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2. 붕당정치의 전개
  • 2) 제1차 예송
  • (3) 예송의 전개

(3) 예송의 전개

 그런데 이러한 논란이 본격적인 예송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이듬 해인 현종 원년(1660) 3월 효종의 練祭(小祥)를 두달 앞두고 허목이 복제의 개정을 상소하면서부터 였다. 여기서 그는≪의례≫斬衰章 ‘父爲長子’ 조항의 賈公彦 疏說인 “第一子가 죽으면 적처 소생의 第二長子를 후사로 세우고 또한 장자라고 부른다”0140)≪儀禮注疏≫권 11, 15쪽(≪文淵閣四庫全書≫, 102∼365쪽), “第一子死 則取嫡妻所生第二長子 立之 亦名長子”.라는 구절을 근거로 하여 효종을 인조의 장자로 단정하고, 재최 삼년장의 ‘母爲長子’條에 의해 대비의 복을 재최 삼년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는 四種說 중 ‘體而不正’의 庶子를 妾子로 간주하여 효종은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0141)許 穆,≪眉叟記言≫권 64, 追正喪服失禮疏. 여기서 허목이 강조한 것은 효종이 宗廟를 주제한 正體였다는 것이다. 효종은 적처 소생의 제2장자였지만 제1자가 죽은 후에 정식 후사로 세워져 장자로 부르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이다. 한편 후사로 정하기는 하였으나 아버지가 참최를 입지 않는≪의례≫疏說의 네 가지 예외규정의 하나인 체이부정 즉 서자가 承重한 경우에 대하여 송시열 등은 이 때의 서자를 적장자 이외의 여러 아들 곧 衆子로 해석하였으나 허목은 이를 글자 그대로 첩자로 해석하였다.

 사실 예송 논쟁에서 가장 치열하게 대립하였던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서자의 해석문제였다. 서자란 용어는 원래 중자와 첩자 두 가지의 개념을 아울러 가진 것으로서, 바로 예송의 전거가 되었던≪儀禮注疏≫상복편 안에서도 어느 경우에는 중자로 또 어느 경우에는 첩자로 정의되어 있다.0142)≪儀禮注疏≫권 11, 15·16쪽, 喪服, “庶子者 爲父後子之弟也 言庶者 遠別之也”, “庶子 妾子之號 適妻所生 第二子是衆子”. 허목은 體而不正條의 서자를 첩자로 단정하였으나 그에 따른 설명은 붙이지 않았다. 그로서는 지극히 당연하게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효종은 인조가 참최를 입을 관계에 있었으며 따라서 조대비는 齋衰 삼년복에 해당한다는 것이었다.0143)≪儀禮注疏≫권 11, 喪服篇, 齊衰三年章. 천자나 제후는 기년 이하의 복을 입을 관계에 있는 방친의 상에 대해서는 이를 생략하고 실제로 복을 입지 않지만 정통의 친속(직계 존비속)이나 그 부인들에 대해서는 강복할 수 없기 때문에 삼년복을 기년으로 강복할 수도 없다는 논리였다. 이러한 허목의 논리에서 본다면 효종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정통의 장자라고 할 수 있고, 이 때문에 조대비의 복을 기년으로 정한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허목의 예론은 학술적인 측면에서는 후에 이익이나 丁若鏞 같은 일부 남인 학자들에 의해서도 다소의 문제점이 있는 것으로 비판을 받기도 하였지만,0144)李 瀷,≪星湖僿說≫권 11, 人事門 己亥禮訟.
―――,≪星湖全書≫권 46, 眉叟禮論.
丁若鏞,≪與猶堂全書≫제 3집(권 19), 正體傳重辨.
李迎春,<實學者들의 禮學思想 -星湖와 茶山을 중심으로->(≪白山 朴成壽敎授華甲紀念論叢≫, 1991).
정치적인 의미에서는 그의 논지가 효종의 정통성을 강조한 것이었기 때문에 강점을 가지고 있었다. 허목의 예설은 윤휴의 참최설에 비해서는 다소 온건한 측면이 있었지만, 효종의 종통을 명백히 하고 그 정통성을 확고히 하려는 입장에서는 일치하는 것이다. 허목은 사실 이 복제소를 올리기 전에 윤휴를 찾아가 의논한 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된다.0145)尹 鑴,≪白湖全書≫附錄 권 5, 年譜(慶北大本 下卷, 1974, 2,139쪽).

