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3. 붕당의 성격

3. 붕당의 성격

 붕당은 조선 선조대에 처음 나타난 정치 현상만은 아니었다. 그것이 처했던 역사적 조건의 차이에 따라 내용이나 성격은 조금씩 달랐을지는 모르나 붕당의 명목은 중국에도 있었고, 선조 이전의 실록기사에서도 붕당의 용어를 찾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붕당들에 대한 당 시대 사람들의 인식이나 평가 등, 그것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언급도 적지 않게 모을 수 있다.

 따라서 선조 6년(1573)∼7년경 외척의 정치관여 문제와 관련된 沈義謙·金孝元 사이의 是非에서 비롯되어 마침내 士林의 分岐에 따른 東人·西人 명목의 출현, 그리고 李珥에 대한 탄핵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동인 言官과의 일대 논쟁 끝에 이이의 서인 自定으로 政派로서 성립을 보게 된 동인·서인의 붕당이 갖는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이전시기의 붕당에 관한 인식, 즉 朋黨論을 먼저 살피는 것이 순서이겠다.

 朋黨이란 본래 친근한 벗을 뜻하는 同類·同志의 뜻인 朋과, 利害 때문에 모인 小人의 집단을 뜻하는 黨이란 상반된 뜻을 지닌 두 글자의 合成語인데 이미≪戰國策≫이나≪史記≫에서부터 “밝은 임금은 붕당의 문호를 막는다(明主塞朋黨之門)”든가 “붕당을 막아 백성을 독려한다(禁朋黨 以勵百姓)”0083)≪戰國策≫趙策 및≪史記≫蔡澤傳.는 데서 보듯이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더욱이 後漢末 환관들에 의해 李膺·陳蕃 등의 善類를 제거하는 黨錮의 禍가 일어나면서 붕당이란 용어는 정치상에서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붕당 명목을 지닌 정치집단으로서 역사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唐代 牛僧孺·李德裕 사이의 牛李黨爭이 황제인 文宗으로 하여금 “河北의 도둑을 쳐서 없애기는 쉬우나 조정의 붕당은 없애기 어렵구나”라는 탄식을 토하게 할 만큼 정치상의 폐단을 야기하였고, 뒤이은 宋代의 新·舊法黨사이의 장기간에 걸친 대립과 내분이 결과적으로 이민족인 金의 침입을 유발, 北宋의 멸망까지 초래케 함으로써 붕당은 이제 군주권을 침해하고 조정을 어지럽히며 국력을 약화시키는 데 그치지 않는 亡國의 요인으로까지 인식되기에 이른다. 明의 법전인≪大明律≫奸黨條에 “조정에 있는 관원으로서 붕당을 交結하여 조정의 정치를 문란하게 하는 자는 모두 목 베이며 妻子는 종으로 삼고 재산은 관에 몰수한다”고 하여 붕당 결성을 죄목으로 규정해 놓은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러나 중국의 붕당 인식이 부정적인 시각 일색은 아니었다. 중국 역사상 붕당이 장기간에 걸쳐 가장 활발하였던 시기라고 말해지는 宋代에는 붕당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에서 그 존재를 합리화하거나 붕당활동을 정당화하는 붕당론을 펴는 견해도 적지 않았다. 북송의 歐陽修와 남송의 朱憙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 구양수는 그의 유명한 ‘朋黨論’에서 利를 좇는 小人은 일시적인 私黨(僞朋)을 이룰 뿐이지만 君子만이 진정한 朋黨(眞朋)을 이루므로 붕당을 위험시할 필요도 없고 오히려 임금은 이 군자의 붕당을 벼슬로 끌어와야 한다고 하였다. 군자·소인의 변별기준이 다분히 주관적이기 때문에 어떤 정치집단을 眞朋으로 삼고 僞朋이라 할 것이냐가 문제되겠지만, 그러나 이때까지 부정적으로 인식되던 붕당은 군자의 집단으로 간주되어 비로소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의 적극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었으며, 상대방으로부터 붕당의 죄목으로 공격을 받는 데 대해 자신들을 방어할 수 있는 논리를 마련하게 되었다.

