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1. 붕당정치의 성립
  • 3) 공신계와 비공신계의 갈등

3) 공신계와 비공신계의 갈등

 인조대는 반정공신들이 지대한 권한을 가지고 정치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같은 공신이라 하더라도 정치적 입장을 모두 함께 할 수는 없었다. 특히 김류와 이귀는 반정을 성공시키는 데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하였으나 곧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그들은 본디 서로 인맥을 달리하여 따로 반정을 계획하였으며, 관직이나 연령 등 개인적인 조건도 쉽게 상하관계를 이룰 수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최명길·장유·신경진·이서 등도 정치적 사안에 따라서 모두 입장을 달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아 공신들은 반정에서의 공적을 구실로 권력을 잡았고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는 점에서 반정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士類들과 정치 권력을 둘러싼 대립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공신과 일반 사류들 사이의 대립은 재위중의 군주를 폐출하고 새 임금을 세운 反正 자체에 단서가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거사한 것을 장유가 스스로 부끄러워했다던가 趙涑이 반정에 참여하고도 끝내 공신이 되기를 거부했다는 사실에 나타나듯이 반정의 당사자들도 약점을 느끼고 있었다. 당시 사류들이 공신을 보는 비판적 입장은 “金元亮은 유생으로서 靖社功臣에 녹훈되었으니 어찌된 것인가”라는 金時讓의 말과, 정경세가 김원량을 두둔하는 입장에서 그가 반정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변명한 데에 잘 나타난다. 이러한 분위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아서 인조 2년 朴弘耈의 옥사 후에는 새삼스레 국왕의 曉諭文을 내려 광해군의 죄악을 열거하고 반정과 인조의 정통성을 누누이 강조하여야 하는 형편이었다.

 공신들과 일반 사류 사이의 대립은 반정 직후 공신의 관직 획득과 인물 등용을 둘러싸고 시작되었다. 일반 사류들은 공신들에게는 상을 주면 될 뿐 관작을 내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였고, 거사에 참여한 사람들을 위해 과거를 시행하려는 계획도 그들에게 특권을 줄 수 없다는 반대에 밀려 취소되었다. 그러나 이귀 등은 강력하게 공신 우대를 주장함으로써 그들 사이의 알력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인조는 붕당을 강력히 배격하면서 남인은 물론 문제가 있는 북인까지 등용하여 서인의 독주를 견제하고자 하였다. 여기에 대해 공신 제일의 권력가 김류가 인물 등용을 당색에 따라 안배함으로써 특정 붕당의 독주를 막는다는 논리로, 일반 서인들과 남인들의 심각한 반대 속에서도 인조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하였다. 반정의 원훈으로서 확보한 기반 위에서 북인까지 포섭할 여유를 가질 수 있었고 그것은 다시 인조와의 연계를 강화하고 비공신사류의 도전에 대하여 자기 세력을 증식하는 길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 김상헌의 주장으로 대표되는 인조 초년의 淸論이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김류가 주도하는 대로 북인과 일부 庭請者들까지 등용한다면 그들 비공신사류들에게 실질적 타격이 올 뿐 아니라, 대북정권에 대항했다는 명분 기반마저도 퇴색하고 말 형편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공신인 이귀와 兪伯曾·朴炡의 태도가 변수로 작용하였다. 이귀는 처음에 정청참여자까지 수용하자는 주장을 폈었지만 인사권을 김류에게 제압당하고 그와의 불화가 깊어짐에 따라 인사문제에 관한 공신의 포용적인 입장을 포기하였다. 그리고 유백증·박정은 공신이면서도 3등에 불과하여 그 특권을 크게 누리지 못하였으며 공신 중에 몇 안되는 문과출신의 小壯官人으로서 김류의 인사정책에 불만을 품을 여지가 많아, 앞장서서 그것을 비판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김류가 인사를 주도하는 중에 인조 3년(1625)에는 소북의 지도자였던 金藎國·南以恭, 인조 7년에는 유희분의 조카사위인 金世濂과 李景稷·남이공의 등용문제를 둘러싸고 큰 논란이 빚어졌다. 이귀·김상헌은 물론 박정·유백증·羅萬甲·金堉을 필두로 한 관인들 대부분이 인조와 김상헌의 정책에 전면적으로 반발하였던 것이다. 서인과 남인의 관인들 사이에도 입장의 차이가 없었다. 그러한 대립은 표면상으로는 세력의 안배를 내세워 붕당의 해를 없애겠다는 입장과 거기에 반대하는 입장의 충돌이었으며, 대립 당사자들이 공신과 일반 사류로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는 당시 공신세력과 비공신사류의 세력 다툼의 일면이었다.0101)이러한 대립은 그 성격에 커다란 오해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 인조는 붕당을 없애겠다는 점을 내세웠기 때문에 그와 김류가 추진하는 인사정책에 반대하는 자들을 또 하나의 붕당으로 지목하였다. 그리하여 거기에 맞서는 자들은 주희의 붕당론 등을 원용하여 자신들을 변호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당시 서인·남인에 대한 논리가 아니라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때의 붕당은 서인이나 남인과 같은 범주로 오해하기 쉬우며 실제로도 인조 초년의 대립에 淸西 대 義西(功西), 인조 7년의 대립에 老西 대 少西라는 이름을 붙인 논의가 있었다. 그리하여 이들의 대립을 서인·남인의 대립과 같은 범주에 놓고 단지 그 대립이 심하지 않았다는 정도의 단서를 붙여 ‘黨爭’의 전개 과정을 계보화하는 데 포함시키는 인식이 있었다. 그러나 그 대립은 서인만의 문제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었던 동시에 서인 전체가 갈라졌던 것도 아니다. 또한 붕당으로 지목되었던 것이 매우 일시적이었으며 지목받은 인물이 대단히 적었다는 점에서, 정권이 재편되는 과정에 정치 참여자들이 서로 자기 기반의 확보를 위하여 벌였던 평범한 대립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공신세력의 私的 군사력에도 비공신사류들의 비판이 빗발쳤다. 주요 공신들은 반정이 성공한 후로도 각자의 軍官을 중심으로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여기에 대해 인조 2년 정경세가 공신 및 유력자의 군관을 없애자고 주장하면서부터 勳臣軍官에 대한 비난이 커졌다. 무사들을 통한 사사로운 경제적 이익의 도모도 비판의 대상이었으며, 더 나아가 공신 군사력을 정묘호란의 패전에 대한 책임과 연결시켜 “임금의 명령을 범하고 위엄을 빼앗았다”고 극렬하게 공신들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런 대립은 공신들이 장악한 군사력이 공식적인 체계내로 정리되면서 인조 5년 이후에는 해소되어 갔다.0102)李泰鎭, 앞의 책, 85∼90쪽.

