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2. 붕당의 출현
  • 2) 사림의 분열과 붕당의 출현

2) 사림의 분열과 붕당의 출현

 구신계가 퇴조하고 사림계가 三司의 언론권은 물론, 의정부의 대신직을 차지함으로써 사림에 의한 정국 주도가 가능해진 시점에 이르러 이제 사림계 자체 내부의 분열이 발생하게 된다. 이때 정계에 포진한 사류는 크게 두 부류로 구분해 볼 수 있다.

 그 중 첫째 부류는 앞서 선조초의 구성에서 제시한 바 있는 명종 연간에 정계로 진출했던 존재들이다. 즉 명종 전반기에 벼슬에 나왔던 朴淳·許瞱·金繼輝·具鳳齡·洪聖民·辛應時·尹斗壽·尹根壽·沈義謙 등(이들은 선조초에는 선배격이었다)과, 후반기에 등장한 鄭澈·李山海·李珥·柳成龍·金孝元·李海壽 등(당시는 후배사류로 불림)이 여기에 속하는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이들은 명종말 선조초에는 선후배 사류로 구분되었으나 선조 이후 벼슬해 오는 과정에서 관직상의 상하 차이가 거의 없어져서 선조 8년경에는 같은 당상관으로서 三司의 장관직이나 승정원의 승지, 6조의 참의, 참판직에 함께 벼슬하였다.0056)예컨대 선조 7년경의 승정원 구성을 보면 도승지 許瞱, 좌승지 朴好元, 우승지 李山海, 좌부승지 安自裕, 우부승지 李珥, 동부승지 權德輿이며 사간원 대사간을 李後白·李珥·洪天民·李山海가 돌아가며 담당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선조 이후 진출하는 사류에 대해서는 선배적인 위치에 있었다.

 한편 두 번째 부류는 선조 이후 관계로 나온 사류들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선조 이후에도 과거는 계속 설행되고 다수의 급제자를 배출하였다.≪文科榜目≫에 의해 선조 8년(1575)까지만 찾아본다 하더라도 모두 11회 설행에 급제자 수는 229명에 이른다.0057)선조 즉위년의 식년시 33명, 원년의 증광시 33명, 2년의 알성시 7명·별시 16명, 3년의 식년시 34명, 5년의 춘당대시 15명·별시 16명·별시 19명, 6년의 식년시 34명·알성시 7명, 7년의 별시 15명 등 총 11회 229명. 물론 이들이 모두 관직을 받았거나 중앙정계에서 활동하였던 것은 아니다. 庚午(선조 3년) 式年榜의 장원급제자인 金大鳴은 평생의 관직이 고작 군수에 그쳤으며 심지어 甲戌(선조 7년) 別試榜의 鄭詳은 장원급제를 하고서도 일생 관직을 갖지 못할 정도였다.0058)≪文科榜目≫선조 甲戌 別試榜 甲科一人 鄭詳의 항목에 벼슬란이 공란으로 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그 중에는 벼슬을 받아 중앙정계에서 활동하고 후일 名士가 되어 達官하는 인물도 또한 적지 않았다. 尹晛·金宇顒·趙憲·金應南·禹性傳·李山甫·金誠一·李元翼·洪進·李誠中·李敬中·沈忠謙·許篈·趙瑗·柳永慶·沈喜壽·洪迪·尹承勳·李潑·金睟·李景山栗 등이 그들이다.0059)이들의 生卒年度와 문과급제연도는 다음과 같다.

이 름 生卒年度 문과급제연도 이 름 生卒年度 문과급제연도
尹 晛 
趙 憲
禹性傳
金誠一
洪 進
李敬中
許 篈
柳永慶
洪 迪
李 潑
李景㟳
1536∼1598
1544∼1592
1542∼1593
1538∼1593
1541∼1616
1543∼1585
1551∼1588
1550∼1608
1549∼1593
1544∼1589
1537∼ ?
1567
1567
1569
1568
1670
1570
1572
1572
1572
1573
1573
金宇顒
金應南
李山甫
李元翼
李誠中
沈忠謙
趙 瑗
沈喜壽
尹承勳
金 睟
1540∼1603
1546∼1598
1539∼1594
1547∼1634
1539∼1593
1545∼1594
1544∼1595
1548∼1622
1549∼1611
1547∼1615
1567
1568
1568
1569
1570
1572
1572
1572
1573
1573

 동·서분당때 각기 전위세력으로 크게 활동했고 후일 대신급에까지 오르기도 하였던 이들은 선조 8년경의 시점에서는 앞서 말한 명종 연간 진출한 사류와 구분되어 후배사류라 불리웠다. 이들에게서 퇴계나 남명계열의 학통적 요소를 다수 찾을 수 있는 외에 별다른 공통점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관직에 처음 나온 新進氣銳한 존재였음으로써 사류의 이상인 사림정치의 실현에 기대가 컷을 것이고 그런 만큼 지지부진하기 만한 정치현실을 비판하면서, 이미 기성 관료화해버린 선배사류에 대한 불만과 불신을 키우고 있었을 것이다.

