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2. 붕당의 출현
  • 1) 선조초의 정계구성과 구체제의 청산

1) 선조초의 정계구성과 구체제의 청산

 흔히 선조의 즉위로 사림이 집권했다고 말해지지만, 사림으로 통칭되는 선조초의 집권세력 내부에는 애초부터 벼슬한 시기에 따른 권신체제와의 관련문제나 학문적 성향의 차이로 인해 정치적 입장과 노선을 달리하는 여러 부류가 있었다. 그것은 크게 보아 중종 연간에 등과하여 이후 계속 벼슬하여 선조초의 시점에서는 고위직을 차지했으나 이미 구세대가 되어버린 부류와, 명종 이후 정계로 진출하였기에 앞의 부류에 비해 상대적으로 신진이라 할 세력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전자를 대표하는 인물로는 李浚慶·洪暹·權轍·金鎧·洪曇·李鐸 등이 손꼽힌다.0034)이들의 구체적인 면모는 다음과 같으며 선조초에 대부분 舊臣系 官僚로 구분된다.

이 름 生卒年度 문과급제연도 선조초의 관직
李浚慶
洪 暹
權 轍
李 蓂
閔 箕
金 鎧
元 混
宋 純
朴忠元
李 鐸
鄭大年
洪 曇
鄭惟吉
鄭宗榮
宋麒壽
朴永俊
1499∼1572
1504∼1585
1503∼1578
1496∼1572
1504∼1568
1504∼1569
1505∼1588
1493∼1582
1507∼1581
1509∼1576
1507∼1578
1509∼1576
1515∼1588
1513∼1589
1507∼1581
1510∼ ?
1531
1531
1534
1528
1539
1540
1525
1519
1531
1535
1532
1539
1538
1543
1534
1540
영 의 정
좌 찬 성
우 의 정
좌 의 정
이조참판
형조판서
병조판서
한성좌윤
예조판서
대 사 헌
병조참판
호조판서
지중추부사
형조참판
공조판서
이조판서

이들은 왕실과의 연결이 없고, 또 권신에 밀착하지도 않았다는 면에서 권신이나 그 추종세력과 일단 구별된다. 뿐만 아니라 비록 일부이기는 해도 金安國·宋麟壽 등 士林系 學統線上에 있는 인물의 문인도 있고,0035)金安國 門人으로서 鄭順朋·李樑을 탄핵했던 閔箕와, 宋麟壽 門人이며 尹元衡을 비판한 鄭宗榮을 예로 들 수 있다. 또 이준경에서 보듯이 권신체제하에서 지조를 굽히지 않고 사류를 옹호함으로써 사림의 신망을 받는 경우도 있어, 넓은 의미로 본다면 그들도 사림에 포함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렇지만 그들은 의리보다는 名利를 좇아 浮沈取容했다는 후대의 비난이 말하듯이, 권신체제를 묵인하면서 그 속에서 벼슬해왔고 그래서 선조초에는 대부분 당상관으로서 주요관직의 우두머리와 대신직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들은 정계의 지각변동을 가져올 권신체제의 청산 문제에 한두 명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선조초의 집권세력 안에서 因循姑息的이라고 비판받던 舊臣의 존재는 바로 이들을 가리킨다.

 한편 후자는 명종 이후에 과거에 급제해 벼슬한 후진적 존재였다. 이들 중에는 徐敬德·李滉·曺植 등 당대 성리학의 종장들과 일정한 학문적 관계를 맺고 있는 인물들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구신들과는 달리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상당하였고 따라서 이에 토대한 사림정치의 구현을 열망하였다. 바로 이런 면에서 그들은 조광조이래 사림의 정통적 계승자로 자처했으며, 뒤에 보듯이 선조초 이후 권신체제의 청산과 혁신정치의 실행을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권신세력에 비해 흔히 신진사류로 불리던 이들 내에도 출신시기에 따라 두 갈래 계통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명종 전반기에 벼슬길에 나왔으나 권신체제를 비판해 쫓겨났다가 후반기에 다시 기용된 朴淳·許瞱·奇大升·金繼輝0036)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이 있다(신진사류 중 선배).

