 주도하는 ‘탕평’의 정국을 지향하였다. 그러나 오랜 기간의 붕당정치 속에서 국왕은 독자적인 권력행사의 기반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주도 붕당이나 권력집단의 교체를 통해 왕권의 입지를 넓혀가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환국은 단순히 붕당정치의 말폐라기보다는 18세기 탕평정치기에 발현된 여러 변화의 시발로 보아야한다는 견해는 설득력이 있다.

 조선 중기는 자연환경 조건이 대단히 나쁜 시기였다.≪조선왕조실록≫의 천문 이상현상 및 자연재해에 관한 기록들을 분석한 최근의 연구성과가 보고하고 있는 점이다. 서구학계는 17세기에 전지구적으로 기온이 강하한 사실-소빙기(little ice age) 현상-이 있었다는 보고를 여러 방면으로부터 받았다. 서구 역사학계는 1970년대 후반부터 이를 수용하여 이른바 17세기 위기론을 제시했다. 장기적인 기온강하로 농산물이 감소하여 기근과 전염병을 유발한 것이 전쟁·폭동·혁명 등의 동요의 원인이 되었다는 학설이다.≪조선왕조실록≫의 자료를 분석한 연구는 장기적인 대자연재난의 원인과 규모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즉 1480년대에서 1760년대까지 운석형 유성이 지속적으로 지구에 낙하한 것이 기온강하를 가져오고 이로 인한 기상학적 이변으로 한발과 홍수가 교차하여 빈발하는 대재해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특히 1550년대에서 1670년대까지의 기간이 그 중심부를 이루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운석형 유성들이 대기권에 돌입하면서 일으키는 물리적 현상은 가공스런 것이었다. 먼저 유성 폭발 때 발생하는 굉음, 빛, 분쇄된 물질이 하늘에 퍼지면서 발생한 여러 형태의 雲氣(赤氣·黑氣·白氣·火氣)현상 등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공포심을 떨칠 수 없게 했다. 그리고 유성 폭발시 발생한 잔해의 먼지(cosmic debris)는 장기적으로 대기권에 쌓임으로써 태양의 빛과 열을 차단하는 결과를 가져와 기온강하의 근본원인이 되었다. 폭발시에 발생한 대풍과 우박 등도 기온강하의 한 부분을 차지했다.

 종래 16세기의 사회경제는 15세기의 농업경제 발달을 배경으로 상업이 발달하고 부역제도에도 변동을 가져온 것으로 보는, 발전론적인 해석이 강하였다. 16세기 전반기까지는 이러한 관점의 해석이 타당하다. 그러나 16세기 중반 이후 갈수록 심해지는 자연재해가 사회경제적 기반을 크게 침식하기 시작하였으므로 이를 일방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다. 생산력과 인구의 측면에서 큰 손상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소빙기현상은 전 지구적인 것이었다. 한반도에서 겪는 타격과 피해는 동아시아 권역의 중국, 일본도 예외가 아니었다. 16세기 후반 동아시아 국제교역도 물자(상품) 고갈의 상태에 점차 돌입하는 양상을 보여 농산물을 포함한 물자 쟁탈전이 국지적으로 발생하던 끝에 임진왜란의 대전란이 발생하는 순서를 밟았다. 여진족의 남하에 따른 중국과 한반도에서의 대전란도 그 연속적 현상이라 보아 큰 잘못이 없다. 요컨대 왜란·호란 등은 16-17세기 소빙기 대재난의 한 중간 결과로서 발생한 것으로, 전란이 준 피해로서만 이 시대의 사회적 동요를 설명하던 종래의 설명 방식은 재고될 필요가 있다.

 16세기 이래의 소빙기 대자연재해는 중종 6년(1511)에 설치된 진휼청이 장기적으로 존속한 사실이 대변해준다. 진휼청은 중앙과 지방의 관사들이 보유하고 있는 관곡을 구휼곡으로 어떻게 활용하는가를 주로 담당하였다. 그리고 기민이 많이 발생했을 때는 죽 끓여 먹이는 일도 담당하였다. 그치지 않는 재해는 명종대에 들어와 관곡이 이미 바닥이 나는 상황을 가져왔다. 그리하여 ‘勸分’의 형식으로 私穀을 동원하는 방식도 비중을 높여갔다. 사곡 제공의 대가로 고안된 납속공명첩의 발행은 소빙기현상의 종식 때까지 계속되었다. 17세기에 접어들면서 비변사하에 설치된 진휼청은 호조, 선혜청, 상평청 등과 긴밀한 협조 아래 조금이라도 흉년을 면한 지역의 곡식을 기근 발생지역에로 이동시키고 이를 상환하는 방법을 조정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모든 관곡은 비상시의 임대곡으로서 환곡으로 활용하는 것이 관례화되었다.