 사류 내부의 분열은 먼저 선배사류내에서 외척인 심의겸의 정치관여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데서 발단하였다. 명종비 심씨의 동생으로서 비교적 이른 시기인 명종 16년(1561)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들어선 심의겸은 평소 사류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특히 명종 18년 당시의 權臣이던 李樑이 자기를 배척하는 사류를 제거하고자 또 한 차례의 사화를 획책할 때, 누이를 통해 명종을 움직여 이량을 귀양보냄으로써 사류를 위기에서 구하는 공을 세웠다. 뿐 아니라 그는 이후에도 척신으로서의 영향력을 발휘하여 사류를 보호하고 그들의 정치적 성장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이런 까닭으로 선배사류는 대개 심의겸을 비록 출신이 척신이기는 하나 사림의 동조자로 받아들이고 그 정치적 활동을 용인하였으며, 乙巳削勳 문제와 같은 정치적 난제의 해결에 그의 힘을 빌리려고까지 한 적도 있었다.0060)≪經筵日記≫선조 3년 10월.

 그러나 선배사류가 모두 심의겸의 인품이나 그 정치적 영향력의 행사를 긍정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명종 21년 윤 10월 그가 우부승지에 임명되었을 때의 史評에서 사류를 보호한 그의 공은 인정하면서도 “벼슬한지 5년만에 당상에 뛰어 오르되 이를 혐의롭게 여기지 않고 賓客을 널리 끌어들여 門庭이 마치 저자거리 같으므로(廣延賓客 門庭如市) 識者가 이를 근심했다”0061)≪明宗實錄≫권 33, 명종 21년 윤10월 을미 및 권 34, 명종 22년 정월 신묘에 심의겸이 이조참의에 임명된 데 대한 史評에도 비슷한 견해가 피력되고 있다고 한 데서 이미 명종 말년부터 우려하는 일부의 시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뿐 아니라 선조 이후에도 계속되는 그의 높은 정치적 비중이, 선조의 大統계승에 결정적 역할을 하고 이제는 大妃로서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명종비 심씨와 형제관계였다는 데 토대하고 있었음으로써, 선조 이후 그의 척신적 입장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이미 선조 원년 당시 사류의 원로였던 白仁傑이 “심의겸은 외척이면서 어찌 정치에 관여하는가, 오늘날의 사류는 거의 의겸의 門客일 뿐이니 외척의 권력을 너무 성하게 해서는 안된다”0062)≪經筵日記≫선조 원년 秋.고 하여 외척으로서 심의겸의 정치관여를 비난한 바 있으며, 후일 동인·서인 分朋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것으로 말해지는 심의겸·김효원 사이의 불화를 가져 온 직접적 요인도 김효원에 의한 심의겸의 외척적 존재의 배척에 있었다. 뒤에 다시 언급되겠지만 선배사류 중에 박순과 더불어 명망이 있던 허엽 역시 외척으로서의 심의겸을 논척하고 그를 지지하는 세력을 외척문객으로 매도하였다.

 선배사류내에서는 비록 소수였기는 하지만 김효원과 허엽의, 심의겸과 그를 용납하는 분위기에 대한 이러한 비판적 견해는 설사 그것이≪經筵日記≫의 기술대로 사실에 어긋나는 謬見이었다고 하더라도 사림정치의 실현을 위해서는 구체제의 잔재인 척신적 요소의 척결이 앞으로 불가피한 과제가 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동안의 정국운영을 통해 확실하게 임금의 지지를 받아내지도 못하면서 구체제의 혁신에 한계를 보이는 선배사류에 불만을 쌓아가던 후배사류들은 쉽사리 그들의 견해를 수용할 수 있었다.

 선조 8년(1575) 이조정랑으로 있던 김효원이 그 후임자로서 심의겸의 동생 沈忠謙이 물망에 오르자 이조의 벼슬이 외척 집안의 물건이 아니라 하여 이를 저지함으로부터 본격화되었다는 沈·金의 是非가, 그들을 각기 지지하는 선배와 후배사류의 분열로 확대되고, 선배사류 중에서도 연배가 가장 높은 축이던 허엽이 도리어 후배사류의 영수가 되어 그 여론을 주도하였던 저간의 사정은 이런 배경 위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선·후배간의 불화가 정치적으로 처음 표면화되어 끝내 동인·서인의 붕당 명목의 성립(乙亥黨論)으로까지 나가게 된 계기는 선조 8년의 載寧지방 殺主奴에 대한 獄事의 처리문제에서였다.0063)≪宣祖修正實錄≫권 9, 선조 8년 7월. 먼저 허엽과 김효원이 대사간·사간으로 있던 사간원에서 옥사의 처리가 잘못되었다고 하여 옥사를 담당했던 영의정 박순을 논핵하자, 정철·신응시·김계휘 및 윤두수·윤근수 등이 중심이 된 선배들은 이를 박순을 공격해 물러나게 함으로써 심의겸의 세력을 고립시키려는 의도로 의심하여 대대적인 반격을 가하였다. 그 결과 허엽·김효원과 이경중·허봉 및 언관직에 있던 다수의 후배사류가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선배들의 이런 처사에 대한 사림의 여론이 악화되었다.

