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2. 붕당정치의 전개
  • 1) 효종∼현종대의 정치상황

1) 효종∼현종대의 정치상황

 효종대(1649∼1659)는 병자호란으로 야기되었던 대내외적 위기와 혼란이 점차 수습되어 가고 새로운 활로를 다각적으로 모색하고자 했던 시기였는데, 이러한 안정 기조는 중국 대륙의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효종 원년(1650) 12월에 청에서는 고압적인 攝政王(九王, Dargon)이 죽고 順治帝의 친정이 시작되면서 청의 중국 지배가 그 기반을 굳혀 가고 있었다. 즉 남부지방의 復明 운동이 1655년에 거의 진압되고 명 최후의 황족이었던 桂王(연호 永曆)은 1662년 버마로 쫓겨나 죽었다. 순치제는 一條便法(1653)·編審戶口法(1654) 등을 시행함으로써 중국의 향촌사회 저변까지 통제력을 확대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청의 국내 사정은 조선에 대해 강압적인 태도를 변화시키고 歲幣의 감면을 가능케 하였다.

 효종은 즉위와 함께 山林學者들을 등용하여 의욕적인 정치를 시행하고자 하였으나 金自點 등 일부 훈척 세력의 반발로 한때 대청관계에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그러나 청 섭정왕의 사망과 김자점 일파의 숙청이 단행된 효종 2년부터는 비교적 청의 간섭없이 내정에 충실할 수 있었다. 효종대의 대동법 확대 실시와 군비 증강은 이 시기의 자활 노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丁丑盟約(1637)에서 금지되었던 군비확장은 여러모로 어려운 것이었으나, 효종 3년부터는 꾸준한 군액 증가, 성곽 보수, 무기 정비, 훈련 강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것은 당시의 재정형편으로는 벅찬 일이었으나 효종의 집념에 의해 추진된 것이었다.0116)車文燮, <朝鮮朝 孝宗의 軍備 擴充(下)>(≪檀國大論文集≫2, 1968). 이러한 군비증강은 이른바 북벌을 감행하기에는 태부족한 것이었으나 효종 5년과 9년에 있었던 두 차례의 羅禪征伐에서 실력을 과시하는 계기도 되었고 왕권의 강화에도 유효한 것이었다.0117)李迎春, <尤菴 宋時烈의 尊周思想>(≪淸溪史學≫2,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5). 따라서 효종대는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청의 내부적 안정에 편승하여 국력회복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효종대의 국내 정치 상황에서 주목되는 것은 집권 서인 내부의 작은 분열과 일부 남인 세력의 등장이었다. 서인은 인조대부터 공신계열과 비공신사림계열 사이에 여러 가지로 알력이 있었다. 인조 말년에는 또 元斗杓(原平府院君) 일가를 중심으로 하는 原黨과 金自點(上洛府院君) 일가를 중심으로 하는 洛黨의 대립이 있기도 하였고, 尹昉의 자제들을 중심으로 하는 尹西와 申欽의 자제들을 중심으로 한 申西 사이에서 갈등이 있기도 하였다. 그러나 가장 심각했던 것은 金集을 중심으로 했던 山黨과 金堉 등을 중심으로 한 漢黨의 대립이었다. 김육은 효종 즉위년 우의정에 올라 인척이었던 申冕 등과 함께 한당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때 김집·宋時烈·宋浚吉·李惟泰 등의 湖西 산림세력은 효종의 예우를 받으며 조정에 들어와 산당이라는 일군의 세력을 형성하여 한당과 대립하게 되었다.0118)李建昌,≪黨議通略≫仁祖朝, 18∼19쪽. 효종 원년 김육은 대동법을 충청도에 확대 시행코자 하였으나 김집 등이 반대하여 실패하고, 서로 사직하는 등의 갈등을 빚었다. 이듬해 김자점의 옥사가 일어나자 그 전부터 산당의 탄핵을 받던 신면이 여기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했다.0119)≪孝宗實錄≫권 7, 효종 2년 12월 신유. 효종 9년 김육이 죽자 그의 아들인 金佐明·金佑明 형제가 묘에 隧道를 써서 장례를 치렀는데, 송시열 일파에서는 이를 僭禮라고 탄핵하여 이장을 요구하였다.0120)≪孝宗實錄≫권 21, 효종 10년 4월 무술. 이 사건은 효종의 만류로 중지되었으나, 이 때부터 산당에 대한 청풍 김씨 외척의 원한이 깊어지게 되었다.