 같은 붕당긍정론을 폈으나 朱子의 논리는 조금 달랐다. 그는 우선 붕당의 폐단을 인정하고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붕당을 싫어하게 마련이라는 일반론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붕당은 조정 신하 사이의 서로 다툼에 그칠 뿐이지만 그것을 미워해 없애고자 한다면 나라마저 망하게 되는 일이 종종 있다”0084)≪朱文公文集≫卷 28, 與留丞相書(4월 24일).고 하며, 북송의 哲宗연간에 舊法黨(元祐黨)을 붕당의 죄목으로 몰아 일시에 축출했다가 蔡京 등 소인의 전횡을 허용, 결국 靖康의 변을 만나 나라가 망한 역사적 경험을 예로써 들었다. 일반적으로 말해지는 붕당망국론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로써 본다면 진정한 의미의 붕당 즉 군자당인 구법당을 제거한 것이 도리어 亡國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그에 있어서 붕당은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군자를 정치로 불러들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정치형태였다. 이러한 붕당긍정적 시각 위에서 朱子는 君子小人에 대한 철저한 변별과 변별한 뒤의 철저한 進君子·退小人의 이행을 내용으로 하는 붕당론을 전개하였다.0085)諸橋轍次,<朋黨の成因と儒學目的の分化>(≪諸橋轍次 著作集≫第1卷).

 군자소인변은 주자 이전에도 제기되었던 논리이지만 주로 붕당이 군자의 집단임을 강조하려는 데 초점이 주어졌던 데 비해 그의 그것은 붕당내의 구성 인원을 대상으로 하였다는 데 본질적인 차이점이 있다. 그는 신법당이 소인이고 구법당이 군자라는 견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구법당의 사람들이 “단지 異己者(신법당을 말함)가 군자가 아니라는 점만 알았을 뿐, 同己者(구법당임)가 반드시 소인이 아니라고 만은 할 수 없다(즉 자기 당 안에도 소인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0086)≪朱文公文集≫권 28, 與留丞相書(7월 10일).라 말한 데서 보듯이 같은 붕당 내에도 군자소인의 분별은 엄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같은 붕당내의 인물에 대해 善人과 惡人을 살펴 구별해 내려는 辨別淑慝이나 濁流를 쳐서 淸波를 일으키게 한다는 뜻의 激濁揚淸을 강조했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런 면에서 그의 붕당관은 붕당=군자집단으로 보는 구양수의 그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붕당=군자·소인 병존이라는 특성을 함께 지니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宋代에는 구양수·주희의 붕당론 이외에도 調停論이라는 논리가 있었다. 그것은 신법당과 대립해 오던 구법당이 다시 洛黨(程頤)·蜀黨(蘇軾)·朔黨(呂公著·劉摯)으로 나누어져 상호갈등이 심화되자 이를 우려한 范純仁·呂大防 등이 三黨의 조화와 절충을 꾀하면서 나아가 신법당의 일부인물까지 收用하며 붕당간의 대립을 완화시키려 한 데서 나왔다. 각 붕당의 인재를 함께 벼슬에 불러들인다 하여 並用論 또는 俱收並蓄論이라고도 말해지는 이 조정론자의 붕당관은 그것을 죄악시하는 부정적인 시각은 아니었으나 같은 구법당계이던 구양수의 군자붕당설과도 거리가 있었다. 예컨대 范純仁은 진붕·위붕에 대한 변별의 어려움을 지적하면서 붕당이, 자기 당 사람을 옳다하고 다른 당 사람을 무조건 배척하는(黨同伐異) 폐단의 위험성을 갖고 있다고 하여 긍정적으로만 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당론이 심하지 않은 자를 불러들여 궁극적으로 無黨의 상태를 구현한다는 것이었다. 黨禍를 경계하여 붕당사이의 대립의 열도를 완화시키려는 극히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한 논리라 하겠으나, 이들의 후배로서 黨人 내의 辨別淑慝을 앞세우던 朱子에 의해 그것은 화란을 부르고 일을 망치는 것으로 배격되었다.0087)정만조,<朝鮮時代 朋黨論의 展開와 그 性格>(≪朝鮮後期 黨爭의 綜合的 檢討≫,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2), 89∼95쪽.

