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1. 붕당정치의 성립
  • 1) 대북정권의 몰락

1) 대북정권의 몰락

 광해군대(1608∼1623)의 정치가 당면한 가장 큰 과제는 임진왜란의 피해를 복구하는 것이었다. 사림파들이 이른 시기부터 추진해온 大同法을 경기도를 대상으로 시행하기 시작하였고, 토지와 호적의 조사를 수행하여 산업과 국방의 기반을 강화하였다. 또 궁궐의 재건 등 일련의 사업을 통해 국왕으로 대표되는 사회체제를 강화하였고,≪東國輿地勝覽≫·≪經國大典≫·≪高麗史≫·≪三綱行實≫등 여러 서적을 복간하고 지방의 史庫를 정리하여 문화의 정리와 보급에도 큰 성과를 올렸다.≪東醫寶鑑≫등 의서의 편찬과 보급은 전란 이후의 심한 질병으로부터 民의 고통을 덜기 위한 노력이었다.

 당시 정치를 주도한 北人은 특색있는 정책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국가 재정을 늘리고 민생을 구하기 위해 銀鑛을 개발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동전 주조, 시장 개설, 대외무역 등 상업을 진흥하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後金의 성장으로 인해 급변하고 있던 동아시아 국제 정세 속에서는 전체적으로 華夷論의 시각을 유지하면서도 구체적인 방어력의 증강에 주력하였다. 火器都監을 세워 새로운 火砲를 개발하고, 각국에 대한 정탐 활동을 활발히 한 것 등이 그 내용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북인의 독점적인 정국 주도와 그로 인한 仁祖反正으로 인해 뒷 시기로 순조롭게 이어지는 데 큰 장애를 겪게 되었다.

 광해군대는 북인, 그 중에서 大北 정파가 우위를 차지한 상태에서 출발하였다. 선조 말년에는 전반적으로 북인이 우세를 점하고 있는 가운데, 柳永慶 등이 선조의 후원을 받으며 그의 적자인 永昌大君을 지원하고 있었던 데 반하여 鄭仁弘 중심의 대북이 세자인 광해군을 지원하고 있었다.0091)이하 광해군대 정국에 대해서는 대개 韓明基,<光海君代의 大北勢力과 政局의 動向>(≪韓國史論≫20, 서울大, 1988) 참조.
李綺南,<光海朝 政治勢力의 構造와 變動>(≪北岳史論≫2, 1990)은 광해군대 정국의 전개를 위 논문과 대개 동일하게 설명하되 국왕의 왕권 확립 시도를 좀더 강조하였다.
그런 중에 선조가 갑자기 죽자 유영경 일파의 방해를 뚫고 세자인 광해군이 즉위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대북 중심의 북인이 단순히 광해군을 지원했다는 것만으로 득세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경상우도 지역을 중심으로 한 향촌 기반, 임진왜란 중 의병장으로 쌓아 놓은 공로와 主戰論者로서의 명분, 그리고 曺植의 학문을 이어받은 강한 學緣 등이 그들 세력의 기반이 되고 있었다.

 대북세력은 정인홍과 李爾瞻을 주축으로 鄭昌衍·趙挺·李慶全 등 선조대 이래의 중진들과 鄭造·尹訒·韓纘男·朴鼎吉·李偉卿·閔夢龍·朴楗·李挺元·尹孝先·朴梓·任袞·白大珩·孫倜·李惺·趙挺立·許筠·申景禧·姜翼文·吳汝檼·柳潚 등 주로 삼사나 이조를 중심으로 활약하던 소장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광해군 초반의 인사 정책은 대북 일변도만은 아니어서, 국왕과 연결된 柳希奮·朴彛敍 등을 중심으로 한 小北 세력은 물론 李恒福·李廷龜·申欽 등의 서인이나, 李元翼으로 대표되는 남인도 어느 정도 흡수하는 선에서 이루어졌다. 북인은 삼사나 銓曹를 중심으로, 이원익·이항복 등의 대신들을 내세운 남인과 서인의 중진들은 비변사를 중심으로 세력을 이루고 있었는데, 특히 광해군대 초기 한때는 소북이 대북보다 우세한 상황에 있기도 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광해군대의 정국에서 이항복·이정구·黃愼 등의 서인들이 임진왜란의 피해에 대한 복구사업과 保民策의 차원에서 號牌法이나 宣惠之法 등의 사회경제적 정책들을 추진하였다. 이것은 북인들이 정국을 주도하고 있는 상황에서 서인들의 정치적 입지를 마련한다는 정치적 목적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여러 계층이나 정파간의 이해가 엇갈려 서인들의 주도대로 시행될 수가 없었다. 거기에 비해 대북의 영수인 정인홍은 광해군 3년(1611)에 이른바 ‘晦退辨斥’을 감행하여 대북세력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고 노력하였다. 그것은 조선 성리학의 道統으로 인정되어 그 전해에 문묘에 종사된 五賢, 즉 金宏弼·鄭汝昌·趙光祖·李彦迪·李滉 중에서 남인 학통의 기반인 이언적과 이황을 배척하는 것이었다. 특히 대북의 중심 학통인 조식을 이단에 가까운 인물로 지적했던 이황의 주장을 반박하여 그를 격하하고 조식을 높이려 하였으며, 그 뒤에도 조식을 배향하는 서원을 건립하고 그를 문묘에 종사하려는 운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남인뿐 아니라 서인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켜, 정인홍은 유생으로서의 자격을 부정당하는 처벌인 靑衿錄에서의 삭제를 당하고 경상좌도와 우도의 사림이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분열되는 등 뜻한 바를 이룰 수가 없었다.