 김우명은 현종의 國舅였고, 김좌명은 뛰어난 자질로 촉망을 받아 정승에 오를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송시열 일파의 외척 배제 방침에 의해 좌절되었고, 그의 아들 金錫冑는 대·소과에 모두 장원급제하고 문명을 날렸으나 역시 산당의 견제로 10여 년간 청요직에 등용되지 못하였다. 현종 원년(1660)의 제1차 예송에서 김좌명·김우명 형제는 許穆의 설에 동조하여 삼년설을 주장함으로써 송시열 일파를 자극하였다.0121)≪顯宗實錄≫권 4, 현종 2년 5월 기사. 이렇게 청풍 김씨 일가는 화려한 가문과 왕실의 배경 및 자신들의 재능에도 불구하고 줄곧 송시열 일파에게 눌려 좌절을 겪었다.

 현종 14년 9월 효종의 寧陵에 表石을 세우는 일과 閔愼의 代服事件으로 김우명이 송시열를 심하게 배척하였다.0122)≪顯宗實錄≫권 21, 현종 14년 9월 을해. 이에 송시열은 국구가 정사에 간여한다고 비판 공격함으로써 조정이 매우 시끄러워지게 되었다.0123)≪顯宗實錄≫권 21, 현종 14년 9월 계미. 민신의 대복은 송시열 등이 교시한 것이었으므로 이에 대한 공격은 그의 학문적 권위에 도전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하여 양측의 감정은 극도로 악화되어 갔다. 같은 서인이면서도 외척이라 하여 송시열 일파의 사림세력으로부터 소외되고 견제되어 온 청풍 김씨 일가는 역시 서인으로부터 억압받아 온 남인과 가까워지게 되었다. 이것이 훗날 제2차 예송을 좌우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남인들은 인조반정 이후 소수파로 정권에 참여하였지만 항상 주변적인 위치에 머물렀고, 서인정권이 강화되어 가면서 점차 소외되기 시작하였다. 인조 후반 이조판서로 있던 趙絅이 한때 남인의 세력을 만회하려고 노력을 하기도 하였으나 무위에 그쳤다. 그러나 효종대에 들어오면서 소수의 남인들이 요직에 등용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許積은 송시열과 함께 효종의 특별한 예우와 신임을 받았고, 대인관계가 원만하여 서인들과 비교적 잘 지냈기 때문에, 현종 5년에 우의정, 현종 9년에 좌의정, 현종 12년에 영의정이 되어 남인 중에서는 유일하게 재상직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는 현종 12년부터 우의정에 임명된 송시열과 한때 동료로 재직하기도 하였으나, 김우명·김석주 등 청풍 김씨 일가와도 친하게 지냈다.

 또 麟平大君의 처족이었던 同福 吳氏 一門도 효종대에 중용되었다. 吳挺一·吳挺垣·吳挺緯·吳挺昌 등의 형제는 인평대군의 장인이었던 吳端의 아들로서 왕실의 인척이었던 까닭에 남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청요직에 참여할 수 있었다. 오정일은 효종 10년(1659) 경기관찰사, 현종 원년 도승지, 현종 4년 형조판서·한성판윤·호조판서 등을 지냈고, 오정원도 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오정위는 현종 5년 예조참의에 오르고 충청·경기관찰사 등을 거쳐 현종 13년 호조·형조판서 등에 임용되었다. 오정창은 현종 13년부터 사헌부 지평 등에 임명되어 언로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들 형제들은 인평대군의 아들로서 당시 현종의 총애를 받으며 세력을 떨치던 三福(福昌君 楨, 福善君 柟, 福平君 木垔)의 외숙으로서 남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왕실의 외척으로서 권력에 참여하고 있었다. 또 오정원의 長子인 吳始壽는 현종 7년 문과 중시에 장원, 문명을 떨치고 현종 13년부터 이조참의·평안도 관찰사·강화유수를 거쳐, 현종 15년 도승지를 지내고 후에 우의정에 올랐다.

 이 밖에 효종·현종대에 벼슬을 유지하고 있던 남인으로는 판서 權恊의 손자들이었던 權大運·權大載 종형제를 들 수 있다. 이들은 선조의 부마였던 吉城尉 權大任의 종형제들이며, 역시 선조의 부마였던 東昌尉 權大恒의 재종형제들로서 역시 왕실의 먼 인척이라고 할 수 있다. 권대운은 여러 청요직을 거쳐 현종 11년 호조판서에 이어 형조판서를 역임하고 있었고, 권대재는 효종 9년 문과 중시를 거쳐, 병조좌랑·전라도사·동래부사·대구판관 등을 지내고 있었다.