 이에 사류 간의 내분을 근심하고 특히 후배사류의 과격성을 우려하던 부제학 李珥가 좌의정 노수신을 움직여 조정분란의 책임소재로 심의겸·김효원을 지목, 임금의 명으로 두 사람을 지방관으로 내보내게 함으로써(外補論) 분쟁을 진정시키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심의겸은 개성유수, 김효원은 慶興府使가 되어 조정을 떠났다. 하지만 조정의 분란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후배사류는 김효원의 임지가 변방이라 하여 불평하였고, 이번의 인사조처를 통해 과격성을 지닌 연소사류의 淸論을 싫어하여 이를 억제하려 하는 왕의 의도를 간파한 선배사류는 이 기회에 후배사류의 핵심인물을 조정에서 몰아내어 그 기세를 꺾고자 하였기 때문이었다.0064)≪宣祖修正實錄≫권 9, 선조 8년 9월.

 이때의 정세는 임금의 지지를 받은 선배측에 유리하였다. 그 동안 후배사류의 淸要職 진출과 언론권 장악의 보루이던 吏曹銓郞의 자리가 선배사류의 수중으로 넘어온 것이다. 허봉·이경중이 물러난 자리는 윤두수의 조카인 尹晛이 차지하였고 그에 의해 趙瑗·李純仁·李山甫 등 선조 이후에 진출한 후배이면서도 선배의 편에 섰던 인물들이 차례로 이조전랑이 되어0065)≪經筵日記≫선조 9년 2월. 후배사류의 언론을 억제하면서 한편으로 벼슬에 처음 나온 新進을 그들 쪽으로 끌어갔다. 뿐만 아니라 李後白이 이조판서가 됨으로써 일반관료의 인사권까지 좌우하게 되었다. 그간 외척 심의겸과의 관련 때문에 수세적 입장에 놓일 수밖에 없었던 그들로서는 심의겸이 외직으로 나가 그 부담을 덜게 되자 인사권·언론권을 배경으로, 몇 명의 선배사류에 불과하였다는 약세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 형세를 만회할 수 있게 되었다.0066)≪宣祖修正實錄≫권 10, 순조 9년 2월. 여기에 이르러 지금까지 그저 선·후배간의 불화와 대립이라거나 沈邊·金黨 또는 外戚·少年之黨으로 불리던 사림의 분열 양상은 마침내 동인·서인이란 명목을 갖게 된다.0067)이때 東人·西人에 속한다고 알려진 인물들은 대개 다음과 같다.
東人:許瞱(대사간), 禹性傳(正言), 李敬中(이조좌랑), 李誠中(수찬), 李潑(이조정랑), 洪進(교리), 洪迪(응교), 洪渾(대사간), 金誠一(수찬), 許篈(이조좌랑), 鄭熙績(지평), 尹承勳(정언), 宋應泂(정언), 金孝元(삼척부사), 李拭(대사헌), 朴大立(형조판서), 朴謹元(이조참의), 柳琠(예조판서).
西人:朴淳(영의정), 金繼輝(대사헌), 尹斗壽(대사헌), 尹根壽(부사), 鄭澈(직제학), 李海壽(대사간), 具鳳齡(대사간), 李後白(이조판서), 辛應時(예조참의), 尹晛(이조정랑), 趙瑗(이조좌랑), 李山甫(이조정랑), 沈義謙(개성유수), 洪聖民(부제학).
이때는 東人·西人에 직접 속하지는 않으면서 李珥를 따라 兩者의 대립을 해소시키려고 노력하는 일종의 調劑세력이 있었다. 즉 李珥(부제학), 盧守愼(좌의정), 柳成龍(헌납), 金宇顒(교리), 李山海(우승지), 成渾(집의), 鄭仁弘(≪經筵日記≫, 선조 14년 4월) 등이 그들이다. 이 중에서 이이와 성혼은 서인쪽에 가까웠고, 유성룡·김우옹·이산해·노수신은 동인쪽으로 기울고 있었으며, 정인홍은 처음 이이와 가까웠던 것으로 말해진다(≪經筵日記≫, 선조 14년 4월).
붕당으로서의 모양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동인·서인이 사림정치에서 말해지는 성리학적 公黨으로서의 붕당에까지 나간 것은 아니었다.

 이 시기의 붕당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었다. 하나는 어느 시기이고 나올 수 있는 것으로 개인적 차원의 갈등과 상호 배척에 그 친척이나 친구가 각기 편을 들어 무리를 이루어 대립하는 형태이다.≪大明律≫의 奸黨條에 본인은 목을 베며 처자식은 종을 삼고 재산은 몰수한다는 죄목으로 규정된 조정관리의 붕당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선조초 李文馨과 洪仁慶의 불화에 그 友人들이 편을 들어 붕당의 조짐을 보였다는 것은 이런 형태의 한 예라고 할 것이다.0068)≪經筵日記≫선조 원년 5월.

 다른 하나는 歐陽修가 개념화하고 朱熹에 의해 성리학적 정치이론으로 확립을 보게 된 君子와 小人 집단으로서의 붕당이다. 소인의 붕당은 私利를 도모하기 때문에 利가 갈라지면 깨어지게 마련이므로 진정한 의미의 붕당은 군자에게만 있으며, 따라서 이런 붕당은 至治의 실현을 위해서는 불가피한 정치형태이고 君主까지도 여기에 들게 해야 한다(引君爲黨)는 것이다. 일종의 긍정적 정치기능을 가진 公黨이라 할 것이다. 이 시기의 사류들은 중종 때의 조광조 일파에서 그 대표적인 예를 찾았으며, 앞서 말한 선조 2(1569)·3년경의 舊臣 중심의 老黨에 대한 그들 위주의 少黨도, 그들만의 일반적인 견해이기는 하나, 마찬가지인 군자의 당으로 간주하였다.