 허목의 疏가 제기되자 조정은 크게 동요하였다. 예조에서는 이 문제를 대신과 儒臣들에게 收議하도록 건의하였다. 이에 기년설 주창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준길이 먼저 상소하여 변명하였다. 송준길은 서자를 적장자 이외의 여러 아들 곧 중자로 파악하였는데, 서자를 중자로 볼 경우 앞의 “제2장자도 또한 장자라고 부른다(第二長子 亦名長子)”와 모순이 되므로, 그는 前說의 ‘第一子死’를 미성년에 죽은 아들로 보았다. 이 경우에는 제이장자를 후사로 세우고 장자라고 부를 수 있으나, 제일자가 성년이 된 후에 죽어 부모가 그를 위해 삼년복을 입었으면, 그 후에 제이장자를 후사로 세워도 장자로 부를 수 없고 삼년복을 입을 수도 없다는 것인데, 이는 참최를 두 번 입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비단 송준길 뿐만 아니라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 예론의 일반적인 견해였다.0146)≪宋子大全≫권 26, 大王大妃服制議. 송준길은 또 왕에게 면담을 청하여 직접 기년설의 타당성을 설명하기도 하였다.0147)≪顯宗實錄≫권 2, 현종 원년 4월 병술.

 송준길의 반론을 본 허목은 다시 상소하여 기년설을 비판하고 복제에 관계된≪儀禮≫·≪禮記≫등의 경전적 전거를 정리하여<喪服圖>라는 도표를 작성하여 첨부하였다. 이 두번째의 상소에서 허목은 이른바 서자의 개념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고 그것을 첩자로 보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그는 이것이 중자의 뜻으로 사용되는 것은 특별히 적장자와 구별할 필요가 있을 경우 등 극히 제한적인 경우일 뿐이며 보통의 경우는 첩자의 뜻으로 쓰인다는 것이다. 또 적서의 구별은 엄격한 것인데 적자를 함부로 서자라고 병칭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제일자인가 아닌가에 있지 않고 조부의 대통을 잇는 정체인가 아닌가 하는 점인데, 효종은 인조의 적자(정체)로서 종묘를 받들어 계승하여 일국의 임금이 되었으므로 장자의 복을 입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허목은 첨부한<상복도>에서 복제에 관한 모든 경전 근거들을 상세히 열거하고 보충 설명을 붙였다.0148)李成茂, 앞의 글, 41∼43쪽 참조.

 이 논쟁 도중에 예조에서 대신들의 헌의를 수합하여 보고하였는데, 그것에 의하면 영돈녕부사 李景奭, 영의정 鄭太和, 영중추부사 沈之源 등은 이전의 國制에 의한 기년설을 고수하였으나, 판중추부사 元斗杓만이 당초 그 자신도 찬동했던 국제기년설의 잘못을 인정하고 허목의 설에 찬성하여 삼년복으로 개정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때 낙향해 있던 송시열도 함께 헌의하였는데, 그 요점을 정리해 보면, 자신들의 기년설이 현행법인≪대명률≫과≪경국대전≫의 복제규정을 따랐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이는 古禮(≪의례≫)의 복제가 명확하지 않아 단정하기 어려운 점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기년복이≪대명률≫의 규정일 뿐만 아니라 고례에 의하더라도 타당한 것임을 누누이 강조하였다. 그도 송준길과 마찬가지로 제일자가 성년에 죽어 아버지가 한 번 참최를 입은 경우에는 차장자를 후사로 세웠더라도 또 다시 참최를 입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참최는 두번 입지 않는다(不二斬)”는 원리에 비추어 보아도 합당하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차장자를 위해 참최를 입는 경우는 제일자가 미성년에 죽어 아버지가 복을 입지 않았을 경우인데, 이렇게 설명하지 않으면 四種說의 체이부정 즉 서자 승중의 규정과 모순되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는 이 경우의 서자를 중자로 해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송시열은 참최를 거듭 입지 않는 것이≪의례≫의 합리적 해석일 뿐만 아니라 인정으로 보아도 아버지가 자식의 상에 매번 참최를 입을 수는 없다고 보았고 그 예로 세종의 경우를 들었다.