 이상의 붕당론으로 볼 때 중국에서의 붕당은 논리상 크게 세 가지 형태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①사사로운 이해 관계를 쫓아 결성된 私黨이고, ②道를 같이하고 그 실천에 힘쓴다는 군자의 眞朋이며, ③善類와 不善類, 심지어는 군자와 소인으로 대비되는 존재까지 병존해 있는 붕당이었다. 현실적인 면에서 하나의 정치집단 내지 정치세력에 대해 어떤 붕당 형태를 적용하여 성격 규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예컨대 임금의 처지에서는 아무래도 붕당 私黨的 견해를, 집권당의 측면에서는 君子眞朋論을 적용하려는 식으로 어떤 객관적인 기준을 설정하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조선에서의 붕당인식도 초기에는 개인적 차원의 갈등과 상호배척에 그 친척이나 친구가 각기 편을 들어 무리를 이루어 대립하는 ①의 사당론적인 부정적인 범주에 머물렀다. 성종 9년(1478) 도승지 任士洪이 朴孝元·表沿沫 등 몇 명의 언관들과 결탁하여 정적인 玄錫圭의 제거를 획책하다가 거꾸로 붕당으로 지목되어 탄핵을 받았던 일0088)≪成宗實錄≫권 91, 성종 9년 4월 경신.이나 연산군 때의 두 차례에 걸친 사화에서 피화인의 죄목으로≪대명률≫의 交結朋黨이 적용되었던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붕당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이해가 깊어지기는 중종대 趙光祖 등 사림세력이 정계로 진출하면서부터 였다. 그들의 논리는 구양수와 주자가 주장한 군자소인변 중심의 붕당론에 토대하였다. 그들은 스스로를 ②의 군자당으로 설정하고 사우관계에 의한 자체결속을 바탕으로 古道의 실천에 힘쓰는 한편 公道의 회복에 주력함으로써 군자당의 위상에 맞도록 자체정비를 하면서, 정치상의 도학을 실천하려는 정치집단으로서의 그들 존재를 합리화하였다. 따라서 붕당의 결성은 至治를 실현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군자의 進用을 위해 불가피한 정치현상이며, 그러므로 그런 붕당은 임금까지 들게 해야한다(引君爲黨)고 할 정도의 公黨的 존재로 설명되었다. 여기서 조광조 등이 수립한 정치집단으로서의 붕당은, 종래의 단순한 친소관계나 이해득실에 따라 취합한 私黨的인 데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 공당적 성격을 갖게 되었다 하겠으나, 곧 그들과 대립하던 공신계에 의해 도리어 조정을 어지럽히는 사당으로 몰려 죄를 입음으로써, 군주제하에서 신료간의 집단형성(政派)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는 일단 다음 세대로 넘겨지지 않을 수 없었다.0089)정만조, 앞의 글, 99∼105쪽.

 동인·서인의 붕당이 출현한 선조대에서 붕당에 관한 논의가 처음으로 크게 일어나기는 선조 5년(1572) 영의정을 지낸 李浚慶이 죽음에 임해 올린 遺箚에서, 당시의 조정에서 행실과 학문을 닦지 않고 高談大言이나 일삼는 풍조가 있어 장차 붕당의 조짐이 보인다고 지적한 데서부터였다. 고담대언을 일삼는 무리가 舊臣과 대립관계에 있던 연소한 관료(즉 士類)를 지목하였음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으며, 따라서 이준경의 의도는 사류를 사당적 의미를 지닌 붕당으로 몰아가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므로 사류가 이준경을 격렬히 비판하고 나온 것은 당연하였다. 그러면서 그들을 붕당으로 모는 주장에 대응하여 그들의 정치적 존재와 활동을 변호하고 정당화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들을 대표하는 李珥에 의해 정립된, 구양수와 주희의 붕당론에 토대한 군자붕소인당 중심의 붕당긍정론-군자당이라는 단서를 달고 있기는 하지만 이이는 심지어 붕당이 성할수록 임금은 더욱 聖君이 되고 나라는 더욱 편안하게 될(黨益盛 而君益聖 國益安) 것이라 하여 붕당이 갖는 정치적 기능에 대한 적극적인 평가까지 시도하였다-은 이런 배경 아래에서 나왔던 것이다.0090)정만조, 위의 글, 105∼112쪽.