 사림정치의 구현을 위한 구체제의 혁신과정에서 외척으로서의 심의겸의 정치적 존재를 허용하느냐 또는 부정하느냐는 견해차이에서 비롯된 선·후배간의 갈등과 대립은, 비록 심의겸·김효원을 각기 지지하고 상호 배척하는 단계를 지나 동인·서인의 명목을 갖는 데까지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그러나 어느 당을 眞朋으로 보고 僞朋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객관적 판단이나 王의 단안이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아직까지는 뚜렷한 정치이념이나 학파적 색채를 분명히 드러내지 못하고 있어서 진정한 의미의 성리학적 公黨으로서의 붕당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선조 16년 李珥가 서인으로 自定하여 동서인간에 학파적 성격과 정국운영의 방안에서 독자성이 확보되고 거기에 따라 기존의 붕당과는 다른 제 3의 붕당형태가 개념화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였다.

 심의겸과 김효원의 外補에서 비롯된 서인의 우세는 그러나 그리 오래가지는 못하였다. 선조 11년 경연에 입시하였던 동인 金誠一에 의해 서인의 중진인 尹斗壽·尹根壽·尹晛이 지방관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가 있다는 사실이 거론되면서0069)이를 보통 三尹事 또는 李銖의 獄이라 부르며 三尹은 바로 파직된다.
≪宣祖修正實錄≫권 12, 선조 11년 10월.
≪經筵日記≫선조 11년 9월.
서인의 정치적 입장이 크게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척신정치하에서 자행되었음직한 수뢰사건에 서인계 인물이 관련된 혐의가 주어진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서도 서인계의 정치적 위상을 훼손시켰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 심의겸을 용납하는 선배세력을 외척당으로 몰아 붙이면서 구체제의 잔재 청산에 미온적이라고 공격하던 후배 내지 동인사류의 주장을 합리화해 주었다. 여기서 동인은 자기파내의 언관들을 동원해 三尹을 탄핵함은 물론 三尹이 속한 서인의 대표인 심의겸을 소인으로, 그 주론자인 정철·김계휘를 私黨으로 몰면서, 나아가 이를 통해 동인이 바르고 서인이 사당이라는 東正西邪論을 제창, 이를 國是로 인정받고자 하였다.0070)≪宣祖修正實錄≫권 13, 선조 12년 2월. 동인의 이러한 움직임은 주자성리학이 갖는 군자소인변 위주의 붕당론에 의거하여 동인을 군자당 서인을 소인당으로 공인 받아서 進君子·退小人의 원칙에 따라 서인의 정계 재진출의 길을 막고 정치현장에서 일소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었다.

 이러한 동인의 공세에 맞서 서인은 진상조사가 필요하다는 방어 논리를 폈으나 한번 명분논쟁에서 밀린 형세를 만회하기는 역부족이었다. 東正西邪論이 한창이던 선조 12(1579)∼13년의 기간에 서인의 대표적 인물이던 심의겸·김계휘·정철이 각기 함경·전라·강원도의 관찰사, 윤두수·윤근수 형제가 연안부사·개성유수로 외직에 나가 있었던 사실은 당시 서인측이 처한 곤경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서인측의 위기는 이이의 중재 노력에 의해 일단 넘길 수 있었다. 처음 심의겸·김효원의 外補論을 편 이후 그 동안 동인·서인 내에서 여론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던 李潑과 鄭澈 사이의 화해를 주선하는 등 개인 사이의 갈등 해소에 힘써 오던 율곡은 이때 와서 “동인·서인의 명목을 깨뜨려 분열 이전과 같은 하나의 사류로 재결속하는 것(打破東西 保合士類)”을 목표로 하는 調劑說0071)≪宣祖修正實錄≫권 13, 선조 12년 5월.
≪栗谷全書≫권 7, 疏箚 5, 辭大司諫兼陳洗滌東西疏.
을 표방하면서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兩是兩非와 辨別淑慝을 주장, 서인에 대한 동인의 공세를 흐리게 하거나 둔화시켰다.

