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1. 붕당정치의 성립
  • 4) 붕당정치의 의의

4) 붕당정치의 의의

 권력을 독점하던 대북과 그들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한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축출된 이후의 정치는, 서인과 남인이 사림으로서의 공통의 기반을 바탕으로 공존하면서 때로는 합의하고 때로는 대립하는 붕당정치의 질서를 실제 정치에서 구현하였다.0107)붕당정치의 용어에 대해, 조선 후기의 붕당간의 다툼을 정치형태·정치체제에 중점을 두고 볼 때는 붕당정치라는 개념을, 과정·결과를 통칭할 때는 당쟁이란 개념을 쓸 수 있을 것이라 하여 ‘당쟁’을 더 포괄적인 용어로 제시한 주장이 있다(李成茂,<朝鮮後期 黨爭硏究의 方向>,≪朝鮮後期 黨爭의 綜合的 檢討≫,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2, 305쪽).
또한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말까지의 정치에는 ‘사림정치’라는 용어가 알맞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즉 그 시기 정치의 주도세력은 사림이라 불리는 집단이었고, 정치목표를 성리학적 정치이념의 구현에 두면서 이를 위하여 公論을 앞세운 言官權의 宰相權 비판과 견제, 그리고 붕당 상호간의 義理·名分 논쟁을 통한 상호비판과 견제를 정치운영 방식으로 하였다는 것이다. ‘붕당정치’는 그 중 정치운영 방식을 가리키는 용어로 한정하였다(鄭萬祚,<朝鮮時代의 士林政治>,≪韓國史上의 政治形態≫, 一潮閣, 1993, 224쪽).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공신세력과 비공신사류의 대립이 정치의 큰 축을 형성하여, 외형적으로는 그러한 양상이 붕당정치의 면모를 능가할 정도였다.0108)인조대의 정국이 공신과 비공신사류의 상호비판과 견제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 붕당정치론의 논리적 근거를 위태롭게 한다는 견해가 있다. 당시 정치가 서인 내에서 공신 대 사류의 비판·대립 구도 속에 진행되었으므로 서인·남인간의 붕당체제와는 다른 것이었다고 지적하고 인조대는 ‘사림정치’의 운용이 시도되던 단계인 적용기로 설정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鄭萬祚, 위의 글, 231쪽). 또 인조대 초년에 남인계 인사들이 상당수 등용되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은 “공존의 원리에 입각한 등용이라기보다는 취약한 기반의 확보를 위한 수단의 하나로 취해진 것이었다”고 하여 붕당정치의 요소로 인정하지 않는 평가도 있다(禹仁秀, 앞의 책, 65쪽). 그러나 인성군 처벌을 둘러싼 대립이나 병자호란 시기 趙絅의 활동으로 대표되는 바와 같이 남인은 인조 초년 뿐 아니라 그 뒤로도 중앙정치에 참여하여 서인 일반과 함께 공신들과 대립하였으므로, 인조대 남인의 정치참여를 무시하거나 인조 초년의 것으로 한정시켜 서인 내부에서 정치운영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는 없다. 또 반대당을 등용하여야만 권력의 정당성이 확보되는 상황이었다면 그것이 바로 붕당 사이에 공존의 원리가 작용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한 시기 정치의 모든 면모를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을 설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 점은 붕당정치의 개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붕당이 정치의 중요한 변수로 계속되는 중에도 상황에 따라 그 밖의 다른 요인에 의해서도 정치세력이 나누어지게 마련이며 때로는 그것에 의한 대립이 당색 이상으로 정국의 전개에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있음은 이미 지적된 바 있다.0109)吳洙彰, 앞의 글, 50∼51쪽.

 공신 대 비공신사류의 대립이 인조대 정치 권력을 둘러싼 중앙 정계에서의 대립을 미시적으로 보여준다. 그에 비해 붕당이 정치세력의 기본적인 범주가 되고 정치 운영의 가장 지속적인 요소로 작용했던 16세기 후반에서 18세기, 그리고 거기에 밀접히 연결된 19세기 철종대에 이르기까지 앞뒤 시기와의 연결 속에서 17세기 전반 인조대의 정치를 설명한다면, 서인과 남인간의 붕당정치가 좀더 원숙한 모습으로 운영되었다는 점에 역사적 의미를 둘 수 있을 것이다.0110)다만 그러한 질서가 당시 정치운영을 온전히 통제하지 못하고 다른 요소와 병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 시기 붕당정치의 의미에 제한을 가한다. 또한 ‘붕당정치’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정치를 일관적으로 설명하는 기준에 따른 것이 못되고, 조선시기 내에서도 ‘군주체제’와 같은 큰 틀의 하위에서 한정적인 의미를 가지는 개념임은 물론이다. 그리하여 시대구분과 같은 거시적인 조망을 하기 위해서는 붕당정치의 구체적인 면모보다는 군주체제와 같은 더 근본적이고 큰 틀을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붕당정치가 16세기 이후로 사림파가 수립해 낸 정치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며, 그 후 탕평정치, 세도정치와 연결시켜 조선 후기 정치의 변화를 설명하는 데 유용한 개념임은 틀림이 없을 듯하다.