 그러나 이와 같이 적극적인 붕당긍정론까지 피력한 이이에게 조차도 모든 붕당이 다 정당화 될 수는 없었다. 관료나 사류사이의 사적인 친소관계에 따른 붕당은 비록 소인들이 결성한 사당과는 다르다 하더라도 바람직하지 않고 타파되어야 할 것이었다. 선조 8년 이른바 乙亥黨論이라하여 심의겸과 김효원 사이에 갈등이 표면화되고 그들을 각기 지지하는 士類 內 선후배사이의 분열로 붕당을 형성하는 조짐이 나타나자 심의겸·김효원 두사람의 外補를 통해 그것의 해소를 적극 추진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물론 심의겸·김효원 두 사람과 그들을 각기 지지하던 선후배들은 상대편을 소인으로 몰았다. 그러기에 심의겸·김효원 시비가 나온 지 2∼3년도 안되어 동인·서인이라는 朋黨名目이 형성되었고 결국 16년 정파로서의 붕당이 성립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동인·서인의 정치집단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전개된 붕당론은, 그들 모두 朱子 성리학의 기반에 있었던 만큼 당연히 宋代 구양수·주희의 그것을 중심으로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에서 중국에는 현저하게 드러나지 않았던 새로운 붕당론이 나왔다. 이른바 調劑論이 그것이다. 조제론은 사림의 분열이 가져올 정치적 위기와 개혁을 추진할 사류의 역량 결집에 불리하다는 판단에서 제기되었다. 처음에는 兩是兩非로서 붕당명목을 타파하고 동인·서인을 함께 벼슬에 불러들이는 방식이었으나 사류 분열에 따른 정치적 위기에 대한 우려가 크게 줄어든 뒤에 가서는, 동인·서인이 각기 사류의 붕당으로서 존속하면서 辨別淑慝과 激濁揚淸에 의해 자체 내부의 深化를 추진해 公黨으로서의 면모를 갖추면서, 사림정치의 실현을 위해 같이 노력하는 경쟁적 상대인 공당으로서 인정한 위에, 집권당에 의해 상대 당 인재를 選別收用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조제론에서 보이는 붕당의 개념은 구법당이 洛黨·蜀黨·朔黨으로 分岐한 데 대한 朱子의 붕당인식, 즉 同己者가 반드시 군자인 것만은 아니며 異己者라하여 반드시 小人만은 아니라는, 善·不善, 君子小人이 하나의 붕당에 병존할 수 있다는 데서 논리적 근거를 구하고는 있지만, 실은 사류의 분열에 직면하여 ①의 사당적 개념이나 ②의 군자소인의 붕당론을 적용하기에 곤란해진 상황에서 나오게 된 제 3의 붕당론이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면 이 시기 동서인의 붕당으로서의 성격은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이 때는 아직 分朋의 초창기였기 때문에 이후의 붕당에서 보이는 세습성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조선 붕당의 특징이라는 학연성도, 동인에 退溪·南冥의 문인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고, 서인에 李珥·成渾과 학문적 교류가 있는 인물이 가담해 있는 점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성향 역시 그리 강하게 드러나지는 않은 것 같다.

 초기의 동인·서인의 붕당에서 비교적 확실하게 찾을 수 있는 것은 출신기반과 관련된 지역성의 요소이다. 대체로 동인의 주축은 영남과 호남 등 지방 출신자이거나 그곳과 연고가 있는 인물로 되어 있으며(박순·구봉령 등의 예외가 있기도 하다), 서인은 특히 서울과 경기도 일원에 기반을 두고 대대로 벼슬하여 온 世族집안 출신들이 많았다. 그러기에 외척인 심의겸과 가까울 수 있었으며 초기에 외척당으로 지목되었던 것이다. 서인으로 지목되기 전 선배사류로 있으면서 그들이, 출신기반이 같으면서도 權臣政權과의 연결문제로 舊臣세력과 대립하고 배척했던 이유도 이러한 데서 구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分黨 초기의 동인·서인이 갖는 붕당으로서의 성격은 이러한 약간의 차이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주자성리학적 이념의 현실정치에서의 적용을 희구하며 이를 위해 노력하는 士族 내지 士林의 이념을 가진 정파였다는 데 있다고 하겠다.

<鄭萬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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