 공납제도에서의 대동법의 발상은 방납의 폐단을 저지하기 위한 데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17세기의 시행과정에서 그 필요성은 安民益國의 차원에서 강조되었다. 즉 모든 농민들이 장기적인 자연재해에 시달리고 있는 형편에서 그들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부역제도의 개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차원에서 제도적 시행이 강조되었다. 나라의 부강은 그 다음에 기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대동법의 성립은 요역의 물납세화, 전결세화 과정을 전국적 차원에서 추인하고 법제화하는 것이었다. 모든 공물의 전세화는 중간 작폐로서 방납의 폐단을 막아주는 것만으로도 백성들에게는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나아가 각종 요역의 부담도 이에 포함시킨 것은 새로운 차원의 기민 구제의 수단을 내장하는 것이었다. 직접적인 노동력 제공을 요하는 각종 요역을 雇立制로 전환할 수 있는 기반이 이에서 확보되었던 것이다.

 대동법의 시행이 논의되고 시험되던 단계에서도 중앙정부는 가능한 한 궁궐 공사, 축성 공사 등의 각종 토목공사를 일으켜 기민들이 먹을 것을 얻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과거 직접 노동으로 요구되던 각종 부역도 대가를 치루어 주는 형태로 전환시켰다. 이런 추세 아래 재상, 왕자, 공주 등의 분묘 조성을 위한 禮葬造墓軍의 役도 대동법 실시로 給價募立의 모립제로 바뀌었다. 국왕의 능을 조성하기 위해 8∼9천 명 정도를 동원하는 산릉역은 직접 노동력을 요구하는 요역의 대표적인 예로서, 17세기 중엽에 이것까지 모립제로 바뀌는 것으로 요역 노동 징발은 거의 사라졌다. 장기 재해로 16세기 후반부터 둔화된 인구성장은 전란까지 겹쳐 17세기 초엽 이후로는 급격히 감소하는 추세를 보여 농업생산에서부터 노동력 절약의 문제가 대두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부역노동에서도 노동력 절약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도 물납세 전환의 한 계기가 되었다. 단기간의 요역 징발도 糧料를 施賞하는 명목을 빌렸다. 17세기에 전란이 끝난 뒤, 서울에는 각지 농촌에서 유리된 기민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에 고립제의 정착은 불가피 한 것이었다.

 장기적인 자연재해와 그 속에서 일어난 여러 차례의 전란(왜란·호란)은 농경지의 대규모적인 황폐화를 가져왔다. 16세기에 양안이나 호적의 작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지배층의 부패에도 중요한 이유가 있지만, 계속되는 재해가 이를 시행할 기회를 주지 않은 점도 없지 않았다. 임진왜란 후의 농경지의 황폐는 극심하여 광해군 3년(1611)의 경지 조사결과는 54만 2천여 결로 이전의 170만 8천여 결에 비하면 극감한 상태였다. 인조대의 양전에서도 총 농지는 985,002결로 늘었으나, 진전이 443,139결(45%)에 달하는 실정이었다. 거듭하는 자연재해가 복구를 쉽게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농경지는 숙종 46년(1720)의 경자양전에서 비로소 139만 5,333결로 정상적인 궤도에 올랐다.

 이 시기 각급 관장들은 진전의 개간을 권장하는 것을 중요한 임무로 삼아야 했다. 종자·농기구·농우를 제공하여 개간지의 실적을 올리는 것은 곧 지방관의 중요 임무였으며, 개간을 권장하기 위해서는 3년 면세의 조건이 주어지기도 하였다. 진전 개간은 권세가와 지방 토호들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일반농민들의 참여도 적지 않았다. 궁방과 권세가는 절수·입안제도의 혜택을 누렸다. 개간을 희망하는 사람이 스스로 조사하여 이를 관에 신고하면, 관에서는 이 토지를 떼어 주어 그 소유로 하고(折受) 이를 법적으로 보장하는 입안도 작성해 주었다. 이런 좋은 조건이 주어진 것은 개간 자체가 그리 쉽지 않은 환경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양전사업은 대동법 시행의 기초로서 시급했지만, 진전개간의 실적도 쉽게 상승하지 않고 양전사업 그 자체도 격심한 자연재해로 뒤로 밀리기 일쑤였던 것이다.