 공신들은 그 세력을 이용하여 많은 경제적 이권을 장악하였으므로 거기에 대한 비판이 宮家의 특권에 대한 것과 더불어 빈번히 행하여졌다. 인조 2년 李潤雨가 공신들이 田土와 백성을 불법적으로 침탈하고 있음을 밝히고 시정을 요구한 이래 같은 내용의 비판이 계속되었으며, 인조 7년에는 공신들이 籍沒을 빙자하여 남의 전택을 빼앗는 것을 금지하자고 최명길이 앞서 주장할 정도였으나 이 경우에도 다른 공신들의 반대로 아무런 대책이 세워지지 않았다. 병자호란이 일어나는 인조 14년에 대사간 尹煌을 중심으로 사간원에서 올린 계에서는 궁가와 훈신들이 賜牌·免稅·折受·立案의 방법으로 민전과 백성을 침탈하여 蘆田·漁箭·鹽盆·海澤의 이익을 독점한다고 공격하였다.

 공신세력과 비공신사류의 알력과 대립은 인조대 主和論과 斥和論의 대립으로 연결되었다. 그 뒤로 오랜 기간에 걸쳐 조선의 정치와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척화론은 무엇보다도 먼저 성리학적 명분론에서 온 것이었지만, 정묘호란에서 병자호란까지의 주화론·척화론이나 그 이후의 반청론이 당시 정치의 중요한 쟁점이었던 만큼 그 정치적 의미를 소홀히 할 수 없다.