 양시양비란 동인·서인 양측에 모두 시와 비가 함께 있다는 뜻이다. 즉 심의겸은 외척이면서도 앞서 명종때 사류를 보호한 공이 있고, 김효원은 명류를 끌어와 조정을 깨끗하고 맑게 한 공이 있어 양쪽 다 옳다(兩是)는 것이며, 그러나 심의겸은 외척으로서의 행동을 조심하지 못하고 정치에 관여하는 잘못을 저질렀고, 김효원은 유생의 몸으로서 비록 친구의 처가이기는 하나 權奸의 집에 출입하였던 허물이 있으므로 두 사람 모두에 잘못이 있다(兩非)는 것이다. 따라서 동인이 옳고 서인이 그르다(東是西非)는 주장은 동인측의 일방적 견해에 불과할 뿐 공론이 아니며 공변된 입장에서 말한다면 양시양비일 뿐이라고 하였다. 물론 이 양시양비론이 동인·서인 분쟁의 근본적인 해소책이 되리라고는 율곡 자신도 생각지는 않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 시비분쟁 자체가 현안의 민생문제와 직접 관계되는 것도 아니고, 국정의 수행에도 그리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 않으며, 오히려 시비를 애써 가리려는 것이 분쟁만 격화시킬 뿐이니 만큼 그저 양시양비의 선에서 그만 마무리되어야 할 것이란 뜻이 강하게 담겨져 있었다.0072)이이는 사림이 우세해진 당시에 있어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훈척정치 아래에서 파생된 많은 사회적 모순과 병폐를 개혁하여 민생의 고통을 해결하는 일이라고 판단한 듯 하다. 그러므로<東湖問答>이나<萬言封事> 등에서 폐정개혁을 위한 경장론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것의 실현은 용이하지 않았다. 임금의 적극적인 지지도 필요하였거니와 정치를 담당할 사류의 힘과 재주를 함께 모을 필요도 절실하였다. 하지만 당시와 같이 사림이 분열되어 동·서인이 부질없는 시비논쟁에 매달려있는 상황에서 그것의 실현은 바랄 수 없었다. 그가 三尹事를 계기로 한 동인의 심의겸과 서인공격에 대해, 그것이 국가의 治亂이나 민생대책과 무슨 상관이 있기에 그리도 심한가 반문하고, 설사 동인이 군자의 이름을 얻고 서인이 소인으로 낙인찍힌다하여 그것이 피폐한 민생에 무슨 도움이 되느냐고 비난한 것은(≪栗谷全書≫권 7, 疏箚 5, 辭大司諫兼陳洗滌東西疏) 바로 이와 같이 민생문제를 최우선의 해결과제로 보는 그의 시국관의 일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동·서인의 갈등에 대해 동서명목을 깨뜨려 사림의 결속을 목표로 하는 그의 주장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시국관의 소산이기도 하였다. 이를테면 이 양시양비는 율곡의 입장에서 볼 때 소모적인 논쟁에 불과한 東是西非論에 대항하는 의미를 지녔으며 또 그 주장을 희석시키는 구실을 하였다.

 한편 동인·서인 모두에 사류로서는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나 심지어는 간사한 자들까지 섞여 있어 사류 재결속을 위한 조제책의 시행에는 반드시 이들을 먼저 구별해 내어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辨別淑慝(때로는 濁流를 치고 淸波를 일으키게 한다는 즉 악을 징벌하고 선을 드러내게 한다는 뜻의 激濁揚淸이라고도 씀)이었다. 율곡은 서인 안에 심의겸이나 三尹과 같은 열등하거나 흠 있는 인물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동인 속에도 앞서 老黨에 속하였던 流俗의 무리가 뒤늦게 가담하였기에 동인 역시 사류의 순수성을 잃고 淸濁과 善惡이 뒤섞여 있기는 마찬가지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군자소인론까지 거론하며 三尹事를 들어 東正西邪를 국시로까지 삼으려는 동인의 주장은 그만큼 설득력이 없다는 것으로 동인의 공세를 둔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율곡의 이러한 양시양비와 변별숙특론은 동시서비와 나아가 동정서사론까지 내세우는 동인 주장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동인은 율곡이 “서인을 부추기고 동인은 억제하려 한다(扶西抑東)”고 까지 의심하면서 그에 대한 불만을 증폭시키며 비난의 수위를 높이게 된다. 정언 宋應泂과 집의 許晉·洪渾 등이 白仁傑 상소의 破朋黨 부분을 이이가 代述한 일로써 탄핵하고 나와 한동안 조정이 시끄러웠던 사건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0073)≪宣祖修正實錄≫권 13, 선조 12년 7월.

 그러나 율곡의 조제보합론은 박순·노수신 등 대신과 그 당시에 명사로서 이름이 높던 김우옹·유성룡·이발·성혼·정인홍 등의 지지를 받았다. 특히 김우옹·이발·유성룡 등 동인의 여론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인사가 동인내 浮薄者의 과격한 주장을 억제하고 그들의 공격으로부터 율곡을 옹호한 것은, 그가 추진하는 동인·서인의 타협에 의한 정국 안정에 적지 않게 기여하였다.0074)예컨대 白仁傑疏의 代述事로 정언 宋應泂이 李珥를 탄핵했을 때 교리 金宇顒이 “宋應泂必是小人也 欲乘此機會 陷害君子也 當劾遞”라 하여 구원한 것을 들 수 있다(≪經筵日記≫선조 12년 7월). 그리하여 비록 열세의 상태에서나마 서인도 三尹事로 인한 곤경에서 벗어나 정치세력으로서의 일정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고, 율곡 역시 이러한 정국 안정을 바탕으로 貢法의 개정, 군적의 개편, 지방 군현의 합병, 監司久任論 등 경장론을 펴면서 현실에서의 적용에 주력할 수 있었다.0075)≪栗谷全書≫권 7, 疏箚, 陳時弊疏(壬午).