 이후 대북은 더욱 강력하게 인사권을 장악하고 중앙 정국을 주도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金直哉가 黃赫 등과 함께 順和君의 양자인 晋陵君 泰景을 왕으로 추대하려 한 것을 다스렸다는 광해군 4년의 金直哉의 獄事를 통해, 외척 유희분을 중심으로 삼사에 진출하여 조정의 논의를 이끌던 소북에 대해서까지 공세를 강화하였다. 또 朴應犀 등 名家의 서얼들이 銀商을 살해한 사건이 심문과정에서 그들이 宣祖妃 仁穆大妃의 아버지인 金悌男을 영입하고 永昌大君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것으로 비화하였고, 거기에 이정구·金尙容·鄭賜湖·徐渻·韓浚謙·朴東亮 등의 서인 인물들이 연관되었다는 진술이 나오자 討逆의 논리로써 서인들을 공박하였다.

 이 사건은 다시 영창대군을 제거하여야 한다는 주장으로 연결되고 그 논의 과정에서 정파간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다. 특히 이 때는 郭再祐 등 북인 내부에서도 영창대군을 두호하는 주장이 나오고 정인홍도 거기에 찬동하였지만 이이첨이 이끄는 대북의 논의는 방향을 바꿀 수가 없었다. 그러한 대북의 주장은 결국 국왕이 인목대비와 같은 궁에 있을 수 없으므로 대비를 폐하여야 한다는 廢母論으로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영창대군은 庶人으로 강등되어 강화도에 유폐되었다가 살해되고, 인목대비는 광해군 5년 11월경부터 감금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이 때 대북은 討逆과 忠逆의 논리를 내세워 반대의견을 억누름으로써, 남인과 서인을 중앙 정국에서 거의 축출하였고 지방 사류들이 공론을 표방하여 중앙 정국에 간여하는 것도 철저히 배격하였다. 그러나 소북은 朴承宗 등이 유희분과의 연결을 통해서 세력을 유지하면서 비변사를 중심으로 서인들을 옹호하는 등 소극적인 반대 입장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고, 정인홍의 문인인 북인 鄭蘊이 ‘廢母殺弟’를 정면에서 비판하는 상소를 올림으로써 지방에서도 경상우도 지역의 정인홍 문인들이 중앙의 대북세력으로부터 이탈하여 中北으로 자처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이첨은 이른바 掌樂署의 모임을 통해 박승종·유희분과의 마지막 타협을 시도하였으나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광해군 10년(1618)에는 우의정 韓孝純이 백관을 이끌고 공식적으로 대비를 축출할 것을 요청한 이른바 ‘廢母廷請’이 이어졌다. 그러한 폐모론은 결말을 보지 못하였으나, 광해군 말년까지 정파간의 세력관계를 볼 때 정국은 “서인이 이를 갈고 남인이 원망을 품으며 소북이 비웃는 형세”로 지속되어 갔다.

 결국 광해군과 대북정권은 서인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인조반정에 의해 축출되었다. 반정은 광해군 12년부터 계획되어 3년 후인 15년 3월 12일을 기한 거사에 성공하여, 선조의 손자인 綾陽君 倧이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李曙·申景禛 등 인조의 인척들이 먼저 계획을 세워 具宏·具仁垕 등을 끌어들이고 다시 金瑬·李貴·崔鳴吉 등의 문신과 연결됨으로써 이루어졌다. 여기에 국왕으로 추대된 능양군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반정에 참여한 인물들은 1등에 10명, 2등에 15명, 3등에 28명 등 모두 53명이 靖社功臣으로 책봉되었다.