 그러나 농업경제에서도 새로운 요소들이 자라고 있었다. 격심한 자연재해를 극복하기 위해 농업기술상의 여러 대책이 강구되었다. 소빙기 기후조건으로 기온이 전반적으로 강하된 상태에서 옷감으로 목면의 수요가 높아진 데 따라 목화재배와 목면생산의 비중이 높아졌다. 그리고 인구감소로 노동력이 부족한 가운데 농사에서도 노동력 절감형이 선호된 가운데 이앙법이 널리 보급되어 간 것도 큰 변화였다. 자연조건이 어려운 가운데서 이렇게 이루어진 극복의 성과는 자연재해의 빈도가 낮아지는 틈에는 소폭의 활력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자유로운 진전의 개간은 서민지주의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토지는 자유매매가 허용되어 토지의 상품화가 활발하게 진행된 것도 새로운 시대를 여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빈농들은 토지 상품화의 피해자로 남았지만, 관료지주가 줄어들고 서민지주가 성장하면서 개간이 더 늘어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병작제가 확산된 가운데 새로운 농업경영형태로 도지제가 등장하여 토지를 둘러싼 경제외적 강제도 크게 해체시켰다.

 金堉을 비롯한 대동법 시행론자들은 백성의 부담을 던다는 安民論의 목적 외에 상공업 장려를 통한 생업의 창출 효과란 목적도 기하고 있었다. 이것은 실제로 貢人 및 공인자본을 낳고, 상업의 활성화와 수공업의 발전을 가져왔다. 대동법 시행론자들은 부수 효과로서 상업·수공업의 발전을 기대하면서, 이를 촉진하는 방도로 금속화폐제도의 시행을 동시에 주장하였다. 이런 주장이 반대론에 밀려 시행시기가 늦추어지기는 했지만, 대동법 시행의 효과가 발휘되면서 동전의 주조도 저절로 후속되었다. 전란이 계속되는 상황은 군수산업을 게을리 할 수 없게 했다. 국초 이래의 병농일치제는 임진왜란 전후 무렵 이미 병농분리제로 대치되었다. 때늦은 방향 전환이지만 이로써 훈련도감의 전업적 군사 양성이 가능해 졌고, 인조반정 이후의 중앙 군영 설립도 이 논거 위에 이루어졌다. 붕당세력의 입지와도 깊은 관련을 가진 중앙 군영들은 각자의 군비확충을 위해 총기·탄약의 확보가 과제였으며, 이는 군수산업의 중요한 명맥선이 되었다. 군수산업은 군영제도의 발달과 궤를 같이 하고 필요한 병기류의 조달은 대동법하의 貢契를 통해 이루어졌다.

 16세기 중반 이후 심각한 상태에 빠져든 사회경제는 17세기 말엽, 18세기 초엽에 이르러 회복의 활력을 되찾기 시작했다. 비상대책으로 시행된 대동법·고립제·환곡운용·화폐제도 도입 등이 새로운 경제의 틀을 구성하여 자연재해의 빈도가 점차 감소하는 가운데 그 효력을 제대로 발휘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자연재해의 발생 간격이 넓어지면서 농업경제의 회복력도 높아져 18세기에 들어와서는 빠른 변화를 보였던 것이다. 그간 명·청 교체의 국제질서의 대변동 가운데서 외교적으로 많은 수난과 어려움을 겪으면서 비단과 그 原絲 등의 중국상품을 일본에 중개하는 국제교역상의 이점도 이 시기의 상공업 발달에 한 몫을 하였다.

 소빙기 자연재해는 조선 중기 역사발전에 부정적으로만 작용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 대재난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새로운 체제의 기틀을 만들었던 것이다. 사회경제적으로 새로운 요소가 효력을 발휘한 것은 대체로 18세기 초엽부터였지만, 새로운 틀 위에 새로운 운영론이 제기된 것은 소빙기현상이 종식하는 시기인 18세기 중엽 이후였다.

<李泰鎭>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