이 름 生卒年度 문과급제연도 선조초의 관직
朴 淳
李後白
許 瞱
金繼輝
奇大升
李陽元
具鳳齡
尹斗壽
尹根壽
具思孟
吳 健
沈義謙
1523∼1589
1520∼1578
1517∼1580
1526∼1582
1527∼1572
1526∼1592
1526∼1586
1533∼1601
1537∼1616
1531∼1604
1521∼1574
1535∼1587
1553
1555
1546
1549
1558
1555
1556
1558
1558
1558
1558
1561
대 사 헌
병조참의
승  지
대 사 간
전  한
도 승 지
이조좌랑
우 승 지
집  의
이조정랑
정  언
승  지

와 같은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복직된 후 주로 언관직에 있으면서 명종비 沈氏의 아우이던 沈義謙과 연결되어 명종 말년의 李樑·尹元衡 등 권신의 축출에 앞장섰다. 그래서 선조초에는 대개 堂上官의 관직을 가지고 신진사류를 영도하는 위치에 서 있었다.

 다른 하나는 명종 후반기에 등과하여 선조초에 막 郎僚職에 진출하였던 李珥·鄭澈·李山海·柳成龍0037)이들의 구체적인 면모는 다음과 같다(신진사류 중 후배).

이 름 生卒年度 문과급제연도 선조초의 관직
李 珥
鄭 澈
金孝元
金宇顒
李山海
柳成龍
李海壽
洪聖民
鄭惟一
權德輿
金命元
1536∼1584
1536∼1593
1532∼1590
1540∼1603
1538∼1609
1542∼1607
1536∼1598
1536∼1594
1533∼1576
1518∼1591
1534∼1602
1564
1561
1565
1567
1561
1566
1563
1564
1558
1562
1561
이조좌랑
부 교 리
병조좌랑
正  字
이조정랑
수  찬
부 수 찬
수  찬
이조정랑
사  간
부 수 찬

등 당시로서는 가장 신진기예한 관료들이었다. 그들은 권신이 제거된 이후 벼슬길에 나와서 권신체제와는 일단 무관하였기에 그것의 청산에 누구보다도 적극적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조광조를 앞세우며 이황·조식 등을 정신적 지주로 받들고 朱子성리학에 대한 탐구와 현실에서의 실천적 적용으로서 사림정치의 구현을 신념으로 표방함으로써 사류의 본령에 충실하였다. 따라서 선조초의 시점에서 구체제의 청산과 혁신정치의 실현을 열망한 신진사류란 바로 이들을 지칭한 것이었다. 그런데 선조초에는 위의 舊臣과 新進사류 이외에 乙巳復官人이라 할 수 있는 존재가 있었다. 명종초의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20여 년의 귀양살이 끝에 정계로 복귀한 白仁傑·盧守愼·柳希春0038)을사복관인의 면모는 다음과 같다.
이 름 生卒年度 문과급제연도 선조초의 관직
白仁傑
盧守愼
柳希春
金鸞祥
閔起文
李元祿
1497∼1579
1515∼1590
1513∼1577
1507∼1570
1511∼1574
1514∼1574
1537
1543
1538
1537
1539
1541
대 사 간
부 제 학
응  교
직 제 학
典  翰
判  校

등이 그들이다. 사화로 직접 피해를 입은 당사자였다는 면에서 그들은 사류로서의 지위를 보장받았고, 조정 상하의 두터운 신임을 얻을 수 있어서 복관되자마자 不次擢用의 특전으로 당상관에 올랐다. 그러나 그 숫자가 얼마되지 않는 데다가 개인적 성향의 차이 등으로 인하여 정치적 결속력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의 독자적 영향력은 거의 없다시피 하였다.

 이상과 같이 선조초의 집권세력 내부에는 정치적 입장과 노선을 달리하는 여러 갈래의 정치세력이 존재하였다. 그리고 舊臣系가 대체로 대신급과 6조의 장·차관직을 차지하고, 신진사류와 을사복관인이 兩司와 홍문관에 다수 포진했던 이 시기의 관직참여 분포상으로 볼 때 구신계는 정국운영권을, 그리고 신진사류들은 언론권을 장악함으로써≪擇里志≫에서 사림정치구조의 기본형태라고 한, 大官과 小官이 서로 維持하고 上職과 下職이 서로 견제한다는 형국을 취하고 있었다.