 또 明宦家 출신이었던 睦來善은 허목의 문인으로서, 효종 원년 문과 급제후 삼사의 요직을 거쳐 현종 13년 공조참의, 현종 15년 3월 형조참의에 임명되었다. 또 그의 조카 睦昌明은 현종 11년 문과에 급제하여 현종 13년부터 사관 및 언관으로 요직에 진출하고 있었다. 남인 명문출신이었던 閔熙·閔點·閔黯 3형제의 등용도 역시 주목된다. 이들은 이조참판을 역임했던 閔應恊의 아들로서 모두 문과에 급제하고 현종대에는 청요직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민희는 현종 2년 경상도관찰사, 현종 13년 승지, 현종 8년 형조참판, 현종 9년 한성판윤을 거쳐 현종 12년 강화유수로 나갔고, 민점은 현종 7년 경상도관찰사, 현종 8년부터 현종 11년까지 여러 차례 승지를 역임하였고, 현종 13년에는 평안병사에 임용되기도 하였다. 민암은 현종 9년(1668) 문과 급제 후 사관과 언관을 역임하고 현종 15년 2월에는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다. 그는 숙종대 기사환국 이후 우의정에 올랐다.

 이 밖에 현종대에 요직에 등용되었던 남인들로는 李元禎·李夏鎭·南天漢 등 몇 사람을 들 수 있다. 이원정은 현종 7년 충청감사, 현종 8년 광주유수, 현종 14년 한성부윤·도승지 등을 역임하고 현종 15년 3월에는 예조참판에 임명되어 남인으로서는 드물게 현달해 있었다. 이하진은 현종 13년 弘文錄에 뽑힌 후 사헌부 장령·시강원 필선·홍문관 수찬·사간원 헌납 등의 청요직을 전전하고 있었다.

 남인으로서 한때 병권을 잡았던 柳赫然도 효종이 북벌계획 중 李浣과 함께 발탁한 인물로서 효종 4년(1653) 이후 황해병사·수군통제사·포도대장·훈련대장 등의 군사령관을 역임하였고, 현종 3년 병조참판, 현종 5년 한성판윤, 효종 6년 다시 병조참판·어영대장을 거쳐 현종 10년 훈련대장에 재임용되어 허적과 함께 訓鍊別隊(禁衛營의 전신)를 창설하는 등 현종대 내내 이완과 함께 병권을 분장하고 있었다. 그는 또 인평대군의 아들이었던 三福 형제와 인척관계를 맺어 왕실과도 통하고 있었다.0124)≪肅宗實錄≫권 3, 숙종 5년 정월 기미.

 이와 같이 남인들은 효종대부터 정권의 핵심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으나, 효종 10년∼현종 원년 제1차 예송에서 패한 후 크게 실세하였다. 남인의 중추였던 조경·허목·윤선도·권시 등의 명사가 축출되었고, 신인들의 진출도 견제를 받았다. 그러나 예송에 참여하지 않았던 일부의 남인들은 그런대로 관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서인들이 전권을 행사하던 현종대에도 허적·유혁연 및 오정일·오정위·오정원 등 동복 오씨와 인평대군 일가를 축으로 하여 남인세력이 형성되어 있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조금씩 通淸과 仕宦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결과 현종 10년 이후부터는 남인의 진출이 현저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특히 현종 말기에는 왕이 송시열 일파의 서인 주류에 대해 심한 혐오감을 갖게 되었고, 또 그들의 당세를 견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남인출신들을 중용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종 15년 당시에도 역시 중앙 권력을 구성하는 핵심 요직의 임용에는 아직도 서인들이 절대적 우세를 점령하고 있었다. 이는 그들이 한번도 人事薦望權을 놓친 적이 없기도 한 때문이었지만, 약 반세기에 걸친 장기집권으로 그들의 문벌 기반이 워낙 강하게 다져져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서인의 집권이 장기화되면서 그들 내부의 알력과 반목으로 여러 형태의 분화 작용들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산당과 한당의 대립에서 기원한 청풍 김씨 외척과 송시열 일파 사림간의 알력이었다. 현종 14년 김우명과 송시열의 분쟁을 계기로 김석주 등 청풍 김씨 일가는 허적·삼복 및 동복 오씨 일가의 남인들과 밀착하여 송시열 일파의 거세를 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러한 무렵에 일어난 제2차 예송은 남인들이 주도적 역할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서인 자신들의 당착으로 패배를 자초함으로써 인조반정 이후 초유의 정권교체를 가져오게 되었다.0125)李迎春, <服制禮訟과 政局變動 -第二次 禮訟을 中心으로->(≪國史館論叢≫22, 國史編纂委員會, 1991), 229∼2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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