 반정세력은 궁중에서 장악한 玉璽를 西宮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에게 바치고 그 권위를 빌어 광해군과 동궁을 폐출하였으며 능양군이 즉위하였다. 반정의 가장 큰 명분은 광해조에 同氣를 살해하고 母后의 폐출을 시도하여 패륜을 행하였으며, 명에 대한 은혜를 잊고 오랑캐와 통함으로써 예의와 삼강을 쓸어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광해군대 대북정권의 기반을 약화시킨 더욱 중요한 요인은 그들의 정책이 지니는 悖倫性보다도, 그러한 정책들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서인·남인 등 다른 붕당의 존재와 반대 의견을 무시하고 각 붕당간의 세력 조정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대북의 그러한 성격은 그들의 붕당론에도 잘 나타난다. 선조대에 성립한 조선의 각 붕당은 광해군대에는 이미 상당한 정체감과 기반을 갖춘 실체로서 존재하고 있었으며, 그것들을 통하여 결집되는 이른바 公論은 정치를 움직이는 중요한 요소가 되어 있었다. 그 점은 대북이 독단적인 정책을 추진하면서도 공론이나 여론을 민감하게 의식하였고 적극적으로 그것을 창출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던 점에도 잘 나타난다. 그러나 대북은 곽재우나 정인홍의 주장에 나타나듯이 다른 붕당의 존재를 매우 부정적으로만 보고 있었다. 특히 정인홍은 국왕에게 君子黨에 대한 변별을 강조하였는데, 거기에는 북인, 그 중에서도 대북만이 수용해야 할 군자당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0092)韓明基, 앞의 글, 288∼300쪽.
禹賢玖,<來庵 鄭仁弘과 光海朝 政局主導勢力>(≪嶠南史學≫4, 嶺南大, 1989), 29∼34쪽.
그러한 바탕에서 북인 일변도의 인사가 행하여졌고, 정인홍의 제자인 정온마저도 스승에게 편지를 보내어 당색을 떠난 고른 등용을 촉구하고 있었지만 이이첨이 일선에서 지휘하는 대북은 탄력있는 정책을 펴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대북정권은 광해군과의 굳은 제휴를 바탕으로 중앙 정계에서의 강력한 주도권을 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사림세력의 지지를 얻지 못하였으며 당시의 각 붕당과 공존상태를 이루지도 못하였다. 게다가 그런 약점을 보충하기 위하여 행했던 무리한 정책이 다시 정권의 고립과 상승작용을 일으킴으로써 결과적으로 반정의 구실만 주는 셈이 되었다.

 인조의 즉위 후에는 반정의 중심 인물들이었던 서인 공신들이 큰 권한을 행사하였다. 사림의 대표자인 金長生도 국왕인 인조에게 정책의 방향을 제시하기에 앞서 이귀·김류·최명길·장유 등 반정의 주역들에게 먼저 편지를 보내어 질서를 바로잡고 나라를 일으킨 공로를 치하하고 정국을 이끌어갈 방향을 말하는 상황이었으며, 국왕도 공신들에게 공개적으로 파격적인 대우를 베풀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거사할 때 동원한 강력한 군사력을 한동안 유지하고 있었으며, 정치권의 재편에 가장 중요한 권한인 인사권을 銓曹의 장관을 제치고 행사하였다.

 정치질서의 재편은 광해군대 정치인의 숙청으로부터 시작되었다. 廢母廷請을 앞장서 추진하는 등 앞 시기 정치를 전횡한 대북의 중심 인물들에 대해서는 그 처벌에 이론이 있을 수 없어서 책임이 확실하고 원성을 높이 샀던 인물들은 거사 당일부터 처형하였다. 이이첨 부자, 정인홍 등 수십 명의 관인이 여기에 해당하였다. 유희분·박승종 등 고위 관직에 있으면서 소북의 영수로 이이첨 등과 대립했던 인물들은 인목대비와 士類를 보호했다는 김류·이귀 등의 두둔이 있었지만 인조의 뜻에 따라 역시 처형되었다. 그밖에 원래 대북에 속하였지만 이이첨 일파의 정책에 가담하지 않아 당시 처벌을 면한 전영의정 奇自獻이나, 반정 당시 좌의정으로 삭직에 그쳤던 朴弘耈도 그 후 역모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요컨대 북인으로서 광해조 말기까지 정권에 깊이 참여한 인물들은 대북 소북을 막론하고 대개 처형당하였다.

 좀더 구체적으로 보면, 광해군 재위 16년간 삼사와 이조의 종6품 이상의 관직(監察 제외)에 오른 인물은≪光海君日記≫의 인사 기록에 따라 정리하면 모두 321명이 되는데, 이 중 40%에 달하는 수가 처벌받았으며, 그것을 피한 인물들도 대개 정계에서 축출되거나 주변 관서로 밀려났다. 특히 다른 붕당의 반대 의견을 용납하지 않던 대북의 전횡이 가장 크게 작용하였던 광해군 5년(1613)부터 10년까지의 기간에 삼사와 이조에 있음으로써 폐모론 등에 책임이 있는 인물들은 거의 완전히 도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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