 동인세력의 압도적 우세하에 이이의 조정 노력에 의해 서인이 겨우 명맥을 유지하면서 소강 상태를 보이던 정국은, 선조 16년(1583)에 들어와 이이가 동인으로부터 직접 공격을 받게 되면서 큰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되고, 이런 과정에서 이이의 西人自定과 그 지지세력 및 문인들의 참여로 서인이 외척당의 혐의에서 벗어나 政派로서의 존재를 확립하게 되어 비로소 朋黨政治라는 하나의 정치형태를 실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이이가 공격대상이 된 것은 앞서 밝힌 대로 양시양비와 변별숙특론이 扶西抑東하는 기만적 논리라고 동인으로부터 의심 받아왔던 데 기인하지만, 그 직접적인 계기는 선조 15년 그가 이조판서로 발탁되었을 때 이를 사양하면서 올린 상소0076)≪栗谷全書≫권 8, 啓議, 辭吏曹判書 三啓(壬午).의 내용 중에, 이조전랑의 淸選權 행사가 갖는 문제점을 지적한 데 있었다. 본래 이조판서의 자리는 國政과 世道를 自任하는 인물이 임명되어 인사권을 쥐고서 한때의 맑은 논의(淸論, 곧 輿論)를 주재하게 마련이었는데, 오늘날에는 그 중요한 言官의 선발권(館閣淸選)을 이조전랑에게 한가지로 맡겨 버리고, 판서는 그저 보잘 것 없는 말단 관리를 선발하는 권한만 행사하게 되었으므로 본말이 전도되어 기강이 서지 않는다고 한 것이 그 요지였다. 자신이 분명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 의도가 전랑이 행사하는 언관의 선발권을 판서에게로 넘겨 전랑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판서로 하여금 명실상부한 인사권 장악은 물론, 그에 토대한 여론 주재권까지 갖게 한다는 데 있음은 명백하였다. 다른 사류들과 마찬가지로 그 스스로도 낭천권의 확보를 통한 낭관권의 강화에 힘써오던 이이가, 이때 와서 거꾸로 낭관권 자체를 문제삼으며 모든 권한을 판서에게 귀속시켜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되는 주장을 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그의 입장에서 볼 때 민생문제의 해소나 국난의 타개와는 하등 관계없이, 그저 상대당을 배척하기에 급급해 인신공격이나 일삼는 일부 동인들의 무분별한 언론행위에 적절한 통제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데 있을 것이다.

 사실 이 시기에 이르게 되면 이이 역시 집요하게 東正西邪를 고집하는 동인 언관들을 怪激을 일삼는 浮薄之徒로 몰아 붙이면서, 이들의 발호를 적절히 통제하지 못하는 유성룡·이발·김우옹 같은 동인계 名士에 대한 실망과 불만을 감추지 않았다. 이제 그로서는 폐정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사류의 힘을 결집시키는 保合士類의 방법으로서, 이떄까지 취해오던 동인사류와의 연결을 통한 조제방식을 그대로 계속할 것이냐, 아니면 다른 대책을 모색할 것이냐 하는 기로에 서게 되었다. 이를테면 이조전랑의 淸選權행사에 대한 율곡의 문제 제기는 이런 여러 가지 배경 위에서 나오게 된 일종의 여론 탐색용 시도였던 셈이다.

 예상대로 동인이 주도하던 조정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그들은 전랑이 갖던 청선권의 판서에의 귀속 주장을, 이이가 권력을 쥐고 마음대로 휘두르고자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보고 배척해마지 않았으며, 이로 인하여 그의 경장론까지도 일을 꾸미기 좋아하는 자의 國家典禮를 훼손하는 무모한 계획으로 비판하였다.0077)≪宣祖修正實錄≫권 16, 선조 15년 정월. 여기에는 유성룡·이발·김우옹 같은 그 동안 그를 지원해 오던 동인계 명사들까지 가담하였다. 결국 이이는 이조판서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말았지만 이제는 정치적 입장의 차이를 분명히 드러내게된 兩者의 불신이 깊어지는 속에 정국은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어 나갔다.