 선조 즉위 직후 그들 사이에는 권신계의 잔존세력을 일소할 때까지 별다른 이견이 드러나지 않았다. 즉 이량·윤원형이 축출된 이후 명종비의 작은 할아버지이며 좌의정을 역임하고 물러나 藥房提調로 있던 沈通源이 권신계의 잔존세력을 규합하면서, 귀양가서 있던 이량·尹百源 등의 복귀를 획책하고, 명종의 후계자 선정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려 함으로써 당시의 집권세력에 큰 위협이 되고 있었는데, 이들은 서로 힘을 합쳐 명종의 발인도 하기 전인 선조 즉위년(1567) 9월에 심통원을 위시한 沈銓·鄭鑦·鄭惕·李元祐·金明胤·尹仁恕·李洪胤 등 권신의 子姪輩들을 탄핵, 정계에서 완전히 추방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앞선 시기의 사화에서 피해를 입었던 인물에 대한 伸寃도 함께 추진하였다. 여기서 조광조·權橃·李彦迪에게 議政의 벼슬이 추증되고 위에서 말한 백인걸·노수신 등의 복관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國喪의 절차가 마무리되어 정치적 과도기가 끝나고 새 임금인 선조에 의한 정치가 본격화하여 국정운영의 방향과 방법을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지면서, 그 동안 잠재되어 있던 여러 정치세력사이의 상이한 정치적 입장과 노선이 표면화되기 시작한다. 특히 이 때는 조광조 이래의 사림세력에 의해 추구되었던 이른바 사림정치가 다시 표방되는 추세에 있었고, 그것의 특징중의 하나가 중요한 정치사안에 관해서는 三司를 중심으로 집권세력 대다수가 참여한 공공연한 토론과 공개적인 검증과정을 거쳐 결론을 도출하는 公論정치에 있었으므로,0039)김 돈,≪16세기 전반 정치권력의 변동과 유생층의 공론형성≫(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3). 논란과 토론의 열기가 그만큼 높았을 것이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각 정치세력의 성향이 보다 분명해지며, 예컨대 그 출신으로 보아서는 구신계라고 할 李鐸이 신진사류의 옹호자로 나서는 데서 보듯이, 정치세력 상호간의 異見者들의 이탈과 취합에 따른 재편성이 수반되면서 후일의 東人·西人 朋黨 성립의 배경이 조성되는 것이다.

 선조초에 조신간에 논란을 일으키고 신·구세력의 존재와 갈등을 드러나게 한 처음의 사안은 郎薦制 문제였다.0040)김항수,<宣祖初年의 新舊갈등과 政局動向>(≪國史館論叢≫34, 國史編纂委員會, 1992). 이하의 서술에서는 주로 이 논문을 참고하였다. 낭천제란 試才를 통하지 않고 이조전랑의 천거를 통해 재주와 행실이 좋은 사류를 관직에 등용하려는 제도로 선조 원년(1568) 吏曹正郞 具鳳齡과 佐郞 鄭澈에 의해 제기되었다.0041)≪宣祖修正實錄≫권 2, 선조 원년 3월. 신진사류에 속하는 그들이 이를 제기한 데에는 윤원형 등 권신집권 이래의 큰 폐단이었던 구신들의 청탁에 의한 인사를0042)國初부터 有蔭子弟로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자의 등용을 위해 四書 一經을 講試하여 初職을 주었는데 윤원형이 집권한 이후는 試講의 내용이 부실해져 집안 소식을 묻는 것으로 대신할 지경이 되므로 배움에 뜻을 둔 自好之流는 여기에 응하지 않게 되어 벼슬길이 더욱 혼탁해졌다고 한다(≪宣祖修正實錄≫권 9, 선조 8년 9월). 배제함으로써 관료사회의 새로운 기풍을 조성함과 동시에 名節을 앞세워 혐의를 꺼리는 사림계 인물의 정계 진출로를 열어준다는 의도가 잠재되어 있었다.

 이 낭천제는 구신계인 朴永俊의 뒤를 이어 이조판서가 된 李鐸이 정철의 요구를 수용함으로써 시행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구신계의 반발이 바로 뒤따랐다. 구신계로서는 그들의 기득권이 상실됨으로써 자신들의 세력기반을 약화시킬 낭천제를 그대로 앉아서 수용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祖宗의 옛제도(舊規)를 함부로 바꾸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주장을 펴면서 낭천제를 주도하는 구봉령·정철 등을 일을 꾸미기 좋아하는 무리(喜事者)로 몰아 배척하였고0043)≪經筵日記≫선조 2년 6월. 구신계 인물을 이조판서로 밀어 이를 통해 낭천제를 무효화하고자 하였다.