 인조 5년(1627)의 정묘호란에서는 이귀의 가장 적극적인 和議論과 거기에 동조하는 최명길·장유에 대항하여 윤황·李楘·유백증 등이 척화론을 내세움으로써 마찰을 빚었다. 이 때 윤황은 후금의 사신을 들이지 말자는 주장을 하면서 이귀·최명길의 화의론을 공격하여 나라를 그르친 것이 훈신에게서 많이 나왔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이귀도 당시 자신의 주화적 입장에 대한 비난을 비공신사류들이 공신세력에 가한 일련의 비난과 같은 맥락에서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묘호란 당시의 논란은 후금과의 강화가 형제관계를 맺는 데 그쳤고 明과의 기존 관계가 인정되었기 때문에 일단 가라앉았다.

 그 뒤 조정의 분위기는 명분상으로 당당한 絶和論者들이 장악하고 있었으나 인조 14년에 전쟁의 위험이 높아짐에 따라 주화론과 척화론의 본격적인 대립이 시작되었다. 당시의 국정은 김류가 영의정, 좌의정이 빈 상태에서 홍서봉이 원임 좌의정, 최명길이 이조판서로서 공신세력이 주도하고 있었다. 이밖에 호조판서 김신국은 김류에 의해서 등용된 인물이었고, 우의정 李弘冑, 원임 대신 尹昉, 병조판서 李聖求 등이 모두 김류와 무리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군사적인 면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한결 심하여 김류 부자, 金自點·金時讓 등 김류 일파가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김상헌과 함께 가장 격렬한 척화론자인 鄭蘊은 청의 침략 직전에 올린 상소에서 絶和를 주장하면서 공신들을 싸잡아 그들로 인하여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극언하였다.

 이에 대해 개전 전에는 최명길을 제외하고는 절화론에 적극적인 반대자가 없었으나 적병 침입 8일 만에 김류·홍서봉·장유 등이 主和의 입장을 분명히 하게 되었다. 당시의 척화란, “논의가 당당하기는 추상과 같지만 국세를 헤아리지 않은 것이어서 處士의 한번 큰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평이 말해주듯 현실적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자 주화론과 척화론의 대립은 반정 후 계속되던 공신세력과 비공신사류의 대립이라는 성격이 분명해졌고, 이념이나 정책만으로 인한 대립 이상으로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병자호란에서는 결국 김류·홍서봉·최명길·장유·김신국·이성구 등의 화의론이 인조의 동의를 얻어 김상헌·정온·윤황 부자·趙絅 및 다수 소장 관인들의 반대를 누르고 청과 군신관계의 수립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화약을 맺고 말았지만, 그 대립은 전쟁이 끝난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청군이 물러간 후 김류 등은 척화론자들에게 선제 공격을 가하여 나라를 그르쳤다는 죄목으로 윤황 등 7인을 처벌하였다. 유백증은 전쟁 중에 파직되었고 김상헌·정온은 지방에 물러가 있었으므로 여기서 제외되었다. 하지만 방어에 실패한 군사책임자들도, 김류의 아들인 金慶徵과 장유의 동생인 張紳이 죽임을 당했고 김류와 김자점을 비롯하여 沈器遠, 신경진의 동생인 申景瑗·李敏求·李聖求 등이 처벌받았다. 한편 남한산성에서 나와 바로 지방으로 내려간 김상헌도 임금을 저버리고 나라를 등졌다는 이유로 인조 16년말에는 파직을 거쳐 삭탈관작되었다.

 이렇게 공방전이 계속되었던 것은 나라의 체모와 명분이 송두리째 뒤집혔던 충격이 너무 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치적으로 공신세력 대 비공신사류의 대립이 지속적인 것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최명길이 가장 격렬한 주화론자이면서도 난이 끝난 후 적어도 얼마 동안은 척화론자들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의 대립이 단순한 명분론을 넘어 정치적인 요소를 강하게 지니고 있었으며 그 정치적 요소란 공신으로서의 기반을 크게 향유하던 김류계열에 대한 비공신사류의 도전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위와 같은 공신세력과 비공신사류의 대립은 전란 후 공신 중에서 최고 권력자가 바뀌어 가는 상황에서 인조대 후반에도 계속되었다. 병자호란 후 5∼6년간의 국정은 최명길이 주도하였다. 김류 중심의 정치세력과 김상헌 등을 대표로 하는 반청론자들은 계속되는 공방전으로 그 중심 인물들이 모두 조정에서 축출되었다. 특히 척화론자들의 주장을 따라 반청정책을 폈다가 속수무책으로 항복할 수밖에 없었던 인조는 전쟁 후 철저히 그들을 배제하였다. 그것에 비해 최명길은 척화론자들처럼 난을 불러들였다는 비난을 들을 이유가 없었고 兵權과 무관하였기 때문에 패전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이 없었다.