 선조 16년의 이이에 대한 동인의 공격은 마침 여진의 추장인 尼蕩介의 침입을 받아 병조판서로서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몇 가지 실수가 문제되면서였다. 몇 가지 실수란 戰場으로 보낼 말을 확보하기 위해 射手에게 말을 바치면 출정을 면제해 주기로 하고, 미처 임금의 재가를 받기 전에 이를 시행하였고, 또 임금의 부름을 받고 대궐로 들어가던 중 현기증으로 內兵曺에 누웠다가 그대로 나온 일을 말한다.0078)이에 대해서는 이이가 死去한 뒤 그 門人 李貴가 亡師를 변호하기 위해 올렸던 상소에 자세하다(≪宣祖修正實錄≫권 21, 선조 20년 3월, 成均進士趙光玹李貴等疏). 이에 持平 李景山栗을 위시한 대사헌 李墍·집의 洪汝諄·대사간 宋應漑·헌납 柳永慶·부제학 權德輿·전한 許篈·洪進·洪迪 등 동인으로 구성된 三司가 들고 일어나, 임금의 허락이 내리기 전에 시행한 것은 권력을 오로지 하며 함부로 휘두른(專擅權柄) 죄요, 부르는데도 병을 핑계하고 오지 않은 것은 교만하며 임금을 가볍게 보는(驕騫慢君) 죄라고 하며, 심지어는 誤國小人으로까지 몰아 심히 공격하였다.0079)≪宣祖修正實錄≫권 17, 선조 16년 6월, 兩司의 啓 및 대사간 宋應漑 辭職啓. 실상 위에 열거한 한두 가지 실수를 專擅慢君의 죄목으로까지 몰아가는 데에는 동인 내에서도 異論이 없지 않았다. 대사성으로 있던 김우옹이, 이이가 뜻은 크지만 재주가 성글고 포용력이 적기 때문에 사류의 공격을 받게 되었음을 말하면서도, 그를 공격한 삼사에 대해 뜬소문을 만들어 일을 꾸미기 좋아하는 무리라고 단정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0080)≪宣祖修正實錄≫권 17, 선조 16년 6월, 대사성 金宇顒 上疏. 그러나 동인 내에서 이런 자세를 가진 인사는 거의 없었다. 선조 15년(1582)의 전랑 淸選權 문제로 소원해지기는 했으나, 평소 동인·서인의 조제보합론에 뜻을 같이해 동인의 과격한 언론을 制抑해 오던 유성룡·이발 등이 이이에 대한 탄핵이 나오기 직전, 종실이던 慶安令 瑤에 의해 동인의 괴수라고 지목, 비난받음으로써 이들이 避嫌하여 조정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이이가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영의정 박순을 위시한 서인계 관료들과 성혼 등 사림의 衆望을 받던 인물들의 변호 및 정철이 배후에서 지휘했다고 말해지기는 하지만 성균생원 柳拱辰 등 462인의 이이 지지 상소를 위시한, 전라도·황해도 유생들의 상소가 답지하였다.0081)이하의 서술은≪宣祖修正實錄≫권 17, 선조 16년 6월 이후 12월까지의 기록에 의거했다.

 무엇보다도 이이에게 힘이 된 것은 동인의 일방적인 독주에 견제의 필요성을 느낀 임금의 비호 및 동인계 삼사 인물에 대한 탄압이었다. 임금은 다시 이이를 이조판서에 임명하여 두터운 신임을 나타내는 한편, 三司의 이이를 향한 근거 없는 공격이 이조전랑이 浮薄한 무리를 끌어들여 뒤에서 조종한 때문이라고 하여, 청의가 대부분 전랑에서 나온다(淸議多出於詮郞)던가 權奸을 막는 구실을 한다는 명분을 앞세운 동인의 반대를 물리치고 이조전랑의 薦望法(自薦權)을 혁파하였으며, 이이 공격에 앞장섰다하여 부제학 권덕여를 성주목사, 응교 홍적을 장연현감, 대사간 송응개를 장흥부사, 전한 허봉을 창원부사, 홍여순은 창평현령, 洪進을 용담현령, 金瞻을 지례현감, 김응남은 제주목사로 내몰고, 나아가 송응개·박근원·허봉을 조정을 어지럽히는 怪激분자라 해서 귀양보내고 말았다. 그리고 정철을 예조판서, 홍성민을 부제학, 이해수를 대사간, 윤근수를 대사성, 성혼을 이조참의, 白惟咸·鄭昌衍을 이조전랑으로 삼는 등 서인을 대거 등용하였다. 박순이 영의정에 있고 이이가 이조판서로 임명되었던 것까지 합하면, 이제 서인이 인사권은 물론 언론권까지 장악해 사실상 정국을 주도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 셈이다.

 서인의 우세는 곧 정파로서의 확립과 연결된다. 동인들로부터 탄핵을 받고 서인이 이것을 변호하는 과정에서 이이는 본의이던 아니던 간에 서인의 名目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아마도 그 스스로 원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앞서도 밝혔듯이 선조 15년경부터 그는 東人이 流俗의 참여로 사류로서의 순수성을 적지 않게 잃어가고 있으며, 따라서 그들의 공세는 사류가 갖는 淸議로서의 의미보다는 상대 세력의 억제와 축출을 통해 自黨의 권력 독점을 도모하려는 偏論的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보고 있었다. 더구나 유성룡·이발·김우옹 같은 명사가 동인 내에 있으면서도 이런 편론적 행위를 制抑하지 못하는 데 크게 실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에서 그가 추구하는 사림정치하의 경장책 추진에 필요한 사림의 힘을 모으기 위해, 동인·서인으로 분열된 사류를 다시 하나로 재결속시키려는 조제보합의 실현은 바랄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그때까지 주장해 오던 자신의 조제보합론을 다시 재검토하였으며 그 결과 사류의 재결속이 무망하다면, 차선책이기는 하나 사류 분열을 기정 사실로 인정한 위에서 동인에 맞설 수 있도록 사류의 당으로서 서인의 세력을 강화시켜 양자가 상호 비판하고 견제함으로써 사림정치를 운영해 나갈 수 있으리라는 결론을 내린 듯하다. 그가 서인으로 自定한 것과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을 때 서인만 專用한다는 비난을 무릅쓰면서까지 서인계 인물들을 정계 要路에 포진시키고, 서인계 신진인 백유함을 이조전랑으로 삼아 신진사류를 다수 끌어들여 사류당으로서의 서인의 면모를 일신하려 한 것은 이런 면으로 설명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李珥의 서인 자정과 그 지지세력 및 문인들의 가담, 그리고 정치적 우세를 배경으로 한 신진사류의 흡수 등은 붕당으로서의 서인의 존재를 확립케 하였다. 정계 요직을 서인이 다수 점거한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退溪·南冥을 앞세우는 동인에 비해 아직 학통상으로는 열세였는지 모르나 현실적인 학문 수준에서는 이이·성혼의 참여로 그들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으며, 이이·성혼의 학연을 따라 경기·황해·충청 및 전라도 지역의 일부에까지 확산된 서인계 사림의 분포는, 영남지역을 주축으로 타 지역이 부분적으로 참여한 동인계 세력에 逼近할 정도였다. 前日의 심의겸을 중심으로 한 선배사류 數三人에 불과하다고 말해지던 때의 서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세력 신장이었다. 이제 조정에는 참여인원이나 정치세력, 그리고 학통 및 학문적 수준에서도 서로 상대되는 두 개의 붕당이, 사림정치라는 공동의 목표구현을 위해 공론을 앞세워 서로 비판하고 견제하는 정치형세를 이루게 되었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두 가지 형태의 붕당 개념, 즉 개인간의 갈등과 대립에 그 친척·친구가 각기 편들어 대립하는 私黨 및 歐陽修·朱子에 의해 확립된 君子朋·小人黨의 형태와도 다른, 第三의 개념에 의한 公黨 형태였다.