 우의정 洪暹의 사촌아우로 구신계의 핵심적 위치에 서 있던 洪曇이 이탁 대신 이조판서가 된 것은 이런 배경에서였다. 홍담은 당장 낭천제를 부정하고 인사권을 판서가 다시 행사하려 하였다. 이에 대해 좌랑 정철이 낭천제를 고집하자 두 사람 사이가 매우 악화되었으며 이는 곧 구신과 신진사류의 불화로 확대되었다. 세력기반의 확보를 위한 구신과 신진사류의 상반된 이해관계가 낭천제 문제로 표출되어 충돌하게 된 것이다. 이후 낭천제는 구신계인 朴忠元을 거쳐 신진사류의 영수격인 朴淳이 판서가 됨에 다시 부활되고 그 뒤로도 몇 차례의 폐지와 설치를 반복하지만 점차 신진사류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가운데 정착을 보게 된다.0044)이 낭천제는 16세기 이조전랑의 권한이 강화되는 추세에서 만들어진 제도였다. 사림들은 自薦制를 바탕으로 이조전랑의 권한을 확대하여 權臣과 大臣들의 인사전횡을 견제해왔다(崔異敦,<16세기 郎官權의 성장과 朋黨政治>,≪奎章閣≫12. 1989). 이와같이 전랑권이 강화되는 추세에서 신진사류들은 전랑이 실질적인 인사권을 행사함으로써 대신들의 인사청탁을 막으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낭천제 시행문제에서 분명히 서로간의 정치적 존재를 확인하게 되는 구신과 신진사류 사이의 대립은 바로 얼마 후에 구신계 대신들이 신진사류를 공격하는 요인이 되고 끝내 老黨과 少黨이란 朋黨명목으로까지 나가게 된다.

 신·구세력간의 갈등은 선조 2년 文昭殿 논의에서 재발하였다. 문소전이란 世宗이 漢의 原廟制를 모방해 太祖와 今上의 四代祖의 신주를 모시는 祠堂을 말한다. 명종의 상을 마치고 그 신주를 문소전에 모시게 됨에 사류들은 명종초 권신들에 의해 해를 넘기지 못한 임금(未踰年之君)이므로 정통의 계승자가 될 수 없다고 하여 延恩殿에 두어졌던 仁宗의 신주도, 이번 기회에 문소전으로 옮겨 권신체제하에서 잘못되었던 명분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논의를 내었다.0045)≪宣祖修正實錄≫권 3, 선조 2년 정월. 이에 대해서는 영의정 이준경 등 대신들도 찬성하였다.

 그런데 신주를 놓을 자리가 협착하여 문제가 발생하였다. 구신계가 문소전 건물의 증축안을 내는 데 대해, 이때 모처럼 조정에 나왔던 李滉은 문소전의 신주설치 방향을 바꾸게 되면 남북보다는 동서가 더 넓은 문소전의 건물구조 때문에 장소협착 문제가 해결되며 古制의 원칙도 회복할 수 있다고 하였다. 특히 古制 회복과 관련하여 不遷之主는 서쪽에서 동향하고 昭穆을 남북으로 배열하는 것이 원칙이므로 이번 기회에 그 동안 고제에서 어긋나게 북에서 남향하고 있던 태조의 신주와 동서로 된 소목의 위치를 바꾸자는 것이었다.0046)≪宣祖實錄≫권 3, 선조 2년 2월 기묘. 이황의 이런 주장은 신진사류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으나 대신들을 위시한 구신세력은 세종이래 140여 년을 지켜 온 祖宗의 舊制를 바꿀 수 없다고 반대하였다. 여기서 이황은 물론 그를, 士林의 宗匠으로 받들던 신진사류들은 대신들의 변통하지 않으려는 수구적 자세를 비판하고 나왔다. 더구나 이런 논의 과정에서 李浚慶이 인종을 한해를 넘기지 못한 임금이므로 그대로 연은전에 두자는 주장을 펴 사류들의 의론을 백지화하려는 태도를 보이자 奇大升·辛應時 등은 이준경을 윤원형·李芑 등의 ‘乙巳權奸’에까지 비유하며 심하게 배척,0047)≪論思錄≫下, 선조 2년 5월 21일. 구신들의 분노를 불러왔다.