 이러한 송시열의 예설은 허목의 예설에 비해 치밀하고 용어의 개념에 대한 이해도 비교적 고례의 원의에 가까왔던 것으로 할 수 있으나, 이것을 제왕가에 적용하기에는 부적절한 것으로 비판을 받았다.0149)丁若鏞,≪與猶堂全書≫제 1집(권 12), 己亥邦禮辨 및≪與猶堂全書≫제 3집(권 19), 正體傳重辨.≪의례≫의 이 조목은 원래 대부들을 위해 규정된 예이며 왕실의 예가 아니었으므로, 이것으로써 조대비의 복제를 논의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다.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은 대체로 종통과 복제를 별개의 문제로 생각하고 있었다. 제왕가에서는 장자를 버리고 서자(중자)로서 대통을 계승시키더라도 형제의 서열은 신중히 한다던가, 또 즉위한 이를 정통으로 삼더라도 모두 삼년복을 입는 것은 아니라는 등의 주장이 이를 말하는 것이다. 제왕례의 특수성에 대한 주의 소홀이나 복제와 종통을 별개의 것으로 보는 인식이 바로 남인들의 집중적인 비판을 받는 구실이 되었다. 송시열·송준길 등의 예설은 논리적이고 치밀하기는 하였지만, 그것이 왕실의 종통문제에 약점을 제기할 수 있다는 정치적 성격 때문에 같은 서인 내부에서도 이의가 제기되었고, 남인들로부터는 격심한 비판을 받아 결국 정치적으로 실패하는 요인이 되었다.0150)李成茂, 앞의 글.

 이밖에도 송시열은 윤휴의 지론이었던 ‘天王皆斬說’을 비판하여 대비가 효종에 대해 내·외종의 친척들이 신하의 처지에서 입는 참최를 입을 수 없음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결론적으로 그는 고례에는 명백하지 못한 점이 있으므로 현행의≪대명률≫과≪경국대전≫에 의거하여 기년제를 행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들의 기년설은 고례인≪의례≫에 의하더라도 틀리지 않지만 현행 법전에 의하면 더욱 명백하다는 것이었다.0151)≪宋子大全≫권 26, 大王大妃服制議.

 이 때 영의정 정태화가 德宗의 상과 順懷世子의 상에서 행한 전례를 실록에서 찾아 참고할 것을 청하자, 왕은 실록을 考出한 후에 다시 수의토록 명하였다. 왕은 또 허목이 올린<상복도>를 베껴 여러 대신들과 송시열에게 보내어 옳고 그름을 구하였다. 대신들의 의견은 전과 다름이 없었고, 송시열은 특히 왕실의 예와 사가의 예가 근본 정신에 있어서 다를 바 없다는 점을 강조하였다.≪의례≫의 ‘通上下’라는 표현은 장자의 칭호를 천자국의 太子, 제후국의 世子 및 대부가의 嫡子에 통용해 쓰기 위해 사용한 것이었으나, 송시열은 이를 확대 해석하여 천자·제후가 대통을 계승하여 군림하는 것이나 사대부가 가계를 계승하여 제사를 주관하는 일이 본질적으로 같다고 본 것이다. 이는 바로 성리학적인 보편주의의 발상이며 신분 초월 관념을 보여주는 것이다. 송시열은≪의례≫疏說의 第一子와 庶子의 개념 정의 및 해설에 주력하여 허목의 妾子說을 타파하고자 하였다. 그에 의하면 서자는 중자를 뜻하는 것으로 결코 천한 칭호가 아니며, 효종을 서자라고 하여 해로울 것이 없다고 강변하였다. 그러나 경전 근거야 어떻든 효종을 체이부정의 서자라고 규정하고 그렇게 지칭하였다는 것은 후일 그의 죄목이 되었다.

 허목의 복제 예론은 이후 모든 남인 예설의 기초가 된 것으로서 그 영향이 매우 컸다. 그의 예론은 제1차 예송 당시에는 받아들여지지 못하였지만, 그가 직접 참여하지 못했던 제2차 예송에서 왕실에 의해 채택됨으로써 그의 학문적 권위가 인정을 받게 되었고 국가의 원로로 존중을 받았다. 이는 그의 예설 자체가 가진 학문적 논리나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지적한 장점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논리가 효종의 종통을 수호하고 왕실의 특수성과 고유성을 강조함으로써 그 권위를 높이는 데 기여하였기 때문이다. 반면에 왕실의 예를 사대부가와 같은 차원에서 논의하고, 비록 복제와 종통을 연계시키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효종에 대해 중자 혹은 서자의 복을 주장함으로써 그 정통성에 의혹의 여지를 남긴 송시열의 예설은 왕실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송시열도 물론 효종의 정통성에 이의를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왕실 전례가 가진 정치적 의미를 고려한다면 그러한 혐의를 쓰고 궁지에 몰리게 될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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