 최명길은 종전 후 약 2개월만에 우의정이 되고 좌의정을 거쳐 다음해 9월에는 영의정으로 승진하면서 명실상부하게 권력을 행사하였다. 인조 초년부터 김류와 대립한 그는, 정승에 張維와 申景禛·沈器遠을 추천하고 이귀의 아들인 李時白과 굳은 연계를 맺고 있었다. 최명길은 공신들 중에서 입장이 통하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세력을 규합하려 한 것이다. 일단의 공신들과 힘을 모은 최명길은 金藎國·金時讓·沈悅·南以恭 등 才局이라는 점에서 정평을 얻고 있던 인물들을 끌어들였다. 이들은 김류에 의해서도 등용되었던 인물들로서, 최명길은 개인적으로 김류와 대립하고 있었으나 공신으로서의 정책은 김류와 상통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 남이공은 인조 16년(1638) 3월에 이조판서가 되어 자신들의 기준에 따른 인사 정책을 펴 나갔다.0103)이 시기 정치인들의 입장과 사상에 대해서는 고영진 외,<17세기 전반 조선사상계의 동향과 그 성격>(≪역사와현실≫8, 한국역사연구회, 1992) 참조.

 이리하여 자기 세력에 어느 정도 여유를 가지게 된 최명길은 연소 척화신들에 대한 용서를 주장하고 김상헌을 두둔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대청관계를 무난하게 이끌어가면서도 병력을 동원하여 명을 치라는 요구만은 따를 수 없다는 입장이었고, 인조 16년 이후로는 僧 獨步를 통하여 명과의 비밀 외교를 지속시켰다. 이러한 노력은 이시백이 담당하고 있었던 남한산성 재건작업과 더불어 최명길 등이 反淸 사류들과 제휴하는 것을 부분적으로나마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李明漢·姜碩期와 같은 쟁쟁한 사림들이 최명길 지휘의 대명관계에 동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효종대에 작성된≪仁祖實錄≫의 사평들이 최명길의 그러한 정책들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데서 알 수 있듯이 공신 최명길과 일반 사류들 사이의 전반적인 대립관계가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명길은 정치 안정과 민심 수습을 위한 개혁을 시도하였다.0104)개혁을 추진한 최명길의 입장에 대해서는 李在喆,<遲川 崔鳴吉의 經世觀과 官制變通論>(≪朝鮮史硏究≫1, 伏賢朝鮮史硏究會, 1992) 참조. 그 중 정치 운영에 대한 개혁 방침으로는 吏曹郎官의 특권을 박탈하고 삼사의 논의 방식을 변경하려 한 것이 가장 특징적이었다. 당시 이조의 낭관은 상대적으로 낮은 품계에도 불구하고 弘文館을 비롯한 三司의 당하관에 대한 인사권의 상당한 부분과 후임자에 대한 自薦權을 행사하고 있었다.0105)吏曹와 三司의 운영구조와 정치적 역학관계에 대해서는 宋贊植,<朝鮮朝 士林政治의 權力構造>(≪經濟史學≫2, 經濟史學會, 1978) 참조. 그것은 소수 권세가의 전횡을 방지하는 효과적인 장치로서 훈척들과의 대항관계 속에서 발전해 온 사림정치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조낭관은 각 정치세력의 이해가 가장 첨예하게 부딪히는 곳이 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일체의 붕당적 정치 질서를 배격하는 인조와 정치의 능률을 높이려는 최명길에 의해 지극히 부정적으로 인식되었고 이미 그 전에도 이조낭관권의 폐지가 시도된 적이 있었다. 그리하여 인조 15년에 최명길은 연소 관인들 사이의 분란과 당론을 일으킨다는 이유로 이조낭관의 堂下薦望權 및 자천권을 혁파할 것을 비변사를 통하여 다시 요청하여 인조의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남이공·남이웅으로 이어지는 이조판서들이 인사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는 상황을 호소하고 그에 대한 대책이 논의되던 상황을 보면 이조낭관의 권한은 혁파 후 적어도 1년 내에 다시 복구되어 그대로 시행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조낭관의 권한에 대해 개혁을 주장하거나 불만을 토로한 김류·최명길·남이공·남이웅 등은 공신이라는 기반 위에서 자기 세력을 증식하려 했거나 그 공신을 대신하여 인사권을 행사하던 인물들이었다. 반면에 그들을 제외한 많은 인물들이 이조낭관권의 합리성을 내세우거나 대신들도 그 혁파를 잘못이었다고 생각했다는 지적을 볼 때, 이조낭관의 자천권과 당하천망권에 대해 일반적으로 동의가 이루어져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인조·김류·최명길 등의 혁파 노력은 실효를 거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최명길은 정치적 논의의 최일선에 있던 삼사의 避嫌制에 대해 개혁을 주장하였다. 당시 삼사, 그 중에서도 사헌부와 사간원에서는 어떤 일을 논할 때 모두의 의견을 일치시키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는데 논의에 찬동하지 못하는 사람은 피혐이라 하여 사직소의 형태로 자기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하였다. 그러면 處置라 하여 삼사의 제삼자들이 그 인물이 논의에 계속 참여할 정당성이 있는가를 평가하고 거기에 따라 임금이 出仕 혹은 遞職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이 관행이었다. 이것은 논의가 번다하고 분란을 확대시키는 경우가 많았지만, 소수 의견을 보장함으로써 특정한 정치 집단의 독주를 막는 기능을 행사하고 있었다. 여기에 대해 최명길은 의견을 억지로 일치시키려 하고 피혐이 어지러이 발생하는 것을 문제로 여겨, 다수 의견에 따라 관서의 입장을 정할 것이며 출사의 처치를 받은 후에 거듭 피혐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규정을 국왕의 허락을 받아 시행하였다. 그러나 이것 역시, 다른 의견이 있다면 소수의 의견일지라도 할 말을 다하여 적극적으로 시비를 가려야 한다는 반대론 속에서 무위로 돌아가고 말아, 피혐과 처치가 전과 같은 양상으로 계속되었다.