 이러한 논쟁은 결국 이준경이 자신의 과실을 인정하고 인종의 신주를 명종과 함께 문소전에 모시게 됨으로써 일단락 되었다.0048)≪宣祖修正實錄≫권 3, 선조 2년 3월. 그러나 문소전 논의를 통해 사류와 구신들은 구체제의 개혁에 관한 서로의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 정국운영에 관한 두 세력의 방안이 근본적으로 상이함을 인식하게 되고 끝내는 정치적 충돌로 나아가게 된다.

 낭관권과 문소전 논의를 거치면서 증폭된 두 세력간의 갈등은 마침내 선조 2년(1569) 5월 구신계인 김개·홍담 등에 의한 신진사류 제거 움직임으로 나타난다. 평소 유학자를 질시하고 특히 낭천제 문제로 신진사류계의 정철과 대립하였던 이조판서 홍담은 사촌형인 우의정 홍섬 및 그와 사이가 가까웠던 宋純·김개 등과 함께 신진사류를 몰아낼 생각을 하고 김개로 대사헌을 삼았다. 이에 김개는 경연에 입시한 자리에서 己卯의 禍는 浮薄之徒로 말미암은 것인 만큼 이를 거울삼아 오늘의 과격한 年少輩를 억제하고, 그들의 경망된 언동을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며 임금을 충동하고, 南袞을 삭탈관작한 것은 잘못이라고까지 하였다.0049)≪宣祖實錄≫권 3, 선조 2년 4월 임진 및 6월 신사·임오.
≪宣祖修正實錄≫권 3, 선조 2년 6월.
古制의 회복과 권신체제의 청산을 위해 혁신을 주장하던 신진사류를 少己卯로 지목하여 위험시하던 구신계의 시각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김개의 이런 발언에 대해 신진사류 계열의 지평 정철·좌승지 기대승·우승지 심의겸 등은 즉각 반발을 보였다. 그들은 김개를 기묘사화에 빗대어 사류를 일망타진하려는 소인배라고 질타하면서 李鐸·朴淳·기대승·尹斗壽·尹根壽·정철·李後白 등 사림계 인사를 제거하려는 홍담 등 구신계 인사의 음모가 배후에 도사리고 있다고 역공하였다.0050)≪論思錄≫下, 선조 2년 6월. 이어 사류가 장악한 三司에서 김개를 탄핵, 관직에서 추방하자 불안을 느낀 홍담이 이조판서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고 우의정 홍섬도 사직을 청함으로써 분란은 표면적으로 가라앉았다.0051)≪宣祖實錄≫권 3, 선조 2년 6월 신사.
≪宣祖修正實錄≫권 3, 선조 2년 6월.
구신계의 구심점인 이준경의 적극적인 동조를 받지 못한 데서 보듯이 김개·홍담의 신진사류 축출 움직임은 구신계 전체의 결집된 의지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기야 舊臣을 구성하는 인물들의 출신기반과 정치성향이 다양하여 중종대 이래 함께 벼슬해 왔다는 것 이외는 공통된 요소가 없어 정치세력으로서의 결속력이 약하기 때문에, 이해관계가 얽히는 이 문제에 구신계 전체가 동일한 보조와 움직임을 취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안의 중대성에 비해 그 파장이 길지 않고 바로 수습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렇다고 하여 이 사건이 갖는 의미가 그리 작은 것은 아니었다.≪宣祖修正實錄≫에는 이 사건을 계기로 구신과 신진사류를 각기 가리키는 老黨·少黨이라는 붕당 명목이 생겨났다고 기록하였다.0052)≪宣祖修正實錄≫권 3, 선조 2년 6월. 구신들의 정치적 결속력이 약하기 때문에 노당이라 불리워졌다고 해서 그것을 곧 하나의 정치세력화한 붕당으로 볼 수는 없다. 아마도 ‘老黨’이란 명칭은, 그 동안 구신들과 대립해오던 일단의 신진사류를 마치 중종때의 조광조 등 연소사류에 비슷한 존재로 간주하여 少己卯라고 부르면서 위험시하고 연소배로 몰아 낮춰보려는 데서 생겨난 少黨이란 명목에 대비시켜 당시 사람들이 부른 데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문제는 사류로 구성되었다는 소당이다. 그들은 구신과의 대립을 거치면서 개혁을 지향하는 비슷한 정치적 입장을 취했으며,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서로 통할 수 있는 정치이념과 이론을 갖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서 그들간에는, 기묘사류의 결속력과 일체감에까지는 이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일종의 동류의식과 같은 연대감이 형성되었고, 이러한 정치적 존재와 움직임이 구신들이나 제 3자에게는 하나의 정치집단으로 비쳤을 것이다. 소당이란 명목은 그래서 나왔을 것이며, 2∼3년 후 영의정 이준경이 죽음에 임하여 올린 遺箚에서 조정에 붕당의 조짐이 있다고 하였던 것도 바로 이들을 지목했던 것이고, 또 그러기에 이들은 이준경이 자신들을 붕당으로 몰아 일망타진하려하는 小人이라고 배척해마지 않았던 것이다.0053)이준경은 遺箚의 第 4條 破朋黨之私에서 당시에 행실이나 학문을 닦지 않고 高談大言이나 일삼는 무리들이 朋黨을 결성, 스스로를 높은 척하며 의견이 다른 사람을 배척하여 용납하지 않는 虛僞의 풍조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물론 이것은 이준경 나름으로는 혁신을 추구하던 일부 사류의 정치행동을 경거망동으로 보아 우려를 표명한 것이겠지만, 이를 붕당으로 지목한 것이 문제였다. 이때만 해도 조정의 붕당인식은 政亂國亡을 초래하는 요인으로 간주되었고 따라서 朋黨행위를 하는 자는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정만조, 앞의 글, 104∼106쪽 참조.
후일 동인·서인의 分黨시기에 선조 이후 진출한 사류로부터 前輩내지 先輩로 불리워지며 沈義謙黨 내지 서인에 속하였던 인물들은, 예외가 적지 않게 찾아지기는 하지만, 상당수가 이들 소당에서 나왔다. 그런 면에서 이 시기의 소당이란 명목의 출현은 후일의 동·서분당의 선구로서 큰 의미를 갖는다.