 붕당정치는 멀리는 고려말·조선초의 사회변화, 가까이는 사림파의 성장이 이루어낸 정치참여층의 확대라는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은 단적으로 과거제의 운영에서 나타난다. 李瀷이 붕당의 분기와 대립에 대한 원인으로 선조대 이후로 과거 합격자가 많아졌다는 점을 지적한 설명은 현상적으로 타당하다고 생각한다.0111)韓㳓劤,<星湖 李瀷 硏究-그의 史論과 朋黨論->(≪社會科學≫1, 韓國社會科學硏究會, 1957;≪星湖李瀷硏究≫, 서울大 出版部, 1980, 103∼113쪽). 그러나 과거합격자의 증가는 그로 인한 부분적인 혼란에도 불구하고 결국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사회 구성원의 확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정치참여자들 사이의 관직을 향한 경쟁이 심화됨에 따라 집단적인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 시기에 삼사를 비롯한 정치적 관서에서 관원이 개인 자격으로 활동하지 못하고 집단적 의사를 반영하도록 되어 있었던 사실은 바로 그 점을 나타낸다.0112)洪順敏,<肅宗初期의 政治構造와 ‘換局’>(≪韓國史論≫15, 서울大, 1986), 142∼167쪽 참조. 붕당적 입장을 내세우지 않는 인물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겠으나 17세기 전반에는 “붕당이 생긴 이후 사대부로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자가 없다”는 지적이 속출할 정도로 士族들은 대개 어느 한 붕당 안에 속하게 되었다.

 붕당의 활동은 정치 권력의 장악을 기도한다는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그것은 당시대인들에 의해 명확히 지적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인조반정 직후 鄭昌衍은 동인이 남인·북인, 그리고 소북·중북·대북으로 나누어진 것을 집권기간이 길었기 때문이며 서인은 집권기간이 짧아서 분열되지 않고 유지할 수 있었는데, 서인이 국정을 담당하니 앞날이 짐작된다고 하였다. 붕당이 서로 경쟁하고 대립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人事를 통하여 가까운 관계에 있는 인물들을 끌어주고 탄핵을 통해 반대파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가능한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모아져야 한다는 ‘공론’이 강조되었고,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은 여러 가지 내용의 정치 질서에 따라 경쟁과 대립이 조절되었다.0113)‘朋黨政治’ 또는 ‘黨爭’의 의미와 문제점에 대한 여러 입장은 李成茂·鄭萬祚 外,
≪朝鮮後期 黨爭의 綜合的 檢討≫(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2)의<綜合討論>참조. 단 이것은 토론 속기록이므로 논리적인 기반을 갖추지 않고 입장만 개진한 경우도 있다.
인조대의 서인과 남인이 元宗 추숭이나 주화론·척화론 등 당시 정치의 가장 뜨거운 쟁점에서 입장을 함께 하고, 강력한 권세가들인 집권공신들의 힘과 논리에 무릎꿇거나 포섭당하지 않았던 까닭이 거기에 있다.0114)당시 정치인들의 구체적인 붕당론이 위와 같이 설명한 정치질서와 그대로 맞아들어가지 않았음을 들어 붕당정치론을 비판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鄭萬祚, 앞의 글(1992), 149쪽. 그러나 정치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논리와 실제 정치상황 사이에는 괴리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넓은 시각에서 볼 때 붕당간의 대립은 본질적으로 신하들 사이의 문제였으며,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당시의 전체적인 정치체제와 별다른 모순 관계를 맺고 있지 않았다. 원래 동인·서인의 분기, 그 뒤의 남인·북인의 분기는 일차적으로 사림·관인들 사이의 문제로 인해 그들 상호간에 이루어졌으며 국왕이 개입할 소지가 크지 않았다. 서로 국왕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노력이 치열하게 기울여졌음은 물론이지만, 그것이 국왕의 위치나 그것으로 대표되는 당시의 정치체제에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붕당을 운영하던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붕당들 사이의 핵심적인 문제는 시비를 가리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그 시비는 무엇보다도 신하들 사이의 자체적인 논의를 통해 가려져야 하는 것이었다.0115)더 나아가, 붕당정치란 與·野의 역할분담을 통하여 상호비판과 견제, 갈등과 타협을 조화시켜 현대의 양당정치체제와 유사한 이상적 정치형태를 추구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라고 하면서, 사림이 죽음도 불사하고 그들의 이상과 정치이념을 실현하려 한 禮訟과 세 번의 換局의 시기를 붕당정치의 전개기로 보아야 할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鄭玉子,<17세기 思想界의 再編과 禮論>,≪한국문화≫10, 서울大 韓國文化硏究所, 1989, 233∼236쪽;池斗煥,<朝鮮後期 禮訟硏究>,≪釜大史學≫11, 釜山大, 1987;吳恒寧,<朝鮮 孝宗代 政局의 變動과 그 性格>,≪泰東古典硏究≫9, 泰東古典硏究所, 1993)도 같은 입장에 서 있다. 정치운영 방식에 초점을 맞추어 붕당정치를 설명하는 견해이다. 이 시기에 일반적으로 붕당에 대한 국왕의 개입을 거부하고 인위적인 붕당 타파 정책을 맹렬히 반대했던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붕당은 간접적으로 국왕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인조 초년과 같이 정치세력의 대대적인 재편기에는 최고 집권자들과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히기도 하였지만, 그것들은 부차적인 측면일 뿐이었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붕당정치가 그 자체의 논리와 질서를 갖춘 정치운영 형태인 동시에 ‘조선시기 군주체제’와 같은 더 큰 개념의 내부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임을 뜻한다.

<吳洙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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