 이와 같이 최명길의 개혁 노력이 실패했던 것은 이조낭관권과 피혐제가 당시 붕당이 정치를 운영하는 핵심적인 장치로서 일반 관인들의 광범위한 동의를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조낭관권은 公論·黨論에 둘러싸여 있을 수밖에 없는 소장관인으로 하여금 삼사 관원에 대한 인사권의 많은 부분을 행사하게 한다는 점에서, 피혐제는 우세한 다수 관인에 대해 소수 의견이라도 적극적으로 시비를 가릴 수 있고 그것이 수반하는 처치제에 의해 삼사 소장 관인들의 의견이 큰 힘을 지닌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큰 흐름으로 볼 때 최명길의 시도는 공신중심 정치세력이 자신들의 세력 유지에 알맞는 방향으로 정치 질서를 개편하고자 했던 것으로, 그 개혁의 방향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실패로 돌아가게 하였던 다수 일반 관인들의 성향과 공론을 반영하는 정치 질서에 대한 굳은 동의에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정국을 주도하던 최명길 등은 인조 18년(1640)초에 최명길·신경진·심열이 전후하여 대신직에서 물러나고 3월에는 부원군으로 남아 있던 최명길이 파직당하고 이시백·남이공 등이 유배당함으로써 권력을 잃었다. 이 처벌의 이유는 대신으로서 청에 보내는 質子를 가짜로 하였기 때문이었으나, 더 복잡한 세력관계의 변동이 있었다. 당시 인조는 淸論을 내세우는 일반 사류들을 신임하지 않고 소장층의 등용도 마다하였으므로 자연 김류·김자점 등의 정계복귀가 쉽게 이루어져 각기 扈衛大將과 判尹·御營大將의 자리를 회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최명길의 후임 영의정에도 김류계열인 洪瑞鳳이 임명되었다.

 그리하여 그 이후로 대신직에 오르는 인물들을 볼 때 대체로 최명길·신경진·심기원·심열에서 강석기로 이어지는 계열과, 홍서봉·이성구·김자점으로 이어지는 계열이 대립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때 영의정에 다시 올랐던 최명길이 명과의 밀통문제로 청으로 끌려가고 신경진·강석기가 세상을 떠난 상황에서 심기원이 역모 혐의로 죽음으로써 권력은 다시 김류계열의 김자점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그는 심기원을 제거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을 계기로 확고한 권력을 장악하고 인조 24년 3월 이후 영의정으로서 3년 후 인조가 사망할 때까지 관인 최고의 권력을 누렸다.