 낭천권의 확보와 문소전 논의를 거치면서 정치적으로 浮上하게 된 신진사류는 이제 舊臣에 당당히 맞설 정도의 유력한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였던 것이다.

 을사사화 피해자의 伸寃과 사화를 일으켜 공신에 책봉된 자에 대한 削勳논의가 본격적으로 제기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배경 위에서였다. 그런데 이 신원과 삭훈의 문제, 그 중에서도 삭훈 주장은 을사사화 자체를 무효화하는 의미를 지니므로 거기서부터 비롯된 권신체제하에서 벼슬한 구신들의 처지나 명분이 무너짐은 말할 것도 없고, 사화를 逆獄으로 인정하고 공신 칭호를 내려준 명종의 처분을 부정함으로써, 명종의 후계자였던 선조의 명분까지 난처함에 빠뜨릴 것이었다. 그러므로 乙巳伸寃과 삭훈문제에 관한 한 사류들도 선뜻 의견을 내기는 어려웠고, 뿐 아니라 사류 내의 의견마저 한결같지 않았다. 예컨대 이이·정철·이해수 등의 권신체제가 무너진 뒤 관직에 나왔던 비교적 연소한 사류들은 사화자체를 역모사건이 아니라 윤원형·이기 등의 권신이 공을 탐해 날조한 誣獄으로 보아 완전한 신원과 삭출론을 폈으나, 신진사류의 종장이라고 할 이황이나 선배격에 해당하는 허엽은 이른바 을사원흉이라는 尹任과 桂林君 瑠는 신원되기 어렵고, 따라서 삭훈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을 가졌으며, 신진사류의 의론을 선도하던 기대승도 삭훈에는 소극적이었다.

 이와 같은 이견이 있고 또 난관과 반대론이 예상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사류로 보아서 을사사화의 신원과 삭훈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하였다. 그것은 비단 사림적 명분을 바로 잡는 일일뿐 아니라, 신진사류 자신의 정치활동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안전을 보장받는다는 현실적인 면에서도 필요하였다. 이에 선조 3년(1570) 4월 백인걸의 신원상소를 효시로 하여 삼사의 상소가 뒤따랐고 이이가 홍문관 교리가 된 5월 이후 삭훈 논의가 본격화하였다. 그 결과 대다수의 피화인은 신원되었으나 柳灌·柳仁淑 및 윤임과 계림군 류의 복관, 그리고 삭훈문제는 끝내 성취하지 못했다.0054)이것은 후일 선조 10년 인종비 仁聖王后가 위독할 때 大妃의 至願을 풀어준다는 차원에서 선조의 결단으로 비로소 실현된다.