 사류가 분열하여 각기 하나씩의 붕당을 형성한 것이 가장 큰 특징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을 奸黨의 결성으로 보아≪大明律≫ 奸黨條의 죄목을 적용할 수는 없고, 더욱이 군자당 소인당의 변별론을 적용하는 것도 불합리하였다. 사류가 모두 군자인 것만은 아니며 그 속에는 열등한 자도, 심지어는 外君子 內小人과 같은 존재도 끼어 들 수 있기 때문이다.0082)일찍이 朱子가 송나라의 朋黨을 논하면서 “단지 상대편이 군자가 아니라는 사실만 알았지 자기 당 사람이 반드시 소인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몰랐다”라고 하여 사류속에 小人이 잠재해 있을 수 있음을 말한바 있지만(≪朱文公文集≫권 28, 與留丞相書 7월 10일), 서인을 사류당으로 확립하려 노력하던 이이 역시 “오늘날 서인편이라고 해서 반드시 君子라고만 할 수 없으며 東人측이라 해서 반드시 小人이라고만 할 수 없다”고 한 것(≪宣祖修正實錄≫권 17, 선조 16년 9월, 이조판서 이이의 상소)은 이런 사정에서 나왔던 것이다. 각 당은 이제 자체 내부에서의 정화과정을 거쳐 公黨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자 노력해야 했으며, 상대당을 타도의 대상이 아닌, 사림정치의 실현을 위해 같이 노력하는 경쟁 상대인 공당으로 인정하며, 공론을 앞세워 당당한 정치명분으로서 사림정치의 실현을 위해 정권장악을 다투는 정치형태 곧 붕당정치를 지향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말해지는 선조 8년(1575)의 乙亥黨論 이후의 동서붕당에서가 아니라, 선조 16년의 동서붕당의 확립에서 붕당이 비로소 출현했다고 보는 所以는 여기에 있다. 중국의 붕당이나, 조선전기의 붕당과도 다른 조선중기 정치상의 큰 특징을 보이는 붕당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제 3의 붕당, 즉 사류의 붕당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성립한 붕당에 토대한 붕당정치는 초창기여서 그런지 선조말까지는 그 운영에 있어서 파행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대체로 동인이 우세한 가운데 선조 22년의 鄭汝立獄으로 잠시 서인이 정권을 장악해 동인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여서 마침내 다수의 동인 名士가 역옥관련 혐의를 받고 죽임을 당하는 불상사를 겪었다. 그러나 그 후유증으로 서인은 선조말까지 거의 실세한 상태에서 겨우 정계의 일각을 차지하는 데에 머물렀으며, 남인·북인으로 갈라선 뒤 임진왜란 때의 척화 주장으로 집권 명분을 갖게된 북인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大北·小北으로, 다시 대북이 骨北·肉北 등으로 권력 향배에 따라 재분열하는 양상을 보였다. 그리고 그 틈을 타 왕실과의 戚分을 앞세운 柳永慶이 정권을 좌우하게 됨으로서 사림정치에서 가장 경계하는 척신정치가 재현되는 현상마저 나타났다.

 이와 같은 사림정치에 역행하는 척신정권이 나타났다는 것은 선조 즉위초의 구체제 청산이 혁신적이지 못해 그 잔재가 남아있었던 사실과, 특히 정여립의 옥으로 인한 붕당간의 대립 열도가 지나치게 높아 붕당정치 본래의 조제론에 의한 상호비판과 견제 구도가 제대로 적용될 수 없었던 데 이유가 있었다.

 붕당 간 조제의 실패를 틈탄 척신정치의 대두는 필연적으로 왕위계승을 둘러싼 조신간의 갈등을 격화시켰다. 그리하여 선조 말년의 정치상황은 그 동안 구축 해놓은 조제중심의 붕당정치가 크게 동요되는 가운데 장차 광해군 치하의 一黨專制 추세에서 벌어질 정치판의 비극을 胚胎해가고 있었다.

<鄭萬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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