 그러나 김자점의 세력 기반은 매우 허약하였다. 반정으로 1등공신에 녹훈되었지만 文科출신이 못되었기 때문인지 정치의 일선에 나서지 못하고 김류의 세력권 밑에서 주변 관서를 전전한 끝에 군사 지휘관으로서 세력을 키웠지만 그나마 병자호란의 패전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취한 정책은 궁중에 유착하여 왕의 개인적인 총애를 받고 親淸政策을 펴서 현상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김자점의 파행적인 정치 운영은 인조 23년 昭顯世子의 죽음과 이듬해 소현세자빈 姜嬪의 옥사에서 잘 드러난다.

 두 사건은 세자에 대한 인조의 의구심에 後宮 趙氏의 참언이 크게 작용하여 빚어진 것으로써, 김자점이 元孫을 폐하는 데 적극 찬성하였고 일반 사림은 물론 김류·최명길까지 반대하는 데 맞서 홀로 강빈을 공격하고 그 사사에 찬성한 것 등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그가 淑媛 조씨와 결탁하여 세자를 해치는 데 모의했음에 틀림이 없을 듯하다.0106)소현세자의 죽음과 강빈 옥사의 과정에 대해서는 金龍德,<昭顯世子硏究>(≪朝鮮後期思想史硏究≫, 乙酉文化社, 1964) 참조. 김자점은 또 소현세자의 아들들과 강빈의 형제들을 제거하도록 하였다. 강빈의 父이며 원손의 外祖인 姜碩期가 일반 사류들 사이에 명망이 높았으며 최명길·심기원과도 연계를 맺었던 만큼 그의 인척은 어느모로 보나 김자점에게 불리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당시 김자점이 처한 상황은, 사림들의 강력한 강빈 보호를 인조가 서인의 당론이라고 비판하자 김자점이 소북·남인도 많이 가담했다고 말하는 대화에서 잘 드러난다. 사실 강빈을 두호하는 것은 당색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었으며, 그것은 김자점 세력의 완전한 고립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런 가운데 김자점은 손자 世龍을 후궁 조씨 소생인 孝明翁主와 결혼시킴으로써 궁중과의 유착관계를 더욱 깊이 하였다.

 본래 병자호란 이후 김류 등은 그 친청적 태도로 인해 줄곧 공격을 받았던 만큼 김류와 부침을 함께 한 김자점 역시 거기서 벗어날 수 없었다. 어차피 反淸 士類들 사이에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청의 지지마저 잃는다면 몰락을 피할 수 없을 것이었으므로, 김자점은 조선출신의 청 통역으로서 조선과 청의 관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鄭命壽와 유착하는 방식 등으로 친청정책을 확고히 하였다. 그것이 다시 비공신사류들과의 대립관계를 격화시켰음은 물론이다.

 인조의 서거는 김자점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였다. 뒤를 이은 효종은 즉위 후 朝野의 분위기에 따라 즉시로 金集·宋時烈·權諰·李惟泰 등의 산림과 김상헌 등을 조정에 불러들였고 이들은 힘을 모아 김자점을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효종 원년(1650) 봄 洪川에 유배당한 김자점은 청과 적극 밀통하여 세력 만회를 꾀하였으나 李景奭·李時白·元斗杓의 활약으로 그의 기도는 실패하고 다시 光陽으로 遠竄되었으며, 효종 2년말에 孝明翁主의 저주사건이 문제되고 아들 釴의 역모 사건이 일어남으로써 그의 세력은 완전히 제거되고 말았다.

 김자점의 몰락은 반정공신 정치세력의 종언을 뜻한다. 김자점과 맞서온 또 다른 공신 원두표는 김자점 등을 공격하여 세력 유지를 꾀하였음에도 당시 반청 사류들의 공격을 받아 일단 처벌받았으며 이후 복귀했지만 공신으로서의 위세를 더 이상 누리지 못하였다. 그 밖의 공신세력으로 이시백 형제와 李厚源·具仁垕 등이 있었으나 그들은 더 이른 시기부터 자기 중심의 세력 규합을 마다하고 일반 사류들과 무리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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