 을사 삭훈 논의를 거치면서 권신체제와 연결되었던 구신계의 정치적 입장은 약화되었다. 그 결과 선조 4년 무렵부터 구신계의 정계로부터의 퇴조가 현저해지고, 따라서 정국의 주도권은 점차 사류의 수중으로 넘어오게 된다.

 우선 선조 3년말부터 계속 사직소를 올리던 이준경이 4년 5월 영의정에서 물러났다. 우의정과 우찬성이 되었던 吳謙과 朴忠元 역시 삼사의 탄핵으로 곧 면직되고 그 대신 구신계와 동년배이면서도 신진사류편에 서서 그들을 옹호하던 李鐸이 우의정에 올랐다.

 거기에다 이준경이 선조 5년 7월에 죽었다. 죽음에 임해 올렸던 破朋黨의 遺箚가 조정에 큰 파문을 일으킨 것은 위에서 잠시 언급하였지만 어찌하였던 구신계로서는 큰 타격을 받은 셈이다. 뒤이어 우의정에 올랐던 鄭大年이 언관의 논박으로 체직되어 향리로 돌아가고 형조판서 元混, 예조판서 朴永俊, 형조판서 박충원, 이조판서 金貴榮·姜士尙 등도 탄핵을 받거나 혹은 스스로 파직하였다. 이와 달리 박순·노수신 등 사림계 인사가 차례로 대신이 되면서 마침내 선조 6년(1573) 9월 영의정에 이탁, 좌의정 박순, 우의정 노수신으로 된 의정부를 구성하게 된다. 지금까지 청요직에 머물던 사류로서는 자기 계열의 인물들로 대신의 자리를 채우게 됨으로써 비로소 국정을 전담할 수 있게 되었다. 바야흐로 사림의 정치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리하여 사류들은 우선 그때까지의 정치적 경험으로 보아 사림정치의 구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임금인 선조의 마음을 돌려 사림적 정치관에 동조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경연을 통해 이른바 군주의 회천을 위해서 이이·김우옹·유성룡 등 당대 일류의 학자가 정성을 다하고, 미출신자의 입대제도를 마련하여 성혼·정인홍 등 산림학자를 사헌부의 지평·장령에 임명케 하며 나아가 그들을 경연에 참여시키기 위하여 미출신자의 경연직 겸대까지 요청하였다.

 그런 한편으로는 숙폐의 제거를 위한 혁신도 추진하였다. 교화보다 양민이 시급하다고 하여 향약을 일시 중지시키는 한편 각사의 공판을 혁파하는 가공제를 실시, 방납의 폐를 줄이고 새로운 군적을 반포하여 피역자를 색출함으로써 군역의 폐단을 시정하려 하였다. 그러나 사류의 이러한 노력들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도 못했고 또 계속적으로 추진될 수도 없었다. 그 이유는 대개 다음과 같다. 우선 그렇게 노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君心의 回天은 쉽지 않았다. 道學에 기초한 君子的 기준에서 고도의 도덕적 자기 수양과 욕망의 억제를 요구하는 사림의 고답적 왕도정치론은 흔히 군주의 자의적 언동과 충돌을 일으키게 마련이었다. 治世를 이루겠다는 의욕을 가졌던 선조의 경우도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사류에게 정치를 맡긴지 몇 달도 되지 않아 黃蠟을 대궐로 들이라는 內旨에 언관들이 佛事를 하려는 것이라고 비판을 하자, 크게 노하여 언관들을 질책한 뒤부터 사류를 멀리하기 시작해 박순·이이·이탁 등을 물러나게 하고 다시 구신을 등용해 사류를 실망시켰던 것이다.

 다음으로 비록 퇴조하였다고는 하나 구신계가 여전히 사류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그것은 선조 8년 명종비 仁順王后의 卒哭후 服制를, 五禮儀에 규정된 바를 수정하여 古禮에 맞도록 흰색으로 바꾸자는 사림들의 주장에 대해 舊臣系가 祖宗의 옛 제도를 함부로 고칠 수 없다고 반대한 데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0055)김항수, 앞의 글, 121∼124쪽. 정치적 입지가 약화된 처지에서 그들은 사류의 주장에 의구심을 갖고 개혁에 소극적인 국왕에 의지하여 수구적 자세를 고수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이 시기에 이르러 사류사이에 개혁의 방법이나 정국운영의 방향을 놓고 의견차이가 심화된 데 있었다. 바로 사류의 분열로 인한 동인·서인 붕당의 출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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